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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이 바로 온 천하 사람의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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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이 바로 온 천하 사람의 몸"

[탁오서당] 〈명등도고록〉 상권 제4장

본문
유용건(劉用健)의 말이다.

"〈대학〉에서 말하는 ‘지극한 선’(至善)이란 바로 '사물을 바르게 인식'(格物)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로부터 지선의 경지에는 원래 사물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지요. 그러므로 지선에 도달한다는 것은 멈춰야 할 곳(지선의 경지)이 어딘지 아는 일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격물을 거친 연후라야 그런 앎에 이르게 되지요.1)

앎에 도달하면 멈춰야 할 곳을 깨닫게 되면서 아무것 없이 텅 비었던 나의 본원이 충실해집니다. 그래서 격물이 중요하지요. 하지만 이미 '격물'을 말해놓고 다시 '사물에는 근본과 곁가지가 있다'(物有本末)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천자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일괄하여 모두가 수신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도 말하는군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몸을 본받는다 했으니 몸은 바로 사물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닦는다는 것은 바로 몸이라는 사물을 닦는다는 뜻이 되지요. 몸이라는 사물을 어떻게 연구하고 규명해야 할까요? 이런 사물을 지녔다면 또 어떻게 그것을 밝혀야 마땅한지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몸은 원래 물상(物相)이 없다. 사람이 단지 사물을 보는 관점으로 그것을 대하니 보이는 것이 생기고, 그래서 몸이 있다고 여기게 되었을 뿐이다. 기왕에 몸뚱이가 있는 줄 아는지라 나라는 존재가 보이게 되고, 내 존재를 알면 타인의 모습도 보이게 된다. 타인과 나 자신 피차간이 눈앞에서 어지럽게 뒤섞이면 물상이 떼로 넘쳐나게 되니, 그걸 어떻게 감당하겠나! 사람들로 하여금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거꾸러지게 하는 것은 죄다 사물이라, 그래서 성인은 사물을 궁구하셨다. 그걸 어떻게 궁구하셨냐고? 성인은 온 세상 사람의 몸뚱이를 자기 한 사람의 몸으로 아셨으니, 그분에게 타인은 또 나 자신이었다. 내 몸이 바로 온 천하 사람의 몸이라고 인지하셨으니, 내가 또 타인이기도 했던 것이다.2)

이렇게 해서 위로 천자부터 아래로는 평민에 이르기까지 두루 한 몸이 되어 통하게 하였다. 이런 연유로 제아무리 미천한 평민일지라도 누구나 빠짐없이 천하에 명덕(明德)을 밝히게 되니, 백성과 친하다는 것(親民)은 그 명덕을 밝히는 일인 것이다. 무릇 내 한 몸을 닦음으로써 내 허환(虛幻)한 형체가 존립하게 되니, 나의 수양 아닌 수양(無修之修)3)으로 밝아진 덕분이렷다. 만약 사물이 있다면 자기의 몸도 있고, 몸뚱이가 있다면 마음속의 자아도 존재하는 것이니, 어찌해야 이 몸이 잘 닦여질 수 있을까?

용건이 다시 물었다.

"말씀대로라면 물상이 없는 나의 본원을 잘 보전하고 내 태허4)의 형체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대학〉의 도가 되겠군요. 다만 '도'라 부르지 않고 '도에 가깝다'(近道)고 말한 것은 또 무슨 까닭인지요?"

내 대답은 이러하다.

우리 성인께선 사람들을 물상이 있는 상태에서 없는 상태로 나아가길 바라셨으니, 유물(有物)이 바로 무물(無物)임을 알아보신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물상이 없는 무물(無物)로 통할 수 있으면 사물 자체가 곧 도(道)가 되니, 그러면 사물이 존재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나! 만약 물상이 없는 상태로 옮겨갈 수 없다면 사물은 여전히 사물일 뿐인지라, 아직은 도를 말할 만한 단계가 아니다. 그래서 물질(物)을 말하고 일(事)을 논하고 가까움(近)을 거론했는데, 그게 다 위와 같은 까닭이었다.

