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대만(타이완)에서는 총통 선거가 치러졌다.
야당인 민진당(民進黨) 차이잉원(蔡英文) 후보가 집권당 국민당 주리룬(朱立倫) 후보를 300만 표가 넘는 압도적인 표차로 물리치고 대만의 제14대 총통으로 당선되었다. 8년 전 국민당에게 빼앗겼던 정권을 되찾은 것이다. 동시에 진행된 입법위원(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총 113석 중 68석을 석권해 35석에 그친 국민당을 크게 물리치고, 행정과 입법을 동시에 장악하는 전면적 집권의 목표를 달성했다.
이번 선거로 대만은 물론 중화권 최초로 여성 최고 지도자가 선출됐다. 또 지난 2000년, 51년간의 국민당 1당 시대를 마감했던 민진당이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두 번에 걸친 민주적 정권교체의 틀이 갖춰졌다.
대만의 대선이 주목을 받는 것은 우선적으로 양안 관계에서 약자의 처지에 놓인 대만이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양안 경제 협력의 수준과 범위를 어떻게 조정할 것이냐가 결정되는 중요한 계기이며, 이러한 결정에 의해 대만의 외교 공간은 물론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대만 독립을 당의 강령으로 삼고 있는 민진당의 재집권
지난 2000년 대선에서 '대만 독립'의 기치를 걸고 집권에 성공한 민진당은 과격한 독립 행보를 보였고 양안 관계는 거의 단절 상태에 돌입했다. 양안 관계의 경색이 대만의 안정과 발전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중국과의 안정적인 관계 유지가 최선의 길임을 역설하면서 2008년 국민당은 정권을 되찾았었다.
그러나 마잉주(馬英九) 총통의 친중 노선, 즉 중국과의 동반 성장 노선은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양안 관계의 안정을 도모했다는 측면과 양안 교류의 규범화, 제도화 측면에서는 그 성과를 부인할 수 없음에도 경제 문제에 대한 실정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국민당 정부의 실정으로 돌리기는 어렵지만 1%대의 경제 성장과 중국 경제에 대한 지나친 의존과 종속, 이로 인해 경쟁력을 잃어가는 대만의 기업들은 고용 창출이 어려워져 경제의 소생이 불투명해졌다. 더 이상 정부에 기댈 곳이 없어진 대만의 청년 세대는 2014년 3월 '양안 서비스 무역 협정'의 체결에 반대해 입법원을 점거하는 '해바라기 학생 운동(太陽花學運)'을 일으켰다. 그 정도로 마잉주 정부는 민심을 얻지 못했다.
이들은 이번 선거를 통해 지나친 양안 대결로 어려움을 겪었던 2000년부터 2008년까지의 민진당 천수이볜(陳水扁) 총통 시기, 그리고 지나친 친중 정책으로 민중과 괴리된 2008년부터 2016년까지의 국민당 마잉주 총통 시기에 대한 새로운 선택지로 민진당의 차이잉원을 총통으로 선출했다.
문제는 차이잉원 총통이 비록 과거와 같은 급진 독립 정책은 아니더라도 본질적으로 대만의 독립을 추구하는 민진당 후보이기 때문에 기존의 국민당과는 다른, 상대적으로 독자성이 강한 정책을 펼치면서 경제 실정으로 유리된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는 데 있다. 차이잉원은 국민당의 실정 덕분에 '통일과 독립'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색채를 충분히 배제한 중에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선거 과정에서 이 문제가 크게 쟁점화 되지 않았다고 해서 이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중국 측은 차이잉원에 대한 의구심을 숨기지 않으면서 어떠한 형태의 독립 추구 행위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92 컨센서스(共識)', 즉 '하나의 중국을 전제로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중국을 정의하는 원칙'에 대한 수용이 전제되어야만 양안 관계의 안정이 확보될 수 있다고 당선자를 압박하고 있다. 대선을 불과 2달 앞두고 싱가포르에서 거행된 시진핑과 마잉주 간의 회담에서 논의된 핵심 의제가 바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대한 재확인이었다. 중국은 바로 '92 컨센서스'가 양안 평화와 교류의 마지노선임을 천명한 것이다.
차이잉원은 일단 '92 컨센서스'에 대해서는 확인을 보류한 채 '현상 유지'를 대중국 정책의 핵심으로 제시하고 있다. 차이잉원이 주장하는 '현상 유지'는 '하나의 중국'을 전제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상호 독자적인 세력이 중국과 대만을 나누어 통치하는 분치(分治)라는 독립적 현상 유지에 더욱 가깝다.
중국은 차이잉원의 이러한 주장이 종국적으로는 독립주의적 행보를 지향할 것이라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중국은 차이잉원 당선자가 실제로 리덩후이(李登輝) 총통 시절, 중국과 대만은 특수한 국가 대 국가의 관계라는 소위 '양국론(兩國論)'의 입안자이며, 천수이볜 정권 때는 중국 사무를 관장하는 대륙위원회(大陸委員會) 주임(장관급)을 맡으면서 한 지역 한 국가, 즉 '일변일국론(一邊一國論)'을 만든 실제 기획자였음에 주목하고 있다.
