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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한상균, 그리고 대학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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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한상균, 그리고 대학의 몰락

[민교협의 정치시평] 환대가 없으면 신성한 곳도 없다

어느 책에 소개된 엉뚱한 아이 얘기.

선생이 아이에게 문제를 낸다.

"새 한 마리가 새장을 떠나 날아간다. 새가 초속 몇 미터 속도로 날아가고, 새장과 숲의 거리가 얼마얼마라면, 새가 숲에 닿은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그러자 아이가 선생에게 묻는다.
"그 새장은 무슨 색이에요?"

선생의 문제에서 '새장'은 이름만 그럴듯할 뿐 '개집, 처마, 나뭇가지'로 바꾸어도 아무 차이가 없다. 실은 수학적으로 '점 x'라 하는 게 가장 노골적이다. 그만큼 '새집'은 빈 기호다. '새장'은 아이의 엉뚱한 질문을 거치고서야 비로소 현실적 사물로 되살아난다. 정말 새장은 무슨 색일까?

뜬금없이 새장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우리가 어떤 질문으로 이 세계의 진실에 다가서고 있는지 궁금해서이다. 모든 질문이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겠지만, 질문이란 어느 편에 설 건가 하는 실존의 문제다. 오늘 엉뚱한 아이의 질문은 이렇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은 조계사로 왜 들어갔을까. 신성한 곳은 어디이고 어디여야 하는가.

사라지는 신성한 공간

신성한 공간은 '신성함, 거룩함'이 깃든 곳이다. 신성한 공간은 바로 이런 신성한 존재가 머무는 곳이다. 그곳이 이름 없는 들판이어도, 어느 골목이어도, 비루한 여인숙이어도 신성하다. 다만 종교적 건축물은 신성한 존재를 상징화하고 세속과 구별되는 물리적 공간을 확보한다. 그곳은 안식과 위로, 복을 주거나 신을 만날 수 있는 성별된 공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신성한 공간은 환대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환대는 '사람에게 자리/장소를 내어주는 행위'이다(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난민처럼 날 때부터 공간이 허락되지 않은 사람, 비정규직처럼 불안한 공간에 있는 사람, 해고자들처럼 공간을 빼앗긴 사람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 환대이다. 환대는 무조건적이다. 조건이 달리면 환대가 아니다. 거래이고 교환이다.

어떤 공간이 신성해지기 위해서는 그곳에 종교적 의례와 거룩한 성물을 갖다놓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신성한 공간은 세속과 다른 삶의 기준, 세속과 다른 행동강령, 세속과 다른 목표로 사람들이 모인다. 부자와 빈자가 평등하게 악수하고 얘기 나눌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세상이 경쟁과 승리를 외칠 때 이곳에서는 연대와 눈물로 기도하고, 비인간적 사회에 대한 예언자적 비탄과 비판이 성립하는 곳. 가난한 이들이 율법을 어기고 법 밖으로 밀려날 때 밀려오는 곳. 그곳은 법을 뛰어넘는다.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 옹호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 안의 종교냐, 법 밖의 종교냐 하는 질문은 부질없다. 그곳은 예외의 공간이자 예외를 만들어 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신성한 곳은 대의되지 않는 자들, 목소리 없는 자들, 몫이 없는 자들, 가장 나중 온 자들도 '허락'하는 곳이다.

한상균이라는 타인(괴물)

한상균이라는 타인(괴물)을 어떻게 대했느냐 하는 점이 종교가 세속의 아픔과 절망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며 자신들의 신성성을 보여준다. 민주노총 위원장 한상균은 종교인들이 보기에 타인(괴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조계사에서 걸어서 나왔느냐, 잡혀서 나왔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범법자'가 신성한 곳에 들어오는 순간, 그곳은 가장 세속적이고 가장 치열한 정치 공간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절집은 치열한 담론과 대립, 오만가지 욕망과 논리가 뒤죽박죽이 된다. 그를 옹호하는 자에서부터 증오하는 자까지 자신들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야단법석을 떤다.

신성한 곳의 제일 원칙은 아마도 이것 아니었을까? 그가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온 것이 아니듯이, 그가 스스로 나가지 않는 한, 나가라고 하지 않는다. 원칙 하나를 더하라면, 타인의 도래로 '법의 법됨'을 되물어보는 것. 율법학자들이 만들어놓은 법이 가난한 사람을 지키는 법인지 몰아내는 법인지 되물어보는 것. 세속 원리로는 법 앞에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등을 떠밀고 나 몰라라 하겠지만, 신성한 곳은 법의 폭력과 집행을 거절하고 죄인의 편, 괴물의 편에 서는 것이리라. 죄인과 괴물이 던지는 질문과 외침을 들어주라고 '화쟁'하는 것 아니었을까.

