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도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이 유명한 섬입니다. 육지와 다리가 놓여 있어 마음만 먹으면 훌쩍 떠났다 올 수 있을 정도로 수도권에서 가까운 섬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다들 한번쯤 다녀왔을 겁니다. 그러나 겨울 안면도를 다녀온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다른 유명 관광지들처럼 안면도 또한 봄·가을 행락철이나 여름 피서철이면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립니다. 하지만 겨울에는 더없이 한가롭습니다. 겨울 안면도는 전혀 다른 느낌입니다. 고요하고 적막합니다. 안면도에는 내내 파도소리 들으며 걸을 수 있는 아름다운 트레일이 있습니다. <태안해변길>의 일부인 <노을길>입니다. 솔밭과 모래해변으로 이어지는 13km의 길은 더 없이 평탄합니다.
2016년 2월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는 13일(토) 제46강 당일 코스로, 안면도 <노을길>을 걸으러 갑니다. 늘 1박2일 일정으로 가던 섬학교에서 모처럼 마련한 하루 코스입니다.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겨울 해변길 걷기에 초대합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2월, [평화와 안식의 섬 안면도 <노을길> 걷기]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도둑과 거지, 기와집이 없던 3무(無)의 섬
“주역의 대가였던 야산(也山) 이달(李達. 1889∼1958)은 6·25전쟁이 일어날 것을 미리 내다보고, 1차로 1946년 12월에 가족과 제자 24명을 데리고 충청도 태안의 안면도로 피신해 들어갔다. 야산의 지시에 따라 6·25 발발 이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제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안면도로 들어왔다. 대략 300가구에 1,000명이 넘는 숫자였다고 전해진다. 야산을 따라 안면도에 들어왔던 사람들은 6·25 때 인명피해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태안과 안면도라는 지명은 그 의미가 심중하다. …앞으로 ‘태안반도’와 ‘안면도’는 후천개벽의 요지가 될 것이다.” <조용헌의 <동양학강의1> 중에서>
이달은 구한말 후천개벽의 사상가 김일부와 함께 주역의 대가로 꼽히는 사상가였다. 역사학자 이이화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안면(安眠)이란 ‘편히 잔다’는 뜻인데 숲이 무성해 조수가 편안히 누워 쉴 수 있는 땅이란 의미도 갖는다. 조수뿐 아니라 사람 또한 안식을 얻은 땅이었던 모양이다. ‘크게 편안한 땅’이란 뜻을 지닌 태안(泰安)과 안면은 상통한다. 수많은 아름다운 백사장과 ‘금강송’처럼 ‘안면송’이라는 고유한 이름을 가진 적송이 자라는 풍요의 땅이다.
태안군 안면도는 본디 섬이 아니었다. 태안반도와 이어진 내륙이었는데 1638년(인조 16)에 충청관찰사 김육(金堉)이 세곡선을 비롯한 조운의 편의를 위해 운하를 파서 섬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섬이 된 안면도가 내륙과 다시 연결된 것은 350년만인 1970년대 말이다. 면적 113.46㎢, 해안선 길이 120㎞나 되는, 한국에서 6번째로 큰 섬이다. 남북 24㎞, 동서 5.5㎞로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다. 북쪽의 국사봉(國師峰, 107m)을 제외하면 대체로 100m 이하의 낮은 구릉과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옛날 안면도는 3무(三無)의 섬으로 유명했다. 기와집이 없고 도둑과 거지가 없었다. 안면도 사람들의 인심이 순후해 도둑과 거지가 없었다 한다. 6.25때 피난민들이 들어와서도 굶주리지 않고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는 안면도의 인심과 도끼 한 자루만 있으면 살 수 있을 만큼 울창한 산림 때문이었다. 과거에는 숲이 에너지의 주유소였으니 가능한 이야기다. 지금은 관광지가 되면서 인심도 많이 바뀌었다. 안면도에 기와집이 없는 것은 부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금기 때문이었다. 안면도는 섬의 모양이 지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안면도 남쪽의 원산도는 닭 모양이다. 두 섬은 오래전부터 경쟁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자기 섬에 대한 자긍이기도 할 터이다.
