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면서 일으킨 파행과 논란은 한국 사회의 역사적 기억상실증과 '역사전쟁'의 전개양상을 잘 보여준다.
교학사 교과서는 검정과정에서 부실과 오류, 편향적인 역사 인식, 역사 왜곡으로 논란에 휩싸였으나 교육부는 무법과 탈법을 오가면서 교학사 교과서의 검정 통과를 위해 애썼고, '불량 교과서'로부터 비롯된 사안을 정부, 여당, 그리고 보수언론까지 나서서 이념논쟁으로 만들었다. 교학사 교과서 필자들은 정부와 여당은 물론 보수언론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검정을 신청한 나머지 7종의 한국사 교과서를 친북좌파 교과서로 매도하는 이념공세를 펼치며 교육현장 진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학사 교과서는 0%대의 채택률을 기록했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 교과서가 워낙 함량 미달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부의 검정과정과 교과서 내용에 대한 시민사회, 학계, 교육계의 비판과 감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전쟁'으로 포장했지만 사실은 한 부실 교과서로 인해 야기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검정 통과 파문은 뉴라이트 출범 이후 최초로 그들의 역사 인식을 담은 교과서가 검정 교과서 시장에 진입하고, 또 교과서로서 결격 사유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이유에 의해 채택되는 선례를 남겼다. 그 과정에서 교육부가 헌법에도 명시된 교육의 전문성과 자주성,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했을 뿐만 아니라 절차적 정당성마저 잃었다는 점은 특기할 필요가 있다.
2015년 가을,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은 2년 전 정부가 걸었던 전철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역사분쟁은 나름대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1990년대에 김영삼 정부가 '역사바로세우기'를 표방하며 과거사 청산에 나서자 한국의 두 보수언론사가 이승만과 박정희 연재를 통해 현대사 재해석을 시도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신문 한 면을 할애하는 파격적 편집으로 장기간 이승만과 박정희의 생애를 연재하였는데, 그 연재가 지향하는 것은 두 사람에 대한 일종의 이미지 재창출 작업이었다. 특히 그들을 '건국'과 '근대화'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하면서 그들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자기 부정과 혐오의 인식론'으로 매도하고, 그것에서 벗어나 생산적인 인식론을 바탕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새로운 틀을 세울 것을 주장했다.
보수언론의 현대사 재해석은 김영삼 정부가 추구하던 과거사 청산에 반대하고, 문민정부와 과거 독재 정권들의 차별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는 보수언론의 현대사 재해석 작업이 김영삼 정부의 개혁에 공세적 비판을 가함으로써 지배층 내 수구세력의 헤게모니를 재확립하고, 수구세력의 역사적 복권과 지배이념을 재창출하는데 적극적으로 이용되었음을 의미한다.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 논란이나 최근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은 20년의 시차를 두고 1990년대의 현대사 인식을 둘러싼 논란을 재연하고 있다. 교학사 교과서가 근현대사 서술에서 관철하고자 했던 핵심 내용이나 정부, 여당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주장하며 언급한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발언은 모두 1990년대 두 신문사가 주장했던 내용의 판박이다. 그 논리나 논리의 관철방식도 두 신문이 구사했던 것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우선 특정인에 대한 평가로 그들이 살았던 시대에 대한 평가를 대체하고, 이를 통해 한국현대사 전반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한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구체적 해명을 제시하기보다는 독자들과 비판자들에게 '역사를 보는 눈과 틀'을 바꿀 것을 강요한다. 그러한 관점과 인식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이념적 차이나 정치적 견해 차이로 치환하고, 이를 좌파적 인식으로 매도한다. 전형적인 색깔론이자 사실상 자신의 정파적 이해관계와 관점을 역사를 매개로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셈이고, 역사를 정치적 도구로 만드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역사는 탐구의 대상이지 정략과 전쟁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 우리 사회가 역사를 위해 해야 할 일은 역사적 정체성과 상상력의 내용을 심화하고, 그 품과 폭을 넓힐 수 있도록 장려하는 것이지 그것을 제한하거나 제약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이 국민 대다수가 동의할 수 없는 정체성을 강요하는 것을 사전적으로 정의하면 독재이고,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곳에서 역사는 지혜를 길어 올리는 샘이 아니라 공동체의 무덤이 된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에 드러난 정부와 권력의 역사교육에 대한 부당한 개입은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시중의 우스갯소리를 연상시킨다. 그 우스개는 날로 진화 중이다. 대학 교수는 조교를 시켜서 넣으면 되고, 교육부는 요식행위에 불과한 각종 위원회와 소신도 양심도 없는 학자들을 동원해서 넣으면 된다는 것이다. 