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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대기업의 이익=미국의 국익' 합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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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대기업의 이익=미국의 국익' 합의 형성

['전쟁 국가' 미국] '제국의 두뇌 집단' 미 외교협회(CFR) ③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한 주된 목적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가 아니었다. 세계를 미국 주도의 단일한 자본주의 체제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 금융과 제조업 및 농업의 대외 진출이 주된 목적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전쟁 목표는 미국 정부가 수립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금융가, 대기업가, 그리고 이들을 위해 복무하는 국제변호사와 학계 인물들로 구성된 외교협회(CFR)라는 민간 조직이었다. CFR은 2차 대전 당시 '전쟁과 평화 연구'(The War and Peace Studies)라는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를 통해 2차 대전 후 세계 정치경제 질서의 밑그림을 만들어냈다. 2차 대전 이후 세계는 대체로 이 밑그림에 따라 재구성됐다.

미국의 역사학자 로렌스 슢과 사회학자 윌리엄 민터가 공동 저술한 <제국의 두뇌 집단: 외교협회와 미국의 대외정책>(Imperial Brain Trust: The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and United States Foreign Policy)을 바탕으로 CFR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미친 영향에 관해 알아보기로 한다. 이 책은 1977년 먼슬리리뷰(Monthly Review)에서 간행됐다.

2차 대전 발발 : 미국의 전후 목표를 설정하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유럽의 2차 대전이 시작됐다. 그로부터 2주일이 채 안 된 9월 12일, 해밀턴 피시 암스트롱(<포린어페어즈> 편집인)과 월터 맬러리(CFR 사무총장)가 워싱턴을 방문해 조지 메서스미스 국무부 차관보(CFR 회원)를 만났다. 암스트롱 등은 CFR과 국무부 공동으로 전쟁에 따른 장기적 문제들과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이 추구해야 할 목표들에 관한 연구그룹 결성을 제안했다.

▲ <제국의 두뇌 집단: 외교협회와 미국의 대외정책>, 로렌스 슢·윌리엄 민터 공저
연구 결과는 루즈벨트 대통령 및 국무부에 보고하되 일반에는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같은 날 메서스미스 차관보는 논의 내용을 코델 헐 국무장관과 섬너 웰즈 차관(CFR 회원)에게 보고하고 승인을 받았다. 이와는 별도로 노먼 데이비스 CFR 의장도 자신의 친구인 헐 국무장관으로부터 연구그룹 결성에 관한 구두 승낙을 받았다. 1939년 12월 6일 록펠러 재단이 첫 해(1940년) 연구비 4만 5000 달러 지원을 약속함으로써 연구그룹은 출범할 수 있게 됐다. 2차 대전 후 세계 정치경제 질서를 규정할 '전쟁과 평화 연구('The War and Peace Studies)가 시작된 것이다.

CFR은 처음부터 세계적 차원에서 미국의 국익을 증진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최대한 넓은 지역에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질서를 이식한다는 것이었다. 1차 대전 후 미국이 고립주의에 빠져 국제문제에서 손을 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전쟁과 평화 연구'의 목표는 "전쟁의 추이를 예의 주시하며, 전쟁이 미국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고, 전쟁 종료 시 미국의 국익을 확보하는 방안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12월 중반 연구조직의 얼개가 그려졌다. 연구의 전체적 방향을 기획하고 조정하는 기획위원회(Steering Committee)와 5개 분과위원회로 구성됐다. 기획위 위원장은 노먼 데이비스 CFR 의장, 부위원장은 해밀턴 피시 암스트롱이 맡았다. 이밖에 월터 맬러리(CFR 사무총장), 제이콥 바이너(시카고대 경제학과 교수), 앨빈 한센(하버드대 정치경제학 교수), 휘트니 셰파드슨(기업인, 파리강화회의 당시 하우스의 측근), 알렌 덜레스(변호사, 30년대 데이비스와 함께 군축 협상 참가), 핸슨 볼드윈(<뉴욕타임스> 군사 전문 기자), 이사야 보우먼(지리학자, 존스홉킨스대 총장) 등 쟁쟁한 인사들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5개 분과위는 경제금융(위원장: 한센과 바이너), 정치(셰파드슨), 군비(덜레스와 볼드윈), 영토(보우먼), 평화목표(1941년 신설, 암스트롱) 등으로 구성됐다.

