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의 옥고를 치르고 우리들 앞에 나타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그의 변함없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서 출판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었을 때 그의 조용하면서도 견고한 정신의 영역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 긴 암묵의 세월을 견디게 하고 지탱해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의 20년과 비교한 우리들 20년은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스스로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신 선생의 엽서를 가장 먼저 세상에 알린 김정남 <평화신문> 편집국장(김영삼 정부 청와대 교육문화 수석 역임), "20년 징역을 살고 쉴 틈도 없이 강의를 맡"긴 성공회대학교의 이재정 총장(현 경기도 교육감), 그리고 위의 이영윤 선생 등이 그런 분들이다.
지난 2006년 8월, 신영복 교수의 정년 퇴임을 맞아 선후배, 제자 등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63명이 함께 쓴 <신영복 함께 읽기>(돌베개 출판사)를 바탕으로 신영복 저작의 탄생 배경과 과정을 알아본다.
신영복 선생의 글을 가장 먼저 세상에 알린 것은 1988년 5월에 창간된 가톨릭계 주간신문 <평화신문>이었다. 그해 여름 우연한 기회에 신 선생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게 된 김정남 편집국장은 읽고 난 후의 느낌을 한마디로 '감동'이었다고 표현한다. 특히 감동을 받았던 내용은 1985년 8월에 '계수님께' 보낸 다음과 같은 구절이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섭씨 37도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 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더욱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옳게 파악되지 못하고 말초감각에 의하여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증오의 감정과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혐오에 있습니다."
김정남 편집국장은 그러나 신 선생의 글을 <평화신문>에 싣기에 앞서 다소 망설였다고 고백한다. "감옥에서 보낸 편지, 그것도 언제 나올지 모르는 무기수의 글을 싣는다고 짜증 섞인 항변은 없을는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1988년 7월, 신 선생의 글이 한 개 면에 걸쳐 소개되자 독자들의 호응이 너무나 커서 당초 2회 정도 연재 계획이 4회로 늘어난 것이다(당시 경향신문 초대 노조 전임이었던 나도 신 선생의 글을 읽고 느꼈던, 잔잔하지만 깊은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신 선생은 이 연재 후 석방됐다). 그랬는데도 연재를 계속하기를 바라는 독자들의 요구가 이어졌고 그것이 마침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책의 제목을 짓고 서문을 쓴 이는 김정남 선생이었다(1988년 9월 5일 햇빛출판사에서 출간됨).
김정남 선생은 "500년 전 율곡 선생이 '글이란 모름지기 좋은 울림(善鳴)'이어야 한다고 한 것은 바로 신 선생의 글을 두고 한 말씀이 아닐까 싶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감동이었고, 그래서 그의 감옥살이가 차라리 부럽기까지" 했으며 "그토록 '좋은 울림'을 덮어두기엔 너무도 아까웠다"고 술회한다. 그래서 당초의 망설임을 덮고 연재를 결정하게 됐다는 것이다.
1993년, 신 선생이 감옥에서 보낸 엽서 230장을 원본 그대로 영인한 <엽서>가 출간됐다('너른마당' 출판사). 사연은 이랬다. 이영윤을 비롯한 신영복의 친구들은 당초 "그의 양심과 고뇌를 나누어 받는 심정으로 그의 엽서를 한 장씩 나누어 가졌다...그러다가 생각했다. 이렇게 한두 장씩 나누어 가져갈 것이 아니라 원본은 본인에게 돌려주고 우리는 이 엽서의 영인본을 만들어 한 권씩 나누어 가졌으면 어떨까,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그러나 저자가 내키지 않아 할 뿐 아니라 또 다른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지금껏 미루어 오다가" 5년 만에 출판이 된 것이다.
맨 위의 인용문은 이영윤 선생이 친구 대표로 쓴 <엽서>의 서문 '우리 시대의 고뇌와 양심'의 첫 대목이다. 1988년 햇빛출판사가 간행한 <사색>에는 1976년 이후의 글만 수록됐다. <엽서>에는 1969년 1월,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68년 여름 구속 당시 그는 현역 육군 중위였다) 보낸 '고성(古城) 밑에서 띄우는 글'을 비롯해 신영복의 옥중 서한 거의 전부가 수록돼 있다. (특히 한때 잃어버린 것으로 알았던 '청구회 추억'이란 글이 수록됐다. 이 글은 1966년 봄부터 그가 구속될 때까지 2년여간 12,3세 전후의 가난하고 어린 친구들 여섯 명과의 교우에 관한 것으로 69년 당시 그는 죽음을 앞두고 그 교우를 회고하는 글을 남겼다. '청구회 추억'은 다음 기회에 소개하겠다.) 1998년 8월 15일 돌베개 출판사가 펴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엽서>의 텍스트판이라고 할 수 있다(<엽서>는 2003년 돌베개에 의해 재출간됐다).
