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28일) 네팔에서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전통적인 남성 중심 사회인 네팔에서 기적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비드야 데비 반다리라는 여성이 바로 그 기적의 주인공이다.
반다리는 적극적인 여권 운동가로 지난달 20일 채택된 새 헌법에 대통령 또는 부통령이 여성이어야 한다는 규정이 명시돼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네팔의 새 헌법은 하원 의석의 3분의 1을 여성에게 배정하도록 규정했다. 더 나아가 대통령이나 부통령 가운데 한 명은 반드시 여성이어야 하고, 정부 위원회 등에도 반드시 여성이 포함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남성 중심의 사회가 이어져 왔던 한국에서도 여성의 지위가 점점 신장되고 있고 여성성의 뛰어남도 평가받고 있다. 급기야 2013년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여성 리더십에 대한 연구도 많아졌다.
일반적으로 여성 국가 지도자라고 하면 국가 수반 및 총리급 이상의 인물을 말한다. 그런 기준에 따라 현대사 속의 여성 국가 지도자를 살펴보면,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었던 아르헨티나의 이사벨 페론(1974~1976년 재임)이 떠오른다. 유럽에서는 영국의 마거릿 대처(1979~1990년 재임)가 있었고, 현재는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성공적인 국가 지도자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내년 선거를 준비 중인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 대만(타이완)의 차이잉원(蔡英文) 등도 주목을 받는 여성 국가 지도자들이다.
중화권에서는 대만의 뤼슈렌(呂秀蓮) 부총통(2000~2008년 재임)을 제외하고는 눈에 띄는 인물이 많지 않다. 중국 최초의 여성 부총리인 '철의 여인' 우이(吳儀, 2003~2008년 재임)나 현임 부총리인 류엔동(劉延東) 정도가 전부다. 중국은 공산 혁명 이후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었다. "천하의 절반은 여성이다"라는 구호를 자주 이용하기도 한다. 대체로 사회 전반에 남녀평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에서는 언제 여성 국가 지도자가 출현할까? 현재와 같은 공산당 통치의 정치 체제 하에서는 요원한 일일까?
중국 최초의 여황제 측천무후
중국의 오랜 역사를 살펴보면, 아주 소수이지만 여성 국가 지도자가 출현했다. 그 중 측천무후(則天武后)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녀는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로 꼽힌다. 물론 사가에 따라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황제가 측천무후보다 150여 년 앞선 북위(北魏) 시대에 출현 한 적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북위 효명제(孝明帝)의 딸인 원고낭(元姑娘)을 말함인데, 원고낭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중국 최초의 여황제인 측천무후(624~705년)는 중국에서는 '무측천(武則天)'이라는 호칭으로 더 알려져 있다. 그녀의 성은 무(武)씨고, 이름은 조(曌)였다. 조(曌)라는 글자는 해(日)와 달(月)이 하늘(當空)에 걸렸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해와 달이 하늘에서 천하를 비춘다'는 의미다. 이름에서 그녀의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690년 당(唐)의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15년 동안 중국을 통치했다. 이후 당의 통치자들은 모두 그이의 핏줄이라고 보면 된다.
그녀는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후궁 출신이다. 14세에 입궁했는데 당연히 미모가 뛰어났을 것이다. 전통 사회에서 여성이 권력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은 혈통이 좋거나 미모가 뛰어나야 한다. 그녀는 뛰어난 미모로 당 태종의 총애를 받았다. 황제의 총애는 후궁들의 직급과 연결된다. 그녀는 4품(四品) 재인(才人)으로서 태종으로부터 '아첨할 미(媚)'라는 이름을 받아 '무미랑(武媚娘)'이라고 불렸다.
이후 당 태종이 승하하자 측근의 궁녀들은 비구니가 되도록 규정되어 있었기에 감업사(感業寺)라는 절로 출가하게 되었다. 그러다 651년 이세민의 아들 고종(高宗, 재위 649~683년)의 후궁으로 다시 입궁하였고, 이듬해에 2품 소의(昭儀)가 되었다. 무후는 고종과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낳았으며, 655년 왕황후와 소숙비(蕭淑妃) 등을 내쫓고 황후가 되었다.
