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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외 정책은 자본가들이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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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외 정책은 자본가들이 만든다

['전쟁 국가' 미국] '제국의 두뇌 집단' 미 외교협회(CFR) ①

외교협회와 미 대외 정책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주된 목적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가 아니었다. 세계를 미국 주도의 단일한 자본주의 체제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 금융과 제조업 및 농업의 대외 진출이 주된 목적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전쟁 목표는 미국 정부가 수립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금융가, 대기업가, 그리고 이들을 위해 복무하는 국제변호사와 학계 인물들로 구성된 외교협회(CFR : Council on Foreign Relations)라는 민간 조직이었다. CFR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과 평화 연구(The War and Peace Studies)'라는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를 통해 2차 대전 후 세계 정치경제 질서의 밑그림을 만들어냈다. 2차 대전 이후 세계는 대체로 이 밑그림에 따라 재구성됐다.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자 로렌스 슢과 윌리엄 민터가 공동 저술한 <제국의 두뇌 집단 : 외교협회와 미국의 대외 정책(Imperial Brain Trust : The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and United States Foreign Policy)>을 바탕으로 CFR이 미국의 대외 정책에 미친 영향을 몇 회에 걸쳐 알아보기로 한다. 이 책은 1977년 먼슬리리뷰(Monthly Review)에서 간행됐다.

▲ <제국의 두뇌 집단: 외교협회와 미국의 대외정책>, 로렌스 슢·윌리엄 민터 공저
1921년 창립된 외교협회(CFR : Council on Foreign Relations)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외교 관련 싱크탱크다. 특히 2차 대전에서 1970년까지 약 30년간 미국의 대외 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진짜 국무부'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J. P. 모건, 록펠러 등 세계 최강의 금융 재벌 및 대기업 임원, 학계 저명 인사와 정부 고위 관리, 기업 변호사와 언론인 등 미국의 최고위 인사들로 이루어진 CFR은 2차 대전 발발 직후부터 6년간 지속된 '전쟁과 평화 연구(The War and Peace Studies)'를 통해 전후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적 세계자본주의 체제 구축을 위한 밑그림을 그렸다. 이를 위한 국제기구로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 그리고 유엔 창설을 주도한 것도 바로 CFR이었다. 일본에 대한 핵공격 결정, 미국의 핵전략 수립, 베트남 전쟁 개입, 중국과의 화해에도 CFR은 주도적 역할을 했다.

역대 미 국무장관 중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헨리 키신저가 외교 전략가의 경력을 쌓은 것도 CFR에서였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역시 CFR 출신이다. CFR은 미 대기업의 해외 팽창이 곧 미국의 국익이라는 동의(consensus)를 창출함으로써 대외 군사 개입의 근거를 만들어냈다. 미국 기업의 해외 진출을 위해서는 때에 따라 군사적 강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8년 베트남전의 실패가 분명해지면서 CFR은 온건파와 강경파로 분열됐고, 1970년대 이후 CFR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FR은 여전히 미국의 대외 정책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CFR이야말로 진짜 국무부다"

CFR은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를 발행하는 단체로 잘 알려져 있다. 외국 국가 원수를 초청해 연설을 듣는 미국 저명 인사들의 사교 모임으로도 알려져 있다. 김대중 대통령도 CFR에서 연설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책 <제국의 두뇌 집단>이 발간된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CFR의 구체적 활동 내용은 일반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활동이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CFR의 활동을 추적한 이 책의 저자들은 CFR이 2차 대전 후 미국의 세계 지배를 이끈 '제국의 두뇌 집단'이라고 말한다. CFR이 2차 대전에서 1960년대 말까지 미국의 대외 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점은 다음과 같은 평가에서도 잘 드러난다.