'전쟁과 평화 연구'에는 1940~45년 6년간 각 연구위에 10~15명씩 약 100명이 참가했고, 362차례 회의에서 682개 정책문서를 작성해 대통령과 국무장관 등 최고위 관리들에 보고했다. 연구보고서는 대통령 2부를 비롯해 총 25부만 작성했을 정도로 극도의 비밀 속에 진행됐다. 이를 위해 록펠러재단은 6년간 총 30만 달러의 연구비를 지원했다. 즉 미국 최고 갑부인 록펠러가 돈을 대고 금융계, 대기업 및 이들의 해외 팽창 목표에 동조하는 지식인들로 구성된 민간 연구조직이 전쟁 후 미국의 장기적 대외정책 목표 설정을 주도한 것이었다.

'전쟁과 평화 연구'는 전쟁의 추이에 따라 두 단계로 진행됐다. 나치 독일이 소련을 제외한 유럽대륙을 석권했던 1941년까지는 나치 세력권(유럽대륙)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 목표였다. 미국의 전통적 세력권이었던 서반구와 영제국의 세력권, 그리고 동남아 등 아시아지역을 미국의 세력권 안에 통합한다는 계획이었다. CFR은 장래 미국의 세력권이 될 이들 지역을 '그랜드 에어리어'(Grand Area)라고 불렀다. 그랜드 에어리어를 미국 자본주의권 아래 통합하는 것을 미국의 최대 국익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1941년 중반 이후 독일의 소련 침공이 신속한 승리로 끝나지 못할 것이 분명해지고, 이어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전쟁에 뛰어들게 되면서 그랜드 에어리어를 넘어 유럽대륙까지 포함하는, 즉 전 세계에 걸친 미국의 패권 확보를 전쟁목표로 삼게 된다. 그랜드 에어리어 단계에서는 CFR이 연구를 전담했지만 1941년 중반 이후에는 CFR과 국무부가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에도 연구의 주도권은 국무부가 아닌 CFR이 갖고 있었다.

그랜드 에어리어

전쟁 초기 CFR의 관심은 독일 점령 지역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 대한 미국의 패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전격전을 앞세운 독일이 1940년 4월부터 단 두 달만에 프랑스, 네덜란드, 덴마크 등 영국을 제외한 유럽을 석권한 엄청난 기세에 비추어 독일 점령 지역에 미국이 진출한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영국조차도 독일의 공습을 견뎌내지 못할 것으로 예상됐었다.

CFR은 전쟁 초기부터 루즈벨트의 전쟁 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다. 우선 1940년 3월 연구그룹 영토분과는 당시 덴마크 식민지였던 그린란드의 전략적 중요성에 주목하면서 독일이 덴마크를 침공할 경우 그린란드가 독일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1940년 4월 초 독일이 덴마크를 점령한 직후 루즈벨트는 영토분과 위원장 보우먼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그 결과 루즈벨트는 그린란드가 먼로독트린이 적용되는 미국의 세력권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고 이에 따라 그린란드는 미국 소속으로 남게 됐다. 4월 18일 기자회견에서 루즈벨트는 그린란드가 미국 영토라는 점을 선언했다. 후에 그는 "(당시 이 문제를 논의하는 국무회의에 '전쟁과 평화 연구' 그룹의 관련 보고서를 가져갔고,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그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됐다"고 회고했다.

1940년 7월 25일 영국에 대한 무기 지원을 결정한 것도 CFR의 작품이었다. 유럽 전장에서 단독으로 독일에 항전하고 있는 영국을 돕기 위해 미국의 구축함 50척을 임대해 주기로 한 것이다. 그 대가로 미국은 서반구에 있는 영국 항구의 사용권을 요구했다. 8월 1일 CFR 간부들은 루즈벨트 및 국무부 고위관리들을 만나 이 같은 제안을 전달했고, 결국 9월 19일 미국 구축함 50척과 남미의 영국 항구 사용권을 맞교환하는 협정을 맺는다. 이는 교전국에 대한 무기 지원을 금지하는 미 중립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CFR 측은 영국을 도와 전쟁에 참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정부로 하여금 영국에 대한 군사지원에 나서게 한 것이다.

전쟁 초기 '전쟁과 평화 연구'의 초점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서반구라는 경제영역만으로 미국의 경제적 자급자족을 이룰 수 있는가, 아니면 미국의 경제적 생존을 위해 영제국, 서반구, 아시아의 시장과 원자재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여기에서 영제국이란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와 인도, 말라야 등 영국의 식민지역을 말한다. 또한 아시아란 중국과, 일본, 동남아 지역을 말한다. 동남아는 주석, 고무, 석유 등 핵심 원자재의 보고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연구그룹은 서반구만의 경제영역으로는 미국 경제의 활로를 열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2차 대전 참전이 불가피하다고 믿었다. 참전을 통해 전후 미국이 지배하는 국제정치경제 질서를 수립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1940년 6월 나치 독일의 유럽 대륙 석권이 완료된 후 미국이 당면한 핵심 과제는 '아메리카 대륙만으로 미국의 경제적 자급자족이 가능한가?' 라는 문제였다. 1940년 여름 연구그룹의 경제금융분과위는 미국과 독일 석권 지역의 경제적 자급자족도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연구에 착수했다. 경제적 자급자족이란 자국이 장악한 지역에서 산업 생산에 필요한 핵심 원자재를 확보하고 그 생산물을 판매할 충분한 시장을 확보할 수 있는 정도를 말한다.

