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처구니없는 '위안부 합의'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또다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친일반민족'이라는 상투적 비판을 스스로 입증해가는 참으로 일관된 정부다. 건국절 주장과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를 통해 일제강점기의 참상을 호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50년 전 한일협정문에 금빛 테두리를 달아주는 이번 위안부 합의까지 성사시켰다. 역사적 피해자에게 필요한 것이 값싼 동정에 기초한 보상이 아니라 가해자가 응당 죄의 대가를 치루는 배상이라는 기본원칙은 이제는 더 이상의 거론조차 진부하다. 그것은 1990년대 이래 우리사회의 지난한 '과거사 청산' 노력을 통해 도출된 사회적 합의요 상식이다.
이번 '외교 참사'를 평가함에 있어 법적 배상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소녀상 철거 문제다. 100억 원도 채 못 되는 돈에 민족적 자존심을 팔아넘길 수 없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 대사관 주위에 자리잡은 소녀상은 그곳에 일상적으로 출입하는 일본인 대사관 직원과 외교관들에게는 분명 눈에 가시처럼 여겨질 것이다. 충격과 부끄러움, 절망과 원한이 지극히 명징한 모습을 띤 채 마주보고 있으니 말이다. 말없이 버티고 앉아있는 소녀상을 어떻게 대면할지는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향후 관계를 가름하는 시금석이다.
양국의 밝은 미래를 위해 과거의 악연을 상기시키는 상징물을 치워버리자는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소녀상 앞에서 바로 그 은발의 소녀들이 20년 넘게 "수요집회"를 이어왔다. 서울 종로구 소재 일본대사관 건너편의 소녀상은 이미 그 자체로 역사적 현장이 되었다. 사라진 문화재도 재건하는 나라가 아닌가? 그렇지만 나는 광화문 앞을 위시하여 도처에 유사한 동상을 세우자는 세간의 주장 또한 합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단지 현장성이 중요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소녀상의 철거와 확대는 상반된 의견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과거를 독점하려는 욕망이다. 한쪽은 불편한 과거를 지워버리려는 반면, 다른 한쪽은 과거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으려한다. 그 어느 쪽도 타인의 아픔을 자신들이 원하는 논리 안으로 편입시키려든다.
소녀상이 대변하고 있는 것은 실존인물로서의 소녀가 아니라 역사적이면서도 현존하는 고통 그 자체이다. 그것은 피해자 개인의 체험을 넘어 집단적 경험의 응축물이다. 따라서 그것은 참으로 부담스러운 존재다. 실제의 피해자 할머니들과는 마음껏 공감할 수 있더라도 소녀상만큼은 낯선 타자로 우리를 응시한다. 여럿이 시위할 때라면 몰라도 나 홀로 대면하기에는 실로 부담스럽다. 한국인은 한국인대로, 일본인은 일본인대로,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 누구도 소녀의 모습으로 육화된 고통 앞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헤아릴 수 없는 고통, 역사의 무게 앞에서 지금 내가 감히 무슨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바로 이러한 불편한 감정이야말로 사실은 소중한 것이다. 어두운 과거를 임의적으로 처분하기가 꺼려지기 때문이다. 상생을 위한 화해라는 명분으로 과거사를 서둘러 수습하려드는 행태를 가리켜 재일 조선인 작가 서경식은 "균질적이고 획일적인 시간에 자기를 맡기려는, 시간축의 전제주의"라고 비판한 바 있다.
사과한다는 것은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약속이다. 이번 "합의"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는 선언은 참으로 기막히지 않은가. 세상에 불가역성을 조건으로 내세우는 사과도 있는가? 법적인 효력 여부를 떠나 타인이 겪은 고통을 제3자가 대신 용서해준다는 발상 자체가 놀랍다. 설령 외교적 합의가 둘도 없는 호조건으로 성사되어 법적인 배상뿐만 아니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기로 했다손 쳐도 이미 입은 피해는 결코 돌이킬 수 없다. 실로 '불가역적'인 것은 외교적 합의가 아니라 고통의 경험이다.
기념비의 상징성에 맞서
소녀상은 매우 독특한 기념비다. 기념비란 본래 정치적 선전도구의 성격을 지닌다. 우리 주변에 흔한 전쟁기념비들이 여실히 보여주듯이, 한 사회나 공동체의 형성과 유지, 발전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인물이나 집단 또는 역사적 사건을 지속적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전사의 검이나 승자의 월계수, 혹은 무명용사의 탑이나 유서깊은 오벨리스크가 하늘높이 치켜세워진다. 19세기 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역사적 사고방식의 한 유형으로 "기념비적 역사"를 거론하면서 이를 비속한 사건들은 망각하고 "위대한 것이 하나의 연쇄를 형성"하는 역사라고 설명했던 것은 참으로 시사적이다. 그렇지만 소녀상은 이와 같은 기념비의 전형과는 판연히 다르다. 소녀의 자태는 우리를 불멸의 위대한 세계로 고양시키기는커녕 어두침침한 고통의 심연으로 끌어내린다.
