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의 뿌리깊은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의 12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 인문역사지리 전문가)는 제45강 <송년특집>으로, ‘조선의 법궁(法宮)’ 경복궁(景福宮)을 찾아, 하나하나 그 의미를 새겨보며 을미년을 마무리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12월 13일 일요일 아침 9시에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앞에 모여 출발합니다(정시에 출발하니 출발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서울 지하철3호선 경복궁역 4, 5번 출구 이용).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광화문-흥례문-금천-기별청-조정-근정전-사정전-강녕전-흠경각-함원전-교태전-동궁-소주방-자경전-함화당-집경당-향원정-건청궁-열상진원-집옥재-팔우정-협길당-태원전-경회루-수정전-궐내각사터-영추문-점심식사 겸 뒤풀이-신무문-건춘문-동십자각-이간수문-종친부-감고당길-운현궁
▶경복궁 바로 보기 www.royalpalace.go.kr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조선의 법궁(法宮) 경복궁>에 대해 들어봅니다.
경복궁의 발자취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강탈한 이성계는 꼭두각시 왕들을 내세워 막후 통치를 하다가 고려왕조를 끝까지 옹위하려는 세력들을 이방원이 대부분 제거하자, 1392년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라 조선을 건국하고 1394년 8월에 고려시대의 삼경(三京. 開京 西京 南京) 중의 하나인 남경(南京)의 이궁(離宮)터에 왕도(王都)를 정하고 같은 해 10월 한양(漢陽)으로 천도(遷都)하였습니다. 이때 창건한 조선의 정궁(正宮)이 경복궁(景福宮)입니다.
지금은 그곳에 청와대가 들어섰지만 고려 숙종 때 지은 남경 이궁인 연흥전(延興殿)터는 고려 때부터 명당(明堂)으로 지목되어 오던 곳으로 북으로 주산(主山)인 백악(白岳)이, 동쪽으로 좌청룡(左靑龍) 낙산(駱山)이, 서쪽으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이, 남쪽으로 안산(案山)인 목멱산(木覓山)이 둘러싸고 있는 좋은 지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터가 이궁으로서는 적당했으나 새로운 나라의 정궁(正宮)의 터로서는 너무 좁아 경복궁을 창건할 때는 남쪽으로 조금 옮겨 지었습니다.
궁궐이 완성된 뒤 조선의 일등 개국공신(開國功臣)인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 궁궐의 이름을 지었는데 <시경(詩經)>의 한 구절인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불렀으니 군자만년에 큰 경복일레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경복(景福)’을 따서 경복궁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개경(開京)으로부터 한양으로 천도한지 채 5년도 지나지 않아 태조의 뒤를 이은 정종(定宗)이 한양에서 개경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경복궁은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개경에서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양위(讓位) 받은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이 다시 6년 8개월 만에 재천도(再遷都)를 단행하여 비로소 경복궁이 조선왕조의 정궁의 지위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태종은 창덕궁(昌德宮)을 건립하여 주로 그곳에서 거처하다가 태종11년이 되어서야 경복궁으로 옮겼는데 이는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이복동생들인 방석(芳碩), 방번(芳蕃)과 정치적 동지였던 정도전(鄭道傳) 등의 개국공신들을 살육한 현장이 경복궁이었기 때문에 조금은 기피하고 싶은 심정 때문일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세종(世宗)대에 들어와서 궁성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을 건립함으로서 남문 광화문(光化門), 동문 건춘문(建春文), 서문 영추문(迎秋門)의 4문(四門) 체제를 완성하고 각 문과 다리의 이름도 이때 지었으며 이로써 경복궁이 390여 칸의 명실상부한 조선 정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경복궁은 완성된 후에 크고 작은 화재가 빈번이 발생하였으나 그때마다 많은 개축과 증축으로 그 규모는 오히려 차츰 커져 갔으며 임진왜란 때 전소(全燒)된 후 폐허가 된 채 방치되어 왔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몽진(蒙塵)에서 돌아온 선조는 갈 곳이 없어 지금의 덕수궁(德壽宮) 자리에 있던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사저(私邸)와 주변의 몇몇 주택들을 포함하여 행궁(行宮)으로 삼아 정사(政事)를 살폈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경복궁뿐만 아니라 창덕궁과 창경궁까지도 모두 불타버렸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하자 바로 창덕궁을 중건하여 창덕궁에서 정사를 돌봤으므로, 경복궁은 폐허가 된 채 대원군이 이를 중건하여 고종이 이어(移御)하기 전까지 273년간 방치되며 창덕궁에게 조선의 정궁의 역할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기울어져 가는 조선의 자존심만이라도 살리고자 1865년(고종2년)에 대원군(大院君)의 강력한 의지와 당시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 조대비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경복궁 중건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재정의 조달이었습니다. 대원군은 이러한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각계각층으로부터 원납전(願納錢)이라는 명목으로 기부금을 받았고 사대문을 통과하는 우마차에 통행세[門稅]를 부과하기도 하고 결두전(結頭錢)을 신설하여 혼인한 모든 백성에게 인두세(人頭稅)를 징수하였으며 기존의 화폐가치보다 백배나 되는 당백전(當百錢)을 찍어내는 등 여러 대책을 썼으나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화폐의 유통질서를 문란케 하여 사회적으로 엄청난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백성들의 참혹한 고통의 대가로 마침내 1867년(고종 4년) 11월 경복궁의 복원은 완료되는데 그 총규모는 7,481칸이고 공사 비용은 모두 770만 냥이 들었다고 합니다. 궁궐 안의 궁궐이라는 건청궁(乾淸宮)도 이때 새로 지어졌으며 지금 전해지고 있는 경복궁의 모습도 이때 중건된 것입니다.