▲ 영화 <바스터즈:거친녀석들> 중 히틀러 ⓒUPI 코리아

조사 결과 독일이 장악한 유럽대륙의 자급도가 서반구(남북 아메리카)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미국은 서반구는 물론 다른 지역(영제국, 태평양지역)과 경제블록을 형성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우선 서반구와 태평양지역이 결합한다면 미국의 대외 수출 의존이 18억 달러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반구+태평양지역의 최대 수혜자는 미국이 될 터였다. 동남아를 비롯한 태평양지역은 미국 제조업 산품의 주요 시장인 동시에 핵심 원자재의 공급원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영제국도 포함돼야 했다. 서반구+태평양+영제국이 미국의 경제영역으로 확보된다면 역내 교역 비율은 수출 79%, 수입 86%가 된다. 반면 독일 주도 유럽대륙의 역내 교역 비중은 수출 69% 수입 79%였다. 따라서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는 영제국, 태평양, 서반구 지역의 시장과 원자재에 대한 접근이 확보돼야 한다는 것이 연구위의 결론이었다. 영제국, 태평양, 서반구 지역은 1941년부터 그랜드 에어리어(Grand Area)로 불리게 된다.

1940년 10월 19일 보고된 경제금융분과위의 보고서 E-B 19는 "미국 경제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필요한 군사, 영토, 정치 정책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뒤 "독일 석권 지역을 제외한 여타 지역에 대해 미국이 정치, 군사, 경제적 지배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당시 독일은 유럽대륙을 석권했고, 영국 홀로 독일의 더 이상의 영토적 팽창을 저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까지 미국의 군사정책은 서반구에 한정돼 왔다. 유럽의 세력균형은 영국이 맡아왔으므로 미국이 유럽의 정세에 개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군사적 팽창으로 유럽의 세력균형은 무너졌다. 오직 영국만이 독일의 팽창을 막고 있으나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형국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독일 석권 지역(유럽대륙) 이외의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위원회의 결론이었다.

보고서는 "현재 세계는 미국이 확고한 지도력을 행사할 것을 고대하고 있다. 이를 위한 최우선과제는 전면적인 군사재무장의 조속한 실현"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비독일지역에서의 미국의 지배력 확보에 대한 최대의 위협은 일본의 대외 팽창이었다. 일본은 만주(1931년)와 중국 침략(1937년)에 이어 영국과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동남아지역을 넘보고 있었던 것이다. 대동아공영권이란 기치 아래 이 지역을 해방시켜 석유, 고무, 주석 등 핵심 전쟁 물자를 확보하고 이 지역을 일본의 경제 영역으로 편입시킨다는 계획이었다(일본의 동남아 침략은 1941년 7월 시작된다).

이러한 일본의 잠재적 위협에 대해 CFR은 "가능하다면 평화적 수단으로, 그것이 불가능하면 군사력을 동원해 물리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미국은 비독일지역(서반구+태평양+대영제국: 그랜드 에어리어)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해야 하며, 만일 일본이 이를 방해한다면 전쟁을 불사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문제

비독일지역을 미국 주도 아래 통합하려는 계획에 대한 최대 장애물은 일본의 팽창정책이었다. 일본은 중국 침략에 이어 동남아 진출을 통한 대동아공영권을 구상하고 있었다. 즉 태평양지역을 일본의 독점적 지배 아래 두려 했기(따라서 미국의 진출을 봉쇄) 때문이었다. 미국은 1853년 일본을 개항시킨 이래 일본을 주니어 파트너로 삼아 중국 등 아시아에 대한 경제 침략을 추진했다. 그러나 태평양지역을 일본 단독으로 독점 지배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와 관련, 경제금융분과위는 1941년 1월 일본의 대외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중국의 대일 항전을 지원하고 대일 경제 제재를 단행하자는 제안을 내놓는다. 원자재가 부족한 일본은 미국의 경제 재재에 극히 취약하며 경제제재를 통해 일본의 일방적 군사행동을 자제시킬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경제금융분과위는 1941년 1월 15일자 보고서 E-B 26("미국의 극동 정책")에서 일본의 동남아 진출을 저지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며, 일본의 행동을 기다리기보다 먼저 선제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째, 경제적 이유로 "필리핀 열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영국령 말라야는 전시 평화시를 막론하고 미국에 매우 필요한 원자재의 산지다. 따라서 적대적 세력이 이 지역을 장악한다면 미국의 행동의 자유에 커다란 제약을 초래할 것"이란 것이었다.