지네와 닭은 상극이다. 실상 지네는 닭에게 좋은 먹잇감에 불과하지만 닭이 바닥에서 자면 지내가 닭의 항문으로 들어가 내장을 다 파먹어버린다는 속설이 있기도 하다. 아무튼 안면도를 지네의 섬으로 생각한 안면도 사람들은 지붕에 기와를 올리면 지네가 모두 깔려 죽고 만다고 생각해 지네가 살기 좋은 초가로만 지붕을 올렸다한다. 지네가 모두 죽으면 원산도에 지고 만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아무리 속설이라도 독충인 지네를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뱀처럼 지네 또한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그래서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거기서 유래된 전설이 아닌가 싶다.
솔바람 일렁이는 <노을길>을 따라
태안에는 원북면에서 고남면까지 7개 구간, 97㎞의 <태안해변길>이란 생태탐방로가 있다. 또 태안군에서 천리포 윗 구간에 조성한 만대항에서 이원방파제를 거쳐 내려오는 <솔향기길> 4개 구간 42.5km를 합하면 태안의 트레일은 도합 140km에 이른다. 이날은 안면도에 있는 <태안해변길> 5코스 <노을길>을 걷는다. 안면읍 백사장항에서 꽃지해변까지 12㎞에 이르는 트레일은 내내 솔숲과 모래 해변을 따라 나있어 <태안해변길> 중 백미로 꼽힌다.
코스의 시작점인 백사장항은 안면도의 대표적인 어항이다. 봄부터 여름까지는 꽃게잡이, 가을부터는 대하잡이로 성황을 이룬다. 연휴나 축제기간에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 백사장항이란 지명은 <청구도> <대동여지도> 등에는 '백사정(白沙汀)'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1872년지방지도>에는 '백사장(白沙場)'으로 기록되면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백사장항과 건너편 드르니항 사이 바다 위로는 인도교가 놓여 있다. ‘드르니’란 어여쁜 지명은 '들르다'라는 우리말에서 비롯됐다. 어선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해서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 전해지는데 일제강점기에 '신온항'으로 바뀌었다가 2003년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백사장항 주변은 몰려든 관광객들과 횟집들의 호객소리로 요란스럽다. 저 호객꾼들의 행태는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병폐다. 호객꾼들 때문에 어항의 풍경을 차분히 둘러볼 수가 없다. 횟집들마다 새우튀김이며 꽃게튀김들을 수북이 쌓아놓고 파는데 하나쯤 사먹고 싶은 유혹을 떨치고 서둘러 난장판을 빠져나간다. 솔숲 입구를 따라 <노을길>이 시작된다. 어린 소나무들은 안면송이 아니라 곰솔이라 아쉽지만 그래도 솔향은 청량하기 그지없다. ‘곰솔’은 잎이 곰털처럼 거칠다 해서 곰솔이다. 바닷가에서 잘 자라 해송이라고도 하고 줄기가 검어서 흑송이라고도 한다.
솔숲 곳곳에는 야영을 하는지 텐트들이 쳐져있다. 15분 남짓 솔숲을 빠져나오면 백사장해변이다. 사람들은 텐트 안에서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거나 낮잠을 잔다. 또 더러는 해변에 나가 낚시를 하거나 고동을 줍거나 물에 발을 담그고 논다. 그 또한 자연을 즐기는 방법이지만 이 좋은 숲길을 걷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점은 아쉽다. 이 길에 온 사람들이 길을 걷지 않는 이유는 뭘까? 길을 걷는 것 또한 의무나 과제처럼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끝까지 완주하지 못할 거라면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일부라도 산책하며 소요할 생각은 왜 않는 걸까.
이 길은 목적지가 없다. 시작과 끝을 표시한 것은 하나의 이정표에 지나지 않는다. 시작도 시작이 아니고 끝도 끝이 아니다. 내가 시작하고 내가 끝내는 지점이 시작이고 끝이다. 나의 길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길의 목적지는 길 그 자체다. 길에 속박된다면, 완주 같은 것이 오로지 길을 걷는 이유라면 이 길은 도그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길에 나와서는 과제하듯 업무하듯 길을 걷는 태도는 바꿔야 마땅하다. 걸을 수 있는 만큼만 걸으면 그뿐이다. 완주를 강요하는 길 따위는 애초부터 만들지 않는 편이 낫다.
