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개인의 지극한 효성으로부터 비롯된 역사 교과서 국정화 파동이 종국에는 국민정신 개조 캠페인이 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1989년 문화방송(MBC) <박경재의 시사 토론> '박근혜 씨, 아버지를 말하다'에서 "나는 5.16을 구국의 혁명이라고 믿고 있다"며 "그동안 매도당하고 있었던 유신, 5.16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해야 한다. 그게 뭐가 잘못됐느냐고 당장 비난을 받더라도 사람들을 설득시켜야 한다. 그게 정치"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서 "그래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런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 일이다. 부모님에 대해서 잘못된 것을 하나라도 바로 잡는 것이 자식 된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녀의 역사 인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흥미 있는 발언인데 정작 내 눈을 잡아 끈 것은 다른 사람을 그러한 역사인식으로 설득하는 것을 '정치'이자 곧 '자식된 도리'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전혀 구분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 교과서 국정화가 역사 교육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의 일환으로 강행되고 있음을 짐작케 하는 발언이다.
그 효성이 이제 국민의 영혼까지 넘보고 있다. 비정상적 혼을 정상적 혼으로 정화(淨化)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행정 예고 기간이 끝나자마자 예정보다 이틀 이른 11월 3일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서둘러서 확정 고시했다. 황교안 국무총리와 황우여 부총리는 이날 정부가 10월 12일 행정예고 했던 '중고 교과용 도서 국검인정 구분 고시안'이 확정됐음을 발표했다.
황 총리는 이날 회견에서 "편향된 역사 교과서를 바로잡아야 학생들이 확실한 정체성과 올바른 역사관을 가질 수 있다"고 역사 교과서 국정화 결정의 취지를 밝혔다. "전국 2300여개 고등학교 중 세 학교만 교학사 교과서를 선택했고 나머지 99.9%가 편향성 논란이 있는 교과서를 선택했다"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정부가 역사 교과서를 다시 유신 시절에나 사용되던 국정 교과서 체제로 되돌리는 핵심 명분은 교학사 교과서를 제외한 나머지 검인정 교과서 모두가 좌편향 됐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호응이라도 하듯 박 대통령은 11월 10일 국무회의에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와 관련해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고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무서운 일"이라며 다시 한 번 국정화 강행 의지를 천명했다.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역사 교과서를 통해서 혼이 비정상인 국민들의 혼을 개조하여 혼이 정상인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것인데, 황 총리의 발언으로 보건대 99.9%가 혼이 비정상 상태 아닌가? 혼을 개조한다니, 왕조 시대에도 불가능했던 일일 뿐만 아니라 그것도 0.1%가 99.9%를 개조하겠다는 것이니 만용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누가 비정상인지 따져볼 일이다. 굳이 떠올릴만한 역사적 사례를 들자면 불령선인(不逞鮮人)들을 황국(皇國)의 충량(忠良)한 신민(臣民)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강압과 회유를 자행했던 식민지기 일제의 전향 공작 정도를 떠올릴 수 있을 뿐이지만 일제도 모든 조선인들의 혼을 충량하게 만들지는 못했던 것 아닌가.
박 대통령이 야당 대표 시절 "(정부가) 역사를 다루겠다는 것은 정부가 정권의 입맛에 맞게 하겠다는 의심을 받게 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를 새로 써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고 언급했던 일이나, 역사 교과서 국정화 홍보와 강행에 앞장섰던 새누리당이 두 해전만 해도 검인정제를 지지했다든가, 이른바 '역사 쿠데타'의 주역으로 원성을 사고 있는 황우여 부총리, 김정배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김재춘 전 교육부 차관 등의 인사들조차 과거에는 국정화를 반대하고 검인정제를 지지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이제 입만 아플 뿐이다. 게다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하기 위해 사전 TF 구성, 예비비 인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위한 또 다른 구분 고시 등 정부가 저지른 불법, 탈법, 규정 위반 등 허다한 '반칙'을 거론하는 것 역시 입이 아프기는 마찬가지이다.
정부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국민 의견 수렴 절차를 진행하면서 여론을 조작한 의혹 역시 속속 드러나고 있다. 심지어 '올바른 역사 교과서 국민운동본부'라는 단체가 의견 수렴 마감 당일 찬성 의견서 4만 장을 인쇄소에서 인쇄해서 '차떼기'로 접수한 사실도 추가로 확인됐다. 성균관대 양정호 교수가 주도하는 이 단체는 새누리당 의원 후원을 받아 국정화 찬성 세미나를 주관했고, 이 단체가 찬성 의견서를 접수한 무렵 교육부는 직원들에게 찬성의견·서명지 20만 부가 도착할 예정이니 밤샘을 해서라도 분류 작업을 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때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언론이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의 친일 독재 미화와 무수한 오류를 비판했지만 이제 총리가 거꾸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이외의 99.9%의 교과서가 편향되었다고 말해도 그의 발언을 문제 삼는 언론이 몇 안될 정도로 언론 상황이 변해버렸다. 역사학자들의 가장 큰 축제로 연례적으로 개최되는 전국역사학대회장에 보수단체 회원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난입하여 그 자리에 있던 연구자들을 향해 욕설과 폭언을 퍼붓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학회장들을 향해 돌진하는 소동을 피워도 그 사실을 '난입'으로 보도하는 언론이 소수인 지경이 되었다. 그 사건을 아예 보도하지 않거나 또는 그것을 '난입'이 아니라 '보수와 진보의 충돌'로 보도하고, 처음에는 난입으로 보도했다가도 두어 시간 뒤에는 슬그머니 보수와 진보의 충돌로 제목을 바꾸어 다는 것이 2015년 한국의 언론 상황이다. 이와 같은 언론 상황이 황 총리가 기자 회견에서 이미 거짓말이라고 판명이 난 교과서 편향성 주장을 버젓이 다시 반복할 수 있는 배경이다. 우리 사회 이곳저곳에서 '기울어진 운동장' 얘기가 넘쳐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언론의 기울기가 가장 가파르고, 이제 도를 넘어섰다.
아무리 기울어진 언론 운동장, 정부의 민의 조작 의혹과 반칙, 정부와 여당 인사들의 말바꾸기를 지적해도, 또 대다수 국민이 나서서 그러한 행위들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라고 외쳐대도 국민정신을 개조하는 중차대한 일이기 때문에 온갖 불법, 탈법 행위를 자행해서라도 기어코 감행하겠다는 것이고, 또 그것이 정치라고 우기는 형국이다.
(이 글은 <내일을 여는 역사> 2015년 겨울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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