"외교협회 회원들은 미국 정부, 기업, 학계, 언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들로 구성돼 있다. 협회는 지난 반세기 동안 미 대외 정책의 기본 개념을 설정하는 데 중대한 기여를 했다" (<뉴욕타임스>, 1966년 5월 15일)

"외교협회는 미 대외 정책의 주류 세력(Establishment)" (<뉴스위크>, 1971년 9월 6일)

"외교 협회는 미국의 어떤 민간 단체보다도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가장 많이 포함하고 있다" (언론인 시어도어 화이트, <대통령 만들기>(1965년))

"외교협회는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민간 단체로, 종종 이 단체야말로 '진짜' 국무부라는 얘기를 듣는다" (마빈 칼브와 버나드 칼브. <키신저>(1974년))

"미 국가 안보 기구의 책임자가 되길 원한다면 외교협회 회원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다" (리차드 바넷, <전쟁의 뿌리>(1972년))

CFR의 막강함은 이 단체의 구성 인원으로도 잘 알 수 있다. 이 책이 쓰여질 당시(1976년) CFR 의장은 미국 최고 갑부인 데이비드 록펠러였다. 또 록펠러 이전 1940년대까지 미국 최대 금융 재벌이었던 J. P. 모건 등 뉴욕의 국제 금융가들이 회원이었다. 1953~1961년 중앙정보국(CIA) 국장으로 비밀공작을 통한 외국 정부 전복 등 은밀한 대외 정책을 수행했던 알렌 덜레스는 1927년부터 그가 사망한 1969년까지 42년간 CFR 회원이었으며 총재를 역임했다. 그의 형 존 포스터 덜레스 전 국무장관(1953~1959년)도 CFR 회원이었다.

알렌 덜레스의 뒤를 이은 존 매콘을 비롯하여 리차드 헬름스, 윌리엄 콜비, 조지 부시 등 1970년 중반까지의 CIA 국장 모두가 CFR 회원이었다. 케네디 정부와 존슨 정부 당시 대외 정책 담당 고위 관료의 절반 이상이 CFR 회원으로 충원됐다.

미국의 양대 신문인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의 사주 아서 설즈버거와 캐서린 그레이엄, 그리고 <타임>, <라이프>의 헨리 루스를 비롯해 월터 리프먼, 데이비드 할버스탐, 제임스 레스턴 등 쟁쟁한 언론인들도 회원이었다. 하버드대, 존스홉킨스대 총장 등 쟁쟁한 학자들도 포함됐다. 한마디로 CFR은 미 금융 및 산업계의 부자들과 정·관계의 권력자, 그리고 학계 언론계의 최고 브레인들이 모여 미국의 세계 경영을 주도하는 단체였다.

미국에서 주류세력(Establishment)이란 말은 20세기 초에서 1960년대까지 미 정계와 경제계를 좌지우지했던 뉴욕 등 동부 지역의 정치 및 경제 주도 세력을 지칭한다. 미국 주류 세력의 대부로 통하는 존 매클로이(1895~1989년 : 변호사 겸 은행가, 2차 대전 당시 전쟁부 차관보를 시작으로 CFR 의장, 세계은행 총재, 독일 고등판무관, 체이스맨해튼은행 총재 역임)는 "대외 정책과 관련해 사람이 필요할 때면 CFR 회원 명부를 뒤적여 뉴욕에 전화를 걸면 됐다"고 말한다. <뉴욕타임스> 출신의 저명한 언론인 시어도어 화이트는 "외교 협회는 한 세대에 걸쳐 민주, 공화당을 막론하고 차관보급 이상의 고위 외교 관리를 선발하는 인재 풀"이었다고 지적한다.

케네디가 CFR의 장관 천거를 받아들인 이유

미국의 대외 정책에 대한 CFR의 막강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본다. 우선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초기 인선 과정. 미국에서 주류 세력은 앵글로색슨계 백인에 개신교도이어야 했다(WASP : White, Anglo-Saxon, Protestant). 케네디는 아일랜드계 이민 3세이며 가톨릭교도로 주류 세력의 일원이 아니었다. 따라서 1960년 대선에서 간발의 차이로 닉슨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주류 세력의 신임을 얻어야 했다.