얼마나 걸었을까. 해변을 지나던 길이 어느새 다시 솔숲으로 이어진다. 숲 곳곳에는 죽은 소나무들이 쌓여있다. 야생동물을 위한 비오톱(Biotope)이다. 태풍 피해목들을 이용하여 야생동물이나 벌레들이 거처할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만들어준 것이다. 나무들은 죽어서도 다른 목숨들을 살린다. 길을 또 어느새 창기리해변으로 접어든다. 이 해변의 명물은 삼봉이다. ‘삼봉’은 하나의 작은 바위산인데 마치 세 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삼봉이란 이름을 얻었다. 작은 산이지만 삼봉이 있어 창기리 앞바다 삼섬, 뒷섬, 갈마섬, 지도, 거아도, 곰섬 등의 무인도와 함께 절경이 완성된다. 삼봉 근처에는 삼봉자율관리공동체에서 세운, 수자원 보호를 위한 입간판이 서 있다. “어린 꽃게를 잡지 맙시다.” 6.4cm 이하의 어린 꽃게를 잡지 말라는 의미다.
하지만 선주들은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어린 꽃게와 물고기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인다. 탐욕은 눈을 멀게 한다. 그것이 결국은 제 발등을 찍는 일이란 걸 모른다. 칠산어장과 연평어장에서 조기의 씨가 마른 것이 그 때문이고 굴업도와 덕적도 어장에서 민어가 사라진 것이 또한 그 때문이다. 마구잡이로 잡아들인 결과 한때는 황해바다에서 꽃게도 씨가 마른 적이 있었다. 다시 꽃게도 조기도 잡히지만 지금처럼 탐욕스런 남획이 계속된다면 이들 또한 마침내는 멸종될 것이 명약관화하다.
작은 꽃게를 이르는 ‘사시랭이’란 말이 재밌다. 대체로 표준어라는 것들은 밋밋히고 재미가 없다. 지역에서 쓰는 다양한 언어들을 거세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물고기 이름들은 그저 서울말일 뿐이다. 삼치라고 다 삼치가 아니다. 도시 사람들이 삼치라고 알고 먹는 것은 삼치 새끼다. 무게가 3킬로그램쯤은 돼야 삼치라 한다. 삼치 새끼는 ‘고시’라 부른다. 도미 새끼는 상사리, 농어 새끼는 껄떡, 민어 새끼는 통치, 어류는 크기에 따라 지역에 따라 이름도 제각각이다. 그러므로 표준말이란 언어정책은 살아있는 언어를 죽이는 언어말살정책에 다름 아니다. 지역을 다니다 보면 아직도 살아있는 우리말들을 채집하는 재미가 솔찬타. ‘솔찬타’는 말의 뜻은 무얼까? 한번 짐작해 보시라.
물을 주는 생명의 사막, 사구
“가도 가도 황톳길”을 노래하던 한하운의 시가 생각나는 길이다. 이곳은 가도 가도 솔밭길, 가도 가도 모래사막의 길이다. 길은 갈수록 깊어지고 고요해진다. 이 길이야말로 평화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기지포해변의 솔숲 앞으로는 해안사구가 잘 발달해 있다. 2002년부터 훼손되었던 지역을 다시 복원한 해안사구다. 사구는 모래가 쌓여서 만들어진 언덕이다. 해안사구에는 갯그렁이나 통보리 사초, 갯메꽃, 갯방풍, 순비기나무, 해당화, 좀보리 사초, 모래지치 등 다양한 사구 식물들이 살아간다. 사구 식물들은 연약해 보여도 뿌리가 깊이 뻗어 수분과 양분을 흡수해 튼튼하게 잘 살아간다. 몸에 털이 있거나 코팅이 되어 있어 염분에도 잘 견디고 수분이 마르는 것을 방지한다. 식물의 살아남기 위한 지혜다.
푸르른 사구와 거기서 터 잡고 살아가는 식물들을 보며 가는 것도 이 길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해안사구의 중요성은 단진 사구 식물들의 서식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구는 무엇보다 지하수를 정수해 저장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모래섬인 임자도나, 자은도, 삽시도 같은 섬들에 그렇게 많은 물치(물웅덩이)가 있었던 것이다. 이 사구가 저장해준 물 덕에 사구 뒤에 마을이 형성되고 농사가 가능했던 것이다. 사구가 잘 발달한 해안은 경관도 빼어나다. 녹색식물들이 모래를 덮고 있는 풍경은 깊고 푸르른 생애처럼 장관이다.
