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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청구회 추억' 육필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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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신영복 '청구회 추억' 육필 원고

인간 신영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 '청구회 추억'

신영복 교수의 영결식(1월 18일) 다음 날, 프레시안의 이근성 상임고문이 다음과 같은 사연을 보내 왔다.

“고 신영복 교수의 옥중 서한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으로 선보이고, 얼마 후 신 교수로부터 당시 중앙일보에 근무하던 저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자신이 20년 전 사형선고를 받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생의 마감을 앞두고 남몰래 그간의 삶을 돌아보며 정리한 글 한 편이 있었는데, 당시 급히 방을 옮기느라 숨길 수 없어 한 헌병에게 집에 전할 수 있으면 전해 달라 부탁한 적이 있으며, 출소 후 혹시나 하고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아 잃어버린 걸로 알았는데 며칠 전 그게 집에서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급히 만나보니 그것은 짙누런 똥종이(당시 교도소 재소자용 휴지)에 깨알같이 여러 장에 쓴 <청구회 추억>이었습니다.

읽는 순간 큰 감동과 울림이 한꺼번에 몰려왔습니다. 이십대 후반 한 청년의 기록으로는 보기 어려울 만큼, 세상을 보는 따뜻한 시선과 이웃에 대한 깊은 배려, 더불어 살려는 마음이 가득 녹아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한 사람의 자전적 기록을 넘어 하나의 문학작품, 아니 이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산문으로 다가왔습니다.

<청구회 추억>은 곧 <월간중앙>에 실려 널리 알려졌으며 다시 한 번 세상을 크게 감동시킨 바 있습니다.

지난 18일 신영복 교수를 떠나보내고, 그날의 감동이 그리워 신 교수가 남기신 똥종이 그대로의 모습으로 올려 함께 당시의 추억을 나누려 합니다.“

‘청구회 추억’은 신영복 선생의 글 중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글이다. 29장의 똥종이에 반듯하게 적힌 이 글은 1966년 봄부터 그가 구속되기까지 2년 여간 여남은 살 먹은 가난한 소년 6명과의 교우에 관한 기록이다.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을 앞둔 그는 왜 이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중앙정보부와 검찰은 왜 ‘청구회’가 국가 변란을 노리는 무시무시한 단체라고 오해했을까? 이 글에는 사람에 대한 신영복의 실천적 사랑이 잘 드러나 있다. 반면 자기 나라 국민을 적으로 대하며 기어코 죽이려는 정보기관의 야수와도 같은 전쟁심리를 엿볼 수 있다.

‘청구회 추억’은 1998년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수록됐으며(30-46쪽), 2008년 7월 별도의 단행본(<청구회 추억>)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전재를 허락해준 돌베개 출판사에 감사드린다. 편집자

신영복 선생의 육필 원고로 전문을 보고 싶다면 (이미지 프레시안 바로가기)


▲'청구회 추억' 첫장 ⓒ돌베개

청구회 추억

1966년 이른 봄철 서울대학교 문학회의 초대를 받고 회원 20여 명과 함께 서오릉으로 한나절의 답청(踏靑)놀이에 섞이게 되었다.

불광동 시내버스 종점에서 서오릉까지는 걸어서 약 한 시간 길이다. 우리는 이 길을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나도 4, 5인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학생들의 질문에 가볍게 대꾸하며 교외의 조춘(早春)에 전신을 풀어헤치고 민들레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걷고 있었는데, 우리 일행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 여섯 명의 꼬마 한 덩어리를 뒤늦게서야 깨닫게 되었다.

만일 이 꼬마들이 똑같은 교복이나 제복 같은 것을 입고 있었거나 조금이라도 더 똑똑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더라면 나는 좀더 일찍 이 동행인(?)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여남은 살의 이 아이들은 한마디로, 주변의 시골 풍경과 소달구지의 바퀴자욱이 두 줄로 패여 있는 그 황토길에 흡사하게 어울리는 차림들이었다.

모표도 달리지 않은 중학교 학생모를 쓴 녀석이 하나, 흰 운동모자를 쓴 녀석이 또 한 명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운동모자는 여러 번 빨래한 것으로 앞챙 속의 종이가 몇 군데로 밀리어 챙의 모양이 원형과 사뭇 달라졌을 뿐 아니라 이마 위로 힘없이 처져 있었다. 그나마 흙때가 묻어서 새하얗게 눈에 뜨이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나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털실로 짠 스웨터였다. 낡은 털실 옷의 성한 부분을 실로 풀어서 그 실로 다시 짠 것이었다. 색깔도 무질서할 뿐 아니라 몸통의 색깔과 양팔의 색깔이 같지 않고 양팔 부분도 팔꿈치 아래는 다시 달아낸 것 같았다. 털스웨터의 녀석은 그래도 머리에 무슨 모자 비슷한 것을 뒤집어쓰기까지 했다.

나는 이 똑똑치 못한 옷차림의 꼬마들로부터 안쓰런 춘궁(春窮)의 느낌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자주 우리들을 할끔할끔 뒤돌아보는 양이 자기들끼리는 몰두할 만한 이야기도 별로 없는 듯하였다.