이 때문에 그가 가장 먼저 장관직을 제의한 사람은 공화당원이며 CFR 회원이자 존 매클로이와 쌍벽을 이루는 주류 세력의 거물 로버트 로벳(1895~1986년 : 전쟁부 차관, 국무부 차관, 국방부 장관 역임)이었다. 로벳은 건강을 이유로 제의를 고사했고 대신 국방 장관에 로버트 맥나마라, 국무 장관에 딘 러스크, 재무 장관에 더글라스 딜론를 천거했다. 케네디는 로벳의 천거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 속사정에 대해 케네디의 핵심 측근이었던 역사가 아서 슐레진저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케네디의 인맥에는 한계가 있었다. (…) 특히 뉴욕의 금융계 및 법조계에는 아는 인물이 거의 없었다. 이곳은 오랫동안 민주, 공화 양당에 주류적 사고를 하는 유능한 인사들을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인재의 보고였다. 이러한 인재 충원이야말로 미국 주류 세력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핵심 비결이었다. 주류 세력의 원조는 엘리후 루트와 헨리 스팀슨, 현재의 지도자는 로버트 로벳과 존 매클로이다. 주류 세력의 전위조직으로는 록펠러, 포드, 카네기 재단, 그리고 CFR, <뉴욕타임스>, <포린어페어스>를 꼽을 수 있다.

뉴욕의 주류 세력은 케네디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 그러나 케네디가 대통령이 된 마당에 주류 세력은 그를 도울 용의가 있었다. 케네디 역시 대통령으로서 그들의 도움을 받을 준비가 돼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류세력의 의심을 불식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뛰어난 외교 전략가 키신저와 브레진스키를 배출한 CFR

무명의 하버드대 교수였던 헨리 키신저를 미국 최고의 외교 전략가로 키워낸 것도 CFR이었다. CFR은 1954년, 당시 31살의 키신저에게 미국의 핵무기와 대외 정책에 관한 연구를 맡겼다. 그해 1월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이 CFR 모임에서 천명한 아이젠하워 정부의 핵심 외교 정책 '대량 보복 전략'에 대한 이의 제기였다.

당시 덜레스는 제3세계 등에서 소련이 도발할 경우 핵무기에 의한 대량 보복으로 맞서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소련이 게릴라 전술 등의 저강도 도발을 할 경우에도 핵공격으로 대응할 수 있겠느냐는 게 CFR의 문제의식이었다. 실제로 미국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베트남군에게 패배했을 당시 핵무기 사용을 고려했으나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키신저는 3년의 연구 끝에 1957년 <핵무기와 대외 정책>이란 책을 펴냈고, 이 책은 외교 관련 서적으로는 드물게 베스트셀러가 됐다. 무려 14주일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던 것이다. 키신저는 이 책 하나로 단숨에 미국 외교가의 기린아로 떠올랐다. 키신저의 처방은 소련의 저강도 도발에 미국은 반(反)게릴라 전술(Counter-Insurgency) 등 재래식 전력으로 맞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처방은 케네디 정부에서 '유연 대응 전략'이란 외교 방침으로 현실화된다.

▲ 1983년 방한한 헨리 키신저. 일정을 마치고 출국하기 전 김포공항에서 기자 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1961년 키신저는 "내가 대외 정책에 관해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된 것은 CFR을 통해서였다. 이후 나는 CFR과 지속적 관계를 유지했고 이 단체에 대한 나의 존경심은 세월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고 술회했다. 1969년 이후 70년대 중반까지 키신저는 닉슨과 포드 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중국과의 역사적 화해, 소련과의 군비 통제 협상 시작, 베트남전 종결 등 미국 외교사에 화려한 발자취를 남겼다.

키신저의 지인이며 CFR 회원인 한 인사는 "CFR 참여는 키신저의 생애에서 하버드대 입학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면서 키신저는 "CFR 사람들이 자신에게 보내준 지원을 결코 잊지 않았으며, 그의 개인적 성장에서 CFR이 갖는 중요성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고 말했다. CFR 참여가 키신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CFR을 통해 외교 전략가의 입지를 굳혔을 뿐만 아니라 미국 최고 갑부인 록펠러 가문과 인연을 맺었고, 나아가 록펠러 가문의 비서와 결혼까지 했던 것이다.

키신저는 CFR의 터줏대감(1922년 <포린어페어스> 창간부터 50년 간 편집인을 역임) 해밀턴 피시 암스트롱에게 "당신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냈습니다(You invented me)"고 고백했다고 한다.

