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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 옛길>에서 ‘봄의 소리’를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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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대관령 옛길>에서 ‘봄의 소리’를 듣다

2016년 2월 두발로학교

강릉이 고향이며 소설 <은비령>의 작가이자 유명한 걷기길 <강릉바우길>을 여는데 큰 역할을 한 작가 이순원님은 <대관령의 봄은 어디에서 오나>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렇게 무릎까지 눈이 빠지는데도 어김없이 대관령에 봄이 오고 있었습니다.눈이 적은 해엔 낙엽 사이를 뚫고 복수초 노란 꽃이 피어나는데 올해는 눈을 헤치고 복수초가 피어났습니다.가만히 보면 대관령의 봄은 눈 속 얼음밭에서부터 오는 것 같습니다.대관령 부근에 살고 강릉에 산다고 봄의 귀한 들꽃을 다 보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산길을 걸어야만 불 수 있는 들꽃이 따로 있어서 다른 곳엔 늘 한두 송이 피어나는 바람꽃과 노루귀가 온밭 가득 피어있고, 어느 곳엔 얼레지가 그런 모습으로 군락지어 피어나 있습니다."

두발로학교(교장 전형일, 언론인)는 2월 제47강으로 <대관령 옛길>을 걷습니다. 2월 27일(토) 당일로, 우리나라 대표적인 옛길인 <대관령 옛길>을 걸으며 대자연 속에 봄이 오는 속삭임을 들으려 합니다.

▲<대관령 옛길>은 ‘바람과 풍차의 언덕’ 선자령 입구에서 시작된다. ⓒnuboro

<대관령 옛길>은 강원도 영동과 영서를 이으며 영동지방의 관문 역할을 하던 곳으로, <강릉바우길>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예부터 이 길을 오르내리던 수많은 조상님들의 애환이 서린 현장입니다. 또한 천년 역사의 강릉단오제 시발지이며 백두대간의 빼어난 경관과 금강송 군락의 수려한 풍광을 맛볼 수 있는 길입니다.

신사임당이 어린 율곡의 손을 잡고 친정어머니를 그리며 걸은 길이고, 율곡의 친구인 송강 정철도 이 길을 걸어 <관동별곡>을 쓰고, 김홍도는 이 길 중턱에서 대관령의 경치에 반해 그림을 그렸던, 유서깊은 옛길입니다.