처음에는 서오릉 근처의 시골 아이들이 제 집으로 돌아가거니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오전 아홉 시. 제가끔 제 집들에 있을 시간이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리고 그중의 한 녀석이 들고 있는 보자기 속에 냄비의 손잡이가 보였다. 이 여섯 명의 꼬마들도 분명히 우리 일행처럼 서오릉으로 봄소풍을 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꼬마들의 무리에 끼어 오늘 하루를 지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속해 있던 문학회원들의 무리에서 이 꼬마들의 곁으로 걸음을 빨리 하였다.

나는 어린이들의 세계에 들어가는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중요한 것은 ‘첫 대화’를 무사히 마치는 일이다. 대화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은 서로의 거리를 때에 따라서는 몇 년씩이나 당겨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꼬마들에게 던지는 첫마디는 반드시 대답을 구하는, 그리고 대답이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만일 “얘, 너 이름이 뭐냐?”라는 첫마디를 던진다면 그들로서는 우선 대답해줄 필요를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는 불쾌감으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뱅글뱅글 돌아가기만 할 뿐 결코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반드시 대답을 필요로 하는 질문을, 그리고 어린이들이 가장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놀림의 느낌이 전혀 없는 질문을 궁리하여 말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이미 그들은 내가 그들 쪽으로 옮겨오고 있음을 알고 제법 긴장들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걸음걸이가 조금 빨라지고 자주 나를 돌아다보는 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예상을 뒤엎고 그들을 앞질러버릴 때까지 말을 건네지 않고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저쪽 산기슭의 양지에는 벌써 진달래가 피어 있었다. 나는 문득 생각난 듯이 꼬마들 쪽으로 돌아서며 “이 길이 서오릉 가는 길이 틀림없지?” 하고 그 첫마디를 던졌다. 이 물음은 그들에게는 전혀 부담이 없는 질문이다. ‘예’ 또는 ‘아니오’로써 충분한 것이며, 또 그들로 하여금 자선의 기회와 긍지도 아울러 제공해주는 질문이었다.

그들의 대답은 훨씬 친절한 것으로 나타났다. “네, 맞아요!”가 아니라 “네, 일루 곧장 가면 서오릉이에요”였다. 뿐이랴. “우리도 서오릉엘 가는 길이어요!”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좋은 것이었다.

허술한 재건복 차림을 한 나에게 그처럼 친절한 반응을 보여준 것은 아마 조금 전까지 나와 같이 함께 이야기 나누며 걷던 문학회 회원들의 말쑥하고 반반한 생김생김의 덕분이었으리라고 느껴졌다.

여하튼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는 사실, 이 사실은 그 다음의 대화를 용이하게 해주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의 대화가 그 다음 대목에서 뜻밖에 경화(硬化)되어버릴 위험은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버스 종점에서 반쯤 온 셈인가?”
“아니요, 반두 채 못 왔어요.”
“너희들은 서오릉 근처에 살고 있는 모양이구나.”
“아니요, 문화동(현재 신당동의 일부: 편집자)에 살아요.”
“그럼 지금 문화동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이냐?”
“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믄 어쩔려구.”
“호호, 문제 없어요.”

이렇게 하여 일단 대화의 입구를 열어놓았다.
이제 더 깊숙히 이 꼬마들의 세계 속으로 발을 들여놓아야 한다.

신영균이와 독고성, 장영철과 김일의 프로레슬링, 손기정 선수 등의 이야기. 세종대왕, 을지문덕, 이순신 장군에 관하여 때로는 쉽게, 때로는 제법 어렵게 질문하면서 또 그들의 이야기를 성의 있게 들어주면서 걷는 동안 우리는 상당히 친숙해질 수 있었다.

그들은 문화동 산기슭의 한 동네에서 살고 있다는 것, 오래전부터 자기들끼리 놀러가기로 약속해왔다는 것, 그래서 벼르고 별러서 각자 왕복 버스 회수권 2장과 일금 10원씩을 준비하고 점심밥 해먹을 쌀과 찬(단무지뿐이었음)을 여기 보자기에 싸가지고 간다는 것, 자기들 여섯 명은 무척 친한 사이라는 것 등을 알게 되었다.

너희들 여섯 명의 꼬마단체에다 이름을 지어 붙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고 제안하였더니, 이미 자기들도 그러한 이름 같은 것을 구상해두고 있는데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구상 중인 이름으로는 ‘독수리’와 ‘맹호부대’의 둘이 있다는 대답이다. 독수리나 맹호부대보다 훨씬 그럴 듯한 이름 하나를 지어주겠는가를 나한테 물어왔다. 나는 쾌히 이를 수락하였다.

나와 이 가칭 독수리 용사들과의 첫 번 대화는 대체로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어느덧 서오릉에 닿았고 이제 이 꼬마들과 헤어져서 나는 학생들 틈으로 돌아왔다. 물론 이따가 한 번 더 만나기로 약속해두었다.