신성했던 공간, 대학

'신성한 대학?' 형용모순이다. 옛날 경찰이 대학에 진입하는 것을 머뭇거리게 했던 것은 무엇인가. 대학은 아무 제약 없이 질문하고 비판하고 방황하는 곳, 모색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은 현실을 다루지만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 곳이다. 학생뿐 아니라 교수들도 '이 신성한 곳'에 경찰이 들어올 수 없다고 외쳤고, 경찰이 들어오면 '신성한 곳이 유린당했다'고 분노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유-린(蹂-躪). 짓밟히고 거듭 짓밟히는 것. 유린은 말 그대로 몸으로, 물리력으로 짓밟히는 일. 모든 유린은 힘의 불균형을 바탕으로 한다. 권력의 의도대로, 법의 외투를 입고 삶의 고유성은 유린당한다. 유린된 자의 몸에는 씻을 수도 잊을 수도 없는 상처가 깊이 파인다. 대학 운동장이 군인들의 연병장이 되고, 대학 정문이 전투경찰의 놀이터가 되었을 때, 우리가 느꼈던 모욕은 몸의 유린에서 오는 뼈저림, 같은 것. 그런데 지금은 그런 유린의 감각마저도 상실했다.

정확히 20년 전이었다. 모든 대학이 학부제 실시로 술렁거렸다. 공청회가 열렸다. 대학원생 대표로 말을 하라고 했다. 내 얘기는 뻔했다. '학부제를 도입하면 학문과 생활의 공동체인 대학은 파괴될 것이다, 인기전공과 비인기전공으로 양분되어 기초학문은 궤멸될 것이다, 교수들이 학문적 다양성을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서 울타리만 없앤다고 교육이 되는 건 아니다, 학생들의 자율적 학습과 공동체적 교류는 사라질 거다' 등등.

문득 맨 앞줄에 앉은 교무처장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경멸!' 시대변화를 모르는 놈에 대한 경멸에 찬 눈초리. 그의 눈에는 밝은 미래를 미리 본 사람만이 갖는 자신감과 함께 대세를 거스르는 자들을 보면서 느끼는 답답함이 섞여 있었다.

그 경멸의 눈초리는 어떠한 반성도 없이 이름을 바꾸어가며 끝없이 환생했다. 요즘엔 산업계 수요에 맞게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프라임사업, 이 사업 때문에 위축될 인문학을 위한 인문학 강화 사업(코어사업) 등이란 이름을 하고 있다. 정부가 강제하는 정원 조정과 학과 개편이라는 쓰나미에, 거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다시 시대의 흐름을 모르는 놈이라는 경멸의 눈초리를 받게 될 것이다.

지금의 대학은 학문과 자본이 자기분열적으로 공생하는 곳이자, 세속화, 기업화, 신자유주의의 최종결정판이다. 신자유주의가 물신의 내면화, 자발적 경쟁, 국가가 아닌 개인 간의 경쟁과 독점을 수용하는 것이라면, 대학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파국이 예비되었다. 경쟁과 효율, 마케팅 기법과 승자독식의 시스템을 종교가 받아들이면 끝인 것과 같다.

대학 안에 촘촘하게 쳐놓은 각종 규정과 기준은 대학을 더욱 파편화시키고 있다. 연구 실적을 연봉에 연결시킴으로써 교수들을 경쟁과 줄 세우기로 내몰고, 상대평가로 학생들은 협력자가 아니라 경쟁자가 되었으며, 대학평가는 자율과 독립을 생명으로 하는 연구와 교육을 수치화했다. 대학은 어느 곳보다 비정규직 노동이 일상화된 곳이다. 비정규직 교수와 비정규직 직원이 교육과 행정의 반 이상을 담당한다. 이런 것들은 끝이 없다. 예측가능성과 계산가능성과 특징인 관료주의가 대학가의 모든 부문을 장악했다.

그런 점에서 대학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딴 데 신경 쓸 자격도 없다. 대학의 몰락을 막지 못한 책임으로 평생을 비탄에 빠져도 부족하지 않다. 대학의 상업화와 신자유주의화는 선생을 자율적 독립체가 아닌, 세속적이되 현명한 척하는 속물로 만들었다. 개인의 생존과 득세를 위해 자기 안의 신성함을 모두 몰아냈다. 가장 교묘하고 가장 무관심한 전쟁터에 있는 주제에.

이젠 멀리 보지 못하겠다. 이젠 거창한 주제를 말하기엔 낯부끄러워 못하겠다. 내 코가 석 자다. 여기가 최전선이다.

다시 묻는다. 대학이 신성한 곳일 방법이 없을까? 비관적이다. 그나마 유일해 보이는 것은, 목소리 없는 이들이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환대의 식탁은 경쟁과 승자독식을 거절한다. 대학은 신성한 곳이어야 한다. 이건 의무이자 책임이다. 지금처럼 노동이 모욕당하는 시대에, 대학은 노동을 환대함으로써 신성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학문공동체라는 말이 빈 말이 되어버린 이곳에서 자기 공간을 내어주는 환대의 몸부림을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환대가 없으면 신성한 공간도 없다. 환대는 의지다. 환대는 몸부림이다. 나를 안전하게 지키던 경계선을 지우고 문턱을 낮추고 타인의 공간을 허용하는 것이다.

대학은 새가 숲으로 날아가는 시간을 답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새장의 색깔을 물어볼 용기를 갖고 있을까?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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