브레진스키 역시 CFR을 통해 외교 전략가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1973년 CFR의 후속 조직으로 만들어진 삼각위원회(The Trilateral Commission)의 사무총장으로 일했으며 삼각위원회의 전폭적인 지지로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백악관 국가안보좌관으로 발탁됐다. 키신저가 중국과의 화해로 소련과의 대결에서 미국의 우위를 만들었다면, 브레진스키는 소련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끌어들임으로써 결국 소련 해체에 이르도록 한 장본인이다. 미국 외교사에 중대한 발자취를 두 인물이 CFR을 통해 배출된 것이다.

CFR과 팔레비 그리고 카스트로

CFR은 1922년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 전 총리를 뉴욕에 초청한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외국 지도자들을 불러들여 이들의 강연을 들었다. 1959~74년 25년 동안 초청된 외국 정상은 무려 59명에 이른다. 영국의 에드워드 히스, 해롤드 윌슨 총리를 비롯해 독일의 루드비히 에어하르트, 빌리 브란트, 헬무트 슈미트 총리,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세 다얀 총리 등이 그들이다. CFR의 영향력은 외국 지도자와 관련한 다음 두 사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란의 독재자 팔레비 국왕(재위 1941~79년)은 CFR을 통해 록펠러 가문 등과 인연을 맺은 뒤 미국 최고위 인사들의 극진한 대접과 전적인 지원을 받은 반면, 쿠바의 카스트로는 혁명 직후 CFR과의 첫 상견례에서 사이가 틀어진 뒤 미국과 적대적 관계로 돌아선 것이다.

팔레비 국왕은 1949년, CFR 회원인 알렌 덜레스가 주선한 뉴욕에서의 '사적인 만찬'을 통해 넬슨 록펠러, CIA의 전신 전략첩보국(OSS)을 창설한 윌리엄 도노반, 언론 황제 헨리 루스 등 최고위층 인사 100여 명을 만난다. 1953년 CIA 최초의 해외 비밀 공작인 이란 모사데크 정권 전복 이후 실권을 장악한 팔레비 국왕은 이후 닉슨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중동의 군사 맹주로 떠오른다.

닉슨 정부는 1972년부터 팔레비가 원하는 대로 미국의 최첨단 무기를 판매했다. 또한 이란의 비밀경찰(SAVAK)을 도와 팔레비의 철권통치를 유지시켰다. 이란에 대한 최첨단 무기 판매는 미국의 해외 무기 판매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전에는 최첨단 무기를 우방국에도 판매하지 않았었다. 이는 베트남 전쟁 패배 이후 각 지역의 안보는 그 지역 국가들이 맡는다는 '닉슨 독트린'에 따른 것이었다. 즉 이란을 중동의 군사 강국으로 키워 지역 경찰로서 미국의 역할을 대신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1973년 1차 석유위기 이후 악화된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를 만회하기 위한 목표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팔레비는 이란의 모든 석유 수출 대금 및 미제 무기 수입 대금을 오로지 록펠러 가문 소유의 체이스맨해튼은행을 통해서 했다. 1979년 이전 체이스맨해튼의 한 해 예금 중 절반이(150억 달러) 이란의 석유 대금이었다고 한다. 팔레비 국왕과 록펠러 가문 사이에 끈끈한 유착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 유착관계가 1979년 11월 미 테헤란 대사관 인질 사건 및 이란 이슬람 혁명의 단초가 된다.