그러나 명성황후(明成皇后)가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비참하게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발생하자 고종은 경복궁으로 이어한지 28년 만인 1896년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俄館播遷]하면서 경복궁은 다시 주인을 잃어버린 신세가 되었습니다.
고종은 삼한(三韓)의 정통성을 잇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반포하고 주로 경운궁(慶運宮. 지금의 덕수궁)에 거처하였고 뒤를 이은 순종은 즉위 후 주로 창덕궁에 거처함으로써 1911년 일제는 주인 없는 경복궁의 부지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탈취하고 경복궁의 많은 전각들을 헐어서 팔아버렸는데 이때 무려 4,000여 칸이 훼멸되었다고 합니다.
경복궁 훼절의 결정판은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의 흥례문(興禮門)과 좌우 행각, 유화문(維和門), 용성문(用成門), 영제교(永濟橋)를 철거하고 그곳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은 것입니다. 이때 광화문의 좌향(坐向)도 기존의 관악산을 향하던 것을 조선신사가 들어선 목멱산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동쪽으로 약간 틀어 놓았습니다. 2001년 옛 조선총독부 청사가 헐리고 흥례문 일원이 복원되고 광화문도 본래의 좌향(坐向)으로 바로 앉혀짐으로써 부족하나마 비로소 경복궁이 제 모습을 찾게 되었습니다.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法宮)
궁궐은 그 용도에 따라 법궁(法宮), 정궁(正宮), 이궁(離宮), 행궁(行宮), 별궁(別宮)으로 나눠집니다. 조선 건국 초기에 경복궁과 창덕궁을 함께 축성하여 이 두 궁궐이 시기별로 정궁의 역할을 달리 하였지만 법궁(法宮)으로서 위치는 여전히 경복궁의 몫이었기에 그 축성에 있어서 당연히 중국의 전범(典範)인 <주례(周禮)>에 따라 많은 부분을 그 원칙에 맞게 궁궐을 지었습니다.
첫째는 대칭의 원칙입니다.
광화문(光化門)-흥례문(興禮門)-근정문(勤政門)-근정전(勤政殿)-사정문(思政門)-사정전(思政殿)-향오문(嚮五門)-강녕전(康寧殿)-양의문(兩儀門)-교태전(交泰殿)으로 이어지는 경복궁의 중심축의 왼쪽인 동쪽은 세자의 영역인 동궁(東宮)과 종친(宗親)들의 영역이고 오른쪽인 서쪽은 임금과 신하가 만나는 영역인 경회루, 집현전 그리고 궐내각사(闕內各司)가 자리잡았습니다.
둘째는 삼문삼조(三門三朝)의 원칙입니다.
삼문이라 함은 고문(皐門), 치문(治門), 노문(路門)이고 삼조라 함은 외조(外朝), 치조(治朝), 연조(燕朝)를 이름입니다. 외조는 신하들이 집무하는 공간으로 흥례문에서 근정문까지, 치조는 정전(正殿)과 임금이 일상생활을 하던 편전(便殿)을 포함한 공간으로 근정문에서 향오문(嚮五門)까지, 연조는 임금과 왕비를 비롯한 왕실의 침전(寢殿)과 생활공간으로 향오문 뒤의 임금의 침소인 강녕전(康寧殿)과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交泰殿) 그리고 대비의 생활공간인 자경전(慈慶殿) 일원입니다.