밧개해변의 보물은 독살이다. 돌살, 돌발, 석방렴, 원담 등 지역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독살은 밀물과 썰물의 원리를 이용해 만든 함정어법인데 돌그물인 셈이다. 해안이나 섬들에는 예전부터 많은 독살이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아 원형이 훼손되었다. 하지만 이 밧개해변의 독살은 현재까지도 사용하기 때문에 의미가 더 깊다. 밧개해변의 산길을 넘어서면 두에기해변이다. 안면도의 해변 중에서도 가장 작은 해변이다. 택시기사의 말에 따르면 음침한 기운이 돈다 해서 섬사람들도 잘 가지 않는 해변이란다. 기사도 어째서 음침한지 그 이유는 잘 모른다. 무얼까. 생애의 그늘처럼 정체모를 해변의 어둠은?
<노을길>의 끝은 방포항 건너 꽃지해수욕장 입구다. 이 해변의 상징은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다. 어느 해안이나 섬에도 깃들어 있듯이 이 바위 또한 슬픈 전설을 품고 있다. 안내판에 바위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150여 년 전, 신라 42대 흥덕왕 4년(838년)에 해상왕 장보고가 지금의 전남 완도인 청해진을 기점으로 하여 북으로는 장산곶, 중앙부로는 견승포(지금의 안면도 방포)를 기지로 삼고 기지사령관으로 승언이라는 사람을 두었는데 승언에게는 미도라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어 행복하게 지냈다. 어느 해 승언이 해상 전쟁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으니 그의 아내는 날마다 바닷가에 나가 2년을 넘게 기다리다 지처 마침내 이 바위 앞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 뒤 이 바위는 미도가 남편을 기다리며 멀리 바라보고 서 있던 모습으로 변했다. 수년 후 승언은 구사일생으로 돌아왔으나 아내 미도가 자신을 기다리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애통해 하다가 그 옆에 죽어 그 또한 바위가 되니 사람들이 이 바위를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승언리’라는 지명도 승언이의 슬픈 전설에서 유래된 것이다.
물질문명의 발전은 이쯤에서 멈추어도 좋지 않을까!
이 대자연의 길을 걸으며 사람들은 마냥 행복해한다. 그저 두 발로 솔숲과 해변을 걸었을 뿐인데 어떤 물질로도 채울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이쯤에서 나그네는 우리 문명의 발전에 대한 회의를 떨칠 수가 없다. 우리는 물질문명의 발전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치 물질문명의 발전이 인류에게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기라도 할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간다.
물질문명의 발전이 인간을 더 안전하게 만들었는가. 인간을 더 평화롭게 만들었는가. 더 행복하게 만들었는가. 물질문명의 발전이 더 큰 편리를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그 편리함이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그 문명의 이기들은 늘 상시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언제든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다. 실상 물질문명의 발전은 인간의 안전을 지켜줄 기술보다는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기들을 더 많이 만들어냈다.
물질문명과는 달리 정신문명은 수천 년 전에서 단 한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인류가 스승으로 떠받드는 부처와 예수, 공자와 노자, 그들이 살던 수천 년 전보다 우리의 정신문명이 더 발전했다고 할 수 있는가. 여전히 그들의 정신이 우리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설파했던 박애와 자비와 평화와 평등의 가치는 여전히 우리가 이루지 못한 가치들이다. 인간성의 발전을 담보할 정신문명의 발전이 없는 물질문명의 발전은 인류에게 독이 될 확률이 더 크다.
물질문명이 우리를 더 안전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인간은 물질문명을 계속 발전시켜야만 하는가. 욕망은 지식에 비례한다. 발전하지 않으면 욕망도 늘지 않는다. 지금도 우리는 너무 많은 욕망의 노예로 살아간다. 더 많은 것의 노예가 되고 싶은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 문명은 이쯤에서 멈추어도 좋겠다. 그 길이 인류와 지구를 파멸로부터 구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섬학교 2016년 2월 13일(토), 제46강 [평화와 안식의 섬 안면도 <노을길> 당일 걷기]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07:30 서울 출발(7시 2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 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46강 여는 모임
09:30 안면도 백사장항 도착
09:40-12:40 안면도 <노을길> 오전 걷기(10km)
백사장항-백사장해변-삼봉해변-기지포해변-창정교-안면해변-밧개해변-밧개문주
12:50-13:40 점심식사 겸 뒤풀이(<부잣집>에서 막걸리를 곁들인 우럭젓국과 복국)
14:00-15:00 <노을길> 오후 걷기(3km)
두에기해변-방포해변-꽃지해변
15:20-16:20 백사장항 어시장에서 장보기 및 놀기
16:30 서울 향발. 제46강 마무리모임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방한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방한모, 스틱, 아이젠, 버프(얼굴가리개), 무릎보호대, 선글라스, 보온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 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 가꾸기 자문위원이며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8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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