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 그룹 간판 계열사가 망해간다. 박용만 두산 그룹 회장이 SNS 활동으로 쌓아둔 괜찮은 이미지는 한순간에 날아갔다. 롯데 그룹은 진흙탕에서 나올 기미가 없다. 경영권 분쟁이 형사 소송으로 이어졌다. 수렁 아래로 잡아당기는 힘만 커지고 있다.
두산 그룹과 롯데 그룹이 한국 경제의 간판은 아니다. 삼성, 현대차, LG, SK 등 4대 재벌보다 아래 규모다. 그런데 두산 그룹과 롯데 그룹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걸 들여다보면, 한국 경제가 지금 선 자리를 엿볼 수 있다.
'처음처럼' 업체 사고판 재벌의 공통점
두산과 롯데 모두 오래 된 기업이다. 두산 창업자 박승직은 대한제국 말기 보부상 출신이다. 롯데는 해방 직후에 설립됐다. 이는 현대적인 지배구조를 갖추지 못한 채 성장했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기업 지배구조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시작된 건 1997년 외환위기 이후다. 그 전에 창업한 기업들은 이 시기를 거치면서, 격렬한 진통을 겪어야 했다. 오래된 기업, 규모가 큰 기업일수록 진통이 컸다.
두산과 롯데 역시 1997년 이후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당시 신자유주의 경영 이념이 급격히 확산됐다. 이들 그룹 경영 후계자들에겐 기회였다. 박용만 두산 그룹 회장, 신동빈 한국 롯데 그룹 회장 모두 미국 경영학 석사(MBA) 출신이다. 둘 다 창업자 집안 안에서는 비주류였다. 하지만 미국식 경영학에 밝았다. 이는 경영권 경쟁을 하는 다른 형제들과 비교되는 강점이었다.
박용만, 신동빈 회장은 모두 첨단 금융기법에 해박했고, 이를 잘 활용했다. 둘 다 기업 인수 합병(M&A)에 적극적이었다. 흔히 기억하는 두산은 술 만드는 회사다. 그런데 박 회장은 '처음처럼' 브랜드로 유명한 두산주류를 팔았다. '처음처럼' 소주는 지금 롯데주류가 만든다. 신 회장이 두산주류를 샀다. 신 회장은 2000년 이후 10년 간 35개 기업을 인수했다.
박용만 "(밥캣 인수 가격) 그게 어떻게 비싼 겁니까"
박용만 회장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의 간판을 바꿨다. 두산은, 술 대신 중장비를 파는 회사가 됐다.
1990년대 말 그룹 구조조정을 통해 주요 계열사를 매각했다. 당시 소비재 및 유통업이 아닌 수출 제조업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2007년 미국 중장비 업체 '밥캣' 인수가 절정이었다. 2011년 3월 <코리아타임스> 인터뷰에서 박 회장이 자세한 이야기를 했다. '밥캣' 인수에 너무 많은 돈을 쓰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을 그대로 옮긴다. (☞바로 가기)
"인수 합병(M&A) 가격을 쓰는데도 두산중공업 때도 그렇고, 두산인프라코어 때도 그렇고 인수할 때 경쟁하는 입찰자(bidder)보다 두 배, 한 배 반 이렇게 썼어요. 그런데도 약정한 기간보다 1년 앞서 시장에서 주가가 약정한 것보다 올라갔지요. 일반사람들이 봤을 때 두산이 많이 썼다? 그러면 내가 증명을 하라고 합니다. 증명 못해요. 당신이 볼 때는 많이 썼지만 나는 싸게 쓴 거야. 왜? 가져왔고 돈을 벌었으니까. 이렇게 설명을 하거든요.
그런데 밥캣의 경우는 예기치 못한 시장의 위기(미국발 금융위기)가 일어났죠. 그런데 나한테만 왜 금융위기가 일어날 것을 예상 못하고 그것을 샀느냐. 난 내가 본 시장의 미래와 내가 생각하는 가치를 봐서는 나는 적정 가격을 지불했어요. 그런데 미국 시장의 60퍼센트가 다운이 되는 쪽으로 갔기에 결과적으로 비싼 것처럼 되어버렸지. 그게 어떻게 비싼 겁니까."
신자유주의 시대의 기업 성공 방정식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성장한 기업의 성공 방정식을 보여주는 대답이다. 대략 이런 수순이다.
'첨단 금융 기법으로 자금을 마련한다. 가치가 저평가된 기업을 골라 공격적으로 인수한다. 그 뒤, 구조조정 등을 통해 기업 가치를 끌어올린다. 중국 등 신흥 시장을 공략한다. 성공하면, 몸집이 확 불어난다. 규모는, 그 자체로 권력이다. 규모가 큰 기업은 정부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위기가 닥치면 정부가 돕는다.'
밥캣 인수 이듬해, 세계 금융 위기가 터졌다. 박 회장이 이를 예상 못한 건 어쩌면 자연스런 일이었을 게다. 첨단 금융 기법에 해박할수록, 2008년 금융 위기에 취약했다. 금융상품에 대해 잘 안다는 믿음이 숫자 뒤에 감춰진 위험을 보지 못하게 했다. 박 회장이 딱 이런 경우다.
박 회장의 답변에 담긴 성공 방정식은 어느 순간, 실패 방정식이 됐다. 중국 등 신흥 시장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과감한 투자는 거대한 손해가 됐다.
