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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남쪽 나라, 남해 명소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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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따뜻한 남쪽 나라, 남해 명소기행

1월 섬학교 <남해 노도·보리암·다랭이마을·독일마을·물건리어부림>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한국의 겨울이 그저 추운 줄만 압니다. 하지만 겨울이 따뜻한 곳도 있습니다. 남쪽 지방의 섬들입니다. 겨울 섬에 가면 한국이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남쪽은 겨울에도 파랗습니다. 온화한 해양성 기후 덕에 월동배추와 갓, 무와 마늘이 들판 가득 자라기 때문이지요.

▲남해도 다랭이마을, 바다와 마늘밭에 푸른 물결이 함께 일렁인다. Ⓒ섬학교

겨울의 남해도는 어느 곳보다 따뜻합니다. 서울이 영하 10도를 오르내릴 때도 남해는 영상의 날씨입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면 추운 날도 있지만 대부분은 따뜻하지요. 그래서 겨울이야말로 남해를 여행하기 더없이 좋은 계절입니다. 번잡스럽지 않고 한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2016년 1월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는 제45강으로 남해의 여러 명소들을 찾아갑니다. 1월 9(토)∼10(일)일 1박2일로, 이순신의 마지막 해전이 있던 노량바다도 건너고, <구운몽>의 저자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의 유배지였던 노도에도 가고, 한국의 3대 해수관음성지 중 하나로 기도빨 쎄다는 보리암에도 오르고 다랭이마을과 독일마을에도 갑니다. 물고기들을 불러모으기 위해 조성했던 물건리어부림(勿巾里魚付林)도 산책합니다. 남해도와 이웃한 해산물천국 삼천포의 겨울 해물요리는 덤입니다. 새로운 한 해를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시작해 보지 않으시렵니까. ▶참가신청 바로가기

▲남해의 겨울은 동백의 계절이기도 하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월 <따뜻한 남쪽 나라, 남해 명소기행>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나는 적이 퇴각하는 날 죽어 유감될 일을 없애겠다”

남해대교를 건넌다. 이순신의 마지막 바다, 노량은 하동과 남해도 사이의 해협이다. 노량에서 이순신은 철군하려는 왜군과 전투를 치렀고 그것은 생애의 마지막 전투가 되었다. 이순신은 노량에서 왜군의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지만 그의 죽음에는 많은 의혹이 따랐다. 선조가 보낸 자객에 의한 암살설은 근거가 희박한 가설이나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자살설은 나름 설득력을 지닌다.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동력이 없어진 왜군은 철군을 결정하고 강화협상을 요청한다. 소서행장에게 뇌물을 먹은 명나라 제독 유정은 전장에서 군대를 철수해버렸고, 명의 진린 도독 또한 강화에 응하려 했으나 이순신의 설득으로 진린의 함대는 노량의 전투에 참가한다. 이순신은 “조각배 한척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전투에 나섰다.

퇴로를 열어주고 전쟁을 끝낼 수도 있었으나 결사항전으로 대응한 것은 이순신다운 종결이었다. 모든 전투에 죽음을 각오하고 임했으니 마지막 전투라고 다를 까닭이 없었다. 용납할 수 없는 전쟁을 일으킨 적들이었으므로 적들의 무사귀환 또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순신은 “이 원수만 무찌른다면 죽어도 한이 없다(此讎若除死則無憾)”고 하늘에 기원한 뒤 전투에 들어갔다.

이순신과 진린 함대는 왜군 선박 500여 척 중 200여 척을 파괴하고 100여 척을 나포했다. 이순신은 도주하는 나머지 패잔선들 추격하던 중 총탄을 맞았고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는 유언을 남긴 후 죽음을 맞이했다. 방심했던 것일까. 어째서 이순신은 승전이 확정되고 전투가 끝나갈 무렵 위험 앞에 스스로를 노출시켰던 것일까.

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전투에 임했던 이순신이었지만 전쟁을 끝내기 전까지는 결코 죽을 수 없는 목숨이기도 했었다. 자신이 목숨을 잃으면 나라 또한 사라질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전쟁이 끝났으니 자신의 역할도 끝났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패잔병들을 쫓는 일에 목숨을 걸 까닭이 대체 무엇이었을까. 이순신이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은 여기서 시작된다.

당시 조정에서는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수들을 대우하기보다는 역모를 씌워 제거하려는 음모가 횡행하고 있었고 이 사실을 이순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그 스스로도 큰 공을 세웠지만 누명을 쓰고 처형당할 뻔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웠던 김덕령이 역모의 누명을 쓰고 옥중에서 목숨을 잃었던 터였다.