따라서 고문은 외조의 정문으로 흥례문이고 치문은 치조의 정문인 근정문이며 노문은 연조의 정문으로 향오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외조의 정문인 흥례문 사이의 공간은 무엇일까? 이곳은 궁궐의 수비를 담당하는 군사가 머무르는 곳입니다. 궁궐(宮闕)은 왕과 왕비 그리고 세자가 살고 있는 궁(宮)과, 궁을 지키는 궐(闕)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궁은 외조와 치조와 연조에 있는 모든 건물들이고, 궐은 경복궁의 사대문과 궁을 둘러친 담장[宮城]과 망루로서의 동십자각(東十字閣)과 西十字閣(서십자각), 그리고 수비 군사들이 기거하는 광화문에서 흥례문 사이의 공간을 말합니다.
그리고 궁궐의 모든 길은 삼도(三道)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삼도의 길 중 가운데가 약간 높이 솟아 있는데 이곳을 특히 폐도(陛道)라 하여 임금이 다니는 길이고 동쪽의 길은 문신(文臣)이, 서쪽의 길은 무신(武臣)이 다니는 길입니다.
그래서 가운데 길인 폐도는 임금만 다닐 수 있어 폐도를 다니는 사람을 일러 폐하(陛下)라고 부르는데 아쉽게도 황제의 나라인 중국의 황제에게만 그렇게 부를 수 있고 제후의 나라인 조선의 왕에게는 그렇게 부르면 역심을 품은 것이 됩니다.
삼도와 마찬가지로 대문(大門)도 동쪽의 문에는 태양을 뜻하는 일(日)자가 들어가며 이곳으로는 문신(文臣)들이 드나들고 서쪽의 문에는 달을 뜻하는 월(月)자가 들어가며 이곳으로는 무신(武臣)들이 드나드는데 근정문 동쪽의 일화문(日華門), 서쪽의 월화문(月華門)을 말함입니다.
또한 중심축의 건물들 좌우로 배치된 부속건물들도 동쪽에 있는 건물과 대문들은 봄 춘(春)자가 들어 있고 서쪽에 있는 부속건물과 대문에는 가을 추(秋)자가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정전 동쪽에 만춘전(萬春殿), 서쪽에는 천추전(千秋殿)이 있고, 경복궁의 동쪽문을 건춘문(建春文)이라 하고 서쪽 문을 영추문(迎秋門)이라 합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光化門) 앞에서 궁궐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돌아서서 바라보면 세종로와 태평로가 숭례문까지 시원스럽게 뚫려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조선일보사 앞에 황토현(黃土峴)이라는 언덕이 있어 한양도성의 정문(正門)인 숭례문(崇禮門)에 가기 위해서는 지금의 세종로인 육조(六曹)거리를 지나 광화문네거리에서 동쪽으로 지금의 종로거리인 운종가(雲從街)를 따라 지금 종각(鐘閣)이라 부르는 종루(鐘樓)까지 가서 다시 남쪽으로 지금의 남대문로인 숭례문로(崇禮門路)를 따라 숭례문에 이릅니다.
세종로길을 조선시대에는 주작대로(朱雀大路) 또는 육조(六曹)거리라 불렀습니다. 궁궐의 좌향(坐向)이 남향을 하게 되어 있으므로 궁궐 앞 도로는 오행(五行)에 따라서 남쪽은 주작(朱雀)이니 주작대로(朱雀大路)라 하였고 또한 그곳에 조선시대의 관청인 육조(六曹)가 자리 잡고 있어 육조거리라 했습니다.
조선은 건국 후 도읍을 형성할 때 중국의 방식에 따라서 궁궐을 중심으로 좌묘우사(左廟右社), 전조후시(前朝後市)의 원칙을 적용하였고 임금은 배북남면(背北南面)하여 통치를 하므로 궁궐은 당연히 남향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궁궐은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게 하고 궁궐의 왼쪽인 동쪽에 종묘(宗廟)를, 오른쪽인 서쪽에 사직단(社稷壇)을 세우고 궁궐의 앞쪽인 남쪽에 관청을 배치하고 뒤쪽인 북쪽에 시장(市場)을 배치하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이 원칙에 따랐으나 시장이 들어선 곳이 지금의 청와대 자리로서 그 터가 너무 협소하여 지금의 종로거리 즉 운종가(雲從街)로 옮겨 육의전(六矣廛)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전조후시가 아니라 전조전시(前朝前市)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주작대로는 제후7궤(諸侯七軌)의 원칙에 따라 제후국가에서는 칠궤, 즉 마차 일곱 대의 넓이를 넘어서는 아니 되었습니다.
육조거리에는 경복궁의 정문(正門)인 광화문 앞 왼쪽, 즉 동쪽으로는 의정부(議政府), 이조(吏曹), 한성부(漢城府), 호조(戶曹), 기로소(耆老所), 포도청(捕盜廳)이 차례로 자리잡았고 광화문의 오른쪽, 즉 서쪽으로는 예조(禮曹), 사헌부(司憲府),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 등이 차례로 배치되었습니다. 이들 육조거리의 관아(官衙)를 통칭하여 궐외각사(闕外各司)라고도 불렀습니다.