1979년 1월 이후 해외를 전전하던 팔레비 국왕에 대한 미국 망명 허용이 미 대사관 점거의 빌미가 된 것이다. 1978년 11월에 시작된 반정부 시위로 팔레비 국왕은 1979년 1월 해외 망명길에 오른다. 이후 이란의 반정부 세력 내에서는 세속파 대 이슬람파 간의 암투가 벌어진다. 당시 아볼 하산 바니사드르가 이끌던 세속파 혁명 정권은 친미 노선을 유지했다. 반면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세력은 반미 노선이었다. 이 과정에서 1979년 10월 팔레비의 미국 망명이 허용되자 이를 미국의 반혁명 음모로 파악한 이슬람 세력이 미 대사관을 점거하면서 444일간의 인질극을 벌였고 이를 통해 이슬람 세력은 세속파 정권을 몰아내고 혁명의 주도권을 잡게 된 것이다. 1953년의 모사데크 축출 공작이 미 대사관을 중심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이런 의심은 충분히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팔레비의 미국 망명 허용이 당시 카터 대통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록펠러 가문 및 이들의 심복인 키신저와 브레진스키가 밀어붙인 결과였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오랜 친구인 팔레비를 위해 대통령의 반대를 무릅쓰고 팔레비의 미국 망명을 허용한 것이다. 만일 팔레비의 미국 망명이 없었다면 미 대사관 점거도 없었을 것이고, 이란에는 미국에 적대적이지 않은 세속적 민주 정권이 들어섰을 것이다.

한편, 1959년 1월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쿠바 혁명에 성공한 피델 카스트로는 1959년 4월 CFR의 초청을 받아 뉴욕 프랫하우스에서 연설을 했다. 당시 미국의 경제계 인사들은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성향을 의심했으며 실제로 그의 정치 성향이 어떤지를 알기 위해 그를 초대했다. 카스트로의 연설에 대한 CFR 회원들의 반응은 적대적이었다고 한다. CFR 회원들은 카스트로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생각, 쿠바 국민들의 시민적 자유를 보장할 것인지, 특히 쿠바 내 미국인 재산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물었다.

▲ 피델 카스트로. ⓒ프레시안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카스트로는 "여기 가난한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이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신체의 자유인가 아니면 음식 한 접시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회원 한 명이 "쿠바는 얼마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경제 지원을 통해 쿠바를 매수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카스트로는 "우리는 당신들의 돈을 원하지 않는다. 당신들의 존중을 원한다"고 답했다.

이후 가시 돋친 설전이 오갔고 카스트로는 "나는 당신들의 친구가 아님을 알겠다"고 말한 뒤 회의장을 나갔다고 한다. 카스트로는 미국 최고 엘리트와의 관계에서 그들의 승인을 받지 못한 것이다. 이후 카스트로는 쿠바 내 미국인 자산을 국유화했고, 미국은 경제 봉쇄를 단행했으며 1961년 피그만 침공을 시작으로 카스트로 정권 전복을 위한 온갖 공작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이 책의 저자들은 "CFR이 원하는 것은 세계에 걸쳐 기존 재산 관계의 현상유지"라고 말한다. 즉 세계 어디서든 자신들의 재산권이 존중되는 것이 미국 지배 계층의 최우선 관심사라는 것이다.

CFR의 탄생 : 영미의 세계 지배를 위한 브레인

CFR은 1921년 7월 29일 뉴욕에서 공식 출범했다. 두 단체가 합병한 결과였다. 하나는 1917년 9월 윌슨 대통령의 개인 보좌관 에드워드 하우스 대령이 제1차 세계 대전 후 미국의 장기적 대외 정책 구상을 위해 결성한 '탐구(Inquiry)'라는 연구 조직이다. 여기에는 미국 지리학회 회장(1915~1935년)과 존스홉킨스대 총장(1935~1948년)을 역임한 미국 최고의 지정학자 이사야 보먼(1878~1950년)을 비롯한 학계 인사와 언론인과 변호사 등 150명이 포함돼 있었다.

'탐구'의 연구 책임자는 당시 28세의 젊은 언론인 월터 리프먼이었다. 이 가운데 보먼과 월터 리프먼, 변호사 알렌 덜레스 등 21명이 1919년 1월 윌슨 대통령과 함께 파리에 갔다. 20여 년이 지나 리프먼은 미국 최고의 언론인이 됐고(냉전 'Cold War' 란 말은 그가 만들어냈다), 덜레스는 CIA 창설(1947년)을 주도하고 8년간(1953~1961년) CIA 국장을 지냈으며, 그의 형 존 포스트 덜레스는 국무장관(1953~1959년)을 맡는 등 미국의 세계 전략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

'탐구' 측 인사들은 1919년 5월 30일, 파리 마제스틱호텔에서 영국 '라운드 테이블' 인사들과 만나 양국에 각각 '국제관계연구소(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회원에게 최신 국제 정세를 알려주며 양국의 대외 정책이 사회 전체의 이익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다"는 것이 설립 목표였다.

