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벼슬도 학문도 도(道)의 실천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벼슬도 학문도 도(道)의 실천

[탁오서당] 〈명등도고록〉 상권 제3장

본문

"자하1)는 '벼슬하면서 힘이 남으면 공부하고, 학문을 하고도 여력이 있으면 벼슬하라'2)고 말했지요. 요즘 사람들 벼슬살이는 공무처리며 산더미처럼 쌓인 장부정리에 밥 먹을 틈조차 없으니 어느 겨를에 책을 읽겠습니까? 게다가 배우는 사람이 책을 읽어 뜻을 곧게 세울 수 있고 행함에 여력이 있더라도 천거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무슨 수로 벼슬을 한단 말입니까?"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벼슬과 학문은 결국 같은 말이다. 벼슬이란 어떤 일인가? 도의 실천을 그 사업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출사해 나라를 다스리면 나라가 정돈되고 더 바깥으로 나가 천하를 경영하면 온 세상이 태평해지는데, 그것이 바로 진실한 학문(實學)이다. 배운다면 무엇을 공부하는가? 도의 실천이 바로 학문임을 알아야 한다. 이리하여 몸을 닦으면 도가 자신에게서 행해지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면 도가 가정에서 시행되니, 그것이야말로 진짜 벼슬이라 하겠다. 벼슬이 곧 학문이고, 학문은 바로 벼슬인 것이다.

벼슬과 학문은 동시에 구비되어야 하며, 애당초 외부에서 떨어지길 기다릴 일도 아니다. 벼슬과 학문을 이와 같이 담론하니, 덕분에 그 학문은 진짜 학문이 되고 그 벼슬은 진짜 벼슬이 되었다. 이런 까닭에 명덕(明德)과 친민(親民)이 한꺼번에 열거되지만 간략하면서도 명쾌하니, 흠결을 허락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일컫는다 하겠다. 이것이 바로 우리 공부자의 학문이 온 세상을 아우르며 천년만년 종주가 될 수 있던 연유인데, 증자(曾子)는 이를 풀어 〈대학〉을 지었고 자하는 다시 그 내용을 '학우'(學優)의 논설로 펼쳐내셨다. 다 같이 공자님에게서 나온 내용이련만 지금은 강론조차 행해지질 않으니, 애석할진저!

질문이 이어졌다.

"확실히 이와 같다면 백성과 사직은 올바른 학문의 바탕이니, 자로의 언사야말로 진실한 의미가 담긴 것이라 하겠습니다. 공자님은 왜 그 말을 미워하셨을까요?"
내 생각은 이렇구나.

자로의 말은 오로지 자기 의도에나 부합될 뿐이니, 그래서 공자님은 그 말을 미워하셨다. 싫어하신 까닭이야 비록 말은 그럴싸하나 뜻이 진실하지 못해서인데, 단지 구변만 좋아 말이 현란하다고 보셨던 것이다. 그래서 "말재간이나 아첨을 미워함은 그것이 의를 훼손할까 걱정스럽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시의에 맞춰 적절히 행사하면 그것을 '의'(義)라 일컫고, 의로움의 기치를 내걸고 논박으로 남들을 제어하면 그런 행태를 두고 '구변만 좋다'(佞)고 일컫는다.

해설

▲자하 초상
이번 장에서 이지는 공부와 일에 과연 선후가 있는지를 논한다. 학문을 닦은 뒤 그 지식을 직업에 활용하는 차원이 아니라, 학문을 닦는 그 자체가 벼슬하는 일과 진배 없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역설한다.

"벼슬하면서 힘이 남으면 공부를 하고, 학문을 하고도 여력이 있으면 벼슬을 하라"는 자하의 말은 얼핏 보면 게으르지 말고 매사 최선을 다하며 공부도 열심히 하라는 말로 들린다. 주희(朱熹)는 이 대목에 관한 〈논어집주〉 해설에서 배운 지식에 의거해 벼슬하고 실제에서 응용함으로써 그 학문을 검증하라고 일렀다. 벼슬을 살면서 공부하면 그것이 일을 돕기 때문에 더욱 깊어질 수 있고, 배운 뒤 벼슬을 하면 그 학문을 징험할 수 있어 학문이 더욱 넓어질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반해 이지는 학문과 벼슬에 등위가 없음을 강조하면서 양자가 다 '도의 실천'(行道)일 뿐이라고 말한다. '벼슬'(仕)은 단지 사업으로 나타난 도의 실천(以行道爲事)이고, '학문행위'(學)는 도의 실천이 배움으로 나타난 경우(以行道爲學)라는 것이다. 삶 전체가 도를 실현하는 과정이며 〈대학〉의 첫머리에 나오는 명덕과 친민까지 예외가 아니라고 하였다. 모든 일을 행도(行道)의 기반에서 풀이하니, 앎(知)과 실천(行), 수신과 치국이 밀접한 관계로 연결된다.

"큰 배움의 길은 맑은 덕을 밝힘에 있고, 백성과 친함에 있고, 지극한 선에 다다르는 그 자리에 있다."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대학〉은 첫 문장부터 공부의 목적과 의미를 명시한다. 인간의 정신을 일깨우고 한 길을 갈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고자 애쓴다. 수미일관 공부의 본령과 규모를 드러낸다고 생각해 정이(程颐)는 〈대학〉을 〈예기〉에서 빼내 독립시키고 주희는 '사서'(四書)의 하나로 편정하였다.

