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후포고등학교에 인문 특강을 하러 갔다. 토크쇼 <백년손님>에서 나오는 후포리에 있는 고등학교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는 낯선 곳이다. 날씨는 좋았지만 갑자기 찾아온 영하의 쌀쌀한 기온 때문에 동해안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특강 이후 교사들과 나눈 담소에서 교육 현장에 미치는 대학 입시의 영향력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모든 대화는 결국 3년 후의 입시로 귀결되었다. 국민들은 수능 시험이 대학 입학의 알파요 오메가로 알고 있지만, 실제 입시는 △내신을 기반으로 하는 수시 △학생부를 중심으로 하는 수시 △논술을 중심으로 하는 수시 △수능 성적을 중심으로 하는 정시의 네댓 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이 입시 제도는 수험 생활을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다.
특강 이후 교사들과 나눈 담소에서 교육 현장에 미치는 대학 입시의 영향력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모든 대화는 결국 3년 후의 입시로 귀결되었다. 국민들은 수능 시험이 대학 입학의 알파요 오메가로 알고 있지만, 실제 입시는 △내신을 기반으로 하는 수시 △학생부를 중심으로 하는 수시 △논술을 중심으로 하는 수시 △수능 성적을 중심으로 하는 정시의 네댓 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이 입시 제도는 수험 생활을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다.
수험 생활을 하는 고3에게는 하루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학교, 학원, 독서실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지옥같은 삶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고등학교 대부분의 실상은 고1부터 그런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3년 내내 수업, 자습, 학원, 과외 등으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실로 엄청난 시간이며 노력이 아닌가? 이렇게 많은 시간이 투입되는데 왜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들의 학력은 더 떨어지고 있을까? 대학에서는 글쓰기, 토론, 영어 능력 같은 기초 학력 문제가 교양 교육의 큰 주제로 부각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아이러니는 현실이 이런데도 교육적 담론은 지식 기반 사회, 창조적 사고력, 비판적 사고력 등 미래 지향적이라는 점이다. 이 미래 지향적 담론에 따라 교육 과정도 바뀌고, 교육 방식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다. 탈학교의 담론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주입식 교육으로는 안되고, 토론식, 참여형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한국 경제의 문제도 캐치업 수준에서 벗어나서 문제 해결력을 갖추고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인재의 양성에서 해결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한다.
모두가 100점이면 안되는 학교라니!
그러나 고3 교실 풍경을 보면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서 문제풀이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마음이 급해서 문제만 풀다보니 실제로 성적도 오르지 않고, 시간도 없으니 깊이 있게 생각할 여유도 없다. 심지어는 교육방송(EBS) 영어 교재의 한글만 읽고 시험을 치룬다는 얘기도 들었다.
원인이 무엇이겠는가? 어떤 논평은 대학 입시가 문제라고 한다. 입시 철만 되면 널뛰는 수능 난이도 문제로 언론은 도배가 된다. 매년 같은 얘기지만 수능 시험의 죄가 아니다.
수학능력시험의 약자인 수능은 미국의 SAT를 모방하여 만들었다. SAT는 Scholastic Aptitude Test(수학적성시험) 또는 Scholastic Assessment Test(수학능력평가시험)를 의미하는 것으로 객관식과 주관식, 에세이 등도 있고 문제 은행으로 진행되며, 연간 수차례 치룬다. 우리 수능은 문제 은행도 아니고, 객관식만 있고 연간 한 차례 치룬다. 이게 결정적 차이일까?
어떤 논평은 미국 SAT 식으로 연간 수차례 치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그런 적도 있다. 1년 만에 폐지되었다. 고3 학생들이 지옥을 두 번 겪은 것이다!
나는 그럴 줄 몰랐을까 정말 궁금하다. 한국의 똑똑한 교육학자들이 정말 몰라서, 수능을 연간 2번 치러본 것일까? 사교육 혁파를 슬로건으로 건 교육 개혁의 수십 년 역사를 죽 일별해보면 입시 제도를 둘러싼 어떤 변화도 고3 지옥을 해결할 수 없고, 미래 지향적 교육 담론을 실현할 수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일부러 실제 원인은 보지 않고, 원인이 초래한 다른 현상을 해결하려고 매달려 온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나는 그 동안의 교육개혁의 노력이 F학점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면 수능 등급제다. 처음 수능 등급제가 도입될 때 불공정하다는 비난이 쇄도했다. 2등급의 맨 위는 얼마나 억울하냐는 거다. 점수 차를 모두 인정해야지 구간으로 하면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는 대학교와 수험생들이 등급제를 받아들이고 있다. 더 이상 등급제가 불공정하다는 등의 주장은 없다. 등급제가 불공정하다는 주장을 확대하면 결국 학력고사로 대학 가던 옛날이 더 낫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전혀 맞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컨대 한 줄 세우기보다는 네 줄 세우기다 더 나은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줄 세우기에 다름 아니라는 점이 문제다.