신영복 선생과 프레시안, 그리고 <강의>
신영복 선생은 프레시안 창간(2001년 9월)부터 2008년 초까지 프레시안 고문을 맡았으며 창간 첫 날인 9월 24일부터 2003년 4월 7일까지 1년 6개월여 166회에 걸쳐 '신영복 나의 고전 강독' 연재를 했다. 그리고 이 연재를 바탕으로 2004년 12월 <강의>란 제목의 책이 출간됐다. 신 선생의 이 연재는, 어려웠던 프레시안 초기에 독자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읽을거리로 자리 잡아 프레시안의 골격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신 선생은 프레시안 창간 5주년인 2006년에는 '정언천리(正言千里: 바른 말이 천리 간다)'란 글씨를 써주시기도 했다.
신 선생을 프레시안 고문으로 모시고 '고전 강독' 연재를 기획했던 이근성 상임고문(초대 대표)은 신 선생이 성공회대학으로 가게 된 과정에 대해 "이영윤 선배를 비롯한 친구 분들은 신 선배가 더 이상 힘든 일을 겪지 않고 사회에 안착하기를 거의 '조급증' 수준으로 갈망"하였고 "이런 염원이 있어 다음 해 신학기부터(89년 3월 6일) 성공회대에서 '강사' 신분으로 강의를 시작"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이와 관련해 신 선생을 성공회대로 모신 이재정 현 경기도 교육감(전 성공회대 총장)은 "1988년 8월 유난히 무덥던 여름, 정동에 있는 세실 레스토랑에서 (고교 3년 선배인) 이영윤 당시 세실극장 고문님의 주선으로" 신 선생을 처음 만나게 됐고 "신영복 선생님에게 이 역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신 선생님이 감옥에 가시기 전 그 '자리'를 만들어드리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말한다.
이재정 전 총장은 "성공회대는 신영복 교수님과 함께 그저 하나의 대학의 길을 걸어온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 시대와 이 역사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것은 다른 길, 다른 대학, 다른 교육, 다른 이해를 추구한 것이었다...이것이 신영복 교수에 대한 이 역사의 보답 중 한 부분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한다.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숲>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한편 신영복 선생의 국내, 해외 기행문을 엮은 <나무야 나무야>(1996년) <더불어숲>(1998년)은 당시 이근성 상임고문이 재직했던 중앙일보 연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 과정에 대해 이 상임고문의 글을, 다소 길지만 인용한다.
"신영복 교수가 성공회대에서 강의를 하고는 있었지만 전쪼회를 비롯한 주위 분들은 그가 좀더 안정적인 신분으로 일하기를 바랐다. 신 교수는 아직도 사면복권이 안 된 상태여서 대학에서도 '강사' 직 이상을 보장받을 수가 없었다.
사면복권이 우선 해결해야 할 과제여서 이 일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영윤 선배 등이 주도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이들은 그 방법의 하나로 중요 신문 하나를 선정해 신 교수의 글을 연재해 보기로 하였다. 많은 사람들에게 신 교수의 진면목을 알리는 게 우선 중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몇 개의 신문을 놓고 논의를 벌였다. 어디에 연재해야 사면복권에 더 도움이 될까. 그때 의견이 모아진 게 중앙일보였다.
그때까지도 글쓰기를 사양하는 신 교수를 설득하고 신문사 교섭은 중앙일보 기자였던 내가 맡기로 하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중앙일보에 기획안을 냈지만 그때만 해도 신 교수를 잘 모르거나 안 좋게 생각하는 간부들이 적지 않았다. 분위기가 이상하다 싶으면 얼른 회수하고 다시 내기를 거듭한 끝에 기획안이 채택되었다. 신 교수가 1년간 주 1회 국내를 여행하면서, 들려줄 이야기가 잡히는 곳에서 엽서를 띄우는 형식의 기획이었다(95년 11월-96년 8월 연재: 편집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중앙일보도 사장을 비롯해 만족하는 분위기였으며 신 교수의 사면복권이 잘 되도록 도와주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이 글들을 모은 것이 <나무야 나무야>란 책이다.
국내 기행의 성과를 바탕으로 다음 해 세계기행을 준비하게 됐다(97년 1년 동안 '새로운 세기를 찾아서' 제하로 연재: 편집자). 세계기행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신 교수가 20년을 격리당한 후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하는데다, 이역만리 낯선 땅에 단지 며칠을 머물고 일주일에 한 번씩 글을 써낸다는 것이 보통 일인가. 그것 못지않게 어려운 일은 여권을 내는 일이었다. 외교부가 신 교수의 신분상 한 달 기간의 단수여권밖에 내줄 수 없다는 바람에 취재를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여권을 다시 내기에 바빴다.
지금도 나는 그 고생을 하면서도 1년간 묵묵히 연재를 맞춰준 신 교수에게 죄송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을 함께 갖고 있다. 이 글들을 모은 것이<더불어숲>이란 책이다. 그 후 신 교수가 사면복권을 받고 정식 교수로 임용될 때 전쪼회 쪼다들은 모두 자기 일같이 좋아했다."(신영복 선생은 1998년 3월 13일 사면복권 되어 5월 1일 성공회대학교 정식 교수로 임명됐다.)