라운드 테이블은 19세기 후반 남아프리카에서 다이아몬드와 금 채굴로 어마어마한 부를 쌓아올려 아프리카의 최대 실력자로 군림했던 세실 로즈(Cecil Rhodes, 1853~1902년)에 의해 1891년 창설된 비밀조직이다. 골수 제국주의자인 로즈는 영어권 세계의 단일 제국을 건설한다는 엄청난 야망을 품고 있었다. 로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현재 세계는 여러 나라들로 조각나 있다. 그나마 남아 있는 땅들도 갈라지고, 정복되고, 식민화됐다. 밤하늘 창공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을 보고 있노라면, 인류가 결코 닿지 못할 저 광대무변의 우주를 보면서 나는 차라리 저 별들을 합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의 필생의 야망은 대영 제국의 세력권을 더욱 넓히는 것, 그리하여 문명화되지 않은 지역 전체를 영국의 지배권 아래 두는 것이다. 미국 땅을 되찾아오고 (독일을 포함한) 앵글로색슨족을 하나의 제국 아래 통일하는 것이다."

이 거창한 야망을 위해 로즈는 1891년 대영 제국의 보전과 확장을 위한 세계적 차원의 비밀 기구 창립을 제안했다. 라운드 테이블의 창립 목적은 대영 제국의 세력권을 단일한 제국 정부 아래 통합시킨 '유기적 연맹(organic union)'을 설립하는 것, 나아가 이 제국에 다른 국가들을 포섭하는 것이었다. 필요 자금은 로즈가 유산으로 남긴 로즈 신탁(Rhodes Trust)에서 충당하도록 했다. 클린턴 대통령 등 미국의 유력 정치인들이 받은 로즈 장학금도 바로 이 로즈 신탁에서 나온 것이었다. 1960~70년대 아프리카의 백인 지배 국가로 악명을 떨쳤던 로디지아(Rhodesia, 1965~1979년)도 로즈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로디지아는 현재의 짐바브웨다.

▲ CFR 홈페이지 갈무리.

라운드 테이블에 관한 연구서를 펴낸 캐롤 퀴글리(1910~1977년, 미 조지타운대학 교수)에 따르면 이 조직은 보어전쟁(1899~1902년)을 일으켰고, 1890년대 초부터 50년 간 영국 최고 권위지인 <더 타임스>를 지배했다. 또한 1차 대전 당시 영국의 전쟁 목표 설정 및 국제연맹 창설 등 전후 처리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나아가 1920~1939년 독일에 대한 유화 정책을 주도했다. 유화 정책은 1939년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파탄 났고, 1945년 총선에서 라운드 테이블이 지원하던 처칠의 보수당 정권이 패배하면서 라운드 테이블의 영향력이 약화됐다고 한다.

보어전쟁은 남아프리카 지역의 주도권을 놓고 네덜란드계 정착민인 보어인들과 영국이 벌인 전쟁이다. 당시 영국은 인구 50만에 병력이 7만에 불과한 보어인들을 상대로 무려 4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3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전쟁 끝에 21만 명을 강제수용소에 가둬 2만 명이 사망케 하는 잔인함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1910년부터 잡지 <라운드 테이블>을 발간했는데 편집진과 필자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라운드 테이블 지도자들 상당수가 파리 평화조약을 위한 영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파리에 왔다.