무릇 천하에는 오직 사물과 일(사업)만 존재할 뿐이다. 사물인즉슨 근본과 말단이 있지만 도에 어떻게 본말이 있겠는가? 만약 도에도 본말이 있다고 한다면 그 말은 틀려먹었다.5)
일에는 끝과 시작이 있지만 도야 무슨 끝이며 시작이 있겠나? 만약 도에도 끝과 시작이 있다고 지껄인다면 그 말도 도리에 어긋난다.6) 그저 무엇이 먼저고 나중이어야 하는지 알 수 있다면 도에 거의 근접한 것이다.
대저 사물의 세계에선 설사 말단에서 출발했더라도 그 근본을 먼저 탐색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근본에서 출발했더라도 거듭 앞질러서 큰 근본(大本)에 도달하길 추구한들 어찌 안 될 것이랴? 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설사 끝에서 출발했더라도 그 시초를 먼저 탐색할 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시초로부터 출발해 다시금 그보다 앞선 시원조차 없는(無始)7) 상태를 탐색하는 일이 어찌 아니 된다 하겠나? 큰 근본을 알고 시원조차 없는 상태를 아는 것이야말로 '무엇이 먼저고 나중인지 감지하는'(知所先後) 그런 마음이 만들어내는 작용이다. 나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한다. 성인은 사람들이 사물이 있는 상태로부터 상승하여 사물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길 바라셨다고 말이다. 사물이 없는 상태(無物)을 말하지 않고 다만 사물을 탐구하라(格物)고 말씀하신 것도 그래서였다.

▲삼교의 성인


해설

이번 장은 〈대학〉에서 말하는 '지어지선'(止於至善)과 '격물'(格物), '수신'(修身)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다. 그런데 지어지선을 해설하는 방편으로 불가와 도가의 개념들이 동원되고 있음이 눈에 띈다. 유가 경전의 해설에 웬일인지 노장(老莊)과 불교의 어휘들이 난무한다.

불가에서는 '물질은 모두 헛되다'(四大皆空)고 인식한다. 일체의 물상(物相)이 죄다 허망(虛妄)하고 이 몸 역시 내 것이 아님을 반드시 간파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유용건이 보기에 〈대학〉은 여하튼 '수신'을 말함으로써 이 몸의 이치를 탐색하고 장애물 없애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몸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일 것인데 어떻게 그 몸을 배제하란 말인지? 〈대학〉의 수신 담론은 이처럼 불가의 '무물' 사상과 표면상 배치되는 까닭에 이를 묻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지는 평소 유교·불교·도교의 제 학설이 결국은 같은 말이라는 '삼교귀일'(三敎歸一)의 입장을 견지하는 터였다. 그래서 질문에 답하고자 노자와 장자를 동원하고 불교의 개념을 차입하는데, 한 사상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사상이나 종교를 동원하는 이런 식의 서술방식은 중국 학술의 역사에서 아주 오랜 전통이었다.

동한 시대 불교가 전래된 이래 유가·불가·도가(철학적 의미 보다 종교성을 강조할 때는 접미어로 '家'가 아닌 '敎'를 붙인다)는 자연스럽게 정족지세를 형성하며 공존해왔다.

셋이 어우러지게 된 데는 일단 불교의 역할이 컸다. 이 종교는 보다 쉽고 신속하게 상류층과 사대부 속으로 진입하기 위해 전래 초기에는 황로(黄老) 사상을 활용했고 위·진(魏晉) 시대에 이르러선 현학(玄學)의 개념과 명제를 빌려 교리를 설명하는 격의불교(格義佛教)를 내세웠다. 예컨대 노자의 용어로 〈반야경〉을 설명한다든가, 장자의 의미로 〈능엄경〉을 해설하는 식이었다.

