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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미래 '소황제', 넌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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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미래 '소황제', 넌 누구냐?

[한인희의 중국 역사의 뒤뜰] 소황제의 과거와 현재

10월 29일 폐막한 중국 공산당 제18기 5중전회에서는 주목할 만한 정책이 나왔다. 중국이 1979년부터 36년간 추진했던 '한 자녀 정책'을 폐지한다는 소식이다.

내년(2016년)부터 중국 부부들은 자녀를 두 명까지 낳을 수 있게 됐다. 그러면 중국은 왜 이 정책을 포기했을까?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한 자녀 정책으로 인한 남녀 성비 불균형, 저출산, 고령화, 노동력 감소 등과 같은 인구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것이다.

중국 국가발전계획위원회 도시 및 소도농 개혁발전센터 주임인 리티에(李鐵)는 지난 5일 홍콩 봉황TV에서 '중국의 인구문제'에 관한 특강에서 다음과 같이 중국 인구 정책의 의미를 설파했다.

"인구가 많다는 것은 중국의 주요 모순이다. 중국 인구가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인구의 구조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결코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중국 인구 문제의 핵심은 첫째, 인구 대국이라는 것이 (무조건) 발전의 장점은 아니다. 둘째, 인구의 질적인 부분을 재고해야 한다. 인구 구조의 조정이 필요하다. 셋째, 자원은 유한한데 반해 인구의 고속 성장은 인류와 세계에 커다란 부담이 될 것이다. 넷째, 각국 간의 경쟁 관계를 고려할 때 인구의 증가는 외국과 발전 경쟁에도 불리하다. 인구가 적은 것이 더욱 큰 가치를 창조할 수 있고 그래야만 발전의 올바른 길을 가게 된다. 여섯째, 수준 낮은 인구가 많은 채로 고속 성장하는 것은 세계의 재난이다"

중국의 인구는 중국만의 문제가 아닌 세계적 이슈다. 사실 중국은 줄곧 인구가 많은 것을 장점이라 판단해 왔다. 1950년대 건국 초기 인구 문제로 논쟁이 있었다. 논쟁의 핵심 당사자는 경제학자 마인추(馬寅初)와 최고 지도자 모택동이었다. 마인추는 토머스 멜서스의 <인구론>에 근거하여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식량은 산술적으로 증가한다'는 이론에 따라 인구의 통제를 주장했다. 이에 대해 모택동은 '사람이 곧 역량이다'라고 반박하며 마인추를 숙청했다. 이후 모택동은 '인해전술' 등을 주장하며 인구 대국 중국의 장점을 과시했다. 중국인이 많다는 점에 대해 외국인들도 '볼펜 한 자루만 팔아도'라는 인식으로 수량에 집착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79년 등소평의 개혁 개방 이후 중국 정부는 한 자녀 낳기 운동으로 인구 조정 정책을 발표했다. 너무 많은 인구가 발전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정책의 결과 탄생한 이들이 이른바 '소황제(小皇帝)'이다. 한족은 한 가구 한 자녀 원칙, 소수 민족은 한 가구 두 자녀 정책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80년대에 태어난 독생자 층을 이르는 말로 '바링허우(80後)', '지우링후(90後)'라고 부르게 되었다. 여자 아이의 경우에는 '소공주(小公主)'라고 했다.

이렇게 친가와 외가에서 한 자녀만을 키우다보니 어른들의 강력한 보호 대상이 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가족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가족 내에 '소황제'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아이들의 말은 곧 봉건 시대 황제의 '성지(聖旨)'가 되었고 가족 내에서 이 성지를 위반하는 것은 금물이었다. 이렇게 길러진 아이들의 독립성과 적응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불문가지다. 어려움과 난관을 뚫고 나갈 생각이 없다. 이러한 것이 이른바 중국 사회의 '소황제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는 중국 가족 제도의 문제점으로 등장했다.