문학회원들과 함께 우리 일행은 널찍한 잔디밭에 자리를 잡고 둘러앉아서 점심을 먹으며 놀고 있었다. 학생 중의 한 명이 잔디밭이 씨름판에 안성맞춤이니 누구 한번 씨름내기를 해보자고 서두를 꺼내자 엉뚱하게도 내가 그 씨름의 상대로 지목되었다. 평소에 나한테 구박을 한 번씩은 받은 녀석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일제히 나를 지목하여 골려보려는 저의는 잔디밭의 봄소풍에 썩 잘 어울리는 놀이이기도 하였다. 아마 나를 자꾸 귀찮게 끌어내려는 녀석이 권만식이었다고 기억이 되는데, 나는 그때 저쪽 능 옆에서 우리를, 특히 나를 지켜보고 있는 예의 그 여섯 꼬마들의 얼굴을 발견하였다. 이 꼬마들도 나의 곤경을 주시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드디어 권 군과의 씨름을 수락하고 만장의 환호(?)를 받으며 잔디밭 한가운데서 맞붙잡았다. 권 군은 몸집만 컸을 뿐 씨름에는 문외한임을 당장 알 수 있었다. 나는 내리 두 번을 아주 보기 좋게 이겼다. 내가 권 군을, 그것도 두 번을 거푸, 보기 좋은 들배지기로 이기는 광경은 천만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뿐이랴. 뒤이어 상대하겠다는 녀석도 보기 좋게 안다리로 넘겨버렸다.

나의 응원단은, 저쪽 능 옆에서 상당히 걱정하였을지도 모르는, 그 꼬마 응원단은 분명히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꼬마들은 물론이고 문학회 학생들도 나의 숨은 씨름 솜씨를 알 턱이 없다. 연구실에서 그저 밤낮 책이나 들고 앉아 있는 선배로 알려졌을 뿐이니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이제 나의 응원단석(?)으로 개선하고 싶은 생각밖에 없다. 그래서 꼬마들이 보지 않게 과일과 과자 등속을 싸가지고 일어섰다. 흡사 전리품 실은 개선장군처럼 나는 우리 꼬마들의 부끄러운 영접을 받았다. 나를 자기들 편 사람으로 간주해주는 그들의 푸짐한 칭찬, 그것은 무척 어색하고 서투른 표현에도 불구하고 가식 없는 진정이었다.

나는 우선 씨름 가르치는 것에서부터 꼬마들과 어울리기 시작하여 둘씩 둘씩 씨름을 시키고 있는데, 저쪽에서 문학회 학생 한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달려왔다. 기념촬영을 해주겠단다.

우리는 능 앞의 염소같이 생긴 석물(石物) 곁에 섰다. 꼬마 여섯 명을 그 돌염소 잔등에 나란히 올라앉게 하고 나는 염소의 머리 쪽에 장군(?)처럼 서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능 뒤쪽의 잔디밭에서 노래도 부르고 내가 싸가지고 간 과자와 사과를 나누어 먹으며 한참 동안 놀고 난 후에 나는 꼬마들과 헤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문학회 학생들과 둘러앉아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는데 약 30미터쯤 떨어진 저쪽 소나무 옆에 꼬마들이 서 있음을 알려주었다. 벌써 집으로 돌아갈 차림이다. 아마 나와 작별인사를 나누기 위하여 기회를 노리고 있는 참인가 보았다. 내가 그들에게 뛰어가자 그들은 이제 돌아가는 길이라고, 그래서 사진이 나오면 한 장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그들 중의 중학생 모자를 쓴 조대식 군의 주소를 나의 수첩에 적고, 나의 주소(숙명여대 교수실)를 적어주었다. 그리고 그때 그들로부터 한 묶음의 진달래꽃을 선물(?)받았다. 지금도 나의 기억 속에서 가장 밝은 진달래 꽃빛은 항상 이때에 받았던 진달래 꽃빛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국민학생답게 일제히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물론 모자도 벗고) 헤어졌다.

가칭 ‘독수리 부대’이며, 옷차림이 똑똑치 못한 이 가난한 꼬마들과의 가느다란 인연은 이렇게 봄철의 잔디밭에서 진달래 맑은 향기 속에 이루어졌다. 이 짧은 한나절의 사귐을 나는 나대로의 자그마한 성실을 가지고 이룩한 것이었다. 나와 동행하였던 문학회 학생들은 아마 그날의 내 행위를 한낱 ‘장난’으로 가볍게 보았을 것이 사실이며 또 나의 그러한 일련의 행위 속에 어느 정도의 장난기가 섞여 있었던 것이, 싫기는 하지만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나와 헤어질 때의 일…'…. 진달래 한 묶음을 수줍은 듯 머뭇거리면서 건네주던 그 작은 손, 그리고 일제히 머리 숙여 인사를 하는 그 작은 어깨와 머리 앞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선생님’이 아닐 수 없었으며, 선생으로서의 ‘진실’을 외면할 수는 도저히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그날의 내 행위가 결코 ‘장난’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상당히 무구(無垢)한 감명을 받고 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곧 그들을 잊고 말았다. 그들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는 사실, 그것이 그날의 나의 모든 행위가 실상은 한갓 ‘장난’에 불과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서오릉 봄소풍날로부터 약 15일이 지난 어느날, 숙명여대 교수실에서 강의 시작 시간을 기다리고 앉아 있는 나에게 정외과의 조교가 세 통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편지를 건네주면서 “참 재미있는 편지 같아요”라는 웃음 섞인 말을 던지더니 내가 편지를 개봉하면 어깨너머로라도 좀 보고자 하는 양으로 떠나지 않는다. 그 조교가 “참 재미있는 편지” 같다고 한 이유는 겉봉에 쓴 글씨가 무척 서툴러서 시골 국민학교의 어느 어린이로부터 온 듯할 뿐 아니라, 또 잉크로 점잖게 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는 점에 있었을 것이다.