초등학교에서는 등수를 매기지 않는다. 평가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별표, 동그라미, 세모 등의 귀여운 아이콘을 사용하여 아이의 성과와 성실성을 세 가지 정도의 수준으로 평가한다. 그렇기 때문에 초등학교는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내용을 고민해서 가르칠 수 있다.
그런데 학년이 올라가면 상대 평가 체제로 바뀌어 학생의 역량을 순서 매기기 시작한다. 가르쳐야 할 것, 가르치는 방법에 대한 관심은 온데 간데 없고, 학생의 평가에만 매달린다. 교사의 창의성은 주어진 교육 내용의 범위 내에 한정된다. 중간 고사 시험을 하고 성적을 주었는데 학생이 와서 "제가 어제 밤 틀린 것 공부하고 다시 풀었으니 맞은 걸로 해 주세요"라고 하면 다시 정정하는 교사가 우리나라에 있을 수 있을까? 교육적으로 보면 정정해주어야 한다. 학생이 배워야 할 것을 완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공정하지 않다. 너도 나도 와서 다시 풀었으니 성적을 고쳐달라고 하면 어쩔 것인가? 모두가 100점이면 안 되는 곳이 학교라니, 정말 아이러니 아닌가? 학교가 가르치는 곳이 아니고 평가하는 기관이란 말인가?
대한민국 생존이 담긴 학벌 문제, 대토론해야
공교육 붕괴를 말하지만 평가 기관으로서 공교육은 점점 더 공고해지고 있다. 붕괴하고 있는 것은 교육 그 자체다. 나는 탈학교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공교육의 정상화를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진정한 학력(學力)을 길러야 한다고 믿는다. 공부하는 능력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학력(學歷), 즉 학벌(學閥)이다.
교육의 병목, 고3 지옥의 원인은 학벌 체제에 있다. 능력주의(meritocracy)의 변종인 학벌 체제는 이제 대한민국의 질곡이 되어가고 있다. 대학 입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대학의 서열화 때문이다. 다양화를 해야 하는데 서열화가 나타난다. 대학의 서열화가 문제되는 것은 좋은 대학을 나와야 좋은 직장과 높은 수입을 얻기 때문이다.
학벌 체제가 어느 정도 순기능을 했던 시기도 있었을 것이다. 소수가 나라를 이끌 수 있을 때는 그렇다. 하지만 이제 소수만으로는 대한민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협업 능력이 있는 다수의 창의적 인재가 필요하다. 창의적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교육의 목표도 창의적 사고, 비판적 사고, 문제 해결력, 의사소통 능력, 협업 능력을 함양할 수 있는 교육으로 되어야 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교육 내용의 개편, 교육 과정의 도입, 교육 방식의 개선이 필요하다. 또 학생의 평가도 상대평가를 통한 줄세우기가 아니라, 주관식, 논술형, 프로젝트 및 참여평가를 통한 참평가로 절대평가를 해야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개선 노력은 대학 입시에서 막힌다.
그간 학벌 체제를 문제삼는 논의가 많이 있었다. 주로 재야 운동권이 이러한 논의를 주도했는데, 노무현 정부 초기에 대학 체제 개편 논의에 포함됨으로써 제도화할 기회도 있었다. 그런데 당시 언론의 벌떼같은 공격으로 초기에 초토화 된 것이 기억난다.
그 논란을 보며 받은 느낌은 너무 단순한 대안이라는 점이었다. 본질은 맞지만, 정책으로 구현되려면 손질해야 할 부분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학벌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하려고 들면 그것은 한국 사회의 대변혁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의 학벌 체제는 한국 사회와 한국 경제에 질곡이 될 만큼 한계에 도달했지만 그래서 이로 인한 고통은 점점 깊어지고 넓어지지만, 그만큼 이 체제에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많고 이들이 사회의 지도층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섬세한 설계가 필요하다. 이러한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사회적 토론을 해야 한다. 나는 이러한 지루한 사회적 토론 과정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합의 도달이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매 2주마다의 회의와 토론이 6~7개월쯤 지나자 사태는 어느 정도 보였다.
고3의 병목, 대학 입시에 깔린 학벌주의는 그 정도 기간과 비용을 들여서 대토론을 해 볼 주제다. 아니 해 볼 주제가 아니라 해야 하는 주제다. 대한민국의 생존이 달려있고, 특히 우리 미래 세대인 고등학생들의 행복한 삶이 달린 주제이기 때문이다. 잠 못드는 한밤에 이 글을 쓰면서 언젠가 TV, 신문과 대학과 학교 등에서 학벌폐지를 위한 사회적 대토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고3들이 더 이상 생지옥에서가 아니라 즐겁고 행복한 학교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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