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자공을 제자로 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보다 낫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자공을 제자로 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보다 낫다"

[탁오서당] 〈명등도고록〉 상권 제2장

아래에 소개하는 상권의 제2장은 공자의 행적에 관한 이지의 평설이다. 또 공자와 자공의 관계를 예로 들어 성인의 생애에서 무엇을 교훈으로 얻어야하는지 일깨우기도 한다.

상권 제2장

"공자는 노나라에서 벼슬살이1) 하면서 삼도2)를 허물고 래(萊) 땅의 군대를 물리치고3) 소정묘를 주살하셨는데, 그분의 마음씀씀이 역시 고작 이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자공은 공자를 지극하게 받들며 칭송했지요. 선생님이 일으켜 세우시니 예가 이에 성립하고, 인도하시니 백성들이 순종하며, 위무하시니 백성들이 거기 귀순하고, 동원하니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협력하며, 살아서는 영광이고, 돌아가시매 모두의 슬픔이라고까지 추켜세웠습니다. 어떻게 유독 현자의 눈에만 그것이 보일까요? 성인의 역할은 정녕 보통사람이 인지하지 못하는 바란 말입니까?"

나(이탁오)는 이렇게 생각한다.

래의 군대를 물리친 것은 물론 정당한 행사였다. 알려진 인사인 소정묘를 죽인 것은 대중을 현혹하는 그 행실을 미워한 때문이었고. 무릇 세 가문이 노나라 권력을 장악하니, 노의 군주는 백성이 없고 정권은 계씨(季氏)의 손으로 넘어간 지가 오래였다. 계씨는 공자를 등용할 수 있었으나 그의 도가 위대한 줄은 알지 못했으니, 애당초 삼환은 공자를 활용할 만한 인물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계환자의 호의는 또 거절하기 어려운 바이기도 하였다.4) 공자가 성(成)을 헐려 하고 비(費)를 무너뜨린 행사 등은 바로 그것이 벼슬에서 몸을 빼낼 수 있는 좋은 핑계거리였던 까닭이니, 무릇 당시의 임금과 재상들에 대해 공자는 낱낱이 파악하고 계셨다. 잠시도 머물지 않고 쉼 없이 천하를 주유하셨던 것은 그의 도가 당연히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고 그들로부터 벗어나면 안 되는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비록 상층부에는 도를 시행하지 못했지만 아랫사람들에게는 도를 밝히게 되었고, 그것으로 또 자족하셨다. 만약 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다면 그분의 경륜과 수단은 예를 가르치면 예가 자연스레 바로서고, 도를 행하면 그 도가 절로 행해지며, 위무하면 사람들이 몰려들고, 동원해도 원망이 없으며, 살아서 영광스럽고, 죽어서는 애통하게 되었을 것이다. 자공의 말은 분명 그 스승의 행사를 높이고 칭송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무릇 자공 역시도 세상에 눈에 차는 이가 없던 자로서 남에게 쉽게 승복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런데 공자만은 하늘처럼 떠받들며 입에서는 칭송의 말이 끊이질 않았고, 여막을 지어 홀로 시묘살이 하더니 삼년이 지나서도 차마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공자가 설사 나라를 얻어 다스리더라도 자공 한 사람을 얻는 통쾌함만은 끝내 못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자공 위로는 또 증삼(曾參)과 민자건(閔子騫) 같은 큰 현인이 건재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돌아가자! 돌아가자꾸나!" 하고 말씀하셨으니, 공자는 당시에 또 자로나 자공을 능가하는 뛰어난 인재를 만날 희망을 여전히 가슴속에 품고 계셨다. 하지만 그 정도의 인재도 만나기 어려운 줄은 알지 못했으니, 그래서 노나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결연했던 것이다.

원래 공자가 자로와 자공을 제자로 둔 것은 한 나라를 얻어 다스리는 일보다 훨씬 나은 경우였다. 삼환의 무리 따위가 어찌 어울려 행사를 도모할 만한 부류였을까!

해설

▲자공 초상
위 글에서 이지는 공자의 정치적 행적과 스승을 대하는 자공의 태도를 병치해 논함으로써 공자의 도가 어떻게 후세에 전해지는지, 듣는 이 스스로가 판단하도록 유도한다. 대체로 실패의 연속이던 정치 인생과 자공 같은 제자를 둠으로써 얻게 된 결과를 자연스럽게 대비시킴으로써 유장한 시간의 축에서 봤을 때 무엇이 중요한지 절로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위대한 사상가라 해서 정치 일선에서 고난이 비껴간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 속에서 펼쳐져야 하는 도인 까닭에 공자는 쉼 없이 천하를 주유하며 자신의 활동무대가 나타나길 바라마지 않았다. 그러나 성취보다는 좌절이 깊었고, 그래서 그는 결국 사람을 키우는 교육에서 자신의 길을 찾게 된다. 공자는 그렇게 생전에 쌓은 몇몇 정치적 업적 때문이 아니라 자공 같은 제자를 곁에 둔 덕분에 후세에 성인으로 이름이 남은 것이다. 제자들과 담론하며 가르치는 가운데 눈앞의 현실을 초월해서 보다 깊고 본질적이며 보편적인 사유로 나아간 덕분이었다.