조대식, 이덕원, 손용대 세 녀석이 보낸 편지였다. 이 녀석들이 바로 ‘독수리 부대’ 용사들이라는 것은 겉봉에 적힌 ‘문화동 산 17번지’를 읽고 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꼬마 친구들에게서 온 편지”라는 짤막한 말로써 그 편지를 전해준 조교의 질문과 호기심에 못을 박아버린 까닭은 내가 그 편지로 말미암아 무척 당황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편지는 분명히 일침(一針)의 충격이며 신랄한 질책이 아닐 수 없었다. 나보다도 훨씬 더 성실하게 그날의 일들을 기억하고, 또 간직하고 있었구나 하는 나의 뉘우침, 그 뉘우침은 상당히 부끄러운 것이었다.

편지는 세 통이 모두 똑같은 내용을, 똑같은 잉크와 펜으로 쓴 것이었는데 아마 한 자리에서 서로 의논하여 손용대는 이덕원의 것을, 이덕원은 조대식의 것을, 조대식은 또 손용대의 것을 서로 넘겨다보며 쓴 것이 틀림없었다. 선생님을 사귀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것, 자기들 단체의 이름을 지었으면 알려달라는 것, 그때 찍은 사진이 나왔느냐는 것, 그리고 건강하시기를 두 손 모아 빈다는 것 등이 적혀 있었다.
그 소풍 이후 약 보름가량을 나는 그들을 결과적으로 농락해오고 있었으며, 그날의 내 행위 그것마저도 결국 어린이들에 대한 무심한 ‘장난질’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 왈칵 나의 가슴 한 모서리에 엉키어왔다.

나는 강의가 끝나는 대로 즉시 서울대학교로 달려갔다. 그때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던 학생(송승호 아니면 이해익으로 기억된다)을 찾았다. 필름이 광선에 노출되어 못쓰게 되어버렸단다. 사진이라도 가지면 나는 나의 무성의한 소행을 조금이나마 만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솔직히 그들에게 사과하는 길밖에 없다.

엽서를 띄웠다.
“이번 토요일 오후 다섯 시, 장충체육관 앞에서 만나자.”

토요일 오후 다섯 시, 장충체육관 앞의 넓은 광장에서 우리 일곱 명은 옛 친구처럼 반가이 만났다. 그러나 이미 한 시간 전부터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 녀석들의 ‘정성’ 앞에서 나는 또 한 번 민망스럽고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이나 먼저 와 있었다는 사실이 무모한 시간의 낭비라고 생각되기는커녕 그들의 진솔함이 동상처럼 높이 올려다 보이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매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6시에 장충체육관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이 약속은 1968년 7월 내가 구속되기까지 매우 충실하게 이행된 셈이다.

다만 만나는 시간이 조금씩 일러지는 기현상(?)을 연출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약속시간이 오후 6시임에도 불구하고 이 녀석들은 꼭꼭 5시부터 나와서 기다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약 30분가량 일찍 나타나서 5시 30분에 만나게 되면 이제는 4시 30분부터 나와 있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내 쪽에서 30분쯤 더 일찍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결국 6시에 만나자는 약속은 에스컬레이션을 거쳐 어느덧 5시로 변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제야 우리는 군축회담이나 하듯 다시 6시로 되돌아갈 것을 결의하고 6시로 되돌아가면 다시 동일한 에스컬레이션을 거쳐서 다시 5시에 만나게 되곤 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이 만나서 하는 일이란, 무슨 할 일을 만드는 일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만나서 서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나누는 그런 사소한 일에 불과하지만 그저 만난다는 사실 그것이 그냥 좋을 뿐이었다. 괜히 자기들끼리 시키지도 않은 달음박질 내기를 해보이기도 하고, 광장 가장자리의 난간에서 서로 떨어뜨릴 내기를 하거나, 모자를 뺏어서 달아나기를 하는 것들이 고작이었다.

10원에 5개씩 주는 아이스케이크를 나누어 먹으며 우리는 난간 부근에서 약 한 시간가량을 보내고 약수동 고개를 넘어 문화동으로 올라가는 입구까지 걸어가서 내가 버스를 탐으로써 헤어지곤 하였다.

두 번째인가 세 번째 모임에서 우리는 상당히 건설적인 합의를 보았다. 문화동 입구의 작은 호떡집에서 ‘문화빵’(10원에 3개)을 앞에 놓고 매달 10원씩의 저금을 하자는 약속을 한 것이었다. 6명이 10원씩을 모으면 60원, 거기다 내가 40원을 더하여 매달 100원씩의 우편저금을 하기로 하였다. 수금과 예금 및 통장의 보관은 이규한 군이 책임지기로 하였다.