▲대관령 아흔아홉 구비가 세상을 영동과 영서로 갈랐다. Ⓒ두발로학교

[대관령] 832m. 강원도 강릉시와 평창군의 경계에 있는 고개. 고개의 총연장이 13km나 되며, 고개의 굽이가 99개소에 이른다고 한다. 서울과 영동을 잇는 관문이며, 옛 영동고속도로가 통과한다. 대관령을 경계로 동쪽은 오십천이 강릉을 지나 동해로 흐르며, 서쪽은 남한강의 지류인 송천이 된다. 이 일대는 황병산, 선자령, 발왕산 등에 둘러싸인 분지로, 고위평탄면 지형을 이룬다. 기후는 한랭다우지역으로 한국에서 가장 먼저 서리가 내리는 지역이다. 특히 겨울에 눈이 많이 내려 스키장이 들어서기에 좋은 조건이다. 연평균 기온은 6.1℃, 연강수량은 1,450mm이다. 고랭지 채소 및 씨감자의 주산지이며 목축업이 발달해 있다. 산 정상에 서면 대관령의 광활한 초원과 강릉의 맑은 동해바다, 백두대간의 웅장한 산세와 마주할 수 있다.
옛 영동고속도로가 지나는 대관령 고갯마루는 널찍한 휴게소가 양편으로 자리잡아 늘 인파로 북적대던 곳이다. 본래 대령(大嶺)이라 하여 아흔아홉 구비가 세상을 영동과 영서로 갈랐다. 아흔아홉 구비라 함은 정확한 헤아림이 아니라 다만 옛날부터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말이다. <증보문헌비고> ‘여지고’의 관방 편에, "<지지(地誌)>에 이르기를, '대관령은 강릉부 서쪽 40리에 있다. 산맥이 함경도의 검산(劍山)과 분수령에서부터 본도(本道)로 들어와서 철령, 추지령, 금강산이 되고, 또 금강산에서부터 미시파령, 설악산, 소동라령, 오대산을 거쳐 이 고개가 되는데 천여 리에 가로 뻗치었다. <한지(漢志)>에서 이른바 단단대령(單單大嶺)이라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여러 고개는 모두 산등성이가 길이 열린 곳과 서로 이어졌는데 이 고개가 더욱 험준하여 그 높이가 30리나 된다. 옛날에는 관방(關防)을 두고 목책을 설치하였는데 강릉의 여러 고을을 관동이라 칭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개 아래에서부터 산허리로 구불구불 이어져 모두 50여 구비를 거쳐 관방에 도달한다' 하였다"고 실려 있다. 내륙과 해안이 서로 만나 발길을 멈추는 곳이다. 지금은 고즈넉하고 한가로운 모습으로 등산객과 관광객들만 지나는 고개이다.
'대관령'이라는 지명을 이 지역 사람들은 '대굴령'이라고도 부른다. 고개가 험해 오르내릴 때 ‘대굴대굴 구르는 고개’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 '대굴령'을 한자로 적어 '대관령'(大關嶺)이 되었다 한다.
대관령 개척의 선구자는 고형산(高荊山, 1453~1528)이다. 대관령 고갯길은 옛날에는 오솔길이었으나, 조선조 중종 때 고형산이 사재를 털어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넓혀 놓았다. 강릉대 장정룡 교수의 <대관령문화사>(동해안발전연구회, 1996)에 따르면, 중종 6년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고형산이 민력을 동원하지 않고 몇 달 만에 대관령을 개척하여 병자호란 때 주문진으로 상륙한 청군이 이 길로 한양을 쉽게 침범하였으므로 인조가 대노하여 고형산의 묘를 파고 이른바 부관참시했다는 종래의 전설은 아무래도 믿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장 교수는 고형산을 대관령 개척으로 동서 교류의 새 역사를 이룩한 인물로 결론짓는다.

▲쌓인 눈 속에서도 어김없이 봄은 오고 있다. Ⓒ두발로학교

[선자령(仙子嶺)] 1,157m.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도암면의 경계를 이루는 선자령은 백두대간의 주능선에 우뚝 솟아 있다. 산 이름을 '산'이나 '봉'이 아닌 선자령으로 부르게 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옛날 기록에 의하면 여러 가지 이름으로 표기하고 있다. 〈산경표(山經表)〉에는 '대관산(大關山)'이라 하고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와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에는 그 아래 보현사의 이름에 따라 '보현산(普賢山)'이라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보현사에 관한 기록을 전하는 〈태고사법(太古寺法)〉에는 '만월산(滿月山)'으로 적혀 있다. 보현사에서 보면 선자령이 떠오르는 달로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것으로 추정된다. 선자령은 해발 840m인 대관령의 북쪽에 솟아 있는 산으로, 대관령에서 약 6km밖에 되지 않아 산행이 힘들지 않고 겨울철 적설 등반지로 적합하다. 이 능선길은 적설기와 신록기가 판이하게 달라진다. 적설기에는 많은 눈에 덮여 은세계를 이루어 황홀하고, 신록기에는 새로 자라난 연녹색의 초원에 야생화가 만발하여 화원을 이루고 있다.
대부분 산의 봉우리는 ‘산’ ‘봉’ ‘대’로 불리고, 고개는 ‘령’ ‘현’ ‘치’ ‘재’로 불린다. 그런데 선자령은 산의 봉우리인데 ‘령’으로 이름 붙여졌다. 이 지역의 지형이 완만하고 다른 길과 만나는 지점이기에 그렇게 불리고 있는 것 같다. 정상석의 뒤쪽을 보면 선자령은 옛날부터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도암면을 있는 고갯길이었고, 대관산(<산경표> 기록), 보현산(<동국여지지도>와 <사탑고적고> 기록), 만월산(보현사에 관한 기록을 전하는 <태고사법> 기록으로, 보현사에서 보면 선자령이 떠오르는 달로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됨)이라고도 불리었다고 한다. 선자령에는 한 가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계곡이 너무 아름다워 선녀들이 자식들을 데리고 와 목욕을 하고 놀다가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선자령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신사임당이 어린 율곡의 손을 잡고 걸었던 길. 반정이다. Ⓒ두발로학교

