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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통 막걸리 익어가는 섬에서 하룻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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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백년전통 막걸리 익어가는 섬에서 하룻밤

12월 섬학교 <송년특집-낭도>

아름다운 섬에는 또 하나의 보물이 숨어있습니다. 섬에 무려 100년 전통의 막걸리 양조장이 있습니다. 여수의 낭도(狼島)주조장 이야기입니다. 근처 섬 개도(蓋島)의 개도막걸리는 막걸리 마니아들 사이에 꽤 유명하지만 낭도막걸리는 외부에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2월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연구 소장)는 제45강, 송년특집으로, 한 해를 보내는 고즈넉한 풍광에 백년전통 막걸리가 익어가는 섬, 낭도에서의 하룻밤을 준비합니다. 낭도의 풍경은 안온하고 자연스러워 더없이 평화로운 느낌을 줍니다. 우리들 고향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송구영신(送舊迎新)! 12월 5(토)∼6(일)일 낭도에서의 하룻밤 속에 오롯한 나만의 안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낭도 상산 오르는 길에 만난 이웃 섬 사도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2월의 섬 <여수 낭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아직도 이어지는 백년 막걸리의 전통

전통 막걸리를 만드는 낭도주조장 강창훈 대표는 낭도주조장의 역사가 100년이 넘었다고 주장한다. 작은 섬에 100년 역사의 막걸리 양조장이 있다는 사실은 한국의 막걸리 역사를 새로 써야 할 만큼 중요한 사건이다. 하지만 강대표의 주장처럼 낭도주조장의 역사가 실제로 100년이 넘었는지는 더 정확히 규명해봐야 할 듯하다. 경기도 고양의 배다리막걸리는 1915년, 경북 영양의 영양양조장과 경기 양평의 지평양조장은 1925년에 양조장 면허를 취득했다며 자신들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막걸리양조장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낭도주조장의 역사가 100년이 넘는 것이 증명된다면 한국의 막걸리 역사는 새로 써져야 하고 낭도주조장은 한국의 막걸리 양조장 1호의 영예를 안을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낭도주조장의 역사가 100년이 넘었다는 것을 증명해줄 물적 증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낭도 주민들은 강창훈 대표의 할아버지인 고 강봉경씨(생존해 있다면 109세)가 20대 초반부터 막걸리양조장을 시작했다고 증언한다. 강봉경씨가 낭도주조장을 처음 창업한 것인지 그의 선친인 고 강세원씨에게서 양조장을 물려받았는지는 불분명 하다. 만약 강세원씨가 창업했다는 증거가 있으면 낭도주조장은 100년이 넘었을 것이 확실시된다. 하지만 아직은 그 증거가 없다.

그러나 주민들의 증언만으로도 낭도주조장은 90년의 역사다. 근 백년이다. 낭도주조장이 100년이 넘었다는 증가를 찾아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못 찾아도 90년 역사의 섬마을 막걸리주조장이란 대단한 유산이다. 나그네가 몇 차례 낭도를 방문하면서 마셔본 낭도막걸리는 약간 싱거운 듯한 느낌이었지만 강대표로부터 직접 얻어 마셔본 막걸리 원액은 그야말로 최상급이었다. 맑으면서도 진했고 달지 않은데도 감칠맛이 컸다.

낭도는 섬이지만 노인 인구가 다수를 점하다보니 어업보다는 농업 종사자가 더 많다. 낭도의 대표적인 농산물은 고구마와 콩이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3kg에 1만 원 선인 밤고구마가 낭도 현지에서는 2014년, 12kg 한 상자가 겨우 9천 원씩에 농협으로 수매됐다. 소비자가의 3분의 1도 안 되는 헐값에 출하되고 있는 것이다. 낭도주조장에서 고구마를 원료로 막걸리를 만들면 어떨까. 나그네는 통영의 욕지도에서 고구마막걸리를 마셔본 적이 있는데 당원이나 아스파탐 같은 감미료가 가미되지 않은 고구마막걸리는 부드럽고 달콤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그네는 강창훈 대표에게 고구마막걸리를 만들어볼 것을 권유했고 강대표는 개발의지를 표했으니 머잖아 낭도 고구마막걸리를 맛볼 수도 있을 듯하다.

▲낭도의 오솔길을 따라 걷다보면 한없이 아련하고 아득해진다. Ⓒ섬학교

가고 싶은 섬, 낭도

머지않아 다리로 내륙과 연결될 예정인 낭도는 전라남도에서 추진 중인 <가고 싶은 섬> 가꾸기 대상 섬으로 선정돼 기대에 부풀어 있다. 낭도 선착장, 여산마을 초입,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두개의 플래카드다. ‘전남 6기 브랜드 시책, 가고 싶은 섬 가꾸기 확정 경축’. 플래카드를 내건 이들은 재경낭도향우회와 재여낭도향우회원 일동이다. 마침 낭도<가고 싶은 섬>추진협의회의 안내 방송까지 나온다. 낭도 주민들은 물론 출향 인사들까지 가고 싶은 섬 사업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큰 지 짐작이 가고도 남게 만드는 풍경이다.

