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87년 이후 30년
2015년이 채 보름도 남지 않았다. 새해가 되면 1987년 이후 29년째다. 1987년 태어난 아기가 곧 서른 살이 된다. 한 세대가 지났다. 벌써 그런가. 1987년의 벅찼던 희망과 기대가 어제 일 같은데, 벌써 그렇다. 그 30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세상은 어떻게 변했는가?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누구는 지금이 1972년의 유신 전후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말하고, 누구는 더 거슬러가 1894년 청일전쟁 전야의 상황과 비슷하다고까지 말한다.
민주화운동 세력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이제 대한민국은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민주주의의 다리를 건넜다고 확신했다. 4.19 때처럼 역사가, 민주주의가 거꾸로 다시 돌아가는 일은 결코 없다고. 60-70-80년대 30년 동안, 4.19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힘이 자라났고, 그랬기에 그 철벽 같았던 전두환 군사독재를 밀어뜨릴 수 있었다고. 이제 한국은 제대로 된 민주국가, 정상국가가 되었다고. 어둠의 임계점을 넘어 광명의 땅으로 들어섰다고. 세계도 환호하며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고. 역사발전의 곧고 탄탄한 정상궤도로 확실히 진입했다고. 다소의 저항이 있겠지만 시대의 대세는 돌이킬 수 없다고. 그런데 시간이 꼬여 버린 듯하다. 다 지나왔다고 생각해왔던 시간 안으로 거꾸로 다시 떠밀려가고 있다는 느낌이니 말이다.
지난 10월 '백년포럼'에서 이부영 전 의원은 1987년 민주화운동 성취 이후, 주도세력에게 '그림', '로드맵'이 없었다고 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림이 분명했다. 그 그림은 4.19 이후 30년의 민주화운동이 산출한 것이다. 이 그림은 직선 몇 개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그림에 있었다. 1987년 6월 항쟁 주도 세력은 이 그림처럼 앞에 열린 길이 탄탄한 평지 위의 직선 길이라고 생각했다.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획득한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를 열심히 하면, '경제사회적 실질적 민주주의'가 자연스럽게 따라 이뤄질 거라고 생각했다. 평탄한 호수 위에 돌을 하나 첨벙 던지면 차츰차츰 확대되어 가는 동심원처럼.
그런데 그 후 30년의 실제는 어떠했는가. 1987년 6월 항쟁 10주년째에는 'IMF 사태'를 당했다. 20주년에는 '6월 항쟁을 통해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 내지 정치적 민주주의는 달성했으나 경제·사회면에서의 실질적 민주주의는 여전히 부실하거나 심지어 후퇴했다'는 식의 진단들이 나왔다. 이제 30년이 코앞인데, 이제는 그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 정치적 민주주의조차 제대로 '달성'된 것이었는지 의문이 드는 지경이 되었다.
나는 1987년 6월 항쟁 주도 세력이 개인욕심에 빠져 민주화의 대업을 이루는 데 실패했다는 식의 설명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식의 진단은 흔히 동기가 의심스럽거나, 혹은 너무 단순하여 그렇듯 의심스러운 동기에 이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런 이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정치권으로 들어간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할 이유도 없는 것 같다. 중요한 점은 나름 열심히 한다고들 했는데 엉뚱한 곳에 와 있는 원인이 뭐냐다. 직선을 따라 30년 열심히 해왔다고 생각해 왔는데 정신을 차리고 다시 둘러보니 왠지 출발한 지점으로 다시 돌아와 있다는 느낌, 기분 좋지 않은 기시감이다.
땅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직선이라 생각했던 길이 직선이 아니었다. 지각이 변동하고 있었다. 지각판 변동처럼 대륙이 뜯어졌다 달리 합쳐지고,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되기도 하는 큰 변화가 진행 중이었다. 좌니 우니, 동양이니 서양이니, 진보니 보수니, 이런 개념이 터를 두고 있는 지각 자체가 크게 뒤바뀌고 휘어지고 있었다. 1987년 직후인 1989~1990년 동구권과 소련이 붕괴했는데, 이걸 단지 사회주의 이념의 붕괴로만 이해하는 것은 엄청난 단견이었다. 이제 돌이켜보면 16세기에 시작되어 점차 세계 전체로 퍼져나간 장기 유럽내전이 이윽고 종식된 것이었다. 이 점이 지각판 변동의 핵심이었다.