신동빈 한국 롯데 회장 역시 마찬가지다. 인수 합병으로 몸집을 키우는 한편, 중국 등 신흥 시장에 활발한 투자를 했다. 그러나 중국 투자 결과가 석연치 않다. 손해 규모에 대해선 이견이 있지만, 손해 사실 자체는 분명하다. 이는 신 회장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경영권을 놓고 싸우는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대표(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는 이 대목을 물고 늘어진다. 신 대표 측 주장대로 중국 투자가 명백한 실패였다면, 롯데 그룹 경영권 분쟁은 더 깊은 수렁에 빠질 게다. 첨단 금융 기법으로 자금을 확보해서 신흥 시장에 투자하는 성공 방정식이, 한국 롯데의 족쇄가 될 수 있다.
중하위 재벌의 '확대경영' 실패
앞서 두산과 롯데의 위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엇비슷한 사례가 많다. 무리한 자금 확보, 신흥 시장 또는 신기술에 대한 지나친 기대, 매출 순위에 대한 집착 등의 조합이 기업을 망친 경우다. 웅진 그룹이 좋은 사례다. 무리하게 자금을 확보해서 건설업에 진출했다. 그룹 매출 순위에 대한 총수의 집착이 주요 이유였다. 한편으론 태양광 등 신사업의 전망에 대해 너무 큰 기대를 걸었다. 미국 MBA 출신 전직 경영 컨설턴트들을 대거 영입해서 요직을 맡겼다. 그러다 주저앉았다. 금호 그룹, 동부 그룹 등도 이런 특징들을 부분적으로 공유한다.
외환위기 이전과 이후의 성공 방정식을 결합했으나 실패한 경우다. 외환위기 이전의 성공 방정식은 은행 차입을 통한 몸집 키우기였다. 외환위기 이후엔 복잡한 금융 기법을 활용해 인수 합병을 하는 게 성공 방정식이었다.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확대 경영'이다. 5위권 아래 재벌들이 상위권 진입을 꿈꾸며 이런 도전에 나섰다. 그러나 실패해서 위기를 맞은 게 지금 상황이다.
1위 재벌의 '축소경영', 중하위 재벌도 동참
그 사이, 1, 2위 재벌은 다른 길을 갔다. '축소 경영'이다. 특히 삼성이 그렇다. 현금을 쌓아두기만 했다. 현금을 쓰겠다고 한 건, '주주 달래기' 용도뿐이다. 사업 확장을 위해 돈을 쓴다는 발표는 아직 없다.
소프트웨어 경쟁력 강화를 위해 미국 실리콘 밸리 기업을 인수하는데 돈을 쓰지만, 그 역시 '축소 경영'이다. 국내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키우는 대신, 외국 첨단 기업을 사들이겠다는 것이다.
기업 실적이 좋은데도 직원을 줄인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지난 1년 동안 삼성전자를 비롯한 13개 주력 계열사에서 전체 직원의 2.5%가 넘는 5700여 명이 삼성을 떠났다. 삼성전자에서도 999명이 떠났다.
두산인프라코어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감원은, 5위권 이하 재벌 역시 '확대 경영'을 포기했다는 신호다. '그룹 순위'를 올려서 창업자 가족 안에서 인정받기보다, 일단 살아남는 게 더 급해졌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삼성 등 상위 재벌이 '축소 경영'을 포기할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상위 재벌이 '축소 경영'을 하고 하위 재벌이 '확대 경영'을 할 땐 대기업 퇴사자에게 그나마 희망이 있었다. 중하위 재벌에 취업하면 된다. 삼성 퇴직자는 재취업이 잘 된다는 통념이 그렇게 생겨났다. 하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어려워졌다.
물가관리와 제조업 매출, 건국 이래 최초 사례
정부는 지난 16일 '2016년 경제정책 방향'을 발표하면서 기존의 경제성장률과 함께 경상성장률도 관리하겠다고 했다. 경상성장률이란 경제성장률에 물가 상승률을 합친 개념이다. 정부 발표는, 물가가 너무 떨어지지 않게끔 관리한다는 뜻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한국 현대 경제사는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이었다. 박정희 정부 시절이 유난히 심했다. 물가는 당연히 오르는 거였다. 부동산은 특히 그랬다. 따라서 돈을 빌려서 자산을 사면, 대부분 이익이 났다. 금리보다 물가가 더 빨리 올랐으니까. 그래서 당시엔 은행에서 돈을 많이 빌리는 게 능력이었다. 너도나도 돈을 빌리기만 하면 안 되므로, 박정희 정부는 가계 대출을 통제했다. 대신 기업이 수혜자가 됐다. 한국 재벌의 '확대 경영' 전통은 이런 역사에서 비롯됐다.
박근혜 정부가 내놓은 '2016년 경제정책 방향'은, 아버지 시대의 '확대 경영'이 불가능하다는 선언이다. 사실, 등 떠밀린 선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제조업 매출은 약 1726조 원이다. 그보다 한 해 전인 2013년보다 10조 원 가량 줄어든 수치다. 제조업 매출이 줄어든 건, 관련 통계 작성을 시작한 1961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사실상 건국 이래 처음이다. 경제 환경이 나빴던 적은 전에도 있었다. 그때마다 원화 가치가 대폭 떨어지면서, 제조업 매출을 지탱했다. 사상 처음으로, 이런 구조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 지난 시대의 성공 방정식이 안 통하는 건,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축소 경영'의 시대,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 가는 길이다. 그런데 길잡이는 여전히 박정희식 '확대 경영' 시대를 그리워하는 관료와 정치인이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