전라남도의 <가고 싶은 섬>가꾸기는 오랫동안 소외되었던 섬들을 가꾸는 사업인데 토목을 배제하고 자연과 문화, 인문자원을 바탕 삼아 섬들을 관광자원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동안 많은 섬 개발은 토목사업 위주로 진행돼 환경 파괴가 심각했다. 게다가 토목 위주 개발은 외부 개발업자들에게만 이익을 안겨줬을 뿐 섬 주민들에게는 별다른 혜택을 주지 못하고 끝나기 다반사였다. <가고 싶은 섬>가꾸기 사업은 이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것인데 궁극적으로 주민들이 살고 싶은 섬, 청년이 돌아오는 섬을 만드는 일이다. 지금까지 섬 개발 사업 중 가장 바람직한 방향의 사업이지 싶다. 노령화와 섬의 어업경기 침체로 활력을 잃어가던 낭도 또한 <가고 싶은 섬>가꾸기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인 듯하다.

낭도(狼島)는 이리 섬이란 뜻이다. 섬의 생김새가 이리, 곧 늑대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하지만 많은 고유의 지명이 한자화 과정에서 와전되거나 왜곡됐듯이 낭도란 이름 또한 한글 지명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본래의 이름을 잃어 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대체 누가 그 옛날에 섬의 형상이 서로 엇비슷한 이리인지, 승냥이인지, 늑대인지까지 세밀하게 구분할 수 있었단 말인가.

게다가 <조선왕조실록>에는 500년 동안 낭도란 지명이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세종실록> 지리지 순천도호부조에서 이미 낭도 바로의 옆의 작은 섬 사도가 언급되는데도 말이다. 옛날에는 낭도(狼島)가 아니라 다른 이름이었을 개연성이 큰 것이다. 고양이와는 하등 관계없는 여수의 다른 섬 묘도가 그렇고 적금도가 그렇듯이. 묘도는 굴의 옛 이름인 괴섬이었는데 한자화 과정에서 고양이 묘를 써서 묘도로 둔갑했고, 자갈(작)밭이 많아 ‘작기미 섬’이라 부르던 적금도는 한자화 과정에서 금광의 섬으로 돌변해버렸다.

낭도는 인근의 사도와 함께 공룡 발자국 화석지로 유명하다. 화정면 인근 섬에서 발견된 공룡 발자국 화석은 총 3,546점인데 두 가구가 사는 작은 섬 추도에 1,759점으로 가장 많고, 낭도가 그 다음으로 962점이다. 그 외 사도에 755점, 목도에 50점, 적금도에 20점의 발자국 화석이 있다. 사람이 살기 전 낭도 일대는 공룡들의 왕국이었던 것이다. 순천도호부에 속했던 낭도는 1896년(고종 33년) 돌산군(突山那) 설립 시 옥정면(玉井面)에 속했다가 1914년 여수군(麗水郡)이 설치되면서 화정면 소속이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낭도는 면적 5.03㎢, 해안선 길이 19.5km의 작지 않은 섬이다. 조선왕조의 공도정책으로 비워져 있던 낭도에 다시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것은 임진왜란 직후 강릉 유씨가 들어와 정착되면서부터라 한다. 2001년 433명이던 낭도의 인구는 2014년 말 기준 298명. 많은 섬들이 그렇듯이 낭도 또한 급속도로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섬의 최고봉인 상산(283m) 정상에는 봉화대 터가 남아있는데 임진왜란 시절부터 왜적의 출몰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봉화대 터라지만 실상은 봉수대라는 이름이 정확하다. 적의 동태를 알리는 위급 신호는 불만 피워서 알린 것이 아니었다. 밤에는 불이, 낮에는 연기가 신호수단으로 사용됐다. 밤에 불을 피워 올리는 것을 봉(烽), 낮에 연기를 피우는 것을 수(燧)라 한다. 그래서 봉수대다. 봉화불은 장작이나 화약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많이 사용된 재료는 승냥이 똥이었다. 승냥이 똥에는 인이 섞여 있어 그 불빛이 푸르고 멀리까지 보이기 때문에 봉화불의 재료로 애용됐다. 낭도의 봉수대는 고흥의 팔영산 봉수대에서 신호를 받아 화양면 장수리 봉수대로 신호를 보내 전라좌수영 사령부가 있는 여수의 종고산 봉수대까지 전달됐다.