이날 <대관령 옛길> 걷기는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상행휴게소에서 시작합니다. 등산로 안내도를 지나, 백두대간의 선자령길과 함께 2km쯤 완만하게 오르다보면 2km쯤 지점에서 통신탑을 만나며 바로 국사성황당 갈림길에 이릅니다. 여기서 선자령길을 빠져나와 오른쪽 아름다운 숲길로 접어듭니다. 바로 <대관령 옛길>입니다. 길은 계속 내리막이고 약 2km 가면 반정입니다. 대관령 옛길의 절반쯤 된다는 반정전망대에서 휴식을 취한 후 내려가다 보면 옛 주막터를 지나 어흘리의 우주선화장실을 만납니다. 반정에서 약 5km 지점에 어흘리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우측으로 빠져 계곡을 건너 환상적인 계곡길을 1.3km쯤 걷다보면 대관령박물관입니다.

이날 걷기는 약 10.3km를 충분한 휴식시간 포함, 약 4시간 30분 동안 걷습니다. 코스는 초입의 약 2km, 느슨한 오르막을 지나면 계속 내리막이어서 큰 어려움 없이 대관령의 대자연을 즐길 수 있습니다.

▲대관령의 힘, 금강송 군락 Ⓒ팅커벨

[강릉단오제]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 단오는 음력 5월 5일로 ‘높은 날’ 또는 ‘신 날’이란 뜻의 수릿날이라고도 한다. 강릉단오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축제로, 마을을 지켜주는 대관령 산신을 제사하고, 마을의 평안과 농사의 번영, 집안의 태평을 기원한다. 강릉단오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매년 3, 4, 5월 중 무당들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3일동안 굿을 벌였다는 남효온(南孝溫)의 문집(<추강냉화(秋江冷話)>) 기록과, 1603년(선조 36년)에 강릉단오제를 구경하였다고 기록한 허균(許筠)의 문집(<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등이 있다.
마을사람들은 단오제를 드리지 않으면 마을에 큰 재앙이 온다고 믿어 대관령서낭당에서 서낭신을 모셔와 강릉시내의 여서낭신과 함께 제사를 드리는데, 대관령산신은 김유신 장군으로 전해지며, 단오제에서 주체가 되는 서낭신은 범일국사이고, 여서낭신은 강릉의 정씨처녀로 전해진다.
단오제는 신에게 드릴 술을 담그면서 시작된다. 대관령산신당에서 제사를 올리고 신성시하는 나무를 모시고 내려와 국사성황당을 거쳐 홍제동에 있는 국사여성황당에 모셨다가 행사 전날 저녁 영신제를 지내고 남대천 백사장에 마련된 제단에 옮겨 모심으로 강릉단오제의 서막을 올린다. 단오장에서는 5일간 아침, 저녁으로 제를 올리고 굿을 하며 농사의 번영과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며 모두 한마음이 되어 제를 올린다. 이밖에 양반과 소매각시, 장자머리, 시시딱딱이가 가면을 쓰고 말없이 관노가면극놀이를 하거나 그네뛰기, 씨름, 농악경연대회, 창포머리감기, 수리취떡먹기 등 다양한 행사가 개최된다. 단오 다음날에 신성시하는 나무를 태우고 서낭신을 대관령으로 모시면서 단오제는 막을 내린다.
강릉단오제는 제관의 의해 이루어지는 유교식 의례와 무당들의 굿이 함께 거행되는 동해안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마을축제로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고 난장이 크게 벌어진다. 특히 관노가면극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무언극으로 대사없이 몸짓으로 관객을 웃기고 즐겁게 한다. 민간신앙이 결합된 우리나라 고유의 향토축제이며, 지역주민이 화합하고 단결하는 협동정신을 볼 수 있다.
강릉단오제는 그 문화적 독창성과 뛰어난 예술성을 인정받아 2005년 11월 25일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재되었다.