2. 지각판 변동=냉전 종식=장기(長期) 유럽내전의 종식
'냉전 종식은 16세기에 시작되어 점차 세계 전체로 퍼져나간 장기 유럽내전의 종식이었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유럽 내전'에서 생겨났던 여러 대립 프레임 자체가 시효만료가 되었다는 뜻이다. 자본주의-사회주의라는 개념 자체와 그 양자의 대립구도, 좌-우, 그와 연동된 진보-보수, 또 유럽 내전의 글로벌한 결과물인 서구-비서구의 차별적·대립적 문명관, 이 모든 게 이제 시효 만료가 되었다는 뜻이다.
냉전을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대결이라고들 했다. 이 대립 구도의 연원은 유럽의 1848년 혁명이었다. 이때 사회주의 사상이 현실정치의 힘으로 최초로 출현했다. 그러면 사회주의가 극복대상으로 본 체제, 즉 근대적 자본주의 체제는 언제 성립했는가? 유럽에서 그 초기 형태는 16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지배적으로 된 것은 18세기 후반, 19세기 초반의 서유럽 몇 나라에서부터다. 유럽의 그 16세기는 어떠한 시대였는가? 유럽 국가들이 먼저 종교 문제, 나중에 식민지 문제를 놓고 치열한 전쟁에 돌입했던 때다. 유럽 국민국가와 자본주의는 이때부터 시작된 길고 긴 (갈수록 확산되고 참혹해진) 전쟁 속에서 탄생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말한다, '전쟁이 서구 근대국가와 근대세계체제를 만들었다'라고. 그 근대국가체제와 근대세계체제 안에 자본주의/사회주의, 제국주의(서구)/식민지(비서구)의 대립이 있었다. 냉전은 바로 그러한 근대국가체제와 근대세계체제의 산물이었고, 냉전종식이란 근대국가체제와 근대세계체제가 그 생애 주기(life cycle)의 정점(頂點)을 치고 이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 근대국가 독재권의 본질은 내전 상황의 조성에 있다
독일법학자 칼 슈미트는 유럽사에서 종교개혁으로 촉발된 16세기 종교전쟁(유럽 내전)에서 세속국가가 교회 대신 전권(專權)을 행사하는 권력주체로 성장했음을 주목한다. 그의 장 보댕, 토마스 홉스의 주권론 해석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슈미트, 2010, 1992). 아울러 이 시기와 거의 동시적으로 시작된 "지리상의 발견의 시대"에 "세계의 대지와 바다"가 점차 "유럽 민족들의 전세계적 의식에 의해 처음으로 파악·측량"되고 이를 통해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대지의 노모스(nomos)"가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대지의 노모스'가 "대륙의 공간질서와 자유해(自由海_의 공간질서의 관계에 근거하며, (이후) 400년 동안 유럽중심적인 국제법, 즉 유럽공법(jus publicum Europaeum)을 떠받쳐왔다"고 한다(슈미트, 1995:23).
그는 그리스어 '노모스'란 "다름 아닌 강자의 임의적 권리"를 뜻한다고 풀이하는데(56), 그 핵심은 "육지 취득(Landnahmen)", "바다 취득(Seenahmen)"에 의한 "원초적 분할(Ur-Teiling)", "원초적 분배(Ur-Verteiling)"에 있다(47). 이렇듯 사뭇 거창한(?) 웅변을 통해서 슈미트는 유럽 근대주권 형성의 '비밀'과 '암호'가 부단한 전쟁 수행, 이를 통한 대지와 바다의 지배권 획득-초기 근대 유럽의 오랜 내전, 그리고 그보다 더욱 길었던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식민지 쟁탈 전쟁(그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에 있었음을 공공연하게 자백한 셈이다.