이 나라 많은 섬들은 이름의 유래조차 정확히 알 수 없을 정도로 섬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부실하다. 조선왕조가 공도정책으로 섬을 하찮게 대우했던 원인이 크다. 그래서 문자기록으로 섬의 역사를 알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사람이 살았어도 기록이 없으면 역사란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섬의 역사를 미력하나마 엿볼 수 있는 기록물이 있다. 구전으로 이어진 섬의 지명들이 그것이다. 섬의 지명은 섬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료다. 낭도의 지명들 또한 다르지 않다.

모소금은 바위에 바닷물이 고여 소금이 되면 식용으로 이 소금을 채취했던 곳이고, 고막포는 고막이 많이 서식했던 곳이고, 도낙포는 옛날에 낙지가 많이 잡혔던 곳이다. 집뚜개[浦]는 해안 모양이 지붕처럼 생겼다 해서 집뚜개고 강남금이는 강낭콩 재배가 잘 됐던 곳이다. 여산마을 동북쪽의 이서나무끝은 옛날에 이서(자두)나무가 많이 자생했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가장굴은 낭도 여산마을의 서북쪽에 있는데 옛날에 주민이 죽었을 때 마을과 가까운 곳에 임시로 장지를 정하고 가묘를 썼다 해서 가장굴이라 했는데 후일 사람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고부터는 신촌이란 이름을 얻었다. 답동은 논이 많았던 마을이라 하여 답동이었지만 지금은 모두들 큰 마을로 이주해 사람이 살지 않는다.

▲아직도 우경(牛耕)을 하는 낭도. 시원의 풍경 남아있으니 참으로 귀한 섬이다. Ⓒ섬학교

마을 대동제로 복원 되어야할 당제

상산으로 오르는 길, 낭도 여산 마을 뒤안 당산에는 아직도 당제를 모시는 신당인 당집이 남아있다. 낭도의 마을대동제인 당제는 4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주관해 치러졌다. 하지만 이제 당제는 더 이상 마을 대동제가 아니다. <가고 싶은 섬> 낭도추진협의회 강창훈 위원장에 따르면 “마을총회에서 교회를 다니는 장로들이 마을 돈으로 당제를 모시는 것을 문제 삼아” 마을행사로서의 당제가 중단됐다고 한다. 낭도에서는 교인들과 비교인들 사이의 갈등이 큰 듯하다. 섬 주민 90% 정도가 교인이라 하니 교회의 영향력이 막강함을 알 수 있다. 마을총회의 당제 중단 결정 이후, 당제의 지속을 원하는 마을 사람들 30여 명이 낭도민속보존회를 결성했으며 지금은 낭도민속보존회 주관으로 당제를 모신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당제는 민속보존회원뿐 아니라 교회에 다니지만 당제도 소중히 여기는 주민들과 출향인사들도 함께 참가해 치러지고 있다. 섬 내부의 갈등관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출향인사들의 후원이 큰 힘이 된다고 한다.

낭도의 당제는 제관들이 정월 열사흗날 당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준비해 당할머니, 당할아버지에게 제사를 올린 뒤 보름날 마을로 내려와 바닷가에서 용왕제를 올리고 막을 내린다. 대부분의 섬과 마을들에서는 당제가 사라진지 오래다. 그런데도 낭도에서 수백 년을 끊이지 않고 당제가 이어져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의미는 크다. 인천의 소래나 연평도의 경우 당제가 사라지고 교회가 풍어제를 풍어 예배로 흡수했지만 근래에는 다시 마을 전체 차원에서 당제가 복원됐다. 문화재인 동시에 관광자원으로 당제를 복원시킨 것이다. 당제는 우리 민족의 민간신앙이이기도 하지만 본질은 마을대동제다. 협소하게 종교적인 시각으로 봐야 할 이유가 없는 소중한 문화재인 것이다. 낭도당제가 다시 마을 전체 차원에서 치러졌으면 싶은 마음이 간절한 것은 그 때문이다.

▲100년 양조장의 항아리에서 익어가는 막걸리 Ⓒ섬학교

낭도의 카니발, 가장무도회

카니발은 가장을 하거나 가면을 쓰고 행하는 축제다. 가장과 가면 행렬에는 악령, 잡귀들을 위협해 쫓는 주술적 의미가 담겨 있다. 놀랍게도 낭도의 세시풍습에도 이런 카니발이 있었다. 낭도의 카니발은 정월 대보름 달집태우기 때 행해졌다. 일반적인 달집태우기와는 달리 낭도의 달집태우기에는 가장을 한 사람만 참여할 수 있었다. 여성들은 남장을 하고 남성들은 여장을 했다. 전문적인 연희패거리에서 하는 탈춤 같은 가면극이 아니라 전 주민이 참가하는 가장행렬로서 카니발은 이 땅에 극히 희귀한 풍습이다. 지금은 중단됐지만 50년 전까지만 해도 낭도에 실존했던 풍습이라니 흥미로운 일이다. 낭도의 카니발은 이 땅 민속놀이의 한 장을 추가할 수 있는 획기적인 풍습이다.