한 달에 100원씩이라 하더라도 1년이면 1,200원, 10년이면 12,000원이다. 우리는 그때 10년까지 계산해보았다고 기억된다. 그날은 공책을 한 권 사서 그것을 우리의 회의록 겸 장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특기해야 할 사실은 매월 저금하는 10원은 반드시 자기 손으로 번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결의하였다는 점이다.

한 달에 10원 벌이는 자신만만하단다. 물지게를 져다 주기, 연탄을 날라다 주기 등 산비탈 동네에 사는 어린이들이 끼어들 수 있는 노력봉사의 사례금이 우리의 수입원인 셈인데, 더러는 아버지나 어머니 또는 집안 식구들의 심부름값이 섞여 있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우리들의 고충이었다.

이렇게 하여 쌓인 우리의 저금은 내가 구속되던 1968년 7월까지 2,300원이 되리라고 기억된다. 내가 육사에서 군사훈련을 받던 1966년 6월과 7월 두 달, 그리고 67년 2월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해 있던 한 달, 그리고 그 외에 한두 번 가량 적금되지 않았으며, 그 대신 언젠가 내가 받은 원고료 수입에서 그동안의 부족액 약 300원 정도를 불입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조대식인가 이규승인가 자기의 무슨 수입 중에서 20원 가량 초과 불입한 일도 있었다.

1966년 9월 우리 ‘청구회’(靑丘會) 회원 중 2명이 교체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이 이사를 간 것이다. 한 사람은 청량리로, 또 한 사람은 용산 어디인가로 이사를 갔다. 비록 이사는 하였지만 모임이 있는 날에는 장충체육관 앞에 나오겠다고 다짐을 두고 떠나갔는데 두 번 거푸 결석(?)을 하였다.

언젠가는 청량리로 이사 간 이대형이 문화동으로 놀러와서 자기도 청량리에서 친구들을 모아 회를 만들어서 선생님의 참석을 부탁할 작정이라는 각오를 피력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듣기는 하였으나 그후 영영 이대형 군의 소식은 끊어지고 말았다.

우리는 2명의 결원을 충원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런데도 10월의 모임 때 여전히 충원되지 않고 4명만 모였다. “요사이는 좋은 아이가 참 드물다”는 것이 그들의 이유였다. 다음 달까지는 꼭 ‘좋은 아이’를 구하여 충원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 달에도 역시 4명밖에 모이지 않았다. 좋은 아이 둘을 구하기는 구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오늘 참석하게끔 하지 않았느냐는 나의 물음에 비실비실 머리를 긁적이더니 오늘 나오기는 나왔다는 것이다.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저기 저쪽 길옆의 전봇대 뒤에 서 있는 아이가 바로 그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과연 길 저편의 전봇대 뒤에 꼬마 둘이 서 있었다. 우리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리자 그 두 명의 꼬마는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같이 전봇대 뒤로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두 명의 아이가 틀림없이 ‘좋은 아이’라고 생각했다. 전봇대 뒤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마음씨야말로 딱할 정도로 착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전봇대 뒤에 있는 두 명의 신입회원을 이리로 데려오기 위하여 4명의 꼬마가 모두 달려갔다. 내가 이 두 명의 꼬마와 악수를 하고 나자 그제야 이 두 명에 대한 칭찬과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신입회원의 자격을 심사하거나 가입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없는 입장에 놓여 있기 때문에 다만 새로 온 두 명의 꼬마친구와 인사를 하는 것이 고작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표정은 그것이 무슨 커다란 관문의 통과나 되는 것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날 우리는 신입회원의 환영회를 벌이기 위하여 예의 그 호떡집으로 갔다. 나는 100원어치의 문화빵을 샀다. 신입회원 중의 한 명은 이규한의 동생 이규승이었고 또 한 명은 반장집 아들 김정호였다.

우리는 열심히 모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장충체육관의 처마 밑과 층층대 밑에서 만났으며 겨울철에도 거르는 일 없이 만났다. 회의 명칭도 꼬마들의 학교 이름을 따서 ‘청구회’(靑丘會)라고 정식으로 명명하였다.

청구회가 가장 힘을 기울인 것은 역시 독서였다. 나는 매월 책 한 권씩을 회의 도서로 기증하였으며 회원 각자도 책을 한 권씩 모았다. 그리하여 ‘청구문고’를 만들 작정이었다.

‘아아 무정’, ‘집 없는 천사’, ‘로빈 후드의 모험’, ‘거지왕자’, ‘플루타크 영웅전’, ‘소영웅’…'… 등의 책을 읽었다. 청구회의 모임은 한 달에 네 번인 셈이다. 매주 토요일에는 자기들끼리 모여서 내가 추천한 책을 번갈아가며 낭독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는 그들의 독후감을 이야기하게 하고 거기에 곁들여 비슷한 이야기를 내가 들려주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가끔 호떡집에 자리를 옮겨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걱정과 어려운 일을 서로 상의하기도 하였다.

