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대만의 마잉주 총통이 싱가포르에서 분단 후 최초, 66년만의 비공식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이로써 중국과 대만은 양자 간 경제 관계 심화에 이어 정치 관계를 안정화하는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이번 시-마 회담은 중국과 대만이 서로를 합법적 정부로 사실상 인정한다는 의미를 가지며, 이에 따라 향후 양안 (비공식) 정상회담의 선례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즉 대만 독립을 지향하는 민진당의 차이잉원 후보가 차기 총통이 된다 하더라도 시진핑 주석과의 만남을 거부할 수 없게 됐다는 점에서 대화에 의한 문제 해결 채널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앞으로 대만이 독립을 추구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양안의 심화된 경제 관계로 보아 현실적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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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지난 2000년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한국과 북한은 2008년 이명박 정부 이후 퇴보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2010년 천안함 침몰을 계기로 한 5.24조치로 개성공단을 제외한 경제 및 민간 교류가 끊긴 데 이어 박근혜 정부에서도 개선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8.25합의로 남북 당국 회담이 기대됐으나 대북 전단 살포 문제 등을 둘러싼 이견으로 성사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2012년 대선 과정에서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를 쟁점화시켜 득표 전락에 활용하고 집권 이후에는 통합진보당을 해산시키는 등 종북 프레임을 국내 정치에 적극 활용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북한의 사상적 통제' 운운 하며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하는 시대착오적 폭거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반북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국내 정치의 주도권을 강화하는 한편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통해 친일과 독재의 어두운 과거를 정당화하려 하고 있습니다. 친일 및 친미 세력이 주도해온 지난 70년 간의 한국정치사를 정당화함으로써 향후 영구 집권의 기반을 닦으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해방 이후 계속돼 온 정권의 대외 예속성이 오늘날의 남북관계 퇴화 및 민주화의 역행을 초래한 것입니다.
시-마 회담의 성과
시진핑 주석이 마잉주 총통과의 회담에 응한 이유로 일각에서는 내년 1월 16일 총통 선거에서 패배 위기에 놓인 국민당 주리룬 후보를 돕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이는 근거가 없습니다. 회담 이후 9일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차이잉원 후보와 주리룬 후보의 지지율 격차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여론조사에서는 각각 48.6%와 21.4%, 다른 여론조사에서는 32.7% 대 21.1%로 2배 내외의 격차는 그대로 유지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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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이번 회담에 응한 속내는 차기 대만 정권의 향방에 관계없이 양안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것입니다. 많은 중국 관측통들은 이번 만남의 성과로 중국이 대만을 합법적 정치체로 사실상 인정했다는 점을 꼽습니다. 역으로 대만이 중국을 합법정부로 사실상 인정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번 만남을 계기로 양 측은 상호 이견을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채널을 마련한 셈이죠.
한 중국전문가는 차기 대만 총통으로 유력시되는 차이잉원 민진당 후보가 차기 이번 회담으로 2가지 이득과 2가지 문제를 안게 됐다고 지적합니다.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개발은행(AIIB) 등 국제기구 참여의 길이 열렸고, 대만에 대한 중국의 군사적 위협을 일단 제거한 것은 이득입니다. 반면 문제는 92공식(共識)을 거부하고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그가 이러한 정치적 목표를 계속 추구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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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공식(共識)은 1992년 11월 홍콩에서 반민간 기구인 중국 해협양안관계협회(해협회)와 대만 해협교류기금회(해기회)가 회담한 뒤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 중화민국(대만)이 각자의 해석에 따라 명칭을 사용(一中各表)' 하기로 한 합의로, 이후 양안 관계의 핵심원칙이 되었습니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에, 대만은 '각자 해석'에 방점을 두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정치적 정통성에 대한 각자의 이견은 제쳐두고 평화로운 공존을 하자는 것입니다.
내년에 차이잉원 집권 후 92공식을 거부하고 대만 독립을 추진하는 경우 양안 관계는 중대 위기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20여 년 간 심화돼온 양안 경제 관계 때문에 이처럼 극단적인 노선을 추구할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심화되는 양안 경제교류, 관계 안정화의 초석
대만 GDP의 40%, 수출의 40%가 중국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지난 1994년 224억 달러였던 양안 무역액은 작년 1300억 달러(대만 340억 달러 무역 흑자)로 20년만에 5.8배 늘었습니다. 그동안 대만의 대중국 누적 무역흑자는 1700억 달러에 이릅니다. 중국의 대만 투자액은 3억3460만 달러, 대만의 중국 투자액은 98억3000만 달러의 대만의 투자액이 중국의 29.4배에 달합니다. 대만인 200만 명이 중국에 상주하며 경제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양안 간에는 매년 800만 명의 관광객이 오가며 매주 840편의 민간항공이 운행되고 있습니다. 양안 간 유학생도 4만 명이나 됩니다. 대만 경제가 압도적으로 중국 경제에 의존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 때문에 대만 내에서는 대만 경제의 중국 예속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역으로 양안 관계의 급격한 단절이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대만 출신으로는 처음 지도자에 오른(1988~2000년) 이덩후이 총통(국민당 소속)은 이러한 대중 경제 예속을 우려해 대만 기업들에게 중국이 아닌 베트남, 필리핀 등에 대한 투자를 장려했지만 언어, 문화적 차이로 인해 대부분 실패했다고 합니다. 1990년대의 경험으로 대만 경제의 활로는 중국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죠.