무능하고 질투심 많은 임금, 모리배들로 가득한 조정, 전쟁이 끝나고 나면 7년 전쟁의 가장 큰 영웅인 자신이, 임금을 능가하는 백성들의 추앙을 받던 자신이 무사하지 못할 것을 이순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았겠는가. 이순신은 전쟁의 종식과 함께 자신의 삶도 끝이 나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을 터다. 그렇다면 이미 정해진 죽음 앞에서 선택만 남았다. 전장에서 명예롭게 죽을 것인가. 전쟁이 끝난 뒤 역모를 쓰고 구차하게 죽을 것인가.

아무리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한들 한 인간으로서 고뇌가 왜 없었겠는가. 혹자는 이순신이 “죽으면 죽는 것이다”라는 확고한 사생관을 가졌기 때문에 아무리 앞날의 위험이 느껴진다 해도 그것 때문에 미리 죽음을 택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평가야말로 이순신을 단순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죽음 앞에 담백하다 했기에 오히려 삶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감정이 없는 기계가 아니고서야 어찌 구차한 죽음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인간 이순신이 이미 정해진 죽음 앞에서 명예로운 죽음을 택했을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하늘로도 이어지고 바다로도 이어지는 끝없이 푸른 남해의 길 Ⓒ섬학교

이순신이 투구를 벗고 선봉에 나섰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후일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고, 이순신의 부하로 노량해전에서 참전해 총탄에 맞아 부상을 입은 몸으로 전사한 이순신을 대신해 전투를 지휘했던 유형은 이순신의 두터운 신망을 받았고 이순신의 최후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장수였다.

유형이 전투가 있기 전 들었다고 전한 이순신의 말은 이순신의 자살 의혹을 더욱 부추긴다.
“자고로 대장이 자기의 공로를 인정받으려 한다면 생명을 보전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적이 퇴각하는 날 죽어 유감될 일을 없애겠다.”
이를 어찌 허언이라 할 것인가. 숙종 때 대제학을 지낸 이민서의 기록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의병장 김덕령이 역적으로 몰려 옥사하자 장수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곽재우는 군직을 떠나 야인이 되어 당쟁의 화를 피했고, 이순신은 싸움이 한창일 때 스스로 갑옷과 투구를 벗고 적탄에 맞아 죽었다.”

소설가가 아닌 정치 권력자 서포 김만중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 섬들이 천대받았던 조선시대, 섬들은 감옥이었다. 경기와 충청을 제외한 모든 땅이 유배지로 이용됐던 나라지만 특히 섬들은 가장 중한 죄인들이 유배를 갔던 엄중한 감옥이었다. 극형을 겨우 면한 자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감옥이었다. 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이 유배지 흑산도에서 죽음을 맞이했듯이 <구운몽>의 작가이자 노론의 거두였던 서포 김만중(1637∼1692)은 유배지 남해의 노도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일반 죄인들뿐만이 아니었다. 폐위된 왕족들의 감옥 또한 섬들이었다. 폐왕이 된 광해군은 강화도를 거처 제주로 이배된 뒤 18년이나 유배생활을 하다가 제주에서 숨을 놓았다. 폐주 연산군 또한 교동도로 유배당한 뒤 거기서 목숨을 거두었다. 노론의 거두 송시열 역시 거제도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했고 안평대군은 강화도에서 임해군은 진도에서 유배살이를 했다.

남해도는 조선시대만 서포 김만중을 비롯한 200여 명이나 유배를 살았던 유배의 땅이었다. <구운몽>의 김만중, 경기체가 <화전별곡>의 김구,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로 유명한 남구만, <남해문견록>을 남긴 류의양 등이 그들이다.

노도는 남해에 딸린 작은 섬이다. 남해로 유배를 왔던 서포 김만중은 노도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다. 앵강만 안온한 바다를 바라보며 그는 권력의 무상함을, 인생의 덧없음을 뼛속 깊이 느꼈던 것일까. 어머니의 유고 소식을 접한 서포는 당시 남해 현령 백세부에게 부탁해 유배처를 남해 본섬 망운산 아래에서 노도로 옮겼다고 전한다. 기록은 없으니 물론 구전이다. 남해도가 임금이 보낸 유배처였다면 작고 외딴 섬 노도는 서포가 스스로에게 보낸 유배처였다. 남해 출신의 고두현 시인은 남해 유배길 서포의 심정을 그의 시 <남해 가는 길-유배시첩1>에서 이렇게 대변한다.