돌아서서 광화문으로 들어서려고 하니 커다란 해태 두 마리가 떡하니 버티고 있습니다. 속설에 의하면 관악산이 화산(火山)이어서 그 화기(火氣)가 경복궁에 미치어 화재를 발생시킬 염려가 있어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불을 먹는다는 상상의 동물인 해태를 광화문 앞에 세웠다는 것인데 그럴듯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이름부터 해태가 아니라 해치로 최근에는 서울시의 상징동물로 해치라고 올바르게 부르고 있어 다행입니다.
해치는 중국 요(堯)임금 때 출현한 상상의 영물(靈物)로서 눈매가 부리부리하고 정수리엔 외뿔이, 목에는 방울이 달려 있고 몸은 비늘로 덮여 있으며 매우 영리하여 선악(善惡)을 구별하는 능력과 사람의 시비곡직(是非曲直)을 판단하는 신령(神靈)스러운 재주가 있다고 하는데 중국의 <이물지(異物志)>에는 해치에 대해 “성정이 충직하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사람은 뿔로 받고 사람이 다툴 때는 옳지 않은 사람을 뿔로 받는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해치의 상징성 때문에 해치는 인간의 죄를 다스리는 사헌부(司憲府) 앞에 놓여있었습니다.그래서 사헌부 수장(首長)인 대사헌(大司憲)의 흉배에는 해치를 수놓았고 문반(文班)의 흉배에는 학(鶴)이, 무반(武班)의 흉배에는 호랑이가, 당상관(堂上官)인 정삼품 이상은 두 마리, 당하관(堂下官)인 종삼품 이하는 한 마리를 수놓았습니다.
사헌부가 있었던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앞에 있었던 해치는 없어졌고 지금 광화문 앞에 있는 두 마리의 해치는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당시 최고의 석수장이 이세욱(李世旭)이 조각한 걸작입니다.
경복궁 둘러보기
광화문(光化門)이란 이름은 ‘광피사표화급만방(光被四表化及萬方)’에서 따왔는데 “나라의 위엄과 문화를 널리 만방에 보여준다”라는 뜻입니다. 광화문은 달리 정문(正門)과 오문(午門)으로도 불렸는데 정문(正門)이란 “닫아서 이상한 말과 사특한 백성을 막고 열어서 사방의 현인들을 들어오게 하는 것은 모든 바른 것 중에서도 큰 것”이라고 정도전이 그 뜻하는 바를 태조께 아뢰었고 오문(午門)이란 궁궐의 좌향(坐向)이 배북남면(背北南面)이니까 그 정문은 오행(五行)으로 봐서 남쪽인 오시(午時) 방향임으로 오문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광화문은 조선시대 궁궐 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闕門)의 형식을 갖추었는데 돌로 육축(陸築)을 높이 쌓고 가운데 칸이 양쪽 옆 칸보다 조금 더 높고 넓은 세 개의 홍예문(虹霓門)을 내는 고설삼문(高設三門) 형식으로, 가운데 칸은 임금과 왕비만이 드나드는 어칸[御間]이고 동쪽 칸으로는 문신(文臣)이, 서쪽 칸으로는 무신(武臣)이 드나들었습니다.
광화문의 현판 글씨는 원래 고종 때 경복궁 중건 당시 훈련대장으로서 영건도감(營建都監) 제조(提調)를 맡았던 임태영(任太瑛)이라는 무인(武人)이 쓴 것입니다. 광화문은 남문이라서 천정에 주작(南朱雀)이 그려져 있고 북문인 신무문에는 현무(北玄武)가, 동문인 건춘문에는 청룡(左靑龍)이, 서문인 영추문에는 백호(右白虎)가 그려져 있습니다.
광화문에서 흥례문에 이르는 구간은 궁이 아니라 궐에 해당되는 곳이기에 삼도(三道)가 형성되어 있지 않고 궁을 지키는 병사들이 거처하는 궐로서 병사들이 훈련할 수 있도록 평평한 광장으로 되어 있으며 군사들이 숙직할 수 있는 건물들도 있습니다.