슈미트 주권관의 핵심은 그의 출세작이 되었던 <정치신학>(1922)에서 집약돼있다. 그는 여기서 근대주권의 본질을 "예외를 결정하는 자"라는 점에서 찾고, 이는 "제한 없는 권력" 또는 "모든 현행 질서를 효력 정지시키는 권한"을 보유한 주체라 하였다(슈미트, 2010:16,22,24). 이렇듯 '예외를 결정하는 자'로서의 주권, 즉 "국가적 권위의 본질"은 그러한 예외 결정이 "법규범으로부터 분리되고…국가의 권위는 법을 만들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고 강조한다(26). 이리하여 유럽 정치신학의 역정은 중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corpus mysticum)' 개념에서 16세기 '왕의 두 신체'를 거쳐, 17~18세기에 왕권(=주권) 무오류론으로 발전했다가, 이윽고 20세기 슈미트에 이르러 '법 위, 법 밖의 독재권'의 주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슈미트의 정치신학적 예외 주권론은 허다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현대 주권론과 국제관계론 영역에서 상당한 영향력과 추종자를 유지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의 주장이 비단 과거의 나치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서구 주권의 한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고, 이제 서구 주권 형태가 세계적으로 확산된 오늘날 그러한 특성이 서구·비서구, 좌우 구분 없이 널리 관찰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는 아감벤이 냉전 종식 이후 초강대국 미국이 전세계를 대상으로 보여준 패권 행태에서 그러한 정치신학적 예외 주권의 면모가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아감벤, 2008, 2009).
물론 서구 주권론이 슈미트류의 전권(專權)적 주권론 하나로 집약되지는 않는다. 로크-몽테스큐-칸트 등으로 이어지는 자유주의적·분권적 주권론, 스피노자-제퍼슨 등의 민주적 주권론 역시 큰 흐름을 이루어왔다. 여기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 어떤 흐름도 유럽 근대 300~400년간의 오랜 내전과 해외팽창전쟁의 와중에서 형성되었다는 서구 근대사의 엄연한 사실 밖에 존재할 수는 없다. 그래서 슈미트는 자유주의의 배경에는 영미 해양패권의 예외주권이 있고, 좌파 혁명운동의 이면에도 전위당의 독재주권론이 있다는 식으로 그의 예외주권론을 정당화하고 일반화했다. 서구 담론 내에서 슈미트 주권론에 대한 반론과 비판은 대단히 많다. 그러나 진정으로 근원적인 비판은 사뭇 궤변적인 그의 논변이 서구주권론·현대주권론에 내재한 근원적 문제를 날카롭게 드러냈다는 점을 인식하고 인정한 위에 가능할 것이다. (논문 <朱熹 主權論의 현재성> 중)
3. 분단체제에서 공존체제로
동구권 붕괴 이후 '냉전 종식'이 요란하게 선언되었지만, 그 실제 의미는 감추어졌다. 예를 들어 요란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이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긴 유럽 내전의 최종 승자가 되었고, 그 최종 승자가 이제 미래 역사의 단독 종주권을 행사하게 되었다는 선언이었다. 이는 유럽 내전의 종식이 아니라 정반대로 유럽내전 상황의 승자독점적 연장, 영구집권을 포효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한국의 냉전세력이 이 주장에 환호했던 것은 당연하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여기서 나왔다. 미국 편에 섰던 승리자=점령자의 마음으로, 미국이 코치하는 대로, UN 남북한 동시가입, 한소수교, 한중수교를 차례로 수행했다. 입으로는 '냉전 종식'이었지만, 마음으로는 냉전승리세력의 단독영구집권이었다. '북방정책'이 왜 국내에서 '공안정국'과 짝을 이뤘는지도 여기서 자명해진다. 냉전승리세력의 영구집권은 냉전승리세력의 세계독점이기도 하다. 이 판의 양날의 칼을 순진하게도 잘못 읽은 것이 우선 YS였다. 그 승리가 당연히 미국편에 섰던 대한민국의 것이기도 하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무차별 도입했던 소위 'Segyehwa(세계화)'(미국 주도 세계 독점의 표어였던 'globalization'의 번안어다)의 결과는 참혹했다. 소련이 붕괴된 이상 이제 세계독점의 자본논리는 구 냉전 시대와 같은 서방/동방의 구분을 할 필요가 없었다. 세계독점의 CEO들에게는 정말 세계가 평평해졌다. 이제 한국이라고 국가부도에 빠지지 않도록 미리 챙겨주고 도와줄 이유가 없다. 거꾸로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세계가 평평하지 않게 되었음을 알아야 했다. 제 위치를 착각하고 자신이 미국이라도 된 양 미국식 'globalization'을 덜컥 삼키려다 거꾸로 '세계화당하고' 말았다.