둘째, 전략적 이유로 일본의 동남아 점령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대독일 항전 능력을 약화시키기 때문이었다. 영국이 동남아 식민지를 잃게 되면 핵심 전쟁 물자의 공급이 위협받고 아시아 내 영국의 위상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또한 일본의 동남아 장악은 영제국 해체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져 호주와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이 (영국 방어를 포기하고) 자국 방위에만 전념할 위험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위원회는 다음 3가지 방책을 내놓았다. 첫째, 전쟁물자를 비롯해 중국에 최대한의 원조를 주어 전투능력을 향상시킨다. 그리하여 중국군이 일본군을 최대한 중국 대륙에 묶어놓도록 한다. 둘째, 영국, 네덜란드와 함께 동남아 방위에 협조한다. 이를 위해 미 해군 및 공군을 파견한다. 셋째, 일본에 대한 전쟁물자 공급을 차단해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킨다.

위원회는 "이 세 가지 방책을 통해 극동지역에서 일본의 세력 팽창을 막을 수 있다...물론 (선제 행동을 통한) 위험은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따르는 위험도 있다. 상황에 대해 단편적, 미온적으로 대응하는 것보다는 조직적이고 능동적인 대응에 따르는 이득이 훨씬 크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동남아 진출이 가시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CFR은 그랜드 에어리어 확보를 위한 최대 장애물로 일본을 지목하고 일본과의 전쟁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랜드 에어리어 확보를 위해 대중 군사 지원 및 대일 경제 제재가 필요하다는 CFR의 정책 제안은 1941년 1월 28일 헐 국무장관에게 전달됐고 일본의 동남아 침공이 시작된 직후인 1941년 8월 미국 정부에 의해 공식 채택됐다.

▲ 2차대전 후반 일본군 ⓒ프레시안 자료사진

그랜드 에어리어를 넘어 세계를 미국 영향권으로

그러나 미국의 경제엘리트는 그랜드 에어리어로 만족하지 않았다. 세계 전체를 미국 주도의 단일 자본주의권으로 묶고 싶어 했다. 그랜드 에어리어라는 개념이 나온 것은 나치 독일이 욱일승천하던 1940년까지는 미국 주도의 단일 세계 자본주의 경제체제 건설이라는 과제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1941년 6월, 경제금융분과위는 "우리는 그랜드 에어리어보다는 단일한 세계 경제 체제가 더 낫다고 본다"며 거대한 야망의 속내를 내보였다. 그랜드 에어리어를 미국 주도 아래 통합하는 것은 전쟁에 임한 방어적 수단이며 단기 목표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CFR은 전쟁이 끝난 후 그랜드 에어리어는 단일 세계 경제 형성을 위한 발판이 될 것이라면서 일단은 현재의 그랜드 에어리어를 경제적으로 통합할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밝혔다. 그랜드 에어리어를 미국 경제권에 편입시킨 다음 유럽대륙의 편입까지도 추진하다는 것이었다.

1941년 7월 24일자 보고서 E-B 34는 미국의 경제, 정치, 군사 정책에서 그랜드 에어리어가 차지하는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우선 미국의 경제 영역이 서반구에 한정된다면 미국은 대대적인 국내 개혁을 할 수밖에 없다. CFR의 간부 윈필드 리플러는 "미국 경제가 대대적 구조조정 없이 살아남으려면 해외에 생존 공간(elbow room)을 마련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이 생존 공간은 미국의 제조업에 필요한 원자재가 있는 곳, 그리고 미국의 잉여 생산물을 수출할 수 있는 곳이다.

이에 따라 비독일지역 전체, 즉 그랜드 에어리어가 미국 경제에 필요한 최소한의 지역이 된다. 즉 서반구, 영국과 영연방 지역,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중국, 그리고 일본 등을 미국의 세력권 안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 지역을 군사적으로 방어하고 경제적으로 통합하지 못한다면 미국 경제는 심각한 위험에 처할 것이다. 고무, 주석, 석유, 삼베, 식용유 등 핵심 원자재를 확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잉여 생산물을 수출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국이 무너진다면 미국의 농산품 등 잉여 생산물의 주요 수입국이 사라짐으로써 미국 경제가 타격을 받고 실업자가 늘어날 것이다.