흥례문(興禮門)은 회랑을 좌우로 둘러치고 위엄 있게 서 있습니다만 흥례문의 원래 이름은 홍례문(弘禮門)이었으나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당시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이름이 홍력(弘歷)임으로 그 이름자를 피하기 위해 홍(弘)을 흥(興)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흥례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근정문이 보이고 좌우로 행랑(行廊)이 둘러쳐 있으며 바로 앞에는 영제교(永濟橋)라는 돌다리가 놓여 있고 그 아래로는 명당수(明堂水)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데 궁궐의 최북단인 열상진원(列上眞原)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향원정(香遠亭)에서 연못을 이루고 전각들의 밑을 흘러 경회루 연못에 잠시 쉬었다가 영제교 아래로 흘러 동십자각 못 미친 곳에 있는 궁궐담장 아래 이간수문(二間水門)을 통해 궁궐을 빠져나가 중학천(中學川)을 거쳐 청계천(淸溪川)으로 흘러갑니다.
이 물길은 서류동입(西流東入) 또는 서출동류(西出東流)하는 명당수로서 금천(禁川)이라고 하는데 임금의 공간과 바깥공간을 구분 짓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어 천록(天祿)이라는 뿔 하나 달린 서수(瑞獸) 네 마리가 매서운 눈초리로 모든 사악한 것들이 금천을 건너지 못하도록 납작 엎드려 지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금천(禁川) 위에 놓인 다리를 금천교(禁川橋)라 하고 조선의 모든 궁궐에 놓여 있으며 경복궁의 영제교(永濟橋), 창덕궁의 금천교(錦川橋), 창경궁의 옥천교(玉川敎)가 그것입니다.
흥례문에서 바라볼 때 동쪽인 오른쪽 행랑에는 덕양문(德陽門)을 냈고 서쪽인 왼쪽 행랑에는 유화문(維和門)을 내고 그 옆에 기별청(奇別廳)을 두었습니다. 유화문은 신하들이 집무를 보던 장소인 빈청(賓廳)으로 통하는 문으로, 궁 밖의 관료들은 광화문, 흥례문, 유화문을 거쳐 빈청을 드나들었으며 유화문 옆에 자그마하게 붙어있는 기별청은 아침마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처리한 일들을 기별지(奇別紙)로 작성하여 배포하던 곳입니다. 관청으로부터 좋은 소식이 있을 때 기별(奇別)이 왔다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동쪽에 일화문을, 서쪽에 월화문을 거느리며 회랑으로 둘러쳐진 근정문을 들어서니 조선의 법궁(法宮)인 경복궁의 정전(正殿)이 이중월대(二重月臺) 위에 당당하게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습니다. 근정전 앞 넓은 뜰에는 삼도(三道)의 양 옆으로 품계석(品階石)이 일렬로 늘어서 있고 그 주위로는 다듬지 않은 돌인 박석(薄石)이 깔려 있는데 가공하지 않은 박석을 사용한 것은 햇빛의 반사를 막고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해섭니다.
박석이 깔린 마당을 조정(朝廷)이라 부르는데 내각(內閣)이나 정부(政府)를 뜻하는 권력기관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며 이곳에서는 매달 5일, 11일, 21일, 25일에 열리는 조회(朝會)인 조참(朝參)의식과 삼명절(三名節)인 정월초하루, 임금 및 왕비의 생신날 그리고 동짓날에 하례(賀禮)를 드리는 조하(朝賀)의식이 열렸던 곳입니다. 그리고 임금의 즉위식도 거행되어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선조 등 여덟 분이 이곳에서 등극하였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조정은 북쪽보다 남쪽이 1미터 정도 낮은 북고남저(北高南低)의 형태로 경사(傾斜)져 있는데 이는 배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근정전 구역은 조정은 박석과 품계석으로 월대는 이중의 화강암 기단으로 모두 석물로 이루어졌는데 딱 세 종류의 쇠붙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박석에 박힌 쇠로 만든 고리인데 이것은 차일을 칠 때 사용하던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근정전의 이중월대 상단에 놓여 있는 청동항아리로서 이는 향로가 아니라 왕권을 상징하는 정(鼎)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이중월대 하단 동쪽 귀퉁이에 있는 가마솥 같은 커다란 철물로 순우리말인 ‘드므’라고 하는데 이곳에 물을 담아 놓아 화마(火魔)가 물에 비친 자기 형상을 보고 놀라 달아난다는 주술적인 소박한 바람이 담겨져 있는 기물입니다.
그래서 왕권의 상징인 정(鼎)은 조선시대의 법궁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과 대한제국의 법궁 경운궁의 정전 중화전(中和殿)에만 비치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궁궐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근정전 뒤편에 사정문과 사정전(思政殿)이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편전(便殿)으로서 임금이 집무를 보던 곳입니다. 사람이 생각을 한다는 것은 곧 사람을 쓰고 부리는 일의 극치이며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잃게 되는 것이므로 왕으로 하여금 깊이 생각할 것을 촉구한다는 뜻으로 사정전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사정전 양쪽에는 사정전을 보좌하는 소편전(小便殿)으로 동쪽에는 주로 봄에 사용했던 만춘전(萬春殿)이, 서쪽에는 가을과 겨울에 사용했던 천추전(千秋殿)이 있어 계절에 따라 집무를 보는 장소를 달리 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정전은 온돌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겨울에 거처하기엔 불편함이 많아서 온돌로 되어 있는 두 개의 부속 건물을 배치하였습니다.