공포 정치와 정치적 업적 : 능력주의 인재 등용과 민생 안정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측천무후는 고종의 황후들과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뒤 고양이를 무서워하게 되었다. 권력을 잡은 그녀는 황궁 내에 누구도 고양이를 키우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왜 그랬을까?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측천무후는 당 고종의 황후였던 왕황후(王皇后)와 소숙비(蕭淑妃) 등과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후 그녀들에게 보복했다.
그녀들의 수족을 잘라 술독에 넣도록 했다. 중국에서는 여인들이 정적(情敵)에게 보복하는 방법으로 자주 이런 방법이 사용되고 했다. 청나라 때 함풍제(咸豐帝)의 부인 서태후(西太后)도 경쟁자 동태후(東太后)에게 비슷한 보복을 했다. 서태후는 함풍제가 만졌던 동태후의 손목과 발목을 자르고 술독에 넣는 잔인함을 보였다. 질투의 극치다.
측천무후의 보복으로 죽게 된 소숙비는 이를 갈며 저주했다. "무측천의 교활하고 요괴스러움이 여기까지 이르다니! 전생에 나는 고양이었고, 너는 쥐새끼였지! 너의 목을 물어버리고 말테다!"라고 고함을 쳤다 한다. 원한에 복받쳐 나온 말이었으나 측천무후는 왕황후와 소숙비의 원한을 두려워했고 그녀들이 고양이가 되어 자신의 목을 물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평생 고양이를 싫어했고 궁에 있는 모든 고양이를 죽이도록 명령했다. 두려울 것 없어 보이는 최고 권력자들의 심리적 취약성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그녀의 공포 정치의 일면을 보여주는 이야기도 있다. 당나라 시기 중국은 불교가 흥했다. 그래서 측천무후는 살생을 엄히 금하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회는 몰래 도축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러나 공개적으로는 감히 살생을 하지 못했다. 대신들이 연회를 열더라도 고기 요리를 먹을 수 없었다.
하루는 측천무후의 총애를 받는 대신이 생일을 맞이했다. 친구와 동료들이 속속 축하를 해주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러나 축하연에는 채식만이 가득했다. 생일을 맞이한 대신은 손님들에게 대접이 소홀하다고 생각해 몰래 돼지 한 마리를 잡았다. 주연은 시끌벅적했다. 연회가 파하고 손님들이 돌아간 뒤 그날 저녁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다음 날 아침 조정에서 조회가 끝나자 측천무후는 어제 생일 잔치를 한 대신을 호출했다. "당신 어제 돼지를 잡았소?" 이 말을 들은 대신은 혼비백산했다. 그는 머리를 조아리며 "신이 죽을 죄를 졌습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땀이 비가 오듯 쏟아졌다. 이 사실을 고자질 한 대신은 바로 옆에서 교활한 웃음을 띠었다.
그러자 측천무후는 "당신은 충신이고, 또한 초범이니 짐은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겠소! 당신을 용서해 주겠소!" 말을 마친 그녀는 고자질한 대신을 가리키며 "손님을 청할 때는 이런 자를 부르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측천무후는 이렇듯 공포 정치 속에서도 간신배와 충신을 구분하고 고자질하는 자들을 경계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혹독한 성품과 공포 정치로 악명을 떨친 통치자로 역사에 기록된 그녀의 정치는 어떠했을까? 그녀의 정치적 업적에는 뛰어난 것이 많았다. 과거 제도를 재정비해 실력 있는 인재들을 많이 중용했고 그녀가 정치에 참여한 50여 년 동안 농민 봉기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민중의 삶을 안정시키는 정책이 펼쳐졌다고 한다.
물론 측천무후가 정보 정치를 했다는 점은 역사가들이 비판하고 있다. 정보를 엿듣게 하고 그 정보에 따라 처벌하는 공포 정치는 봉건 사회 권력자들이 자주 이용했던 바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도 이런 통치술을 애용했다고 한다. 통치자가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정보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사적인 것까지 파악하려 하고 의도까지 예단하여 처벌하는 등 정보를 악의적으로 이용하면 악정의 근원이 된다. 전통 왕조나 지금이나 최고 통치자가 유의해야 할 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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