그랜드 에어리어를 군사적으로 방어한다는 것은 독일과 일본이라는 두 개의 군사 위협에 대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럽대륙을 장악한 독일은 경제적 자급도가 높으므로 경제봉쇄로 무너뜨릴 수 없다. 따라서 독일은 미국에 대한 최대의 장기적 위협이다. 일단 독일이 북아프리카, 중근동, 소련을 장악하지 못하도록(그리하여 경제적 자급도를 높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나치든 누구든 유럽 전체를 석권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미국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1941년 6월 암스트롱은 유럽의 통합은 결단코 저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주도의 그랜드 에어리어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유럽이 단일한 경제권으로 통합되는 것은 미국의 경제 체제와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최근 미국이 우크라이나 사태를 이용해 독일 등 서유럽과 러시아의 자연스러운 경제통합을 가로막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지정학적 사고가 현재까지도 적용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반면 일본은 미국의 국익에 즉각적 위협이 된다. 일본의 팽창, 특히 동남아 침공은 그랜드 에어리어의 통합을 직접 위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저 대처해야 할 것은 일본의 위협이다.

한편 CFR은 그랜드 에어리어의 경제적 통합을 최우선과제로 인식했다. "미-영이 승리할 경우 세계를 재조직하기 위해, 특히 유럽을 새롭게 조직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다. 이런 측면에서 그랜드 에어리어의 통합이 매우 유용할 것이다. 적응과 재건의 과도기 동안 그랜드 에어리어는 세계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랜드 에어리어의 통합에 이용된 조직과 제도들은 유럽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유용한 경험으로 활용될 것이다. 어쩌면 유럽 경제를 단순히 그랜드 에어리어 경제에 통합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즉 그랜드 에어리어는 미국 주도의 세계 자본주의 경제를 형성하는 바탕이자 핵심지역인 것이다. 경제금융분과위의 제이콥 바이너 교수는 1941년 5월 "그랜드 에어리어의 조직을 세계로 확산시키는 것이 미국 정책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이들은 안정된 세계자본주의 체제 구축을 위해 국제통화기금(IMF), 월드뱅크(WB) 등의 국제경제기구가 필요하다며 이에 관한 초기 구상을 내놓았다. 전자는 교역 확대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국제 통화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후자는 저개발지역에 대한 투자 및 개발을 위한 기구였다.

나아가 보고서 E-B 31(1941년 3월 7일)에서 그랜드 에어리어의 경제통합에 관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하나는 특혜관세에 의한 관세동맹 등을 통해 영국 등 비슷한 수준의 경제들을(즉 선진국) 한데 뭉치는 수평적 통합이다. 다른 하나는 제조업 중심의 선진국과 원자재를 공급하는 후진국(태평양, 남미 지역) 간의 수직적 통합으로 이를 위해 미국은 투자, 식민화는 물론 필요하다면 노골적인 정치군사적 통제도 동원할 터였다. 나아가 미국은 영국을 보호해 미영 협조 하에 아시아 원자재 및 시장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한다는 계획이었다.

미국, 전쟁에 돌입하다

1941년 중반 이후 추축국의 패배가 예상되면서 CFR과 국무부는 그랜드 에어리어 구상을 전 세계에 적용키로 했다. 이들은 특히 동남아의 전략적 중요성에 주목했다. 고무, 주석 등 핵심 전략 물자의 생산지이자 미국 상품의 수출시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말래카해협 등 해양 및 항공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곳에는 영국의 식민지 말라야가 있었다. 만일 일본이 동남아를 점령하게 되면 일본 전쟁 수행 능력은 크게 강화되는 반면 영국의 전쟁 수행 능력은 치명적 타격을 입을 터였다.

앞에 말한 대로 1941년 1월 중반, 보고서 E-B 26은 일본의 동남아 진출 저지가 미국의 핵심 국익이라고 규정했다. 이어 1941년 7월, 섬너 웰즈 국무차관은 일본의 동남아 진출은 "평화시는 물론이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주석과 고무 등 미국의 핵심 물자 보급을 위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8월 헐 국무장관은 일본이 극동의 영국 식민지를 점령하게 된다면 영국의 전쟁 물자 공급이 차단될 것이며 이는 영국의 대독일 항쟁에 치명적 타격이 될 것이라면서 이는 독일군의 영국 본토 침공에 버금가는 위협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1941년 하반기 루즈벨트 대통령은 영국 및 네덜란드의 극동 식민지에 대한 일본의 공격은 미국의 핵심 국익에 대한 즉각적 위협이며 "일본과의 전쟁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영국의 처칠 총리도 일본의 동남아 공략은 영국에 "거의 치명적" 위협이며 일본의 침공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역시 만주에서 동남아에 이르는 대동아공영권을 구상하고 있었고 이는 양보할 수 없는 일본의 국익이었다. 1941년 7월말 일본이 인도차이나 남부 공략을 시작으로 동남아 진출에 나섰을 때 동남아 지역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중 인도차이나(프랑스 지배)와 동인도제도(네덜란드)는 일본에 함락됐고 오직 영국만이 식민 지배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급해진 미국은 강경 대응에 나섰다. 미국 내 일본 자산을 동결하고 핵심 전쟁 물자인 석유의 대일본 수출 금지 등 전면적 경제 제재를 단행했다. 1941년 8월 11일 미-일은 협상에 임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미국이 일본군의 중국 대륙 철수를 요구한 것이었다. 미국은 중국의 독립을 유지하면서 함께 중국의 경제 개발을 이루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는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1941년 11월 26일 미국은 일본에 대해 10개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미-일 간 교역을 재개하려면 중국 및 인도차이나에서 군대를 철수하라는 것이 핵심 요구였다. 이는 사실상 일본의 굴복을 요구한 것이었다. 일본이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공격한다면 미국은 일본과 전쟁에 나설 것이라는 경고도 덧붙였다.