사정전 뒤에는 향오문(嚮五門)을 통하여 들어갈 수 있는 왕의 침전(寢殿)인 강녕전(康寧殿)이 있습니다. 향오는 오복(五福)을 향해 나아간다는 뜻으로 오복이라 함은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을 일컫는 것입니다. 수는 오래오래 천수(天壽)를 다해 사는 것이고, 부는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고 남을 괴롭히지 않으며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고, 강령은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이며, 유호덕은 덕을 쌓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으로 항상 남을 도우려는 마음을 갖자는 것이고, 고종명은 마지막 죽음에 임해 고통 없이 평온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는 한다는 것입니다. 오복 중에서 세 번째 강령을 따와서 침전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강녕전 건물은 용마루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곳에 잠을 자는 사람이 바로 용인데 또 다른 용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강녕전은 전각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월대(月臺)가 무척 높고 넓습니다. 임금의 침소 앞뜰에서도 통치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증좌일 것입니다. 왕비와 세자가 석고대죄를 청하던 곳이기도 하고 임금의 잘못된 정책에 대하여 조정대신들이 그 부당함을 목숨을 내놓고 바로잡기 위해 읍소하던 곳도 바로 강녕전 월대였습니다.
강녕전을 에워싸듯이 사방에 소침전(小寢殿)이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동소침인 연생전(延生殿)은 서쪽을 향하고, 서소침인 경성전(慶成殿)은 동쪽을 향하고, 연생전의 북쪽에는 연길당(延吉堂)이, 경성전의 북쪽에는 응지당(膺祉堂)이 자리잡고 남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이 다섯 전각이 모두 회랑(回廊)을 통해 이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강녕전을 지나 양의문(兩儀門)을 들어서면 교태전(交泰殿)이 나타나는데 내명부(內命婦)를 총괄하던 왕비가 일을 보는 전각(殿閣)과 침전(寢殿)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중궁(中宮) 또는 중전(中殿)이라고도 하며 이런 연유로 왕비를 중전이라고 달리 부르기도 합니다.
‘양의(兩儀)’와 ‘교태(交泰)’는 음양(陰陽)의 조화와 남녀의 교합(交合)을 의미하며 음양이 잘 조화를 이루어 순조로운 생산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으며 특히 ‘태(泰)’는 <주역(周易)>의 64괘(掛) 중에서 하늘, 남자, 상승(上昇)을 의미하는 건(乾)괘 셋이 아래에 있고 땅, 여자, 하강(下降)을 의미하는 곤(坤)괘 셋이 위에 있는 모양으로, 앞으로 땅의 기운이 하강하고 하늘의 기운이 상승하여 비로소 천지음양의 기운이 화합하여 만물이 생성, 번영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교태전은 원길헌(元吉軒), 함홍각(含弘閣), 건순각(健順閣) 등 부속 건물을 지붕을 낮게 달아낸 익각구조(翼閣構造)로 거느리고 있으며 뒤편에는 후원(後園)을 만들고 그곳에 경회루의 연못을 판 흙으로 가산(假山)인 아미산(蛾眉山)을 쌓고 위쪽에는 큰 나무들을 심었고 아래에는 화계(花階)를 만들어 ‘노을이 드리운 연못(落霞潭)’과 ‘달을 품은 연못(函月池)’을 돌에 새겨 두었고 육각형의 굴뚝 4개를 두고 각 면마다 십장생(十長生), 사군자(四君子), 만자문(卍字紋), 봉황(鳳凰), 귀면(鬼面), 학, 박쥐, 불가사리, 당초문(唐草紋) 등의 아름다운 문양을 소조편(塑造片)으로 장식하였습니다.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 뒤에 굳이 가산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전통적인 풍수인식에 의하면 백두산의 정기가 산줄기를 따라 방방곡곡으로 뻗어나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백두대간(白頭大幹)을 따라 남향한 산줄기가 분수치에서 남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한북정맥(漢北正脈)을 일구고 도봉산과 삼각산 사이의 영봉을 지나면서 정맥의 본줄기는 서쪽으로 노고산, 장명산을 지나 서해로 숨어들고 다른 한줄기는 남쪽으로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의 세 봉우리인 삼각산(三角山)으로 솟구쳤다가 시단봉을 지나 보현봉에서 형제봉으로 이어져 구준봉을 지나 백악에서 경복궁으로 내려앉았는데 백두산에서부터 이어져온 이 정기를 왕비가 받아 안아 왕자(王子)를 순산하여 왕실을 번영케 하라는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근정전 동쪽에는 앞으로 왕과 왕비가 될 세자와 세자빈의 생활공간으로 ‘떠오르는 태양’을 의미하듯 동궁(東宮)이라 하고 달리 세자궁(世子宮), 춘궁(春宮)이라고도 부르는데 아마도 동쪽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의미하기 때문에 붙여진 것 같습니다.