당면한 걱정 역시 중학교 진학 문제였다. 그러나 그것은 중학교에 진학할 경제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생기는 걱정이라는 점에서 실은 진학문제라기보다는 사회진출 문제라고 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결론은 대체로 1, 2년 뒤에 야간중학에 입학하거나 또는 자격검정고시를 치르고 바로 고등학교(야간)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1968년 7월까지 중학교에 진학한 회원은 조대식 1명밖에 없었으며 또 이덕원 군이 자전거포에 취직이 되었을 뿐이었다. 이덕원 군이 자전거포에 취직함에 따라 우리의 모임도 마지막 토요일에서 첫번째 일요일로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와 셋째 일요일이 이덕원 군의 휴일이기 때문이었다.

독서 이외에 청구회 회원들이 한 일들도 제법 다채로운 것이었다. 이를테면 우선 동네의 골목을 청소하는 일을 들 수 있다. 나는 그들이 한 달에 몇 번씩 자기 동네의 골목을 쓸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여름철과 겨울 방학 때는 매주 2, 3회씩이나 골목을 청소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겨울철에 얼음이 얼어서 미끄러운 비탈길을 고쳐놓는 일이다. 땅에 박힌 얼음을 파내고 그곳을 층층대 모양으로 만드는 일을 하였다. 그리고 봄철이 가까워 땅이 녹아 질펀하게 미끄러워진 때에는 그런 곳에다 연탄재를 덮어서 미끄럽지 않도록 만드는 일도 하였다.

나는 물론 이러한 일들에 참여하였거나 그들의 업적을 직접 확인한 일은 한 번도 없다. 당시 나는 종암동 산 49번지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내가 추천하지도 않은 일인데 그들은 여름철이면 새벽같이 일어나서는 남산 약수터까지 마라톤을 하였다. 66년 여름과 67년 여름 새벽을 줄곧 뛰었던 것이다.

내가 이 청구용사들을 잊을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1967년 2월 내가 수도육군병원에서 담낭절제수술을 받고 입원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 달의 모임에 참석할 수 없노라는 사연을 간단히 엽서로 띄우면서 혹시라도 병원으로 문병 오지 않도록, 곧 퇴원하게 될 테니까 절대로 찾아오지 말 것을 부탁하였다. 그래서 그 꼬마들은 내가 퇴원할 때까지 다행히 병원에 오지 않았었다.

그러나 다음 달에 우리가 만났을 때 그들이 두 번이나 찾아왔다가 두 번 모두 위병소에서 거절당하였음을 알았다. 그것도 삶은 계란을 싸가지고 왔었단다. 더욱이 나이가 제일 어린 이규승이는 평소에 같이 걸어갈 때에도 내 팔에 매달리며 걸었는데 한 번은 저 혼자서 병원까지 왔다가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물론 삶은 계란은 자기들끼리 나누어 먹었겠지만 그들이 그렇게 벼르고 별렀던 서오릉 소풍 때에도 계란을 싸가지고 갈 수 없었던 가난한 형편을 생각하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문화동에서 멀리 병원까지 걸어서 왔다가 걸어서 돌아간 것이었다.

내가 이들로부터 꼭 한 번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 66년 크리스마스 때였다. 카드 한 장과 금관담배 한 갑이 그것이다. 아마 이 선물을 위하여 일인당 10원씩을 거두었던 모양이었다. 왜 내가 그것을 짐작할 수 있었는가 하면 손용대와 이덕원의 표정에는 자기 몫을 내지 못한 침울한 심정이 너무나 역력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크리스마스 때 선물이나 카드를 주고받지 않기로 하였던 지난 달의 결정을 상기시키고 다시는 이런 낭비(?)를 하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러한 우리의 결심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던 어린이들에게 어느 정도로나 수긍이 갔었는지, 그리고 몫을 내지 못한 두 어린이의 침울한 심정이 과연 얼마나 위로되었는지 매우 쓸쓸한 기억밖에는 없다.

나는 카드 대신 1월 1일경에 이들에게 배달되도록 날짜의 여유를 두어서 사관학교의 그림엽서 한 장씩을 우송하였다.

1967년 6월 나는 수술 후 완전히 회복되었기 때문에 4월부터 미루어온 봄소풍을 가기로 약속하였다. 이미 6월이 되어 여름 소풍이 되어버린 셈이지만 우리는 이 소풍을 위하여 여러 차례 의논을 하였으며 오래전부터 마음을 설레어온 터였다. 우리는 이번 소풍이 전번보다 더 풍성하고 유쾌한 것이 되도록 청구회 외에 다른 그룹도 참가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목적지를 이번에는 ‘백운대’ 계곡으로 정하고 다른 그룹에 대한 교섭은 물론 내가 책임을 맡았다.