따라서 내년이 차이잉원이 집권한다 해도 양안 경제 관계를 해칠 수 있는 극단적 조치를 취하기는 어렵다는 게 중국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지난 10여 년 간 가속화된 양안 경제 교류가 정치 분야에서의 급격한 변화를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양안 경제 관계가 가속화된 결정적 계기는 2010년 체결된 양안경제협력기본협정(ECFA)입니다. 이후로도 양안은 23개의 경제 관련 협정을 맺었다고 합니다. 마잉주 총통은 지난 4월 대만을 방문한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에게 이러한 양안 경제 관계 심화가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벤치마킹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즉 압도적 경제력을 앞세운 경제 교류 확대를 분단국 관계 안정화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한 것은 한국이 먼저였다는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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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경제 교류, 양안의 55분의 1
하지만 현재 남북한 경제 교류는 극히 미미한 실정입니다. 개성공단을 통한 경제교류가 전체 남북 교역액의 99.8%, 인적 교류의 99.7%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남북 교역액은 23.4억 달러로 양안 교역액의 55분의 1에 불과합니다.
2015년 국제통화기금(IMF) 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GDP는 11조 2119억 달러로 대만(5278억 달러)의 21배 쯤 됩니다. 남북한의 경제력 격차는, 북한측 자료의 미비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40배라고 얘기됩니다(한국은 중국의 8분의 1 쯤 됩니다). 즉 한국이 마음만 먹으면 남북 경제교류의 활성화를 통해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다는 애깁니다. 또한 남북 경제 교류 확대는 수백조 원에 이르는 사내유보금을 쌓아두고도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는 국내 대기업에게 좋은 투자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이런 가능성을 외면해 왔습니다. 재고 쌀이 130만 톤이 넘어 쌀값을 떨어뜨리고 농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데도 대북 인도적 쌀 지원을 애써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반북 이데올로기와 종북 프레임이 정권 유지의 가장 유용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복지국가 등 사회경제적 정책에서 진보세력에 우위를 점할 수 없는 보수정권은 반북이데올로기와 종북 프레임을 정권 안보의 주요 무기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종편을 비롯한 보수언론이 이러한 종북몰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양안의 공산당과 국민당은 비록 내전을 치르기는 했지만 함께 일본제국주의 세력에 맞섰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차례의 국공합작(1924~27년, 1938~45년)이 이를 말해줍니다. 비록 내전은 했으나 두 세력 모두 항일세력이었다는 것이죠. 같은 항일세력이었으니 비록 이념적으로는 대립했다 하더라도 상대가 죽어야 내가 사는 극단적 대결은 없었습니다. 리영희 선생에 따르면 대만이나 중국의 교과서에는 상대방을 헐뜯는 내용이 일체 없다고 합니다. 이런 공통점이 양안 관계의 안정적 진화를 이루는 바탕이 된 겁니다.
하지만 남한과 북한은 다릅니다. 북한은, 비록 미미했다고는 하나, 항일 세력이었습니다. 한국은 이승만을 제외하고는 친일 세력이 정치세력의 중추를 이뤄왔습니다. 혈서를 쓰고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 박정희도 대표적인 친일파입니다. 따라서 현재 한국의 주도적 정치세력은 역사적으로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기가 매우 어려운 입장입니다. 무리하게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이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정통성의 결여를 은폐하기 위한 것입니다. 해방 이후 친일 및 친미 세력이 한국 정치를 주도해 온 역사적 부담이 바로 현재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라는 반동적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행태와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 한다 해도 엄연한 역사적 진실은 은폐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정치세력이 해야 할 일은 과거의 치부를 무리하게 가리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진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아가 천하대란의 이 시점에 한반도의 안녕과 평화, 한민족의 행복과 번영을 위해 남북 화해와 국내 민주화를 진전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한국은 그야말로 1%만의 행복을 위해 99%가 고통 받아야 하는 '헬조선'이 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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