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와 거북이' 뒷이야기로 살펴본 경쟁 구조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이야기는 다 알고 있을 텐데 여기서는 그 뒷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 경주가 끝나고 나서 동물 세계에서는 난리가 났다. "토끼가 졌단 말이야? 어떻게 토끼가 질 수 있지?" 토끼에 대한 비난도 있었고, 제도를 보완해서 토끼와 같은 희생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었다. 거북이가 이긴 것에 대해서는 "토끼가 낮잠을 잤다고 해도 이긴 건 대단한 거야. 역시 성실하면 성공할 수 있어". 이렇게 거북이는 불리한 상황이라도 열심히 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 전국을 들끓게 한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때문에 다음 경기는 대규모로 개최되었고, 토끼와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정해진 길로 안내하는 안전요원이 곳곳에 배치됐다.
정해진 길로만 달려서 정상에 먼저 도착하는 경주였지만, 가끔 길에서 벗어나 딴짓을 하는 동물도 있었다. 토끼는 땅굴을 파면서 놀았고, 원숭이는 나무가 울창한 숲에서 나무타기를 하기도 했다. 이런 때면 어김없이 안전요원의 고함이 들려왔다. "지금 뭐해? 옆으로 새지 말고 정해진 길로 달리라고!" 겨울이 되어 곰과 다람쥐가 "너무 졸려요. 조금 자고 달릴게요"라고 하자, 안전요원은 "지금 잠이 와? 저기 안 보여? 원숭이랑 토끼는 안 자고 잘 달리잖아"라고 호통을 쳤다. 곰과 다람쥐는 겨울잠조차 잘 수 없었다.
이런 경쟁 속에서 안전요원의 지위는 높아져 갔다. 누구든 안전요원의 말을 따라야 했다. 하지만 딱 한 명 안전요원의 말을 듣지 않는 동물이 있었으니 문제 동물로 유명한 산양이었다. 산양은 안전요원이 아무리 소리 지르고 겁을 줘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위 타기를 하며 놀았다. "지금 여기가 바위 타기를 하기에 딱 좋은데, 왜 자꾸 정해진 길로만 가라고 하는 거죠?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마세요!"
안전요원의 지시와 통제가 먹히지 않자 등장한 방법이 '부모의 훈계'였다. 안전요원들이 산양의 부모에게 상황을 전한 것이다. 화가 난 부모는 아이를 다그쳤다. "다른 건 신경 끄고 달리는 데만 집중해. 바위 타기는 경주 끝나고 하란 말이야!" 반복되는 부모의 압력에 어린 산양은 바위 타기를 멈추고 정해진 길로 들어왔다. 이후 산양은 정해진 길을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산양에게서 전과 같은 생동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풀이 죽은 채 그냥 터벅터벅 걸어갈 뿐이었다. 산양 사건으로 모든 동물들의 상황이 안전요원을 통해 부모에게 전해지는 시스템이 구축됐다.
그렇게 안전요원의 개입과 부모의 열띤 응원 속에서 동물들은 경주에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자 그 어떤 동물도 정해진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 길 근처에 자기가 좋아하는 장소가 있거나,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슬쩍 고개를 돌려 바라볼 뿐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경주의 틀이 이렇게 정착되자, 대부분의 동물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나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아예 잊어버리게 됐다. 그중 일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정상에 도착할 때까지는 그 일을 미뤄야 한다고 믿었다.
경주의 인기가 치솟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동물들의 부모 덕분이었다. 응원 열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경주에 참가한 동물의 등수가 중간 중간 안전요원을 통해 부모에게 전해졌고, 부모들은 그 등수에 모든 것을 걸었다. 심지어 경주에 참가하기 전부터 달리기 특훈을 받는 어린 동물들도 많았다. 경주는 국민적 인기를 얻었고 그런 인기를 배경으로 달리기 전문학원이 생겨날 정도였다. 그리고 경주에 참가한 모든 동물에겐 서열이 매겨졌다. 몇 등을 했는지 알려주는 그 숫자가 동물의 모든 것을 결정했다. 힘들게 정상에 도착한 동물은 경주가 끝났으니, 자기가 꿈꾸던 삶을 살게 됐을까? 아니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경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경주가 있다는 것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시간'과 '공간'을 빼앗는 학교
학교 시스템이 문제일까, 학생들이 문제일까? 빌 게이츠는 미국 공교육에 대해 이렇게 말을 했다. "미국 학교의 문제는 바로 체제, 그 자체다. 공교육은 더 이상 오늘날의 학생들에게 필요한 지식을 가르칠 수 없기 때문에 단순히 교육체제를 개혁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바꿔야 한다." 빌 게이츠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말에는 공감한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문제는 학교에 있지, 학생에게 있지 않다고.