그렇다면, 전통 봉건 왕조의 소황제들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 중국 역사 2000년 간 전통 왕조에서의 황제는 대략 380여 명 정도였다. 그 가운데 어린 소황제는 120명이다. 10살 이하에 등극한 황제만도 30명이다. 소황제 중 4분의 1이 10살 미만에 황제 자리에 올랐다. 가장 어린 나이에 황제로 등극한 이는 동한의 상제(殇帝) 유륭(劉隆)으로 백일이 채 안된 아이가 황제가 되었다. 그나마 그는 8개월간 재위하고, 한 살이 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얼마나 억울하면 황제의 익호를 '일찍 죽을 상(殇)'자를 썼을까?

봉건 사회에서 황제로 태어난다는 것은 운명이다. 그 탄생부터 범상치 않는 대접을 받았다. 아마도 현대의 소황제에 대한 부모들의 보살핌과도 비교해 볼만하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청대 서태후(西太后)의 아들 동치제(同治帝)의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서태후의 공식 직함은 자희태후(慈禧太后)이다. 서태후는 아들 재순(載淳)을 낳았다. 이 아들이 바로 청나라 제10대 황제 목종(穆宗) 동치제다. 그는 1856년 4월 27일 태어났다. 태어나서부터 백일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자. 보통 사람의 삶과는 엄청난 괴리가 있다.

첫째, 분만 전에 먼저 '탯줄을 땅에 묻는 곳'을 선정한다. 귀한 몸이시기 때문이다. 그곳에 태반과 탯줄을 묻었다. 묻을 때 젓가락 한 쌍을 함께 묻었다. 이유가 있다. '아들이 빨리 세상에 나오라(快生子)'는 의미의 중국어와 젓가락을 뜻하는 '콰이즈(筷子)'라는 말의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유모를 선정한다. 세 번째는 만주어로 '마나허(馬娜哈)'를 준비한다. 만주족이었던 청조는 '마나허'라는 태어날 아이의 옷가지를 준비하는 전통이 있었다. 태어날 아기에게 준비할 옷가지는 많다. 황제의 자식이었으니 오죽했으랴! '마나허'로는 청색 실크 저고리 27개, 흰색 옷감으로 짠 적삼 4개, 한 폭짜리 홍청(紅靑) 시트 1개, 붉은 배두렁이 4개, 루초우(潞綢 : 산시성의 유명한 실크) 비단으로 만든 이불 18채, 남색 고려포(高麗布)로 만든 요 10장, 단추를 단 포요 1장, 남색 고려포로 만든 긴 요 1장, 백색 고려포 침대보 33장, 대문에 걸 대홍포(大紅布) 등이었다. 여기에 사용된 각종 실크 재료만 해도 156척(尺) 4촌(寸)이었고, 각종 색깔 포(布) 재료만도 10필(匹)이었다.

네 번째는 크고 작은 나무로 만든 목욕통 2개, 나무그릇 2개, 작은 나무칼 1자루가 준비된다. 이것들은 분만 때 탯줄을 자르기 위한 준비물이었다. 그 밖에도 무비원(武備院 : 청대 내무부에 해당하는 관청 휘하의 무기류 담당처)에서 길이가 6척, 넓이가 4척인 검은색 담요 한 장을 준비했다. 조판처(造辦處 : 청대 황가의 의복 등을 제작하던 관청)에서는 요람차 한 대를 준비했다.

이렇게 분만 준비를 마친 서태후는 1855년 9월에 수태를 하고, 황제의 집무실인 양심전(養心殿)에서 큰 칼인 대능증도(大楞蒸刀) 한 자루와 건청궁(乾淸宮)에서 돌 하나를 가져다가 서태후가 머물던 저수궁(儲秀宮) 뒤뜰 동쪽 칸에 걸어 놓았다.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한 벽사의 의미였다.

황자가 태어난 후 어의는 즉시 '복수단(福壽丹)'이라는 환약을 입에 넣어 준다. 복수단은 주사(朱砂) 1분(分), 황련(黃連) 1분, 감초 0.5분을 꿀물에 갈아 만든 보약이었다. 황자가 태어나면서 놀라지 않고 심신을 진정시키는 효과 외에 태열을 없애고 해독시켜 주기 위한 것이었다.