이제 미국과 일본의 전쟁은 기정사실이 된 것이다. 미국 정부는 전쟁 준비에 나섰다. 11월 28일 헐 국무장관과 헨리 스팀슨 전쟁부 장관, 그리고 프랭크 녹스 해군부 장관은 일본이 싱가포르, 또는 동인도를 침공할 경우 일본과의 전쟁에 나설 것이라는 대통령의 대의회 메시지를 작성했다. 일본이 싱가포르 등을 공격할 경우 전쟁에 나선다는 계획이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의 미 해군기지를 기습함으로써 참전을 위해 국민을 설득할 필요도 없어졌다. 그동안 반전과 고립주의에 젖어있던 국민여론이 진주만 기습에 의해 일거에 전쟁 찬성으로 돌아선 것이다. 게다가 사흘 뒤인 12월 10일 히틀러가 미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미국은 아시아 및 유럽의 전쟁에 뛰어들 수 있게 됐다.

▲ 세계 2차 대전 당시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진주만>의 한 장면. ⓒ터치스톤 픽처스

CFR과 국무부 통합 계획

미국의 2차 대전 참전으로 미국 정부는 전쟁 수행은 물론 전후 계획 수립도 주도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적어도 전후 수립 계획에서만은 CFR의 주도가 계속됐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1941년 12월 28일 루즈벨트 대통령은 '전후 대외정책을 위한 자문위원회' 구성을 승인했다. 루즈벨트는 전후 정책 구상의 전권을 국무부에 위임했고, 국무부는 CFR과 합동으로 작업하라고 지시했다. 자문위원회의 연구 목표는 "1942~44년 미국 경제와 사회의 필요 사항, 이 필요 사항과 세계와의 관계, 이를 위해 필요한 국제기구"는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즉 1940~41년 CFR의 연구에서 세계 대부분의 지역을 대상으로 한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경제 질서 확립이 핵심 목표로 규정된 데 이어 1942년부터는 이를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 연구에 들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전후 대외정책을 위한 자문위원회'는 14명으로 구성됐다. 코델 헐 국무장관, 섬너 웰즈 국무차관, 노먼 데이비스 CFR 의장, 마이런 테일러(유에스 스틸 전 이사회 의장, 전 바티칸 주재 루즈벨트 대통령 특사), 딘 애치슨(국무부 경제 담당 차관보), 해밀턴 피시 암스트롱, 아돌프 벌 국무부 차관보, 이사야 보우먼('전쟁과 평화 연구' 영토분과위 위원장), 벤자민 코언(뉴욕 변호사), 허버트 파이스(국무부 국제경제 보좌관), 그린 해크워스(국무부 법률고문), 해리 호킨스(국무무 통상정책 담당 국장), 앤 오헤어 매코믹(뉴욕타임스 논설위원, 여성) 레오 파스볼스키(전후 기획 담당 국무장관 특별보좌관) 등이다.

그런데 위원 14명 중 8명이 CFR 소속이었다. 정부 측 9명 중 4명(코언, 파이스, 파스볼스키, 웰즈), 공공의 의견과 이익을 대변한다는 명목으로 영입된 민간 위원 5명 중 4명(데이비스, 암스트롱, 보우먼, 테일러)이 CFR 회원이었다. 나머지 민간위원 앤 오헤어 매코믹은 여성이라 CFR 회원이 될 수 없었다(CFR은 1970년까지 여성 회원을 받지 않았다). 민간위원에는 경제계와 학계 인사만 포함됐을 뿐, 노동조합을 비롯한 시민단체 대표는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CFR 소속 인물들이 자문위원회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이다.

특히 이 가운데 핵심 인물은 헐, 웰즈, 데이비스, 테일러, 보우먼, 파스볼스키로 이들은 비공식 정치 의제 그룹을 형성해 자문위원회의 의제를 선정 및 조율했고 유엔 헌장의 초안을 작성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들을 "나의 전후 기획 보좌관들"(my post-war advisers)라고 불렀다고 한다.

