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힘이 세긴 세군요. "진실한 사람들만 선택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한 마디로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는 걸 보니 분명 대통령은 최고의 스피커이자 최상의 세터임이 분명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분석과 반응은 크게 하나로 모이고 있습니다. 바로 '개입'입니다. 야당은 박 대통령이 노골적으로 '선거 개입'하는 것이라고 맹비난하고 나섰고, 여당은 '진박(瞋朴)'과 '가박(假朴)'의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박 대통령의 '공천 개입'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총선은 통상 '심판'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대선과 총선의 주기가 엇갈려 대통령 임기 중반기에 총선이 치러져왔기 때문에 자연스레 총선이 대통령 중간평가의 성격을 띠었던 것이죠.
박 대통령은 이 '심판 선거'를 180도 뒤집으려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국회의원에 대한 심판으로 몰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심판의 잣대는 민생입니다. 민생 입법에 호의적이고 적극적인 의원은 '진실한 사람'이고 민생 입법에 삐딱하고 소극적인 의원은 '진실되지 못한 사람' 입니다. 민생 입법의 핵심은 박 대통령이 최우선 의안으로 설정한 이른바 노동개혁 법안과 경제살리기 법안입니다.
대충 그림이 나오죠? 박 대통령은 불철주야 국민의 민생 증진에 골몰하는 호민관입니다. 반면 '진실되지 못한' 국회의원들은 밥만 축내는 베짱이입니다. 따라서 "진실한 사람들만 선택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말은 박근혜의 이름으로 베짱이 국회의원들을 심판해달라는 주문입니다. 아니 훈시이자, 명령입니다. 이 얼마나 도도합니까? 또 얼마나 자신만만합니까?
도대체 이 도도함과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심판의 주체와 대상을 뒤바꿔버리는, 거침없는 전복은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요?
당장 눈에 들어오는 건 '무기력한 야당'입니다. 다수의 국민이 교과서 국정화, 즉 박 대통령의 패착에 반발하는데도 이 여론을 자신들에 대한 지지세로 돌리지 못하는 무기력한 야당이 박 대통령의 도도함과 자신감의 자양분일지 모릅니다. 저런 야당을 상대로 총선에서 승리하는 건 '누워 떡 먹기'이고 '땅 짚고 헤엄치기'라고 생각해 무소의 뿔처럼 내달리는 것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박 대통령이 겨냥하고 있는 '진실되지 못한 사람' 중에는 여당 내 '가박' 인사들도 포함되기 때문에 '무기력한 야당 때문'이란 분석은 일면적이고 단선적입니다.
일면성을 극복하기 위해선 추가해야 합니다. 다른 동인, 더 정확히 말하면 보다 근본적인 동인을 추가해야 합니다. 그건 박 대통령 자신입니다. '무오류의 박근혜' '무결점의 박근혜'라는 자기 설정, 아니 자기 최면이 가장 중요한 동인입니다.
박 대통령에게 '진실'의 준거는 바로 자신입니다. 자신의 애민사상이 물화된 게 노동개혁 법안과 경제살리기 법안이고, 그 법안들이 인격화 된 게 바로 자신입니다. 이건 부정은 물론 수정조차 용납할 수 없는 '절대 선'입니다. 그렇기에 '절대 선'의 구현 방법은 비타협적이어야 하고, '절대 선'에 삐딱하거나 소극적인 사람들은 '악'이기 때문에 심판해야 합니다. 선거를 통한 심판으로 존재를 척결해야 합니다.
이 지점에서 용어를 수정해야 합니다. 박 대통령이 내보인 모습은 도도함도 자신감도 아닙니다. 그건 선택받은 자의 결연함이요, 소명 받은 자의 엄중함입니다.
우리 국민은 지금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을 지도자로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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