더불어숲학교 신영복 교장선생님
<더불어숲>은 당초 두 권으로 출간됐으나(1998년 6월 29일) 2003년 4월 10일 개정판을 내면서 한 권으로 바뀌었다. 2002년 안식년을 맞은 신 선생은 그해 겨울, 오대산 자락 내린천(內麟川) 상류에 자리한 미산계곡의 개인산방(開仁山房)에 머무르며 개정판 작업을 했다. 비조불통(飛鳥不通), 새가 아니면 넘지 못한다는 계곡의 원시미(原始美)가 압도하는 곳이었다.
개인산방은 신영복 선생의 서울상대 3년 후배인 신남휴 선생이 머무는 곳이었다. 신남휴 선생은 해군 소위로 복무하던 1968년 8월 신영복 선생과 같은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돼 그와 함께 1년 여간 옥중 동거를 한 사이였다. 사업가로 활동하던 신남휴 선생은 1990년대 중반 미산계곡에 개인산방을 지어 이곳에 은거하고 있었다. 내린천을 따라 아래위로 십여 리씩을 나가야 마을을 만나는 외진 곳이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십여 리 산판 길을 걸은 뒤 도르래에 매달려 내린천을 건너야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2001년 개인산방을 처음 찾은 신영복 선생은 이후 틈 날 때마다 붓 한 자루, 책 몇 권을 배낭에 넣고 이곳을 찾았다. 2002-03년 겨울에는 오랜 기간 머물렀다.
두 신 선생은 '개인산방을 좀 더 의미 있게 사용할 방도가 없을까'를 고민하다가 이곳을 조그마한 담론(談論)의 공간으로 만들어보자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개인산방에는 30여명이 숙식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더불어숲학교'라는 이름의 조그만 문화학교. 교장은 신영복, 운영은 신남휴, 이근성이 맡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2003년 10월 유재원 외국어대 교수의 '다시 왜 신화인가-21세기에 부는 신화 바람'을 주제로 첫 '더불어숲학교' 강의가 시작됐다. 이후 더불어숲학교는 2008년까지 매월 한 차례씩 열렸다. 입소문을 타고 전국에서 몰려든 30여명이 1박2일간 강의도 듣고 자연탐사도 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꿈꿨다. 한여름에는 텐트를 치고 작은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신남휴 선생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시대를 고뇌하며 아픔을 함께 했던 각 분야의 원로 지성들을 모셔다 성찰과 모색의 시간을 갖고 있다. 별이 쏟아지는 밤이면 모닥불 피워놓고 물소리 들어가며 삶의 진솔한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한다. 울창한 숲도 한 알의 씨앗에서 시작된다는 소박한 믿음을 가지고서."
마지막 저서 <담론>
책의 서문에서 선생은 "나는 그동안 책을 여러 권 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책을 집필하지 않았다고 강변합니다. 옥중에서 편지를 썼을 뿐이고, 여행기를 신문에 연재했을 뿐이고, <강의>와 이 책처럼 강의를 녹취하여 책으로 냈을 뿐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어 "'책'이 강의실을 떠나 저 혼자서 무슨 말을 할지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책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하면 모든 텍스트는 언제나 다시 읽히는 것이 옳습니다. 필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는 순전히 독자의 몫이라는 뜻이리라.
그는 5월 9일 <한겨레> 인터뷰에서 "앞으로 계몽주의적인 노인 권력이 바탕에 깔린, 그런 글쓰기는 지양"돼야 한다면서 "잘난 사람들이 하는 거거든요. 계급적 편견이라고 봐야 되죠. 자기 가치를 기준으로 타자를 끌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나아가 이른바 '멘토'란 계몽주의의 변형으로서 "지금 젊은 사람들이 앞으로 20-30년 후에 살아갈 세계에 대해서 20-30년 전의 기준으로 제시한다는 자체가 오히려 진보를 방해하는 것 아닌가요?"라고 반문했다.
그는 "사표나 스승이라는 건 당대에는 존립할 수 없는 겁니다...집단지성 같은 게 필요하고 집단지성을 위한 공간을, 그 진지를 어떻게 만들 건가가 앞으로의 지식인들이 핵심적으로 고민해야 할 과제"라고 지적했다. "차이라는 건 단순히 공존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고, 자기 변화의 시작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담론>은 신영복 선생이 좋아하는 글귀 '언약(言約)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로 끝을 맺는다. 지난 주말 선생의 영결식장에는 이 글귀를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 이제 그의 말처럼 '필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해야 할 때가 됐다.
'사람'과 '사랑'을 일생의 화두로 삼았던 신영복 선생(강준만 교수의 지적). 이제 그는 가고 없지만 '사랑이 넘치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임무는 우리의 과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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