물살 센 노랑 해협이 발목을 붙잡는다
선천(宣川)서 돌아온 지 오늘로 몇 날인가.
윤삼월 적은 흙길을
수레로 천 리 뱃길 시오 리
나루는 아직 닿지 않고
석양에 비친 알몸이 눈부신데
망운산 기슭 아래 눈발만 차갑구나.

내 이제 바다 건너 한 잎
꽃 같은 저 섬으로 가고 나면
따뜻하리라 돌아올 흙이나 뼈
땅에서 나온 모든 숨쉬는 것들 모아
화전(花田)을 만들고 밤에는
어머님을 위해 구운몽(九雲夢)을 엮으며
꿈결에 듣던 남해 바다
삿갓처럼 엎드린 앵강에 묻혀
다시는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리.

▲마늘밭 너머 한없이 푸른 남해바다 Ⓒ섬학교

서포는 평안도 선천에서 1년 남짓 유배살이를 하다 풀려난 지 5개월 만에 다시 권력투쟁에 휘말려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4년 뒤 죽음을 맞이한다. 마지막 유배지였던 남해의 노도에서 김만중은 숙종과 장희빈, 인현왕후의 관계를 빗댄 소설 <사씨남정기>를 집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인의 거두답게 서포는 마지막까지 남인의 후원을 받던 장희빈을 사악한 여인으로 비난하는 글을 남긴 것이니 죽음 직전까지도 권력투쟁을 하다 간 셈이다.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와 함께 조선의 3대 고전문학가로 꼽히는 서포 김만중은 조선시대 노론 계열의 명문가였던 광산 김씨였다. 서포는 병자호란의 와중에 피난선 위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아명이 선생(船生)이었다. 서포의 아버지 김익겸은 23세의 나이로 강화도가 함락되자 충의를 지키기 위해 자결했다. 그래서 서포는 유복자였고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각별했다고 전해진다. 서포의 증조부는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의 스승인 사계 김장생이다.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문묘에 배향된 학자는 역사상 18명에 불과하다. 이들을 동국18현이라 하는데 최치원, 설총, 안향, 정몽주, 조광조, 이황, 이이, 송시열 등 사상 최고의 학자들이다.

그런데 동국18현 중 2명이 서포의 집안이다. 증조부 김장생과 큰 할아버지 신독재 김집. 그뿐만이 아니다. 서포 자신을 포함해서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만이 역임했다는 홍문관 대제학을 7명이나 배출한 것이 서포의 집안이다. 요절한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 또한 서포의 조카였다. 서포 집안은 최고의 노론 명문거족이었다. 게다가 서포는 대제학뿐만 아니라 도승지, 예조·병조판서, 좌참찬, 우참찬 등 최고의 관직을 누린 권세가였다. 서포의 정체성은 결코 <구운몽>이나 <사씨남정기> 같은 한글소설을 쓴 소설가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포는 그의 당파인 서인이 남인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이후 몰락의 길을 걸었다. 서인이었던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되고 남인이었던 장희빈이 왕후가 되자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했다. 그 여파로 서포는 모든 권력을 빼앗기고 돌아올 수 유배 길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권력투쟁은 유배지에서도 끝나지 않았다. <사씨남정기> 같은 한글소설로 권력투쟁을 이어갔던 것이다.

<구운몽>뿐만 아니라 노도에서 집필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씨남정기>는 일반 백성들까지 알아볼 수 있는 한글로 쓴 것이다. 여기서 궁금증이 일지 않을 수 없다. 최고 권력을 누리던 서포가 어째서 양반들의 권력독점 유지에 기여하던 한문이 아니라 한글을 애용했던 것일까. 물론 서포의 한글에 대한 애착은 진정성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서포는 그의 문집에서 한글예찬론을 펴기도 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문은 자기 말을 버려두고 다른 나라의 말을 배워서 표현하므로 설령 아주 비슷하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서포만필> 하 160)

서포의 한글 사랑은 분명 남다른 데가 있다. 하지만 그의 한글소설 <구운몽>(남해에서 창작했다고 알려졌으니 최근 연구로 선천에서 집필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나 <사씨남정기>가 모두 권력에서 밀려나 유배지에 있을 때 창작되었다는 것은 어떤 함의가 있는 것일까. 중앙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했을 때 밑바닥 민심을 되돌리는 수단으로 한글을 활용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억측일까!


