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최고 지도자 김정은 제1국방위원장이 직접 창단을 지시하고,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세계에 알리는 첨병 역할을 할 것이라는 북한 최초의 걸 그룹 모란봉 악단의 베이징 공연이 돌연 취소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10월 10일 북한 노동당 창당 기념일에 중국이 당 서열 5위인 류윈산(劉雲山) 정치국상무위원을 파견해 화해의 물꼬를 튼 이후 비록 악단의 방중이긴 하지만 경색된 양국 관계의 완화 분위기 조성, 특히 아직도 실현되지 않은 김정은 중국 방문의 단초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1970년대 중미 수교 전야에 펼쳐진 핑퐁 외교에 비견될 만큼 주목을 받았다.
분명히 지난 류윈산 상무위원 방문 시 약속됐을 공연이 양국 간의 특수 관계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취소된데 억측이 난무하고 있다. 중국 관영 통신사 <신화통신>은 "업무 방면의 소통에 문제가 생겨 예정대로 공연을 진행할 수 없다"는 짤막한 성명을 발표했고, 12월 10일 당 중앙연락부장인 쑹타오(宋濤)가 북한 공연단 일행을 접견한 보도를 삭제하는 등 관련 내용에 대한 철저한 통제를 하고 있다.
그러나 상황이 그렇게 단순할 리 없다는 입장에서 각국 매체는 미확인 소식임을 전제로 김정은의 수소폭탄 개발 언급이 중국 측을 자극해 중국 측 고위 인사의 공연 참관이 취소되고, 모란봉 악단 단장이 김정은의 전 애인이었다는 것이 보도되면서 김정은이 격노해 철수 지시를 내렸다는 보도도 나온다. 공연단 단원 두 명이 한국으로 탈출을 시도해 공연이 취소됐다는 설도 있고 중국이 북한에 대한 원유 공급 중단을 위협해 생긴 일이라는 등 많은 추측성 보도가 나오고 있는 중이다.
정확한 사실은 알 길이 없지만 이번 사건을 놓고 몇 가지 사항을 체크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북한이 이번 모란봉 악단의 첫 해외 공연인 베이징 공연을 고도의 정치적 행사로 기획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북한은 이 공연을 기획하면서 주중 북한 대사관을 통해 약 2000명의 중국의 대 북한 우호 인사 및 상징적 인물 그리고 혁명 후대, 북한의 주 중국 기관 간부 및 관련자들을 초대할 계획이었다. 상업적인 의도를 배제했다는 뜻이다.
조선중앙통신사 역시 이번 공연을 통해 중국 관중에게 '북한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논조의 보도를 계속 내보냈다. 그러나 중국의 매체들은 이번 공연을 일반적인 미녀 걸 그룹의 활동쯤으로 가볍게 해석하면서 북한이 의도하는 정치적 의미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 배경이 있었다. 중국 측의 대 북한 우호 분위기 조성의 진실성에 김정은이 근본적인 의심을 품었을 만한 대목이다.
둘째, 중국 내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모란봉 악단의 단장으로 북한 민중들에게 '북한의 떵리쥔(鄧麗君)'이라 불리는 국가 공훈 배우 현송월(玄松月)이 최고 지도자 김정은의 옛 애인으로 부각되면서 북한 당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소위 '최고 존엄에 대한 무례'가 확산될 소지가 생긴 점도 북한으로선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관련 보도가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조기에 수습하지 않으면 북한 국민들의 동요와 민심 수습에 결정적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특히 12월 17일 김정일 사망 4주기를 앞두고 베이징 공연 기간 중 최고 존엄에 대한 오락성 기사가 계속 나온다면 이는 공연을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단순한 문화 공연의 진행이나 취소 문제를 넘어서는 북한 외교의 이중 전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베이징에서 문화 공연을 진행하면서 수소폭탄 개발 발언을 러시아를 통해 세상에 알렸다. 12월 10일, 중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심의된 북한 인권결의안에 대해 러시아와 함께 기권도 아닌 반대표를 던졌음에도 북한은 '중국의 한반도 비핵화' 정책을 무시하고 수소폭탄까지 개발한 핵보유국 북한을 인정해달라는 메시지를 중국에 전달한 것이다. 미국 언론들은 "평양이 베이징의 뺨을 때렸다"는 표현을 했다. 실제로 북한은 모란봉 악단이 평양으로 돌아간 12일, 김정은이 평양의 한 양식장을 시찰하면서 만면에 웃음을 띤 사진을 세계에 전송했다. 공연 취소를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는 것으로 어쩌면 잘 계획된 단계적 전술일 수도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번 사건은 중국에게 쌓였던 불만을 북한이 고도로 기획된 외교 행위로 표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중국의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자주성을 강조하면서, 아직도 중국 방문을 실현하지 못한 김정은이 중국 방문을 구걸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하기 싫다는 의지의 천명이기도 하다. 그동안 중국은 북한이 주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중국 방문을 추진하는 모습을 보이기를 바라 왔다.
또한 핵을 보유하고 있다하더라도 운송 수단인 핵 배낭이 완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수소폭탄 보유에 대한 사실 확인도 어렵지만 적어도 북한은 자신들이 명실상부한 핵보유국이라면서 중국은 물론 미국에도 새로운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중국이 수소폭탄까지 보유한 국가인 북한과 교류를 한다는 의미는 바로 전 세계에 북한의 영향력을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중국이 전략적으로 북한을 쉽게 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김정은의 전략을 중국이 모를 리 없으며 이는 분명히 매우 '비우호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향후 중국의 대응도 더욱 복잡하게 전개될 것이다. 중국과 북한 관계는 사실 엄밀하게 말해 결정적이고 구조적인 모순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김정은의 돌발 행동은 중국 입장에서 보면 북한의 신뢰도와 소통 방식에 다시 한 번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특히 시진핑 주석의 입장에서 보면 공산당과 노동당 교류의 첨병인 당 대외연락부장을 자신의 인맥인 쑹타오로 교체한 후 첫 번째 교류에서 뒤통수를 맞은 꼴이 되었다. 국가 간 교류에 있어 지도자의 인식과 신뢰가 가장 중요한 점임을 생각해본다면 김정은의 대중 전략과 핵 보유 의지 그리고 중국의 대북 영향력 유지를 둘러싸고 새로운 경색 국면이 다시 도래했다고 볼 수 있다.
기대 속에 진행된 남북 차관급 회담은 설전만을 전개한 끝에 결국 결렬됐고, 북-중 관계는 새로운 위기를 맞았다. 더불어 한미 동맹 관계 속에서 중국의 '건설적 역할'을 기대하는 한국 외교도 또 다른 시련을 맞게 됐다. 늘 이런 구도에서 수동적인 움직임만으로는 한 발짝도 더 나가기 어려운 상황이다. 어떤 의미에서든 획기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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