처음에 나는 다른 꼬마들을 참가시킬까 생각하다가 곧 그런 생각을 취소하였다. 청구회 회원들이 주인이 된 소풍에 또 다른 꼬마들이 곁든다는 것은 그 손님이 된 꼬마들이 비록 세심한 배려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어색하고 섭섭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선 내가 지도하고 있던 이화여자대학교의 세미나 서클 ‘청맥회’에서 청구회의 내력과 봄소풍 계획을 피력하여 열렬한(?) 동의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나서 나는 육군사관생도들을 참가시키기로 작정하였다. 육사 생도들의 화려한 제복과 반듯한 직각의 동작은 평소 우리 꼬마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당시 10주의 훈련을 거쳐 육군중위로 임관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수부에서 경제학을 강의하고 있었다.

66년 임관 직후 내가 예의 그 허술한 국민복 상의를 벗어버리고 정복 정모에 계급장을 번쩍이면서 장충체육관 앞에 나타났을 때 청구회 꼬마들이 큰 눈으로 신기해하고 자랑스러워하는 품이란 그대로 흐뭇한 한바탕 축하회였다.

그날 나와 꼬마들이 옆으로 늘어서서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걸어가는데 저만큼에서 육군병사 한 명이 차렷 자세로 내게 경례하였다. 그 병사가 구태여 걸음을 멈추고 차렷 자세로 정식 경례를 한 마음씨가 짐작할 만하였다. 그 광경을 목격한 이 꼬마들의 뛸 듯이 기뻐하는 모습이라니. 나도 으쓱해지려는 치기를 어쩔 수 없었던 터였다. 이번 봄소풍에 육사 생도들을 참가시키자는 것은 오히려 꼬마들 쪽에서 먼저 얘기를 꺼낸 것이기도 하였다.

나는 3학년 경제학원론 강의를 빨리 진행하여 일찍 마친 다음 생도들에게 청구회의 봄소풍 작전을 공개하여 그 참가를 희망하는 생도는 강의가 끝난 후 경제학과 교수실로 와서 신청하도록 광고(?)하였다. 상당히 광범한 반응이 일었다. 이처럼 많은 희망자가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을 나는 결코 이화여대의 ‘청맥회’가 동행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청구회에 얽힌 몇 가지 에피소드만으로도 충분히 호감이 가는 소풍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생도들보다 비교적 일찍이, 그것도 6명이 단체로 신청한 생도들과 약속하였다. 그후 많은 생도들의 신청을 무마하여 다음 기회로 미루어 돌려보내느라 상당히 오랫동안 고역을 치렀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봄소풍 일행은 최종적으로 그 인원이 확정되었다. 청구회 6명, 청맥회 여학생 8명, 육사생도 6명 그리고 나 이렇게 21명이었다. 그리고 각 참가 그룹별 책임을 분담하였다. 책임이란 소풍에 필요한 점심과 간식에 소요되는 최소한의 준비였는데 이 분담도 참가신청 이전에 이미 참가의 조건으로 제시된 바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상기시켜 잊지 말도록 하는 것일 뿐이었다. 여학생들은 점심식사에 필요한 주식과 부식의 준비, 육사 생도들은 과자와 간식의 준비, 그리고 청구회 꼬마들은 주빈답게 아이스케이크 30개 값을 지참하는 정도로 그저 체면 유지(?)에 그친 것이었다.

이 아이스케이크 값도 그날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동이 나고 말았지만, 마침 다들 목이 마를 때 다른 그룹들보다 먼저 선수를 쳤기 때문에 상당한 갈채를 받았다는 점에서 그 비용에 비하여 효과는 지극히 훌륭한 것이었다.

1967년 6월 ○일 일요일 오전 10시 30분. 우리 일행은 수유리 버스종점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나는 9시 30분에 문화동 입구 청구국민학교 앞에서 꼬마들과 만나서 시내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수유리 종점에 도착하였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여학생들과 사관생도들은 우리의 도착으로 비로소 그들이 오늘의 동행인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먼저 그들의 책임 준비물을 점검하였다. 초과달성이었다. 주.부식을 분담하였던 여학생들에게서 딸기, 과자 등속이 지참되고 있었는가 하면 생도들의 짐 속에는 ‘쌀’까지 들어 있었다. 일요일에 등산 또는 소풍가는 생도는 학교로부터 쌀의 정량을 지급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악착같이(?) 타왔단다.

이날 청구회 회원들은 여학생들과 사관생도들로부터 대단한 우대를 받았다. 가난한 옷차림을 낮추어보는 시선도 없었고, 가난한 옷차림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의 구김새도 없이 ‘신나게’ 놀았던 하루였다. 육사 생도들은 육군사관학교로 꼬마들을 초대하겠다는 약속을 하였고, 여학생들은 ‘청구문고’에 도서를 기증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오후 5시경 수유리 종점에서 헤어질 때까지 우리는 줄곧 의젓하게(?) 처신하면서 청구회의 위신을 손상시킴이 없도록 자제하기도 하였다. 그래서였던지 그후 동행인들로부터 각종의 찬사와 격려를 받았다.

우리는 계속 부지런히 장충체육관 앞에서 만났고 엽서와 편지를 주고받아가며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애정을 키워왔던 것이다.

지금 옥방에 구속된 몸으로 이 글을 적으면서도 애석하고 마음 아픈, 이른바 실패의 기억처럼 회상되는 일이 하나 있다.