정부가 강행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역사교육계와 역사학계는 물론 국민 일반의 공분을 불러일으켰고, 전국민적 반대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이 역사교육과 역사학의 본래의 목적을 훼손하고, 헌법이 보장한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위반하여 결국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침해할 것이며, 유엔도 인정한 세계 시민의 보편적 기준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교육권, 문화권 등의 인권을 훼손한다는 것이 비판과 반대의 주된 이유이다. 하지만 정부는 그런 비판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정부의 엄격한 심사를 통해서 검정을 통과한 기존 교과서들의 현대사 서술 내용이 편향되어 있다는 자가당착의 논리와 거짓말을 반복할 뿐이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역사적 해석 대신 획일적 사고를 강요하는 것이고, 정권의 이념과 정책을 무리하게 내용에 끼워 넣으려는 의도에서 강행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의거해 교육이 실시된다면 교육현장을 황폐화시킬 것이고, 그 최대피해자는 미래세대인 학생들이라는 비판과 경고가 지배적이지만 정부와 집권층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이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우스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고, 또 그것을 다른 희생양에게 강요해서 목적을 관철하는 무책임성을 풍자하고 조소하는 일종의 블랙유머다. 정부는 역사학계와 교육현장의 고언과 건설적 제언, 그리고 국민의 비판과 반대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기어코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으려 하고 있다. 무엇보다 학대받는 코끼리에게 큰 불행이 아닐 수 없고, 종내 실현 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최근 사회 각 방면에서 민주주의 위기론이 날로 고조되고 있지만 역사학과 역사인식, 역사교육의 측면에서도 문제는 민주주의다.
한국 사회의 민주화 도정에서 역사학은 나라의 역사적 정체성을 쇄신해왔고, 또 공동체의 역사적 상상력의 폭을 넓히는데 기여해왔다. 그것은 동시에 대중들의 역사의식을 심화시키고 확장하였다. 이 작업은 한국 사회와 역사학계가 공동으로 이룬 성과이고, 민주화의 진전에 따라 다양한 역사적 사고와 실험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성과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역사학은 상보적 관계에서 서로를 지지, 지원하면서 발전해왔다. 최근 들어 한국 사회에서 역사인식의 퇴행을 강요당하는 현상이 빈발하고 있지만 지난 역사가 보여주듯이 그러한 반민주적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강요된 퇴행을 극복하기 위한 민주적 역량의 결집과 민주공화국 쇄신을 위한 새로운 역사적 상상력의 창출과 확충이 필요한 때이다.
지난 11월 14일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정부의 노동개혁에 반대하고,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민중총궐기대회에서 69세의 농민 백남기 씨가 경찰 차벽 앞에서 경찰이 직사한 물대포를 맞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는 서울대병원으로 후송되어 뇌출혈 수술을 받았으나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깨어나지 못한 채 사경을 헤매고 있다. 1980년대를 "응답하라 1988"과 같은 드라마를 통해서나 불러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80년대는 드라마로 불러내야 볼 수 있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의 현실이다. 그도 그렇고 이한열 열사도 그렇고, 평생을 땅을 일구며 살아온 사람,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묵묵히 노력해온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기 위해 거리에 나섰을 때 국가로부터 받는 대접의 폭력성과 야만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바뀐 것이 없다. 그저 백남기 씨를 열사 반열에 올리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그의 자식과 손자는 아직도 그로부터 들어야 할 얘기가 많이 남았고, 우리 사회 역시 그로부터 경청해야 할 '역사'가 너무 많이 남아 있다. 그가 하루 속히 의식을 회복하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한다.
2015년 가을 한국 사회에서 서로 시대를 달리 하는 여러 개의 데자뷰를 동시에 목도하고 있지만 중·고생들로 이루어진 '국정교과서반대 청소년행동'은 이 글을 쓰고 있는 11월 21일 오후 서울 광화문역 앞에서 국정교과서 반대 7차 청소년 거리행동을 이어갔다. 그들은 다양한 역사교과서를 원한다며 박근혜 정부가 지금이라도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국정화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청소년행동은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인 오는 12월 10일에는 유엔에 중·고교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문제점을 알리는 청원을 직접 제출할 계획이라고 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정부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철회하라!
(이 글은 <내일을 여는 역사> 2015년 겨울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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