물론 차이잉원은 경선 과정에서 자신은 "지난 20여년에 걸친 양안 교류의 성과를 인정하며, 일관되고 예측 가능하며, 지속적인 양안 관계의 유지", 즉 소통하며, 도발하지 않고, 의외성이 없는 양안 관계를 견지하겠다고 천명했다.
차이잉원의 현상 유지론, 성공할까?
5월 20일 정식 취임까지는 아직 4개월이 남아있다. 민진당에 과거와 같은 급진적 독립주의자들이 많이 이탈하긴 했지만 차이잉원이 민진당의 이념 지향적인 분위기를 어떻게 추스르고 중국과 관계를 설정할 것인가가 큰 숙제로 떠올랐다.
또 차이잉원의 입장에서 보면 선거 과정에서 계속 강조한 외교 공간의 확대를 통한 독자성의 확보, 즉, 미국과의 관계 확대 및 일본과의 교류 확대를 어는 정도까지 끌어올릴 것인지도 중요한 문제이다. 특히 독자적 국방 역량의 강화는 미국으로부터의 무기 수입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첨예하다. 여기에 일본과의 협력 확대는 아시아 주도권을 둘러싼 중-일 간의 경쟁과 연결되어 있어 더욱 복잡하다.
미국의 양안 정책은 기본적으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현상을 변화시키는데 반대한다'는 현상유지 정책이다. 대만의 지나친 미국으로의 접근도 미국 입장에서는 미-중 간에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인자이다. 그럼에도 차이잉원은 미국이 주도하는 TPP(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 가입을 천명하고 있으며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작년 5월 미국 방문에서 총통에 당선되면 미국산 돼지고기를 수입하기로 했다는 이면 합의설에 시달리고 있기도 하다.
차이잉원 당선자도 중국의 우려를 알고 있다. 당선 기자 회견에서 중국어로는 "국제적 맹방(국제맹우)"과의 교류 확대라는 표현을 썼지만 영어로는 미국과 일본을 직접 지칭한데서도 그녀의 고민이 읽혀진다.
원하지 않던 민진당 차이잉원의 당선은 중국에게도 많은 고민을 안기고 있다. 차이잉원 정부를 독립 추구 정권으로 몰아붙이자니 '대만 민족주의'를 자극해 더욱 독자성을 강화할 빌미를 주게 될 것이 분명하고, 대만의 국제 생존 공간을 제약하는 외교적 압박 역시 대만의 독자 노선 추구에 대한 명분을 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적어도 대만이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유지하고 있고 자유 민주적인 생활 문화를 가진 사회로 중국과는 다른 사회임을 이해해야 한다. 차이잉원도 689만(56%) 표로 압도적인 득표에 성공했지만 44%의 양안 관계에 불안감을 느끼는 대만인들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향후 정책이 2300만 대만인 전체를 고려하는 정책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속적인 양안 교류의 결정권이 일차적으로는 민진당과 차이잉원에게 있겠지만 대만의 젊은 유권자들에게도 있다. 차이잉원 집권 후 경제가 부진하고 청년 취업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국민당에게 등을 돌렸던 청년 학생 그룹이 민진당에게도 등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표면적인 독립 노선을 추구한다면 이는 또 다른 불안 요소가 될 수 있다.
일단 양안은 치열한 탐색전을 전개할 것이다. 중국과 대만 모두 갑작스러운 큰 변화를 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국 입장에서 보면 국민당 정권보다 민진당 정권이 갈등 소지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섣불리 양안 정책을 조정하기보다는 일정한 관망기를 가질 것으로 보인다.
대만의 입장에서는 중국과의 경제 교류가 여전히 중요하다. 경제 의존도가 40%에 달하고 400만 명이 넘는 중국 관광객이 대만을 찾고 있으며, 150만 명 이상의 대만인이 중국에서 경제 활동을 하고 있다. 과거 천수이볜 총통 시절 중국과의 첨예한 갈등이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미국으로부터도 외면당해 고립을 자초하기도 했다.
최근 우리나라 연예 기획사 JYP의 대만 출신 걸그룹 멤버 저우쯔위(周子瑜)가 중화민국 국기인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를 흔든 것으로 인해 양안이 흥분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만큼 양안문제는 민감하다. 16세 소녀가 풀죽은 모습으로 '하나의 중국'을 언급하면서 사과하는 장면은 작위적이고 안타까웠다.
없어진 국가인 중화민국 국기를 휘두르는 것은 독립주의자와 다름없다는 중국 네티즌과 그러면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五星紅旗)를 흔들어야 하느냐는 대만 네티즌 간의 설전이 뜨겁다. 중국인들도 마음이 상했고 대만 사람들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한 어린 연예인의 행동이 이렇게 정치적으로 해석되고 이용될 만큼 경색되어 있으면 양안 관계의 앞날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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