▲17세기에 그려진 유불도 삼교도(三敎圖). 미국 예일대 소장


이후로 삼교는 각자 독립적인 형태를 취하면서도 관념과 사유방식에서 부단히 교류하고 융합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원나라 이후부터는 삼교의 취지가 결국 동일하다는 삼교합일(三敎合一) 혹은 삼교귀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송대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신유학은 종교성이 매우 강화된 철학이었다. 공자의 윤리관을 핵심 내용으로 삼지만 불교와 도가 철학을 대량으로 흡수하여 그 자체로 삼교합일을 구현한 특성이 있었다. 유학은 원래 불교나 도교에 비해 종교성이 약한 탓에 생사와 같은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 제대로 된 해답을 주지 못한다고 인식되었지만, 주자학은 그런 약점을 상당 부분 극복했고 특히 양명학에 이르러선 종교성이 보다 심화된 철학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선불교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자기실현과 이해를 이루는 방도로 내성과 직관적 통찰을 중시하는 '심학'(心學)이 창출된 것이다.

이지는 위의 기반에서 삼교합일의 정신을 실천한 대표적 인사였다. 〈대학〉의 해설인 이 글에서도 입증되는 바, 종횡무진 인용되는 삼교의 교리를 보면 슬쩍 말을 비틀어 격의유교(格義儒教)가 아닌가, 하고 물어도 어색하지 않을 지경이다. 예컨대 본문에 나오는 "이 몸은 원래 물상이 없다", "성인은 온 세상 사람의 몸뚱이를 자기 한 사람의 몸으로 아셨으니, 그분에게 타인은 또 나 자신이었다", "수양 아닌 수양" 등은 얼핏 봐도 불교와 도가에서 나온 말인 줄 알 수가 있다.

이번 장은 주희가 '경'(經)으로 받든 〈대학〉 첫머리에 관한 해설이다. 이지의 말뜻을 이해하려면 삼교가 회통(會通)하는 그의 사상적 배경을 알아야 할 노릇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우선은 아래 〈대학〉의 본문부터 읽고 깨칠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이라야 이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 실체가 마음으로 다가올 수 있다.

▲명대 화가 정운붕(丁云鵬, 1547~1628)이 그린 삼교도(三敎圖).
"큰 배움의 길은 자신에게 품수된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사랑하며, 사람을 혁신시켜 지극히 선한 경지에까지 도달하는 데 있다. 멈춤을 알아야 방향이 정해지고, 정해진 방향이 있어야 고요할 수 있으며, 고요한 다음이라야 편안해지고, 편안한 다음이라야 생각하게 되며, 생각하고 나서야 깨달음을 얻어 지선에 도달할 수 있다. 사물에는 근본과 가지가 있고, 일에는 끝과 시작이 있다. 앞서고 뒤처지는 바가 무엇인지 가릴 줄 알아야 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예로부터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고 싶은 사람은 먼저 그 나라를 다스렸고, 그 나라를 다스리고 싶은 사람은 먼저 그 집안을 다스렸으며, 자기 집안을 다스리려는 사람은 먼저 자기 몸을 닦아 바로잡았다. 자기 몸을 닦고 싶은 이는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했고, 자기 마음을 바로하고 싶은 이는 먼저 그 뜻을 성실하게 했으며, 그 뜻을 성실하게 하고 싶은 이는 먼저 그 앎을 이루었고, 그 앎을 이루고 싶은 이는 먼저 사물을 바르게 인식하였다. 사물이 바르게 인식되면 앎에 이르게 되고, 앎에 이르면 뜻이 성실해지고, 뜻이 성실해지면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면 몸이 올바르게 닦인다. 자기 몸이 닦아지면 집안이 가지런해지고, 집안이 정돈되면 나라가 다스려지며, 나라가 다스려지면 천하가 평정된다. 그러므로 천자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똑같이 수신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근본인 자신도 다스리지 못하는 주제에 국가나 천하를 다스리겠다는 생각은 틀려먹었다. 중요한 수신은 가볍게 보고 말단인 국가경영은 첫머리에 놓아서 천하가 잘 다스려진 적은 있지를 않았다."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知止而後有定; 定而後能靜; 靜而後能安; 安而後能慮; 慮而後能得.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齊其家; 欲齊其家者, 先修其身; 欲修其身者, 先正其心;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在格物. 物格而後知至, 知至而後意誠, 意誠而後心正, 心正而後身修, 身修而後家齊, 家齊而後國治, 國治而後天下平. 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爲本. 其本亂而末治者否矣; 其所厚者薄, 而其所薄者厚, 未之有也.)