학교의 명목상 존재 목적은 '배움'을 위한 것이니, 배움의 본질을 짚는 것이 학교 구조를 살펴보는 출발점이다. 배움은 학생이 주체가 될 때 생명력을 얻게 된다. 학생에게 '배우고 싶은 것'을 선택할 권리가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 권한은 오로지 국가에게만 있다.
국가가 교육과정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은 지배세력들이 교육내용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가르치고 싶은 것만 가르치고, 가르치기 싫은 것은 빼겠다는 것이다. 역사의 경우 근현대사를 감추거나 왜곡하고 있다. 경제, 사회, 정치 관련 교과도 자신들을 옹호하는 내용으로 채워 넣었다. 특히 땀 흘리는 노동의 본질을 아는 것이 인간 존엄의 출발점임에도 반노동자 의식을 심기 위해 노동교육을 교육과정에서 아예 빼버렸다.
교육과정을 국가가 일방적으로 정하면 학생들의 '정신'을 가둘 수 있다. 복종하는 신민의식을 자연스럽게 심어줄 수 있다. 물음표를 죽이고 마침표만 찍는 '마침표종'으로 만들어 쉽게 지배하고 착취할 수 있는 구조를 고착시키는 것이다.
'국가가 교육 내용을 독점했더라도 학생 본인이 주체적으로 공부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는 현재의 시스템에서는 어림도 없는 소리다. 가르치는 내용만 공부하도록 완벽한 시스템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호기심, 능동성, 자발성 등 배움의 생명력을 죽였고, 평가라는 시스템을 구축해 국가가 정한 교과 외 지식은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또한 이기적 개인주의를 내면화시켜 공생, 협력, 배려, 나눔을 경험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등수가 곧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믿도록 만들었다. 나는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 등이 나온 배경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약자를 보면 측은지심을 느끼는 것이 사람의 본성임에도 그들은 무시와 희롱의 대상으로 삼는다.
아이들이 잃는 것은 이걸로 끝나지 않는다. 이보다 더 엄청난 것을 빼앗겼으니 그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이다. 시공간을 빼앗았다는 것은 학생에게서 '삶'을 빼앗았다는 말이다. 눈뜰 때부터 누워서 잠들 때까지 입시를 위한 공부를 하느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시간이 없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교실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방과 후에는 야간 '타율'학습을 하거나 학원에 갇혀 있어야 한다. 학교 시스템은 시공간을 제거해 아이들 삶을 가두고, 국가가 독점한 교육 내용을 주입시키면서 '정신'까지 가둬버렸다. 이보다 더 잔인한 시스템이 또 있을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잔인한 시스템의 가장 큰 버팀목은 부모들이다. 입시구조에 더 파묻혀 있는 건 학생보다 부모들이다. "공부해라!"라는 말은 "무조건 앞에 서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불안하다"라는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아이가 잘됐으면 하는 마음, 아이에 대한 걱정과 사랑과 관심이 성적 집착, 등수 집착으로 나타난다. 성적은 아이뿐만 아니라 부모까지 열등감을 갖게 한다. 이게 정말 아이를 위한 것일까?