[국사성황당] 해마다 봄날이면 무려 한 달 보름이나 이어진다는 강릉단오제. 일찍이 강릉의 소설가 허균(1569~1618)은 "해마다 오월이면 대령의 신을 모셔다가 갖은 놀이로 기쁘게 해드린다"고 하였다.
강릉은 본래 무천이라는 제사를 지내던 동예의 땅이다. 무천이 시월 상달에 올리는 추수감사제라면 단오제는 모내기를 끝낸 뒤에 곡식의 파종과 성장을 기원하는 잔치다. 온갖 씨앗을 잉태한 대지의 신들에게 바치는 생명의 축제, 강릉단오제는 그 연원을 모를 정도로 내력이 오래 되었다고 한다. 제사의 신은 대관령의 국사서낭신이다. 그는 신라 고승 범일국사(810~889년)로 15세에 중이 되어 당나라에 유학한 뒤 구산선문의 하나인 강릉 굴산사에서 40여 년을 주석하며 사굴산파의 개조가 되었다. 처녀가 표주박에 담긴 해를 마시고 낳았다는 탄생설화, 왜구가 침략할 적마다 대관령에 올라 술법으로 물리치는 등 강릉 지방에는 그에 관한 많은 전설이 구전된다.
국사성황당은 죽은 뒤에 강릉과 영동 지방의 수호신이 되었다는 범일국사를 서낭신으로, 김유신을 산신으로 모시고 있다. 김유신은 허균의 <성소부부고>에 "그는 어려서 이곳에 와 수련하였는데 산신이 검술을 가르쳤고, 그의 칼은 명주 남쪽 선지사에서 만들었는데 90일 만에 완성되어 광채가 달빛을 능가했다. 장군이 그 칼을 차고 고구려를 평정했으며 죽어 대관령의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강릉 시내에 국사여서낭신이 있다. 강릉의 처녀로, 옛날 강릉 남문동의 정씨 집안에 예쁜 딸이 하나 있었다. 하루는 정씨의 꿈에 대관령 서낭신이 나타나 그 집의 사위가 되겠노라고 청했다. 그러나 정씨는 사람이 아닌 귀신을 사위로 삼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얼마 후 정씨의 딸은 대관령 서낭신의 시자인 호랑이에게 물려가고 말았다. 사람들이 서낭당에 가보니 정시의 딸은 이미 죽어 있었다. 이에 사람들은 그녀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 대관령 여서낭신으로 모시고, 해마다 그녀가 호랑이에게 물려간 4월 15일이면 서낭신을 여서낭사에 모셔가 합위시키고 제사를 올렸다. 이 행사는 지금도 강릉단오제 기간 중에 이루어진다. 음력 삼월 스무날이면 신주(神酒)를 빚는 일로 시작하여 단오가 지난 음력 5월 초이래까지 계속된다. 한편에선 왁자지껄 난장을 치고 단오굿과 풍어굿을 올린 뒤 관노가면극 같은 탈놀음도 곁들인다.