김영삼 정부는 1987년 6월 항쟁 주도세력의 강점과 약점을 잘 드러냈다.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같은 문제, 직선형 문제의 직선적 해결에는 통쾌한 힘을 발휘했다. 그의 과거의 투쟁경로가 이런 패턴으로 프로그램되어 있었다. 그런 식의 게임에는 강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지형 자체가 변하고 있는 문제, 지각판이 움직이고 있는 상황의 문제에 관해서는 자멸적인 패착을 이어갔다. YS는 민주화의 주역이지만 냉전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민주주의관은 냉전 틀 안의 민주주의관이었다. 그의 '냉전 종식' 의식은 후쿠야마식 '역사의 종언'을 벗어나지 못했다. 후쿠야마식 자본주의, 민주주의를 남에서, 그리고 북으로도, 계속 직진하여 일로매진 완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과연 재야세력이나 DJ는 그러한 냉전형 민주화운동의 프레임에서 자유로웠던 것일까? 그렇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은 이 세력이 표방해온 '분단체제론'과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모토다. '분단체제'란 '분단체제 극복'을 소리 높여 강조할수록 '분단체제'의 구속력이 강해지는 체제다. 1989년 문익환-임수경-서경원의 연속 방북이 격화시킨 '공안정국'이 그 일례다. 그 논의를 다듬어온 백낙청 교수가 강조해 왔듯 분단체제는 냉전체제의 하위범주다. 따라서 '분단체제 극복운동'이란 '냉전 프레임 내에서의 민주화운동'를 말한다.
냉전종식 이전까지는 '분단체제 극복운동'이 민주화운동 세력을 결집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냉전체제 민주화운동이란 냉전체제의 구속력(=탄압)에 비례하여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노태우 정부의 발 빠른 '북방정책'에 1987년 6월 항쟁 주도 세력은 오히려 당황하고 있었다. 겉보기로, '북방정책'이 냉전체제를 앞장서 허물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착시, 착각이었다. 앞서 말한 후쿠야마식 시각, 냉전상황의 승자독식적 연장일 뿐이었다. 그러나 당시 1987년 6월 항쟁 주도 세력은 '실제 현실은 그것이 아니라 이것이다'라고 내놓을 만한 안목이 없었다. 어쩌면 오늘날까지도 냉전적 프레임 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분단체제 극복'을 소리 높일수록 분단체제의 구속력이 더욱 커지는 구조가 (노무현 정부 중반 이후부터는) 오히려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심지어 유신체제의 회귀라는 불길한 소문까지 떠돌게 된 형편이다.
'분단체제'와 '분단체제 극복' 프레임, 즉 '냉전체제'와 '냉전체제 민주화운동'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분단체제'라는 말부터 버려야한다. 분단체제는 냉전종식과 함께 이미 시효 만료된, 사멸하고 있는 체제다. 죽어가는 현실이 아니라, 새로 자라나고 있는 현실, 미래가 확실한 현실을 붙잡아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공존체제'라 부른다. 그것이 '다른 백년'의 확실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분단체제를 내려놓고 공존체제를 내세울 때, '다른 백년'의 프로그램이 열린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