1968년 1월 3일에 청구회 꼬마들을 우리집으로 초대하여 간소한 회식을 갖자고 제의하여 이들의 승낙을 받았다. 그러나 약속날인 1월 3일 12시 동대문 체육관 앞에는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이들의 초대를 위하여 어머니에게 이들의 면면을 말씀드려 ‘회식’의 준비에 각별한 애정을 느끼게끔 미리 터를 닦아놓기까지 하였던 터였다.

12시부터 약 1시간 40분 동안 추운 버스정류장에서 이들을 기다렸다. 처음 한 시간은 12시 약속을 1시 약속으로 착오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그후 40분은 도중에 무슨 일로 좀 늦어질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1시간 40분을 행길가에 서서 기다렸다. 흔히 약속 시간보다 1시간씩이나 일찍 나타나곤 하던 이 녀석들의 특유의 버릇을 생각하여 근처의 담뱃가게에 소상히 문의해보는 일도 잊지 않았다.

나는 어깨를 떨어뜨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님의 실망을 위로하여야 하였다.
나는 지금도 그때 그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까닭을 정확히 모르고 있다. 사실은 그들이 나오지 않은 이유 자체가 심히 모호한 것이기도 하였다. 어쩌면 나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였는지 아니면 부모들로부터 역시 같은 이유로 금지 당하였는지 그들의 대답과 표정은 끝내 모호하였을 뿐이었다. 결국 분명한 해명이 없는 채 그대로 지나치고 말았다.

바로 이 점에 나의 고충이, 그리고 그들 쪽에도 하나의 고충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종류의 미묘한 심리적 갈등이 한두 번, 그나마 가볍게 노출되었던 것 외에 무슨 다른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하고 고작 검정고시로 가난한 마음을 달래고 있는 이들에게 중학교의 입학금과 학비를 내가 조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나를 상당히 우울하게 하였다. 이 문제에 관하여 나는 감상적으로 되는 나를 애써 경계하면서 이러저러한 논리를 갖추어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다짐하면서도, 문득문득 눈앞에 서는 이 국민학교 ‘7학년’, ‘8학년’의 위축된 모습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번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달 100원씩 붓는 우리들의 우편저금이 먼 훗날 어떠한 형식으로 이 잃어버린 중학 시절의 공허와 설움을 보상해줄 수 있겠는가.

1966년 이른 봄철 민들레 씨앗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해후하였던 나와 이 꼬마들의 가난한 이야기는 나의 급작스런 구속으로 말미암아 더욱 쓸쓸한 이야기로 잊혀지고 말 것인지…'….

중앙정보부에서 심문을 받고 있을 때의 일이다.
‘청구회’의 정체와 회원의 명단을 대라는 추상 같은 호령 앞에서 나는 말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어떠한 과정으로 누구의 입을 통하여 여기 이처럼 준열하게 그것이 추궁되고 있는가. 나는 이런 것들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8월의 뜨거운 폭양 속에서 아우성치는 매미들의 울음소리만 듣고 있었다. 나는 내 어릴 적 기억 속의 아득한 그리움처럼 손때 묻은 팽이 한 개를 회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답변해주었다. ‘국민학교 7학년, 8학년 학생’이라는 사실을.

그후 나는 서울지방법원 8호 검사실에서 또 한 번 곤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청구회 노래’인가?”

검사의 반지 낀 손에 한 장의 종이가 들려져 있었다. 거기 내가 지은 우리 꼬마들의 노래가 적혀 있었다.

겨울에도 푸르른 소나무처럼
우리는 주먹 쥐고 힘차게 자란다.
어깨동무 동무야 젊은 용사들아
동트는 새아침 태양보다 빛나게
나가자 힘차게 청구용사들.

밟아도 솟아나는 보리싹처럼
우리는 주먹 쥐고 힘차게 자란다.
배우며 일하는 젊은 용사들아
동트는 새아침 태양보다 빛나게
나가자 힘차게 청구용사들.

여기서 ‘주먹 쥐고’라는 것은 국가 변란을 노리는 폭력과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심각한(?) 추궁을 받았다.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폭력의 준비를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끈질긴 심문이었다.

내가 겪은 최대의 곤혹은 이번의 전 수사과정과 판결에 일관되고 있는 이러한 억지와 견강부회였다. 이러한 사례를 나는 법리해석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권력 그 자체의 가공할 일면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는 특정한 개인의 불행과 곤혹에 그칠 수 있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심각한 사회성이 복재(伏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군법회의에서 이 ‘청구회 노래’의 가사를 읽도록 지시받고 ‘청구회’가 잡지사 ‘청맥사’를 의식적으로 상정하고 명명한 이름이 아니냐는 ‘희극적’ 질문을 ‘엄숙히’ 추궁받았다.

언젠가 먼 훗날 나는 서오릉으로 봄철의 외로운 산책을 하고 싶다. 맑은 진달래 한 송이 가슴에 붙이고 천천히 걸어갔다가 천천히 걸어오고 싶다.

▲'청구회 추억' 마지막장ⓒ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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