황자가 출생하면 즉시 황제에게 보고된다. 이어 황후에게 알린다. 그러고 나서 황실의 친척들에게 통보한다. 아울러 황자의 출생 사주인 '명첩(命帖)'을 흠첨감(欽天監 : 청대 천문을 관리하는 관청)에게 넘긴다.

이후 3일 만에 별자리 28수를 고려하여 황자를 남쪽으로 향해 목욕을 시킨다. 이 절차가 이른바 '세삼분(洗三盆)'이다. 이는 한족의 생활 습관으로 탄생한 이후 3일째 되던 날 목욕을 시키는 의식이다. 이 날은 친척들이 모여 아이의 축복을 기리는 날이다. 목욕을 시키는 것은 세상의 번뇌를 씻는다는 의미로 세상의 오물을 씻어내고, 어려움이 없기를 기원하고 복을 구하고 길상을 추구하는 의식이다. 황자의 탄생과 함께 황제 이하 모든 사람들이 예물을 보내는데 그것을 '첨분(添盆)'이라 한다. 커다란 대야 안에 돈과 예물들을 넣는 행위를 의미한다.

황자가 태어난 지 보름이 되면 청나라 황실의 예법에 따라 선물이 하사된다. 비가 황자를 생산하면 은사로 은 300냥, 의류재료 70필 등을 받는다. 서태후는 동치제 분만 당일 후궁에서 비(妃)로 승급했다. 한 달이 되었을 때 12시 30분, 내전태감이 황자의 머리를 깎는 의식을 행한다. 만주족의 습속이다. 이때 황후, 비빈, 공주, 친왕, 군왕 및 기타 복진(福晉) 등이 상을 받거나 혹은 귀중한 예물을 진상한다. 이후 탄생 백일이 되면 비빈(妃嬪)은 다시 한 번 황제로부터 상을 받는다.

황자가 한 돐이 되었을 때 이른바 '졸반예'를 거행하였다. 청조정은 강남 지방에서 즐기는 아이에 대한 '테스트' 풍속이 있었다. 돌상에 활, 화살, 종이, 붓을 먹는 것과 진기한 완구들을 놓는다. 황자가 무엇을 고르는지를 본다. 그가 장래에 탐욕(貪), 염치(廉), 어리석음(愚), 지혜(智) 중에 어떤 것을 중시할 지 미리 테스트해보는 것이다. 이날 동치제는 책을 먼저 잡았다. 다음으로 활과 화살을 잡았다. 마지막으로 붓을 잡았다. 그러나 동치제는 6살에 황제에 등극한 뒤 19세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무런 문치무공이 없었다.

동치제는 세삼분, 소만월, 만월, 백일, 졸반예 등 5차례에 걸쳐 푸짐한 상을 받았다. 이때 받은 금은 기물만 800여 점이나 되었고, 의복류는 560여 벌이나 되었다. 하포(荷包)와 옥기 등도 70여 점이나 되었다. 세상에 자식 귀하지 않는 이가 누가 있으랴! 그러나 구중궁궐에서 황제의 신분으로 태어나 모든 이들의 축복을 받았음에도 짧은 생으로 마감한 동치제를 보면 그간의 정성이 무상하게 느껴진다.

현재 중국의 보통 집안에서 '소황제'의 삶을 누리는 아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 각자의 집안에서 떠받들어지는 삶에 익숙해져 있고, 누구하나 귀하지 않은 이가 없다. 문제는 곱게 자란 이 아이들의 타인에 대한 배려를 모르고 자기만 위하는 태도들이다. 중국인들조차 걱정하는 미래 사회문제의 주요 요인이다.

두 아이 정책으로 과연 중국의 경제 발전에도 도움이 되고 가족 내 형제애를 생각하는 도덕성의 회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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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희

건국대학교 국제학부에서 가르치며, 한중사회과학학회 회장과 KU 중국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대만 중국문화대에서 중국 근대 정치사 연구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대 중국의 영웅들>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와 <중국 외교사> 시리즈 및 <대만 현대 정치사> 등 20여 권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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