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무원연금이다. 지금까지 국민연금, 세금, 공공부문 등 국민의 원성을 사는 놈들이 여기에 소개되었지만 나만큼 비판을 받진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 가입한 공무원이 약 100만 명이니까 주위 동료(사학연금, 군인연금 가입자 30만 명)와 부양가족을 합치면 약 400만 명이 내 편이겠지만 그 열배가 넘는 국민들이 나를 못마땅해 할 것이다. 이 정도면 난 왕따라 불릴만 하다.
작년에 국민연금법이 개정되는 바람에 나를 둘러싼 압박이 더 거세졌다. 게다가 이명박정부가 18대 국회 첫 회기인 6월에 나를 손보겠다고 공언했다. 정부 내부에서 마련한 개정안 시안이 이번 달에 공개될 예정이다.
당사자인 공무원의 대응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정부안 반대, 공동논의기구 구성 등 다소 원론적 주장에 머무르고 있다. 나를 '표적'으로 삼고 압박해 오는 이명박정부의 전략적 행보와 비교해서 안이하다는 느낌이 든다.
어차피 현행대로 유지될 수 없다면 누가 나의 개혁을 주도하느냐가 중요하다. 나도 가슴 펴고 살고 싶다. 공적 영역에 속한 놈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며 개혁에 참여하고 싶다.
적자는 부분적립연금의 당연한 결과
억울한 것부터 이야기하자. 이미 2000년에 내 기금은 고갈됐었다. 올해 국고 지원액이 1조 원, 2010년에 2조 원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민간 생명보험사였으면 파산도 몇 번 했을 일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이 적자가 마치 내 잘못으로 발생한 것처럼 몰아가는 건 정말 어불성설이다. 애초 내가 부분적립방식(미래 연금 대비 일부만 보험료로 적립하고 나머지는 공적재원이나 후세대에 의지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기에 어느 시점에 적자로 돌아서고 이후 기금까지 소진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1960년에 태어난 나도 이제 50을 바라보는 나이다.
부분적립방식은 국민연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국민연금은 올해 20살이 된 젊은 연금이다. 작년 한해만 30조원을 늘리는 흑자경영을 했다. 하지만 이는 초기 현상으로 나처럼 부양율(수급자수/가입자수)이 높아지는 중년기가 되면 그 역시 적자로 접어 들 것이다.
적자구조를 방치하자는 건 아니다. 적자를 가능한 줄이기 위해 미리 재정구조를 개선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나의 적자가 나의 잘못만이 아니라 한국식 공적연금의 고유한 특징에 기반하고 있음을 짚어두고 싶다.
공무원연금의 적자가 심한 이유
부분적립방식일지라도 미래 적자 폭에 대해선 논의가 필요하다. 연금 수익비(총급여액/총보험료액)를 보면 내가 국민연금에 비해 2배 이상 높다. 이 때문에 '특혜'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나 역시 내가 고수익 연금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여기에도 사연은 있다. 산업화 시기 민간기업들이 커 나갈 때, 공무원의 임금은 민간부문 노동자에 비해 작았다. 그래서 나는 애초 공무원들을 위한 '연금'으로 태어났지만 국가정책에 의해 낮은 보수를 보충하는 '후불임금'의 성격을 동시에 부여받았다.
민간대비 공무원의 보수 수준은 1985년에 66%로 2/3에 불과했고 80%에 도달한 것이 불과 10년전 1999년의 일이다. 김대중정부, 노무현정부의 보수현실화 정책에 따라 2004년 96%까지 올라갔으나 다시 공무원임금 통제에 따라 최근 92%로 낮아져 있다.
게다가 민간부문 노동자가 퇴직금으로 임금의 8.3%를 받는 반면 공무원은 그 절반, 혹은 절반의 절반을 퇴직수당으로 받는다. 나에게 공무원의 낮은 퇴직금을 보충하는 역할까지 부여된 것이다.
내가 그렇게 몰지각한 놈은 아니다. 애초 부분적립방식으로 설계되었기에 미래 적자는 당연히 예상되는 일이었으며, 낮은 공무원 보수와 퇴직금을 보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 높은 수익비를 지니게 된 것이니까 말이다.
이명박정부의 불순한 의도 맞서 공무원이 연금개혁 주도해야
작년에 노무현정부가 공무원연금제도발전위원회를 통해 정책건의안을 발표했다. 나의 지출을 줄이자는 내용이었는데, 내가 지닌 특수한 배경을 이해한다면 무작정 깎기만 하는 것은 공정치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정부 개정안을 반대만 할 수도 없다. 난 자존심도 있지만 양심을 더 높이 사는 놈이다. 비록 내가 이렇게 태어났지만 앞으로도 이런 상태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국가재정에 주는 부담이 작지 않으며,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도 편치 않다.
특히 이명박정부가 시장중심 공공부문 개혁의 빌미로 나를 활용되는 게 속상하다. 이명박정부의 불순한 의도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80년대 초 영국의 대처나 미국의 레이건이 공공부문 노동조합과 일대 전투를 통해 자신의 시장주의적 개혁에 대한 우군을 확보했듯이, 나를 표적으로 삼아 공공부문 개혁의 모델을 만들려는 의도 말이다.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먼저 개혁의 깃발을 드는 자들이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마련이다. 이왕이면 나의 주인인 공무원들이 먼저 나의 개혁을 선도하는 진취성을 발휘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신규공무원, 국민연금 가입하고 노동자성 요구해야
나의 개혁을 논할 때, 기존 공무원과 신규 공무원을 구별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혹자는 공무원들을 차별하는 것이라 비판하지만 내가 워낙 특수하게 설계된 탓에, 신규 공무원까지 내 품 안에 담기는 무리다.