옛날 낭도의 달집태우기에 참가하는 마을 사람들은 모두 성역할을 바꾸고 나왔다. 여자는 남장을 하고 남자는 여장을 하고 참가했다. 여자는 갓을 쓰고 남자는 치마, 저고리를 입고 나와 달집을 태우고 풍악을 울리고 춤을 추며 축제를 즐겼다. 낭도에는 여산, 규포 두 개 의 큰 마을이 있는데 당시에는 여산마을 한 곳에만도 350호 1,000여 명이 살았으니 그 풍경이 장관이었을 것이다. 이 카니발은 낭도 처녀 총각들이 짝을 맺는 연애의 시간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해방구였던 것이다. 평상시 여자라 수줍어하던 처녀들도 이날은 남자가 되어 더 적극적으로 좋아하는 총각에게 구애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낭도의 카니발이 다시 재현된다면 얼마나 멋진 행사가 될까. 생각만으로도 설레게 하는 축제가 될 것이다. 섬마을의 카니발!

실상 낭도에는 빼어나 풍광이나 문화유적이라 할 만한 것은 많지 않다. 낭도가 난개발의 바람을 피해갈 수 있었던 이유다. 덕분에 섬은 우리들 고향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섬의 풍경은 안온하고 자연스러워 더없이 평화로운 느낌을 준다. 하지만 낭도는 지금 연륙교 공사가 한창이다. 3∼4년 후쯤 연륙교가 완공되면 낭도에는 관광객들과 육지의 문물이 물밀듯이 몰려올 것이다. 지나치게 많은 관광객의 유입은 난개발의 욕망을 부채질할 것이다. 주민들도 개발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지만 더 큰 문제는 낭도의 전망 좋은 땅들의 70% 이상이 외지인 소유라는 점이다. 거대자본을 등에 업은 외지인들은 호텔과 리조트, 펜션, 대형식당 등을 세우려 들 것이다. 이들 시설이 무분별하게 들어서면 낭도의 보물인 자연스런 경관들이 훼손될 것은 불을 보듯 환하다. 밀려드는 차량들을 위한 도로 확장의 요구가 생길 것이고 이 또한 경관 파괴로 이어질 것이다.

공룡발자국 화석이 있는 낭도가 아직은 문화재보호법과 수자원보호구역 설정으로 보호받고 있긴 하지만 이 장치들이 언제 허물어질지 알 수 없다. 이미 외부자본이 수자원보호구역 해제를 위한 로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린다. 섬은, 섬 개발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섬에 다리가 들어서는 것이 결코 섬 주민들만을 위한 일이 아님을 낭도에서 또 한번 느낀다. 전남도가 <가고 싶은 섬>가꾸기를 하는 일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지만 전남도의 힘만으로는 섬을 지키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국가 차원의 관심과 정책적 지원이 있어야 섬은 진정한 주민들의 섬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낭도, 섬의 마지막 시간들이 애틋하게 흘러간다.

▲갯바람에 말라가는 여수 명물 서대와 갑오징어 Ⓒ섬학교

섬학교 2015년 12월, 제45강 <낭도> 답사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배시간의 변경으로 일부 조절될 수 있습니다).

<12월 5일(토)>
06:30 서울 출발(6시 2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 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45강 여는 모임
-여수 백야항 도착
-낭도 도착
-점심식사
-첫째 날 낭도 걷기(6km)
낭도출장소-삼거리-쉼터(5백년송)-상산(283m)-쉼터-삼거리-당산-여산마을-숙소
-저녁식사 겸 뒤풀이
-자유시간 및 취침(다인실)

<12월 6일(일)>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
-둘째날 낭도 걷기(4km)
낭도출장소-낭도중학교(폐교)-답동-낭도해수욕장-답동-낭도중-낭도출장소-낭도주조장
-점심식사
-낭도 출항
-백야항 도착. 서울 향발. 제45강 마무리모임

▲섬학교 제45강 <여수 낭도> 답사지도 Ⓒ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모자, 선글라스, 장갑,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섬학교 제45강 <여수 낭도> 참가비는 25만원입니다(왕복교통비, 1일 숙박비, 5회 식사비 겸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참가신청 하신 후 참가비를 완납하시면 참가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드립니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참가신청 바로가기
▶섬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island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개발의 바람이 비껴간 섬은 오래된 길들이 오롯이 남아 걷는 즐거움을 준다. Ⓒ섬학교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 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이며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8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공룡발자국이 남아있는 낭도 해변의 바위들은 억년의 시간 저편 공룡의 시대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섬학교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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