영광이 아닌 고통을 환기시키는 기념비에 있어서 독일에 산재하는 홀로코스트 관련 기념비들은 최상의 모델을 제공한다. 그다지 영광스럽지 못했던 20세기의 민족적 경험이 기념비 문화의 융성을 낳았다. 그렇지만 역시 그곳에서도 어떠한 기념비를 만들 것인지는 끊임없는 논란거리다. 따라서 우리가 참조할 것은 기발한 착상이나 조형언어가 아니라 오랜 논란의 과정 중에 표출되었던 심도 깊은 고뇌와 문제의식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 기념비 문화의 특징은 자기민족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타민족의 고통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른바 "경고비(Mahnmal)"라 불려온 서독의 홀로코스트 기념비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피해자를 추념하고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죄의식을 새로운 민족적 정체성으로 통합시켜내고자 고뇌한 산물이었다. 그러나 이들 기념비는 어느덧 근본적인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다. 씻을 수 없는 죄업이 추상화되고 예술적으로 상징화되어 더 이상 불편한 느낌을 주지 않게 된 것이다. 물론 승리의 영광을 자축하는 관례적인 기념비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더 이상 보행객을 성가시게 만들지 못한다.
베를린의 최고 중심부에 1만9000평방미터의 드넓은 부지를 떡하니 차지한 '유럽에서 학살된 유대인들을 위한 기념비'는 독일 기념비 문화의 빛과 어둠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예술적 상징화의 극치를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색다른 면모도 보여준다. 2002년 공사에 착수해서 2005년 완공된 이 초유의 추모시설은 독일 국내 모든 홀로코스트 추모시설의 사령탑에 해당하며 독일이 통일 이후에도 계속해서 과거를 반성하겠다는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 국책사업의 일환으로 구축되었다. 독일 역사상 최초로 연방의회가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대해 의결하는 진기록도 남겼다. 이처럼 철저히 관주도의 기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념비 군상의 형태는 참으로 이색적이다. '해체주의 건축'의 선구자인 미국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n)이 설계를 맡았는데, 격자형 부지에 총 2711개의, 서로 다른 높이를 지니고 아무런 표식이 없는 콘크리트 기둥들이 마치 물결치듯 늘어서 있는 이곳에서 보행자는 자신의 신체와 기둥의 변화하는 관계를 통해 리듬감을 느끼며 마치 홀로 묘지 속으로 빠져든 듯 편치 않은 기분 속에서 나름의 상념에 빠져들게 된다. 부지의 남동쪽 지하에는 800평방미터에 달하는 정보센터가 자리잡고 있다.
'유럽에서 학살된 유대인들을 위한 기념비'에는 독일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이른바 '반(反)-기념비(countermonument)'의 정신이 스며들어있다. 기념비 특유의 체제순응적 성향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과정에서 등장한 이 기념비 아닌 기념비는 예술적 상징화를 거부하고 어떠한 정연한 논리와 의미망 안으로도 편입되지 않으려한다. 그것은 고정되어있기보다는 일시적이거나 비가시적인 형태로 등장한다. 아이젠만의 이른바 '해체주의 건축'은 기존의 권위주의적인 기념시설을 거부하고 거대한 규모와 공공성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의 가능성으로 열린 새로운 장소를 탄생시켰다. 물론 이와 같은 거대시설이 과연 국가가 마련한 의미망에 포섭되지 않고 그것을 진정으로 '해체'할 수 있을지는 가히 의문이다. 비판자들은 이런 종류의 시설이야말로 기억을 실제적인 장소에서 유리시킴으로써 독일인들로 하여금 쉽사리 피해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민족의 죄과에 대한 고백이 새로운 자긍심으로 전화되는 것은 실로 역설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의 사례는 기념비의 가치와 한계에 대해 반추해보도록 만든다. 멋진 기념비와 추모시설을 완공시킴과 더불어 우리는 그만 기억의 짐도 벗어던지려하지는 않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기념비의 참된 가치는 과거를 환기시키는데 있다. '반기념비'는 기념비가 현재와 과거를 매개하는 '매체'임을 입증하고자 스스로를 기꺼이 소멸시킨다. 기념비는 우리를 자극하고 일깨울 때만이 가치가 있으며, 한낱 상징물로 전락하여 우리를 타성에 젖게 만들 때 본연의 가치를 잃는다.