원론적으로 공적연금은 하나로 통합되는 게 옳다. 애초에 나와 국민연금이 너무 다르게 태어나 통합이 어렵지만, 신규공무원부터는 통합의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다. 국민연금 방식으로 가는 것이 하향평준화라는 비판도 있지만, 서구 연금에 비하면 국민연금도 가입자에게 매우 후한 연금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국민연금 보험료율이 9%인데 이건 서구의 절반에 불과하니 말이다.
작년 서울시 공무원 7급, 9급 시험의 경쟁률이 53:1이었다. 시험 보는 날 수험생들이 전국에서 서울로 대이동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민간부문에 비해 공무원의 고용안정성이 높고 과거에 비한다면 보수도 꽤 현실화되고 있다. 이들에게 국민연금 적용을 요청하는 것이 그리 부당한 일이라 여겨지지 않는다.
신규공무원은 국민연금 방식에 가입하여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내부 차이를 없애고 둘이서 힘을 모아 기초노령연금을 상향하는 일에 노력해야 한다. 이는 공무원의 노동자성을 주장하는 데에도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기존 공무원, 균등지수 도입하여 상위 공무원 연금 낮추어라
기존 공무원에게 국민연금 방식을 바로 적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이미 수십년간 공무원 직업의 특수성을 반영하여 내가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 방식으로 그냥 버티기도 힘든 상황이다. 나의 공공성을 강화하되 국가 재정 부담을 완화하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나에게도 균등지수가 필요하다. 국민연금은 균등지수라는 것이 있어, 보험료는 소득에 비례하여 내지만 급여의 절반은 모두에게 동일한 금액이 지급되고 나머지 절반만 소득비례가 적용된다. 이를 통해 저소득 가입자일수록 높은 수익비를 제공받게 된다. 부족하나마 소득재분배 효과를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반면에 나는 소득비례인 까닭에 모든 직급에게 동일한 수익비가 적용된다. 소득비례가 공평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공적연금이라면 하위계층에게 유리해야 한다는 게 내 소신이다.
국민연금처럼 균등지수를 도입하면, 전체 지출을 중립으로 유지하면서도 하위직급 가입자는 현행보다 급여율이 높아지고 상위직위 가입자는 낮아지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만약 하위직급 가입자들의 급여율이 낮아지지 않는 수준까지 평균급여율을 낮춘다면 연금재정 지출을 절감할 수 있다. 연금공공성을 확보하면서 국가 재정 부담을 완화하는 방안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중상위 공무원들의 대승적 양보가 관건이다.
공무원연금 사각지대 해결해야
내가 지닌 사각지대 문제도 심각하다. 공무원들이 나를 받기 위해서는 20년 이상 가입해야 한다. 국민연금의 10년 요건에 비교하여 엄격하다. 수급기간을 채우지 못하면 그냥 자신이 낸 보험료만 돌려받기 때문에 연금 수급자에 비해 돌려받는 총 금액이 1/4~1/5에 불과하다. 이들은 낮은 보수와 퇴직금을 보완하는 후불임금을 받지 못하고 퇴직하는 셈이다.
보통 공무원들이 장기근속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미 공무원 퇴직자 3할이 20년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철밥통'을 깬다하니 이같은 현상은 더 심해질 것이다. 나의 높은 수익구조 안에는 조기퇴직자의 희생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20년 미만 퇴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나와 국민연금을 연계하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연금재정 부담이 커진다는 이유로 방치되어 왔으나 이제 더 이상 미룰 일은 아니다.
국민을 우군으로 만들자
공무원들이 나서서 나를 개혁하라. 국가재정 부담을 줄여야 한다면, 무작정 급여를 깍을 게 아니라 비례연금방식에 균등지수를 도입하여 상위직급 공무원들의 양보를 요구하라. 여기엔 중간직급 공무원들의 일정한 참여도 필요하다.
정치적으로 이야기하면, 나를 둘러싼 대립구도를 '국민 vs 공무원'이 아니라 '국민 vs 상위 공무원'으로 전환하라는 제안이다. 국민을 적이 아니라 우군으로 만들어야 한다.
균등지수 도입은 이명박 정부 시기 공적 연금 연대전선을 수립하는 핵심 축이 될 수 있다. 이명박정부가 국민연금과 기초노령연금을 통합한다면서 이 과정에서 국민연금에 있는 균등지수를 없애려하고 있다. 국민연금에겐 균등지수 사수 운동이, 나에겐 국가재정 부담을 완화하면서도 계층형평성을 확보하기 위한 균등지수 도입 운동이 필요하다.
이미 노동시장에는 정규직/비정규직, 일반노동자/공공부문 노동자의 구별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제 노동자 내부에 쳐진 수많은 장벽을 하나씩 허물어야 한다.
나를 발판으로 삼아 달라. 이명박정부가 공공부문 죽이기 카드로 나를 이용하는 것에 맞서 공무원들이 나서 자신을 혁신하고 전체 노동자의 사회연대를 확장하는 밑거름으로 나를 사용하라는 간절한 요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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