공자는 열국을 주유할 때 은사(隱士)인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자로에게 자기들처럼 세상을 피해 사는 선비(辟世之士)를 따르라고 권유했는데, 공자는 이 말을 전해 듣고 한탄하면서 "사람이 새나 짐승과 무리지어 살 수는 없는 법이다. 내가 인간과 함께 도모하지 않는다면 누구랑 더불어 같이하겠느냐?"(人不能和鳥獸同群, 我不同人打交道而同誰打交道?)(〈논어〉'미자微子'편)라면서 가던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끝내 알아주는 이가 없자 "돌아가자! 돌아가자꾸나! 우리 동네 젊은이들은 패기 있고 뜻이 커 찬란하게 문장을 이룰 수 있는데 어떻게 다듬어야 할지를 모르고 있구나"(歸與! 歸與! 吾黨之小子狂簡, 斐然成章. 不知所以裁之.)(〈논어〉'공야장公冶長'편)라면서 고국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여생을 마쳤다. 공자가 "위험한 나라에는 들어가지 말 것이며, 어지러운 나라에는 기거하지 말고 떠나라. 천하에 도가 있으면 자신을 드러내도 좋지만, 도가 없으면 은거해야 한다"(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논어〉'태백泰伯'편)고 말한 것은 바로 자신의 경험에서 깨우친 바를 전한 것이었다.

공자는 삼천 제자를 두었다고 하는데 현인으로 거론되는 일흔두 명 중에서 십철5)이 유명하고, 거기서도 탁월한 이는 안회, 자로, 자공의 세 사람이었다. 같은 유가의 사상가로서 공자와 이지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공자 학단의 인물들 같은 제자가 이지에게는 없고, 그래서 학파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비록 의도적으로 제자를 키우지 않았다지만 평생 홀로 떠돌았던 이지가 공자에게 가장 부러운 바라면 바로 그의 제자복 아니었을까? 스승을 잘 받들며 말귀 또한 알아들고 그 뜻을 잇는 제자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자공에 대한 이지의 평가에 절절이 묻어나고 있다.

자공(子貢, B.C. 520~B.C. 456)은 이재에 밝아 큰돈을 번 거부였던 까닭에 스승의 경제적 어려움을 가장 많이 도왔던 제자였다. 위(衛)나라 출신으로 구변이 좋고 외교적 재능이 있었으며 안회와 더불어 공자를 가장 잘 받든 제자이기도 하였다. 공자는 "사(자공 이름은 단목사端木賜)는 천운을 타고나지 않았는데도 재화가 늘어난다. 억측을 해도 잘 들어맞는구나"(賜不受命, 而貨殖焉, 億則屢中.)(〈논어〉'선진先進'편)라면서 그 총명함을 칭찬했는데, 그런 스승을 자공은 해와 달에 비유하며 가장 지고한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선생님께 미칠 수 없음은 마치 하늘을 사다리 타고 올라갈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나라를 얻어 다스리면, 이른바 일으켜 세우시니 가르침이 이에 성립하고, 인도하시니 사람들이 순종했으며, 편안케 하시니 사람들이 따르고, 격려하시니 사람들이 이에 화목하였습니다. 그 삶은 영광이고 죽음은 슬픔이었으니, 제가 어찌 그분께 미칠 수 있겠습니까?"(夫子之不可及也, 猶天之不可階而升也. 夫子之得邦家者, 所謂立之斯立, 道之斯行, 綏之斯来, 勤之斯和. 其生也榮, 其死也哀. 如之何其可及也?)(논어〉'자장子張’\'편)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가 죽은 뒤 다른 제자들은 삼년간 복상하고 다들 흩어졌는데 자공만은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도합 육 년을 지킨 다음에야 떠났다고 기술하였다.

스승에 대한 자공의 대접은 인간적 측면에서든 사제관계로 보든 더 이상 극진할 수가 없다. 이지가 보기에 인생에서 그런 사람 만나 교유하는 것보다 더 이상 가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별로 가망도 없는 현실정치에 열성인 공자를 향해 글의 말미에서 "자로와 자공을 제자로 둔 것은 한 나라를 얻어 다스리는 일보다 훨씬 나은 경우였다"고 일침을 놓는 것이다. 공자의 생애를 관통하는 평가라 해도 손색이 없으니, 제자들이 아니었다면 공자의 도가 천하와 후세에 전해졌을 리 없기 때문이다.