세월호 침몰로 학생을 잃은 단원고 교실을 떠올려보자. 이 교실의 존치여부를 둘러싼 논란은 당국의 입장에서는 이미 타협의 여지가 없을 것이고 학교 입장에서도 학교 안에 위령시설을 두는 것이 여러모로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실용적인 해결방안을 강구할 사안이 아니다. 어딘가 다른 곳에 번듯한 시설을 만들어 한데 몰아 추모하자는 것은 이제는 그만 잊고 싶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 소중한 생명들이 떠나간 자리에서 어찌 부담스럽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계속 분노해야한다. 계속 미안해야한다. 끊임없이 불편해야한다.
예술이 나서야할 자리
일본 대사관 앞의 소녀상은 확실히 독특한 면모를 지닌다. 옛 소녀들을 대변하는 듯 하지만 구체적인 그 누구도 지시하지 않는다. 그저 고통을 환기시킬 뿐이다. 걸상에 손을 꼭 쥐고 앉아 있는 맨발의 소녀는 확실히 민족적 수난을 상징한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통상적인 기념비처럼 예술적 풍모를 띠지 않는다. 단발머리에 순진무구하고 앳된 얼굴이지만 무표정하기 이를 데 없으며, 조각처럼 아름답다는 상투적 표현에 맞지 않는 평범한 서민층의 용모이다. 절제되다 못해 급작스럽게 돌로 굳어버린 듯한 형상은 우리가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자신을 호락호락 열지 않는다. 이 무뚝뚝한 소녀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증언하면서도 설명을 늘어놓지 않는다. 그 대신 옆에 의자를 비워두어 우리를 낯선 과거로 초대한다. 부산외대 인도학부 이광수 교수가 페이스북을 통해 주장한바 있듯이, 소녀상의 미학은 "여백의 미"이다. "예술의 힘은 독자(관람자)가 머무를 수 있는 여백에 있다."
이 만만치 않은 소녀와의 대면은 우리로 하여금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어떻게 다루어야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효과적인 처방을 얻기 위해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정신분석학 서적을 뒤적여본다. 이미 학계에서 다각도로 논의된 바 있는 '애도와 멜랑콜리'의 이론은 우리가 과거의 고통과 대면하는 두 가지 방식을 거론한다. 양자는 상관적이면서도 상이하다. 사랑하는 대상을 잃었을 때 우리는 충격에 빠진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인정하기보다 부재하는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다른 대상으로 관심을 옮겨가야함에도 강박적 집착이 반복될 때 우리는 흔히 '우울'로 번역되는 멜랑콜리의 상태에 빠져든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라진 대상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만 다시금 "자유롭고 장애없이" 살 수 있다. 이른바 애도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상실된 대상을 집착의 대상이 아닌 온전한 기억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예컨대 학문적 설명이나 예술적 상징화 작업을 통해 우리는 아픔을 "승화"시킨다.
멜랑콜리란 확실히 병적인 상태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태도이다. 내가 그 대상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어찌 쉽게 정리하고 잊을 수 있으랴. 상생을 운운하는 손쉬운 화해의 제스처야말로 내 아픔이 거짓임을 입증하는 것이 아닌가. 사과를 했으니 이제는 용서하라고? 대체 누가 누구를 용서하라는 말인가? 더구나 용서받으려면 사과하는 측이 불가역적이니 뭐니 하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돌이킬 수 없는 고통과 상실을 받아들이는 용서야말로 시간의 '불가역성'을 넘어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소녀상은 우리를 계속해서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아니 그래야한다. 소녀상은 반드시 일본 대사관 건너편에 그대로 놓여 있어야한다. 그래야 제대로 불편하기 때문이다. 만약 유사한 동상을 도처에 세운다면 마치 교회의 십자가처럼 숭배의 대상이 되어 우리를 타성에 젖게 만들 것이다. 소녀상은 그 자체로 진실을 대변한다기보다는 진실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애타는 마음들이 만나는 장소이다. 외교적, 이데올로기적, (통상의)예술적 접근을 거부하는 예술의 참된 저력이 효력을 발하는 바로 그 지점이다.
끝날 줄 모르는 집착이 현명하지 않다면, 그냥 현명하지 말도록 하자. 우리가 과거로부터 울려나오는 절규에 귀를 막고 거짓 화해로 손을 내미는 순간 숨죽이고 있던 가해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득세하게 될 것이다. 이미 한 세기 전에 독일 사상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 성찰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경고한 바 있다.
"고인이라도 승리한 적으로부터 안전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적은 승리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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