지속가능한 교육은 가능할까
공교육의 문제점을 인식해서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내는 사람들도 많지만, 집 가까이 그런 곳이 없다면 멀리 이사를 해야 하거나 아이만 보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혹 아이를 보내기로 마음먹어도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가정 형편이 받쳐줘야 가능하다. 때문에 '졸업할 때까지 몇 년만 참자'며 대부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학교를 보낼 수밖에 없다. 지금의 학교 구조를 버리고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은 험난한 길이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포기한 채 모른 척할 수는 없다. '지금'을, '오늘'을 살지 못한 채 아이들은 죽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적정교육'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한다. 적정교육이라는 말은 '적정기술'에서 따온 말이다. 아프리카는 무더운 날씨로 인해 음식이 금방 상하기 때문에 냉장고가 필요한 곳이다. 하지만 전기시설이 없을 뿐 아니라 고장 날 경우 필요한 부품을 구할 수도, 고칠 수도 없으니 아프리카 현지에서 전기 냉장고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적정기술로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팟인팟 쿨러'라는 일종의 아프리카식 냉장고다. 큰 도기 안에 작은 도기를 넣고 그 사이에 모래와 물을 채워 만든 것으로, 물이 증발하면서 작은 도기 속의 열을 빼앗아 채소나 과일을 신선하게 보관해준다. 상온에 보관하면 2~3일 만에 상하던 토마토가 '팟인팟 쿨러'를 이용하면 21일 동안 보관이 가능하다고 한다. 적정기술은 가장 적은 비용과 가장 쉬운 방법으로, 현지에 가장 적합한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기술이다.
이젠 교육도 적정교육이 돼야 한다. 적정교육은 내가 살고 있는 곳, 지금 여기에서 사람, 공간,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학교를 벗어나면 마음 놓고 갈 곳이 거의 없다. 그러니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학교가 끝나면 학원으로 돌린다. 아이들에게 학원은 갈 곳이 없어서, 친구들이 모두 거기에 있어서, 부모님이 가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가는 곳이다. 아이를 믿고 보낼 수 있는 공간과 사람을 찾는 것이 적정교육의 출발점이자 핵심이다.
적정교육을 살리려면 시민이 직접 나서야 한다. 먼 곳이 아니라 내가 사는 곳에서 '살아 있는 공부'를 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봐야 한다. 지금 우리는 철저히 개인화, 개별화되어 있다. 마을 공동체 자체가 없어지고 아파트가 주거의 표본이 되면서, 고립된 주거 시스템 속에서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고, 관심을 갖고, 방법을 찾아가고자 연대하는 것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이다. 적정교육의 목표는 아이가 배움의 주체가 되어, 입시공부와 경쟁 구조에서 벗어나 ‘오늘’이라는 삶을 살도록 하는 데 있다.
적정교육은 이런 움직임 속에서 서로 마음을 열고 살아 있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을 찾는 데서 시작된다. 그것을 연결해 학생이 배움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교육이 적정교육이다. 적정교육은 고립된 개인들이 모여 있는 마을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이웃의 정이 살아 숨 쉬는 마을을 만드는 역할도 할 것이다.
학교교육을 넘어 적정교육으로
올해 하반기부터 적정교육을 준비해 내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보려고 한다. 아직 큰 그림을 그리는 중이지만, 희망하는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교육장은 사용 가능한 주변 공간을 최대한 이용하려고 한다. 공공장소인 도서관은 기본이고 공원, 하천, 자영업을 하는 곳이나 다소 여유가 있는 문화공간 등도 교육현장에 포함된다. 이런 공간 중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가용 공간을 목록화할 때는 사용 가능한 시간과 함께 그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기록한다. 전국의 박물관, 공원, 문화재, 사적지, 도서관 등의 공공장소뿐만 아니라 사회문제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연대현장(광화문 광장, 단원고등학교, 평택 쌍용차 공장, 콜트콜텍 문화제 등)도 교육공간에 포함시키고, 누가 어느 공간에서 무엇을 돕거나 가르칠 수 있고, 언제 시간이 가능한지 함께할 수 있는지 사람들의 목록도 함께 만드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제는 아이들에게서 빼앗은 시공간을 돌려줘야 한다. '지금' '여기'를 주체적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국가가 독점하고 있는 교과 지식이 아니라, 스스로 배우고 싶은 것을 찾아 몸으로, 가슴으로, 발과 손으로 직접 배울 수 있게 해야 한다. 기계처럼 살아가는 삶을 벗어나 아이들이 주체성을 살릴 수 있도록 새로운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람을 만나도록 하자. 그 길을 함께 만들어보자.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바로가기 :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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