▲소정묘
본문에는 공자가 소정묘를 죽인 사건도 아울러 언급된다. 소정묘(少正卯, ?~B.C. 496)는 노나라의 대부인데 언변에 능해 '유명인사'(聞人)로 일컬어지던 인물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공자 당시 사학에서 강학을 했는데 공자의 제자들까지 유인해 강의를 듣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노나라 정공 14년 공자는 대사구(大司寇)가 된 지 이레 만에 소정묘를 주살했다. 자공이 죽인 이유를 묻자, 공자는 그가 '소인배 중에서도 난 놈'(小人之桀雄)으로 '다섯 가지 악덕'(五惡)을 한 몸에 구비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오악은 그중 한 가지만 있어도 죽이지 않을 수 없는데, 소정묘는 "속으론 뻔히 알면서도 음험하기 그지없고, 행실이 한쪽으로만 쏠리는데도 완고해 고칠 줄 모르며, 거짓말인 주제에 꼬박꼬박 논리와 근거를 들이대고, 추악한 일만 찾아 기록하면서도 범위가 해박하고, 잘못된 언행을 옹호할 뿐더러 거기다 분칠까지 하기"(心達而險, 行辟而堅, 言僞而辯, 記醜而博, 順非而澤)(〈순자〉'유좌宥坐'편) 때문이라는 거였다. 공자의 소정묘 관련 사안은 그 진위가 의심스러워 역대로 이를 우화로 간주하는 견해가 우세하였다. 그러나 일화에서 발견되는 성인의 마음씀까지 우화로 간주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오히려 지금에 이르러 누군가는 더욱 새겨들을 필요가 있는 뼈 있는 말씀으로 보인다.

각주

1) 공자는 B.C. 501~497년 노나라에서 중도재(中都宰)·사공(司空)·사구(司寇) 등의 벼슬을 차례로 거쳤다.

2) 삼도(三都) : 공자가 벼슬할 당시 노나라의 권력은 삼환(三桓), 즉 계손씨(季孫氏)·맹손씨(孟孫氏)·숙손씨(叔孫氏)의 세 대부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공자는 왕실을 강화하기 위해 "집안에는 무기를 숨기지 않고 고을에는 백 치의 성을 쌓지 않는다"(家無藏甲, 邑無百雉之城)는 고대의 법제(古制)에 근거해 세 가문의 성을 헐라고 요구했다. 삼환도 이를 받아들여 계손씨의 비읍(費邑)과 숙손씨의 후읍(郈邑)은 철거했는데 맹손씨만은 가신들이 "성이 없으면 맹손씨도 존립이 불가하다"(無成, 是無孟孫也)고 뜯어말리는 바람에 공자의 뜻은 관철되지 못했다. 노나라 군대는 성을 포위하고 공격했지만 이기질 못해 결국 그곳을 허물지 못했다. 〈좌전〉'정공'(定公) 12년조에 보이는 기사.

3) 노나라 정공(定公) 10년(B.C. 500), 제나라 경공(齊景公)과 정공이 협곡(夾谷, 지금의 산동성 래무시萊蕪市)에서 만났는데 노나라 측에선 공자가 예를 주관했다. 제는 강자의 횡포로 노의 신하들을 겁박하면서 래(萊)의 주민들에게 노나라 군주를 에워싸게 했는데, 공자는 이에 굴하지 않고 위병들을 지휘해 반격에 나섰다. 결국 경공은 래인들을 물러가게 하고 제가 노나라에게서 빼앗은 문양(汶陽)의 땅을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사기〉 '공자세가'에 보인다.

4) 당시 노나라는 계환자(季桓子)가 집정하고 있었는데, 공자가 출사하기 이전 계씨의 가신 양호(陽虎)가 전권을 휘둘러 계환자를 구금하고 공자의 출사를 적극 권유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공자는 그 말을 듣지 않았고 양호가 도망친 다음에야 출사해 중도재(中都宰)가 되었는데, 바로 계환자가 공자를 전적으로 신뢰한 때문이었다. 계환자의 후의를 거절하기 어려웠다는 말은 이 일을 가리킨다.

5) 십철(十哲) : 공자 문하에서 가장 뛰어났던 10명의 제자를 가리킨다. 〈논어〉 '선진'(先進)편에서 공자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공자가 말씀하시길, '나를 좇아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고생하던 제자들은 모두 관리가 되어 관청 문전에 들어가지 못했다. 덕행으로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 있고, 언어에 뛰어나기로는 재아와 자공이다. 정사에는 염우와 자로가 있으며, 문학에는 자유, 자하가 손꼽힌다"(子曰: '從我於陳蔡者, 皆不及門也. 德行: 顏淵、閔子騫、冉伯牛、仲弓; 言語: 宰我、子貢; 政事: 冉有、子路; 文學: 子遊、子夏.')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김혜경

대전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와 국립대만사범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지금은 대전의 한밭대학교 중국어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여기저기 다니며 하는 세상 구경을 좋아하다 보니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와 영국 런던 대학교(SOAS)에서 견문 넓힐 기회를 가졌고 중국 무한대학교 초빙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싶어 여러 번 읽다가 포송령의 <요재지이>와 이탁오의 <분서>, <속분서> 같은 중국 고전을 우리말로 옮기기도 했다. 지행합일을 지향하는 자칭 개인주의자이기도 하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