동궁은 세자와 세자비의 생활공간인 자선당(資善堂), 세자가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던 비현각(丕顯閣), 세자의 교육이 이루어졌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세자의 경호 업무를 맡았던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로 배치되어 있는데, 특히 세자시강원을 춘방(春坊), 세자익위사를 계방(桂坊)이라 달리 불렀고 동궁의 정문은 중광문(重光門)입니다.
동궁 일원은 지금은 복원되어 있습니다만 1915년 일제가 경복궁을 훼멸시킬 때 자선당의 재목들은 오쿠라(大倉)라는 일본인에게 팔려나가 일본 도쿄에서 조선관(朝鮮館)이라는 사설박물관으로 존재하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모두 소실되고 검게 그을린 주춧돌만이 오쿠라호텔 정원에 있던 것을 1995년 경복궁으로 돌아와 지금은 자경전 밖 한쪽에 놓여 있습니다.
동궁 북쪽에는 궁궐에 필요한 음식을 장만하던 소주방(燒廚房)이 최근 복원되었는데 ‘불을 때서(燒) 조리하는 주방(廚)’이라고 붙여진 이름으로 왕과 왕비의 수라를 장만하는 내소주방인 수라간, 궁궐의 크고 작은 잔치상과 차례상을 준비하는 외소주방인 난지당, 다과와 간식을 마련하는 생물방(生物房)인 복희당의 세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경복궁에는 소주방 건물이 여러 곳에 있었으며 복원된 건물은 대전(大殿)에 속한 소주방입니다.
조선의 왕은 보통 하루에 다섯 끼를 먹었는데 오전 10시에 12첩 반상의 아침수라와 오후 5시에 저녁수라를 주식으로 삼고, 오전 7시에는 흰 쌀죽과 반찬이 놓인 죽수라상을, 오후 1시와 밤 9시에는 국수를 위주로 한 반과상(飯果床)을 차렸습니다.
교태전을 나서면 동궁 북쪽으로 고종의 양모인 조대비(趙大妃)를 위해 청련루터에 건립한 자경전(慈慶殿)이 그 위용을 뽐내고 있는데, 경복궁에서 연침(燕寢)에 해당되는 강녕전, 교태전, 자경전 중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건물입니다. 1917년 창덕궁에 화재가 나자 일제는 경복궁 전각들의 재목을 창덕궁 복원에 사용하였으니 강녕전을 헐어 희정당(熙政堂)을, 교태전을 헐어 대조전(大造殿)을 복원하였고 지금의 강녕전과 교태전은 1990년대에 중건한 것입니다.
궁궐에서 자경전은 임금의 어머니 또는 할머니 등 여성들이 주거하는 공간을 일컫는데, 정조(正祖)가 즉위하면서 어머니 혜경궁(惠慶宮) 홍(洪)씨를 위해 창경궁(昌慶宮)에 자경전을 짓는데서 비롯되었으며, 자경(慈慶)은 임금의 어머니와 할머니 등 여자 쪽 어른들에게 경사가 있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자경전은 조선 초 경복궁 창건 때는 없었던 건물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고종의 양어머니가 된 조대비를 위해 특별히 지은 것입니다. 정문을 만세문(萬歲門)으로 이름 짓고 담장은 아름다운 꽃담으로 장식하였으며 뒤뜰에는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십장생(十長生) 굴뚝과 함께 불가사리 같은 벽사(辟邪)를 상징하는 동물들도 벽돌로 구워 새겨 넣었습니다.
교태전 뒤편에 조대비가 승하한 흥복전(興福殿) 구역은 상궁들의 침전 영역으로, 흥복전 주변에 광원당(廣元堂), 영훈각(永薰閣), 다경각(多慶閣), 집경당(緝敬堂), 함화당(咸和堂) 등의 건물들로 둘러 싸여 있었으나 지금은 집경당과 함화당만 세 칸의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쓸쓸히 남아 있고 흥복전은 지금 한창 복원공사 중입니다.