▲노도 김만중 유배처의 동백이 옛날처럼 피었다. Ⓒ섬학교

‘노자묵고 할배, 김만중’

벽련항에서 여객선을 타고 앵강만 바다를 건넌다. 노도는 앵강만 안의 섬이다. 앵강만은 상주면 벽련마을에서 남면 다랭이마을까지 내륙 깊숙이 들어온 바다다. 앵강의 뜻은 무얼까. 어디에서도 앵강의 어원을 알려주는 단서를 찾기가 어렵다. 섬이나 해안지방에서는 바닷가를 갱변이라 한다. 바닷물은 갱물이다. 강물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앵강 혹시 내륙 깊이 들어온 안쪽의 갱변이란 뜻은 아닐까. 안강이 앵강으로 표현된 것이 아닐까. 5분쯤이나 지났을까. 잠깐 궁금증에 사로잡힌 사이 작은 여객선은 벌써 노도로 입항한다.

노도에는 한때 40호 200여 명까지 거주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겨우 13가구 18명의 주민들만이 살아간다. 63세와 65세의 부부가 마을 최연소다. 노인들만 사니 마을이 곧 경로당이다. 물 사정이 안 좋은 편이지만 노인들은 워낙 절약의 습관이 몸에 배어 부족함은 없다. 지금보다 사람이 많이 살 때는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려서 배를 타고 남해 본섬으로 건너가 물을 실어다 먹곤 했다. 머지않아 남강물이 해저 관로를 통해 들어올 예정이다.

섬의 형상이 삿갓처럼 보인다 해서 노도는 삿갓섬으로도 불린다. 산은 작지만 노도에는 유난히 굴참나무가 많았다. 굴참나무는 워낙 질기고 강해서 잘 부러지지 않는다. 그래서 노도의 굴참나무는 옛날부터 전마선의 노를 만드는데 이용됐다. 굴참나무는 노를 만드는 재료로 남해 본섬이나 여수까지도 팔려나갔다. 굴참나무를 사러오는 외지인들도 많았었다. 노도 토박이지만 부산에서 교직생활을 하다 4년 전 귀향한 노도 여객선 김광열 사무장의 아버지도 노를 만들 굴참나무를 많이 베어다 팔았다. 노를 만드는 나무가 많았다 해서 섬의 이름이 노도가 된 것이다.

과거에는 섬의 산비탈까지 모두 일구어 고구마를 심어 먹고 살았으나 지금은 대부분 묵정밭이 됐다. 삼사십년 전까지만 해도 주민들은 집집마다 작은 전마선을 가지고 갯장어나 붕장어, 문어 등을 잡아 생활했다. 그 시절에는 고기잡이를 해도 판로가 어려웠다. 잡은 생선들을 전마선으로 싣고 나가 광주리에 이고 30리길을 걸어가 장에다 팔고 다시 30리길을 걸어와야 했다. 장에 다녀와 식구를 부르면 전마선으로 실으러 건너왔다. 파도가 없는 날은 20분 거리지만 물살 거센 날이면 1시간씩 노를 저어야 했다. 징그럽게 고생만 하고 산 세월이었다. 지금은 상전벽해다. 남해 본섬까지 여객선으로 빠르면 2분, 천천히 가도 5분이면 충분하다.

노도에는 서포가 말년에 살았다는 이야기가 구전된다. 살던 집터와 숨을 거둔 뒤 한 달 정도 가매장 되었었다는 허묘 자리도 남아있다. 노도에서 전해지는 서포는 ‘노자 묵고 할배’다. 섬 주민들은 그가 유배를 왔는지 무얼 왔는지 모르지만 일도 하지 않으면서 늘 놀고먹으니 ‘노자 묵고 할배’라 불렀다 한다. 그래서 허묘도 노자나 묏등이라 불린다.

근래 노도의 큰골에 복원된 서포의 유배 초옥 근처에는 수백 년 된 아름드리 동백들이 줄지어 서있다. 서포의 유배시절을 기억하는 나무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옛 사람들은 오래된 나무에게 기원도 하고 나무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나무와 소통하지 못한다. 우리가 다시 나무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옛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까. 그 때는 서포가 살던 시대 노도의 이야기도 듣게 되지 않을까.