게다가 자문위원회의 운영방식도 CFR이 주도권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짜여졌다. CFR 소속의 연구 담당 위원을 매주 2, 3일씩 워싱턴의 자문위원회에 파견해 그 논의 내용을 CFR이 소상히 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는 1942년 1월, 암스트롱이 데이비스에게 제안해 성사된 운영방식이다. 자문위원회는 1942년 2월 6개의 소위원회(정치 관련 3개, 경제 2개, 조정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가운데 조정위원회는 각 소위원회의 연구를 기획, 통괄하는 한편 "전후 문제들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민간 기구들과의 접촉"하는 핵심 기구로 CFR 의장 노먼 데이비스가 위원장을 맡았다. 데이비스는 안보소위원회 위원장도 겸임했으며 영토소위원회는 이사야 보우먼, 정치소위원회는 섬너 웰즈 국무차관이 맡았다.

암스트롱은 자문위원회 운영 방식과 관련 CFR의 연구위원이 컨설턴트라는 타이틀로 매주 후반 2, 3일 소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CFR이 "자문위원회의 실제 돌아가는 사정을 소상히 알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CFR 소속 연구위원이 국무부와 CFR의 연락 담당 역할을 맡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CFR 소속인 암스트롱이 역시 CFR 소속(의장)인 노먼 데이비스 자문위원장에게 제안한 것이니 당연히 받아들여질 것이었다. 말하자면 CFR이 북 치고 장구 치며 자문위원회 운영을 좌지우지 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42년 3월 각 소위원회에 CFR 파견 연구위원을 두며 이들은 회의 결과를 문서로 작성해 위원들에게 배포했고, 또한 CFR에도 보고했다.

자문위원회는 1942년 5월 2일 헐 국무장관 주재로 전체 회의를 가진 이후 소위원회 단위로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 내용은 극비였다. 1942년 7월 20일 파스볼스키 위원은 비밀 엄수를 당부하면서 소위원회 논의 내용은 "정부 내외의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CFR은 각 소위원회에 파견된 CFR 소속 연구위원 덕택에 논의 내용을 소상히 알 수 있었다. 또 이를 바탕으로 소위원회의 논의를 CFR이 원하는 대로 끌어갈 수 있었다. 정부 내 어떤 고위공직자들보다도 CFR이 미 전후 계획의 실상을 잘 알고 또 만들어나갈 수 있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국무부 특별연구위원회의 부책임자 할리 노터는 항의 사표를 내기도 했다. 한마디로 미국의 전후 계획은 'CFR의, CFR에 의한, CFR을 위한' 것이었다.

미국의 국익, 누구를 위한 것인가

CFR과 미국 정부는 2차 대전 전후에 걸쳐 미국의 국익을 위해 대외정책을 펼친다고 주장해왔다. 이들이 말하는 국익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노동자, 농민을 비롯해 대다수 미 국민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금융가와 대기업 등 유산계급의 계급적 이익인가를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이 책의 저자들은 CFR과 미국 정부는 2개의 서로 다른 목표를 추구하면서 필요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전쟁 목표는 첫째, 미국 국민이 전쟁에 나서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확대된 그랜드 에어리어를 미국 영향권 안에 편입시키기 위한 구체적이고 소상한 방안을 마련하고 집행하는 것이었다. 후자가 CFR의 진정한 목표였다. 그러나 미 국민이 전쟁에 반대한다면 이 목표는 달성될 수 없을 것이었다. 이에 따라 CFR은 전쟁 목표와 관련해 겉 다르고 속 다른 말을 하게 된다. 미 국민에게는 세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는 고상한 말을 한 반면 그들끼리는 미국의 경제적 패권 장악을 위한 방안 마련에 골몰했다.

1941년 7월 '전쟁과 평화 연구' 경제금융그룹은 "(국민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선전 목적으로 공식 발표하는 전쟁 목표와 진정한 국익을 규정하는 전쟁 목표는 매우 다르다"고 밝혔다. 즉 국민들에게 공식적으로 천명하는 전쟁 목표와 (정부와 자본가들이 은밀히 추구하는) 전쟁 목표는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전쟁 목표와 관련, 이 그룹은 1941년 4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만일 (우리가 내세우는) 전쟁 목표가 오로지 영-미 제국주의와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면, 세계 다른 인민들의 공감을 살 수 없을 것이며 나치의 반대 선전 공작에 밀릴 수 있다. 또한 그러한 전쟁 목표는 미국 및 영 제국의 가장 반동적인 분자들에 도움을 줄 뿐이다. 다른 나라의 인민들, 즉 유럽은 물론이고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인민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 강조돼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훨씬 나은 선전(프로파간다)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실제 국익을 최대한 드러내지 말아야 했으므로 국민에 대한 선전 목적의 전쟁 목표는 구체적이어서는 안 됐다. 애매하고 추상적이어야 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1941년 8월의 대서양헌장이다. 이것이 미국의 공식적 전쟁 목표였으며 이는 오로지 선전을 위한 것이었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자유, 평등, 번영, 평화 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CFR은 그 구체적 내용들을 제안했고 그 회원 중 하나인 섬너 웰즈 차관이 대서양헌장 작성을 위한 대통령의 주요 보좌관이었다.