[어흘리(於屹里)]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에 있는 리(里). 1914년 가마골, 문안, 반젱이, 굴면이, 제민원 등을 합쳐 만든 행정리이다. 어흘리에는 대관령을 끼고 있는 마을로 산 능선들이 이어져 있고, 삼포암, 초막골, 제멩이 등의 경치 좋은 계곡이 많다. 대관령이 끝나는 지점에 있어 영동과 영서를 잇는 교통 요지이다. 조선시대에도 관도(官道)로 관리되었으며, 길을 따라 역(驛)이 있었다. 자연마을로 가마골, 문안, 반쟁이, 굴면이, 제멩이 등이 있다. 가마골은 마을이 큰 가마솥에 숫가락을 꽂아놓은 것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했고, 반젱이는 조선시대 구산역과 횡계역의 중간 지점이라는 뜻의 반정(半程)이 변한 말이다. 굴면이[屈免]는 대관령을 다 넘어 내려와 '구르는 것을 면했다'라는 데서 이처럼 불린다. 조선시대 관원들의 숙소인 제민원이 있었다는 제멩이에는 옛 관도를 정비한 대관령 옛길 등산로의 입구가 있으며, 가마골과 대관령 반정에서 흘러 내려오는 계곡으로도 유명하다. 2003년 개관한 시립박물관인 대관령박물관이 있다. (자료 출처 : 강릉시, 문화재청, 한국관광공사, 네이버지식백과, 백두대간학교 등)

▲봄이 오는 속삭임 Ⓒ두발로학교

두발로학교 제47강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2월 27일(토요일)>

07:00 서울 출발(출발시각을 늦춥니다. 0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두발로학교> 버스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47강 여는 모임
09:00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상행휴게소 도착, 걷기 출발
11:00-11:30 반정 전망대 도착, 간식타임
13:30 대관령박물관 도착
14:00 횡계에서 늦은 식사 겸 뒤풀이(막걸리를 곁들인 오삼불고기요리)
15:00 서울로 출발. 제47강 마무리모임

▲<대관령 옛길> 걷기 안내도 Ⓒ두발로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방한 등산복/배낭/등산화), 방한모, 장갑, 스틱(필수), 아이젠(필수), 스패츠, 버프(얼굴가리개), 무릎보호대, 보온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여벌 양말, 간식(필수),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전형일 교장선생님은 언론인으로 오랜 동안 일간지 기자 생활을 했습니다. 현재 인터넷 언론 매체를 운영중이며, 원광대학교에서 동양철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틈틈이 여기저기 <걷기의 즐거움>에 몰입하며 <걷기의 철학>에도 빠집니다.

교장선생님은 <두발로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걷기>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걷기 코스의 명소들이 생겨나고 <걷기 동호회>도 부쩍 늘어나고 있습니다. 각 지자체들이 고유의 <길>을 경쟁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인간이 한동안 잊었던 <걷기의 가치>를 되살리고 걷기를 통해 몸과 마음의 즐거움과 건강을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직립보행(直立步行) 이후 걷기를 멈춘 적은 없습니다. 최소한 집안이나 사무실에서도 걸었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걷기가 새삼스럽게 각광을 받는 이유가 뭘까요.

성경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길을 본받는데, 길은 스스로 그러함(자연)을 본받는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길>에서 이처럼 종교적 진리나 철학적 깨달음 같은 거창하지는 않지만, 길을 걸으면서 내면의 기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루소는 <고백록>에서 “나는 걸을 때만 명상에 잠길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나의 마음은 언제나 나의 다리와 함께 작동한다”고 말했습니다. 걷기의 리듬은 사유의 리듬을 낳는다고 합니다. 경치를 구경하며 생각할 수 있고, 미지(未知)의 것을 기지(旣知)의 것으로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레베카 솔닛의 저서 <걷기의 역사>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의사가 둘 있다. 왼쪽 다리와 오른쪽 다리 말이다. 몸과 마음이 고장날 때 나는 이 의사들을 찾아가기만 하면 되고, 그러면 다시 건강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가장 경제적이고 신체에 부담이 적은 운동을 택한 것이 <걷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는 속도와 능률이 지배하는 세상에, 목적에 대한 부담을 덜고 걷기를 통해 느림의 미학으로서 세상을 보고 싶은 것은 아닐까요.

사람마다 걷기를 통해 찾고자 하는 의미와 기쁨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모두 함께 찾으려는 것은 <몸과 마음의 건강> <새로운 경관> <자연을 즐기는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의 세 가지가 아닐까요.

<두발로학교>는 <아름다운 길 걷기> 전문학교입니다. <두발로학교>에서 세 마리 ‘토끼몰이’를 해보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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