마제스틱호텔 모임을 주도한 사람은 미국의 역사학자 조지 루이스 비어와 '라운드 테이블'의 지도적 인물인 역사학자 라이오넬 커티스였다. 비어는 '탐구' 소속인 동시에 '라운드 테이블'의 미국 측 회원이었다. '라운드 테이블'은 미국에도 회원을 두고 있었는데 '탐구' 소속으로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한 J. P. 모건은행의 토마스 라몬트, 로즈 장학생인 휘트니 셰파드슨 등이 라운드 테이블 회원이었다. 즉 영국 라운드 테이블 측에서 미국의 유력 인사들을 끌어들여 영-미 공동의 세계 경영을 위한 연구 조직을 만들려 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1918년 6월 뉴욕 금융가 및 기업가와 이들의 조력자인 국제 변호사들의 사교클럽으로 결성된 CFR이다. 이들은 국제 문제에 관심이 있으며 값비싼 만찬을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을 가진 뉴욕의 유력 인사들로 '장래의 통상 활동과 관련해' 외국 정치인 등 저명 인사들의 강연을 듣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의장은 전쟁부 장관, 국무부 장관, 상원의원을 역임하고 노벨 평화상(1912년)을 수상한 공화당의 정치 거물 엘리후 루트(1845~1937년)였다.

루트는 슐레진저가 미 주류 세력의 원조로 꼽은 바로 그 인물로, 19세기 말까지 아메리카대륙의 지역 맹주에 머물러 있던 미국을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 필적하는 세계 열강으로 도약케 한 장본인이다. 루트는 1870년대 초부터 30년간 대기업의 자문변호사로 활약했다.

이 시기는 남북 전쟁 이후 철도 건설 등 급속한 산업화에 의해 강도 귀족(robber baron)으로 불리는 대부호들이 속속 탄생하던 시기였다. 작가 마크 트웨인은 대부호들의 천박한 행태를 비꼬아 이 시기를 금칠한 시대, 즉 도금시대(Gilded Age)라고 불렀다. 또한 산업화에 따른 과잉생산으로 두 차례 심각한 공황(1873, 1893년)이 발생하면서 미국 경제의 해외 팽창이 절실한 때였다.

30년간의 기업 변호사 생활에서 루트는 미국 대기업의 필요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해외 진출이었다. 미국은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필리핀을 식민지로 획득하고 쿠바를 사실상 보호국으로 만들면서 아메리카 대륙을 넘어 해외 진출을 시작했고, 이와 함께 열강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스페인 전쟁 직후 전쟁부 장관(1899~1904년)에 임명된 루트는 군 합동참모회의와 육군대학을 창설하는 등 군 현대화 작업에 앞장섰다. 미국 경제가 아메리카 대륙을 넘어 세계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사력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 덕택에 미국은 중국, 필리핀, 카리브해를 비롯한 중남미 지역에 대한 군사 개입을 단행할 수 있었다. 스메들리 버틀러 장군이 '자본가의 조폭'으로 활동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루트는 또한 미국 대기업의 이익을 위해서는 적극적인 대외 정책이 필요하다는 점을 잘 인식했고, 미국 엘리트들 간에 이러한 국제주의적 합의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CFR은 바로 이런 필요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부자와 권력자, 그리고 지식인들을 한데 모아 20세기 미국의 대외 진출을 위한 준비 작업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탐구'와 라운드 테이블의 마제스틱 호텔 합의 후 영국은 왕립국제문제연구소(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 일명 Chatham House)를 설립했지만 미국 측의 연구소 설립은 진전을 보지 못했다. 때마침 1918년 결성된 CFR도 1920년부터 활동 정지 상태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1921년 2월부터 탐구 측과 CFR이 협상을 벌여 7월 말에 합병이 성사됐다(1922년의 회원은 약 300명). 모임의 명칭은 CFR Inc.로 결정됐다.

합병으로 출범한 CFR의 명예의장은 엘리후 루트, 의장은 존 데이비스(1873~1955년)였다. 데이비스는 윌슨 정부에서 법무부 차관과 주영 대사를 역임한 뒤 1924년 대선 후보로 나섰던(캘빈 쿨리지에게 패배) 민주당의 정치거물이었다. CFR과 '탐구'의 합병이 재력과 두뇌의 결합을 의미한다면, 공화당과 민주당의 정치 거물인 루트와 데이비스를 지도자에 앉힌 것은 미국의 대외 팽창을 위한 초당적 합의를 겨냥한 것이었다.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국제연맹에 대한 미국의 가입이 의회에서 거부된 것은 루트와 같은 공화당의 정치 거물을 설득해내지 못한 탓이라는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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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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