그러나 실제 목표는 미국이 전쟁 이후 세계에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참전 1주일 후 암스트롱은 "우리는 세계를 관리할 책임을 떠안아야 한다...우리가 어느 정도 승리했는가는 전쟁 이후 우리가 얼마나 세계를 지배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1942년 1월 보우먼은 "(미국의) 세계 지배를 위해 전략적으로 필요한" 지역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안보 이익의 개념이 보다 확대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CFR 의장 노먼 데이비스는 1942년 5월, 전쟁 이후 "영 제국은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국은 "더 이상 세계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미국의 국익에 방해가 되는 것은 사전에 그 싹을 잘라내야 한다"고 말했다. 정보 사령관 출신의 조지 스트롱 장군(안보소위원회 위원)은 "미국은 전후 세계 문제를 다룸에 있어 우리 자신의 조건을 강제할 수 있다는 정신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은 세계와 미 국민을 향해서는 2차 대전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라고 선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금융 및 제조업, 농업의 대외 팽창을 위한 전쟁을 벌인 것이었다. 파시즘을 물리쳤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미국 대외정책의 고삐를 쥐고 있던 자본가들의 진정한 목표는 미국 경제의 무한한 팽창이었던 것이다.

자본가계급의 고위 공직 진출

CFR은 전후 계획의 수립만으로 미 대외정책을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핵심 성원인 금융가, 기업가, 기업변호사들이 직접 정부 요직에 진출함으로써 그 영향력을 키워갔다. 여기에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용인술이 한몫을 했다.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할 즈음인 1940년 6월 19일, 공화당 출신의 월가 변호사이자 주류세력의 원조인 헨리 스팀슨(1867~1950년)을 전쟁부 장관(국방부의 전신)에 임명한 것이다. 예일대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스팀슨은 이미 전쟁부 장관(1899~1904년)을 비롯해 필리핀 총독(1927~29년), 국무부 장관(1929~1933년)을 역임한 정치거물이었다. 정계를 떠난 뒤에는 뉴욕의 금융기관과 대기업의 자문변호사로 일했다.

루즈벨트가 공화당 출신의, 그것도 73세의 노정객을 국방 책임자로 발탁한 이유는 스팀슨이 말한 대로 자본주의 국가가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대기업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스팀슨은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전쟁부 장관으로 일했다.

전쟁부 장관이 된 스팀슨은 자신과 같은 주류세력의 인물들을 끌어들였다. 존 매클로이와 로버트 로벳이 바로 그들이다. 스팀슨은 1940년 9월 매클로이를 비서실장으로, 12월에는 로벳을 공군 관련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했다. 매클로이는 1941년 4월부터 차관보로서 전쟁물자 조달, 연합국에 대한 전쟁물자 임대(렌드리스), 징병, 정보 관련 일을 했으며 CIA 창설에도 깊이 관여했다. 한편 로벳은 전략 폭격 등 미국의 공군력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스팀슨, 매클로이, 로벳 등 공화당 출신의 주류세력 인물들이 미국의 전쟁정책을 도맡았던 것이다. (1941년 국무부 차관보를 시작으로 국무부 장관까지 역임한 딘 애치슨은 민주당 소속으로 CFR 회원이 아니었지만 월가 변호사 출신이라는 점에서 이들과 성향이 비슷했다) 그리고 이런 인물들이 미 정부의 핵심 요직을 차지함으로써 CFR의 영향력이 발휘될 수 있었다.

리차드 바넷은 <전쟁의 뿌리>라는 책을 통해 "1940년 이후 이들 국가 안보 관료들은 미국의 국익을 새로 정의했다"면서 루즈벨트의 스팀슨 등용이 미 대외정책의 중대한 전환점이었다고 지적한다. 공화당 출신으로 대기업의 이익을 옹호해 왔던 이들이 대외정책의 요직을 맡으면서 '미국 대기업의 이익이 곧 미국의 국익'이라는 관점을 유포시키면서 미국 대기업의 해외 팽창을 위한 대외 군사 개입의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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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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