얼마 전 대만(臺灣, 타이완)의 총통(總統, 우리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진보당(民主進步黨, 이하 민진당)의 차이잉원(蔡英文) 후보가 승리했다. 이번 선거는 대만에서 첫 여성 총통의 등장과 여당이었던 국민당(國民黨)과의 정권 교체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이번 선거에서 특히 한국인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바로 '쯔위 사건'이었다. 한국 아이돌 그룹에서 활동하는 대만 태생 쯔위가 한 예능 프로에서 중화민국(中華民國)의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靑天白日滿地紅旗)를 흔들자, 중국의 한 네티즌이 '쯔위는 대만독립분자다'라는 말을 하면서 중국이 강한 불만을 나타냈던 것이다. 이에 쯔위의 소속사 사장이 나와서 쯔위에게 공개 사과를 하게 했다.
이는 중국 내의 불만을 일시 잠식시키는 효과를 거두었지만, 반대로 대만의 많은 젊은이들을 분노케 하였다. 속설로는 한국에서 발생한 이 사건으로 그간 정치에 무관심했던 수백만 명의 대만 젊은이들이 독립을 주장하던 민진당에게 몰표를 하여 차이잉원의 당선에 적지 않게 일조했다고 한다.
대만의 속사정
대만은 섬 이름이고 정식 국호는 '중화민국'(中華民國)이며, 쑨원(孫文)의 신해혁명으로 세워진 아시아 최초의 근대국가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중화민국은 이미 멸망했다고 주장한다. 즉,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이 마오쩌둥의 공산당에게 패하고, 1949년 10월 1일 중국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 들어서면서 중화민국은 멸망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중국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을 '신중국'(新中國)이라고 부르며, 대만을 '성'(省)으로 보고 있다.
국제사회에서도 역시 대만은 국가로 인정받지 못한다. 원래 중화민국은 1945년 UN의 창설멤버이며 안보리의 상임이사국 중 하나였다. 하지만, 1971년 중화인민공화국이 UN에 가입하자 중화민국은 UN을 탈퇴했고, 이에 따라 UN에서 국가 '중국'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만을 가리키게 됐다.
중국은 외국과 국교를 수립할 때 철칙으로 내세우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一个中国原则'(하나의 중국 원칙)이다. 현재 중국은 정치 체제가 다른 여러 곳이 '중국'이라는 이름으로 합하여 있다. 홍콩, 마카오 그리고 대만이 그렇다. 중국은 만약 홍콩, 마카오, 대만을 같은 중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와는 국교를 맺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1992년 중국과 국교를 수립할 때 이 때문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유중국',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던 대만이었지만, 중국과 수교를 맺기 위해 매몰차게 대만을 나라로 인정하지 않고 중국의 한 '성'(省)으로, 대사관을 영사관으로 격하시켰던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만 겪었던 문제가 아니다. 현재 대만과 국교를 맺고 있는 나라, 즉 중국과 국교를 맺지 않는 나라는 22개뿐이라고 하니 세계 대다수의 나라가 대만보다는 중국을 택한 것이다.
대만의 인구 구성과 역사
그럼 대만은 과연 어떤 곳이며, 왜 독립을 주장할까? 대만의 인구 구성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복잡하지만, 절대다수는 한족(漢族)이다. 그전에도 일부 한족들이 대만에 정착하였지만, 한족들의 대거 대만 이주는 크게 두 시기로 나뉠 수 있다.
첫째는 17세기 중엽 명말청초이다. 만주족(滿洲族)의 청에 의해 한족의 명은 멸망하였고, 명의 일부 유민들은 만주족의 지배에 끝까지 저항했다. 이중 가장 대표적인 세력이 바로 정성공(鄭成功)으로 그는 육지에서 기마민족인 만주족을 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복건성(福建省)의 유민들을 이끌고 바다 건너 대만으로 이주했다. 당시 대만은 동인도회사의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점령됐지만, 정성공 등에 의해 쫓겨났고, 이들은 대만을 중심으로 '반청복명'(反淸復明) 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강희제(康熙帝)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되었는데, 사실 강희제는 대만의 통치를 포기하려 했다. 다행히도 대만 수복에 앞장섰던 시랑(施琅)의 적극적인 건의로 대만은 청의 직접 통치를 받기 시작했다. 당시 대만에 정착했던 대규모의 한족들은 '본성인'(本省人)이라 불리며 현재 대만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후 대만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게 패한 후 맺어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후 50년간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1945년 일제의 패망 이후 다시 중국의 영토가 되었다.