각주

1) 깊고 투철하게 이해한다는 뜻. 〈대학장구〉의 집주에서 주희는 "앎에 이른다는 것은 내 마음이 아는 바에 미진한 구석이 없다"(知至者, 吾心之所知無不盡也)는 의미라고 설명하였다.

2) 성인에 관한 이 같은 담론은 도가에서 연원한다. 〈장자〉'제물론'(齊物論)에 "이것은 또 저것이고 저것은 또 이것이다"(是亦彼也, 彼亦是也); "천지는 나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고, 만물의 다양함도 나와 더불어 하나가 된다"(天地與我並生, 而萬物與我為一)는 구절이 보인다. 주희는 이를 〈중용장구〉 집주에서 "천지만물은 본시 나와 한 몸을 이룬다"(蓋天地萬物本吾一體)는 사상으로 발전시켰고, 왕수인 역시 "천지만물은 한 몸"(天地萬物一體)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3) 무수지수(無修之修) : 수양에 매달리지 않는 수양. 도가사상은 유의(有意)·유욕(有欲)·유위(有爲)에 반대하며 무위이치(無爲而治)·순기자연(順其自然)·자연천성(自然天成)을 주장한다. 개인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까닭에 수양이 아닌 수양을 얘기한 것이다.

4) 태허(太虛) : 공적허무(空寂虛無)의 경계. 이 글에서는 허무(虛無)하고 허환(虛幻)함을 일컫는다. 〈장자〉'지북유'(知北游)편에서 다음과 같이 처음으로 쓰였다. "이런 까닭에 곤륜 같은 높은 경지는 이르지 못하며, 태허의 자유로운 세계에서 노닐지도 못한다."(是以不过乎崐崙, 不游乎太虚.)

5) 〈노자〉 제14장과 41장에서 도(道)는 무형무상(無形無狀)이며 만물을 구성하는 기본재료로 설명된다. 도 자체는 근본이나 끝이 없다는 것이다.

6) 도가는 도가 어디에나 존재하며 시작과 끝이 없다고 인식한다. 〈장자〉'대종사'(大宗師)에 "대저 도라는 것은 … 스스로 모든 존재의 근본이 되는데, 천지가 아직 생기기 전부터 존재해왔다. 귀신과 하느님을 신령하게 만들고, 하늘과 땅을 낳는다. 태극보다 앞서지만 높다고 여기지 않고, 육극보다 아래에 있지만 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천지보다 먼저 생겼지만 오래되었다 여기지 않고, 상고의 옛날보다 더 오래 존재했지만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夫道, … 自本自根, 未有天地, 自古以固存; 神鬼神帝, 生天生地; 在太極之先而不為高, 在六極之下而不為深; 先天地生而不為久, 長於上古而不為老.)는 구절이 보이고, 「제물론」에도 같은 취지의 글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시작이 있으면 그 앞에 '아직 시작되지 않음'이 있고, 또 그 앞에 '아직 시작되지 않음의 이전'이 있다."(有始也者, 有未始有始也者, 有未始有夫未始有始也者.)

7) 무시(無始) : 아직 시작이 없는 단계. 즉 형적(形迹)이나 표현(表現)이 아직 보이지 않는 초창기 상태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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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대전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와 국립대만사범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지금은 대전의 한밭대학교 중국어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여기저기 다니며 하는 세상 구경을 좋아하다 보니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와 영국 런던 대학교(SOAS)에서 견문 넓힐 기회를 가졌고 중국 무한대학교 초빙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싶어 여러 번 읽다가 포송령의 <요재지이>와 이탁오의 <분서>, <속분서> 같은 중국 고전을 우리말로 옮기기도 했다. 지행합일을 지향하는 자칭 개인주의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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