▲기도빨 쎄기로 유명한 보리암과 남해 금산 Ⓒ섬학교

서포의 유배 초옥과 허묘를 돌아보고 다시 마을로 나왔다. 어느 집 근처 밭 앞에는 ‘경작금지’ ‘출입금지’ 푯말이 서있다. 필시 섬 주민 소유의 땅은 아닐 것이다. 빈 땅에 농사를 못 짓게 할 섬사람들은 없다. 땅은 놀리면 황무지가 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저 밭은 육지의 투기꾼이 사놓은 듯싶다. 야박한 밭주인의 ‘경작금지’ 푯말에도 불구하고 밭에는 여보란듯이 농작물이 심어져 있다. 한글을 모르시는 할머니가 농사를 지으시는 걸까. 설령 한글을 모르신다 해도 섬사람 누군가 푯말의 뜻을 알려주지 않았겠는가. 그래도 그 할머니는 집 가까운 텃밭을 놀리고 싶지 않으셨을 게다. 어떠한 농사도 생명을 기르는 농사가 죄가 될 까닭은 없으니 그리 하셨을 게다.

막배 시간이 다 된 것일까. 도선의 뱃고동이 운다. 이제 다시 앵강 바다를 건너야 할 시간이다. 나 또한 섬사람이라 그럴까. 더러 많은 평자들이 서포를 비롯한 섬 유배객들의 외로움과 처절한 고독에 공감하는 듯 감정을 쏟아내는 것이 불편하기만 하다. 감정의 과잉처럼 느껴지는 까닭이다. 화려한 삶과 최고의 권세를 누리다 갑자기 몰락하여 섬으로 내쫓긴 유배객들의 고독과 커다란 상실감이야 짐작이 가고도 남지만 섬사람들은 그들이 누린 화려함이나 권세의 만분의 일도 평생 누려본 적도 없이 온갖 고역에 시달리다 갔다. 유배객들이 감옥이라 여겼던 섬이 섬사람들에게는 삶의 터전이었다.

유배지에서의 생활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해결해야 했으니 모든 유배객들이 서포처럼 ‘노자 묵고’였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노도 섬사람들의 시선에서 서포는 그저 팔자가 좋아 일하지 않고도 ‘놀고먹는 할배’였을 뿐이다. 섬사람들에게 서포는 오히려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유배객을 바라보는 시선도 허위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육지 중심, 양반 중심, 유배자 중심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섬사람들의 입장에서도 바라볼 수 있는 균형 잡힌 시선이 필요하다.
그와 함께 유배자들이 유배지에서 썼던 글들을 모두 유배문학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도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몸은 유배지에 있으나 마음은 한양에 있고, 유배지에 살던 핍박받는 백성들의 고통스런 삶에는 무관심한 체 오로지 자신의 신세한탄이나 권력투쟁을 위해 쓴 글을 진정한 유배문학으로 볼 수 있을까. 다산처럼 백성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들을 어떻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나게 만들까 고민하는 글이야말로 진정한 유배문학이 아닐까. 서포나 송강, 고산의 글들을 대표적인 유배문학으로 꼽고 유배문학관이나 가사문학관 같은 것들을 만들어 기리는 세태가 불편한 것은 그 때문이다.

▲독일마을에 오르면 물건리어부림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섬학교

섬학교 2016년 1월, 제45강 남해와 노도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배시간의 변경으로 일부 조절될 수 있습니다).

<1월 9일(토)>
06:30 서울 출발(6시 2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 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45강 여는 모임
-삼천포 도착
-점심식사(일미해물탕)
-앵강만 벽련항 출항
-노도 도착
-서포 김만중 유허지 탐방
-노도 출발
-벽련항 도착
-보리암 탐방
-저녁식사 겸 뒤풀이(삼천포 연정실비)
-숙소 도착 및 휴식(삼천포 노블레스모텔, 다인실)
*노도행 배가 뜨지 않을 시 노도 대신 남해바래길을 걷기로 합니다(앵강만∼다랭이마을까지).

<1월 10일(일)>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삼천포한정식)
-남해 독일마을 및 물건리어부림 걷기
-다랭이마을 탐방
-점심식사(주란식당 남해식백반)
-남해유배문학관 탐방
-서울 향발. 제45강 마무리모임

▲섬학교 제45강 <따뜻한 남쪽 나라, 남해 명소기행> 답사지도 Ⓒ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보온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모자, 선글라스, 스틱, 아이젠,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섬학교 제45강 <따뜻한 남쪽 나라, 남해 명소기행> 참가비는 25만원입니다(왕복교통비, 1일숙박비, 5회 식사비 겸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참가신청 하신 후 참가비를 완납하시면 참가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드립니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참가신청 바로가기
▶섬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island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물고기들에게 그늘과 먹이를 제공하며 물고기들을 불러모으기 위해 조성했던 지혜의 숲, 물건리마을의 어부림 Ⓒ섬학교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 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 가꾸기 자문위원이며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8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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