두 번째 한족들의 대거 대만 유입은 첫 번째 시기로부터 300년이 지난 바로 20세기 중반 무렵이다. 일제의 패망 이후 중국 대륙의 패권을 두고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는 공산당의 마오쩌둥(毛澤東)에게 시종 우위를 점했지만, 민심을 잃어 결국 공산당에 패하여 대만으로 물러났다. 이때 장제스를 따라 중국 대륙에서 건너간 중국인들은 '외성인'(外省人)이라 불린다. 외성인은 전체 대만 인구의 약 13% 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두 시기가 대륙의 중국인이 대거 대만에 유입했던 시기이지만, 같은 중국인이라도 외성인과 본성인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며, 이로 인해 본성인들에 의한 대만 독립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다.
외성인과 본성인의 갈등
대만의 역사는 크게 청, 일제, 국민당 통치의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대만의 독립을 원하는 이들이 이 세 통치 시기를 바라보는 관점은 이렇다. 청이야 전제왕조시기이므로 제외하고, 일제와 국민당의 통치 시기에 대한 관점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즉, 일제는 대만에 학교·병원 등 근대시설을 확충하여 비록 식민지였지만 나름 살기 좋았다는 점을 적극 옹호한다. 반면 국민당의 통치는 '백색공포'(白色恐怖)로 대변되는 본성인 압박 위주였다고 여기는 것이다.
본성인은 사실 처음에는 대륙에서 건너온 외성인을 무척 환대했다고 한다. 이민족인 일본인에게 식민 지배를 당하는 것보다는 같은 민족의 도래를 환영하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당의 외성인은 중국 대륙에서 패전하여 도망 온 것이었으며, 당시는 공산당과의 전시 중이라는 특수한 상황이었다.
국민당은 새로이 정착한 대만을 자신들의 통제 하에 두기 위해 외성인들을 각종 고위직에 임명하며 반항하는 본성인들은 철저히 탄압하였다. 더욱이 이미 일제 50년의 통치하에서 창씨개명에 중국어보다 일본어를 더 잘 하는 본성인들이 외성인들의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결국 이들 사이 갈등의 골은 갈수록 깊어져갔으며, '2·28 사건' 등 심각한 충돌이 발생하였다.
현재도 본·외성인 간의 이러한 갈등은 진행 중이며, 정치적 성향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국민당은 비록 공산당에게 패해 대만으로 쫓겨 왔지만, 중국 대륙과 강한 연대 의식을 가지고 있다. 사실 장제스 집권 시기만 하더라도 '반공대륙'(反攻大陸)이라며 중국 대륙으로의 반격을 계속 준비해왔었다. 지금도 물론 중국 대륙으로 돌아가길 원하며 대치중에 있지만, 경제 등 여러 방면에서 여전히 중국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이에 반해 본성인들은 같은 민족이기에 일본인보다는 나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일본인보다 더 자신들을 폭압하는 외성인들에게 실망하며, 오히려 일제 통치를 그리워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더욱이 민진당이 대만 독립을 주장하던 시기에 얼어붙은 양안관계(兩岸關係, 대만 해협을 두고 마주 보는 중국과 대만의 관계)는 중국과의 거리를 더 멀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본성인과 외성인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이것이 바로 대만인들에 의한 독립국가 대만 건국, 그리고 쯔위 사건이 발생하게 된 배경이다.
일제 통치를 그리워하는 대만인들
하지만,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일제를 높게 평가하는 대만인들의 생각은 식민사학자와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조선근대화론'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즉, 일제가 대만에 근대화를 추진했던 것은 사실이나, 이는 대만을 중국과 동남아 등으로 진출하는 확고한 교두보로 삼기 위함이었다. 또한 주권과 자유를 빼앗긴 채 일제에 의해 배불리 사육되는 것, 이것이 과연 향수를 느끼게 할 정도로 좋은 것일까? 우리와 같이 일제의 식민지배라는 치욕스러운 경험을 했지만, 우리보다 길었던 15년이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이것이 바로 대만인들을 '중국말을 하는 일본인'이라 부르는 원인일 것이다.
또한 소련의 전례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은 대만 독립으로 인한 연쇄반응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 실제로 대만 외에 티베트, 신장과 같이 중국 대륙 내에서도 분리독립을 원하는 세력이 적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만의 독립과 관련된 문제는 중국의 존폐가 걸린 문제일 것이다.
18세 대만 소녀 쯔위, 분명 여느 소녀들과 같이 정치에 관심도 없고, 잘 아는 것도 없을 것이다. 청천백일만지홍기를 흔들었던 이 소녀의 행동은 정말 아무런 정치적 입장이 포함되지 않은 무의식적인 행위였을 것이다. 이 같은 일에 대해 불같이 성내는 중국인들의 행위는 분명 잘못됐지만, 양안(兩岸)의 속사정과 대만의 친일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면 단순히 중국만 비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임상훈 교수는 현재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역사문화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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