건청궁(乾淸宮)은 고종이 아버지인 대원군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내탕금(內帑金)으로 지은 궁궐 안의 궁궐로 경복궁의 북쪽 끝에 있습니다. 고종이 머물렀던 사랑채인 장안당(長安堂), 명성왕후가 머물렀던 안채인 곤녕합(坤寧閤) 그리고 행랑채로 구성된 일반 사대부집과 같이 지어졌으며 특히 곤녕합의 옥호루(玉壺樓)에서 일본 낭인들은 명성왕후를 시해(弑害)하고 옆에 있는 녹산(鹿山)에서 시신을 불태웠습니다.
경복궁에는 연못이 둘 있는데 하나는 강녕전과 근정전 곁에서 정면 7칸 측면 5칸의 35칸 규모의 팔작지붕 중층건물(重層建物)인 경회루(慶會樓)를 품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건청궁 앞에서 정육각형 정자로 모지붕을 한 중층건물인 향원정(香遠亭)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경회루는 웅장하며 남성적이며 향원정은 아담하며 여성적인 분위기가 풍깁니다. ‘경회(慶會)’는 ‘임금과 신하가 덕(德)으로서 만난다’는 뜻으로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외국의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던 공적(公的)인 공간이고 ‘향원(香遠)’은 ‘향원익청(香遠益淸), 즉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아진다’라는 뜻으로 임금이 휴식을 취하며 거닐던 사적(私的)인 공간입니다.
건청궁의 서쪽에는 집옥재(集玉齋), 협길당(協吉堂), 팔우정(八隅亭)이 있는데 이 세 채의 건물은 당초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진 건물이었으나 1888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이 전각들도 옮겨온 것으로, 고종은 이 건물들을 어진의 봉안 장소와 서재 겸 외국사신 접견장소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3채의 건물은 다른 전각들과 달리 중국식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신식이라고 생각되던 중국풍을 받아들였기 때문으로 생각되며, 집옥재의 현판을 송나라 명필인 미불(米連, 字 元章)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중국풍으로 만든 것도 이런 연유 때문입니다.
경복궁의 서북쪽 일대는 빈전(殯殿)이나 혼전(魂殿), 영전(靈殿) 같은 제사와 관련된 전각들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빈전은 왕실에 돌아가신 분이 있을 때 관을 모셔두는 곳이고 혼전은 종묘에 모실 때까지 만 2년 동안 위패를 모시는 곳이며 영전은 돌아가신 분의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복원된 태원전(泰元殿)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던 건물로 나중에는 빈전이나 혼전으로도 쓰였습니다.
경회루 남쪽에 있는 수정전은 세종 때는 신하들과 만나 학문도 논하며 한글도 창제한 집현전(集賢殿)으로, 세조 때는 정례행사와 모든 중대회의에 참석하여 회의록과 사초(史草)를 작성하고 시정기(時政記)를 편찬하여 실록편찬(實錄編纂)의 자료로 삼았던 예문관(藝文館)으로, 고종 때는 잠시 침전(寢殿)과 생활공간으로 사용한 연거지소(燕居之所)로, 갑오경장(甲午更張) 때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로, 그 이후에는 내각(內閣)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경복궁의 네 개의 문은 드나드는 사람들이 달랐는데 정문인 광화문은 임금의 행차나 사신들이 주로 드나들었고, 세자의 공간인 동궁이 동쪽에 있어 건춘문으로는 왕실의 종친들이 주로 드나들었고, 궐내각사가 근정전 서쪽에 있어 영추문으로는 문무백관이 주로 드나들었으며, 북문은 특별한 일이 없는 동안에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연유로 종친부(宗親府)는 건춘문 밖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경복궁을 둘러보고 영추문으로 궁궐을 나와 건너편에 있는 생선구이와 찌개를 잘하는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그때 그사람들’의 역사적 현장인 궁정동 안가터를 지나 경복궁 밖에서 신무문과 건춘문, 동십자각과 이간수문(二間水門)을 둘러보고 최근 본래 위치로 이전한 종친부를 들러서 삼청동 골목길을 지나서 인현왕후와 명성왕후의 사저(私邸)로 사용했던 감고당(感古堂) 길을 거쳐 고종의 잠저였으며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운현궁(雲峴宮)까지 둘러보려고 합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화, 등산복, 배낭), 모자, 장갑, 선글라스, 식수, 스틱, 무릎보호대,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서울학교 참가비는 5만5천원입니다(강의비, 관람료, 점심식사 겸 뒤풀이,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참가신청 하신 후 참가비를 완납하시면 참가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드립니다. 현장에서는 참가접수를 받지 않습니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참가신청 바로가기
▷서울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seoulschool2 에도 꼭 놀러오세요.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 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번씩, 둘째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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