주희가 창도한 새로운 유학은 〈대학〉의 해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인간의 선한 본성이 욕망과 또 그런 욕망을 자극하는 외물에 가로막혀 발현되지 못한다고 여겼고, 욕망을 차단할 수 있는 힘은 오직 '배움'에서만 나온다고 보았다. 인간의 도덕적 실천이 학습으로 연결된 것이다. 이리하여 〈대학〉에서 강조하는 배움은 단순히 경전을 외우고 문장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로하여(正心) 자신을 반듯이 세우고(修身)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齊家) 나라를 다스리고(治國) 맑은 덕을 온 천하에 전파하는(明明德於天下) 일이 되었다.

주희는 〈대학〉만 제대로 알면 다른 경전은 모두 잡설에 불과하다3)고까지 했는데, 〈대학〉이 유학의 모든 가치관을 망라했으며 공부의 윤곽과 구조를 그려낸 기본 경전이라는 인식은 역대의 유자들에게 공통된 바였다. 〈대학〉이 가리키는 방향이 진취적이고 근본적인지라, 그 정신으로 말미암아 유학의 길은 늘 새롭게 밝혀질 수 있었다. 유학이 새로 개조된다면 그 출발은 〈대학〉일 수밖에 없다는 근거를 송대의 유자가 진작에 마련해놓은 것이다.

〈대학〉은 왕양명에 이르러 심즉리(心卽理)와 결합해 치양지(致良知)의 신공부(新工夫)로 변환되었다. 앎을 극대화시켜 물리(物理)를 깨우친다는 주자학의 논리가 보다 심화된 내성적 통찰로 바뀐 것이다. 양명은 궁리진성(窮理盡性)보다 치지(致知)의 근원을 강조했는데, 내 마음에 이미 구비되어 있는 선험적 능력인 양지의 발현이 바로 치지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치지의 뜻이 치양지라면, 그 내용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정성스럽게 만드는'(正心誠意) 것으로 낙착될 수밖에 없다. 앎은 실천의 시작이고, 실천은 앎의 완성이 된다. 양명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은 앎과 실천이 단순한 등식으로 일치하는 이론이 아니라, 매우 격렬하고 역동적인 삶의 실천 속에서 일어나는 과정으로 해석함이 마땅해진다. 학문이나 벼슬이 다 마찬가지라는 이지의 말은 지와 행을 똑같이 강조하면서도 실천을 보다 중시하는 양명학의 기풍이 반영된 것이었다.

본문에서 질문자는 또 자로가 왜 공자에게 면박을 당하는지 묻는데, 그 이면의 고사부터 알 필요가 있겠다.

위(衛)나라에서 계씨(季氏)의 재상을 지내던 자로가 자고(子羔, 역시 공자의 제자 고시高柴)를 '비읍의 읍재'(費宰)로 천거하자, 공자는 이를 만류하고 나섰다. 자로는 이에 "백성이 있고 사직이 있습니다. 왜 꼭 책을 읽은 연후라야 배운다고 하겠습니까?"(有民人焉, 有社稷焉, 何必讀書然後爲學?)(〈논어〉'선진'편)라면서 대들었는데, 그의 말인즉슨 관리노릇 하면서도 배울 수가 있으니 책을 읽는 독서만 공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자로 초상
자로는 "누군가 벼슬하지 않으면 세상의 정의는 사라진다. 장유의 절도조차 없애면 안 되는데 군신의 의를 어찌 폐할 수 있단 말인가?"(不仕無義. 長幼之節, 不可廢也; 君臣之義, 如之何其廢之?)(〈논어〉'미자微子'편)라고 피력한 적이 있는데, 본문에 언급된 '진실한 이치'란 이 말을 가리킨다. 세상을 변혁하여 바로잡겠다는 이상이 있다면 어떤 어려운 상황이라도 구애치 말고 그 일에 나아가야 한다는 당당한 신념의 소유자가 바로 자로였다.

그러나 백성을 다스린다고 하면 우선 그 자리에 합당한 능력과 인품이라야 남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고 본인에게도 피해가 없는 법이다.

공자는 본래 "자고가 우둔하다"(柴也愚)(〈논어〉'선진'편)고 보던 터였다. 반란이 자주 일어나는 거친 땅인 비읍을 맡기에는 모자란 인물로 여겼는데, 자로는 공자가 왜 반대하는지 이유를 뻔히 알면서도 자기 합리화를 위해 백성과 사직을 내세우는 억지를 쓴 것이었다. 공자는 그런 자로에게 "말재주를 어디다 쓰겠다는 것이냐? 약삭빠른 구변으로 남의 말을 막으면 그 사람에게 미움이나 살 뿐이다"(焉用佞? 禦人以口給, 屢憎於人)(〈논어〉'공야장公冶長'편) 하고 나무라는데, 결국 공자의 예상은 들어맞아 나중에 일어난 위나라의 정변으로 자로는 육젓이 되고 자고는 도망쳤다. 공자는 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돌아온 자고에게는 대의(大義)에 밝고 보신(保身)을 잘했다고 칭찬하였다.

이지는 비록 학문과 벼슬이 같은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을 절대시하진 않았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만이 공부는 아니라는 자로의 말에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의로움을 사칭하거나 사람과 세태에 아첨하는 향원(鄕原)의 이중성을 꼬집는 소재로 삼고 있다. 그는 〈맹자〉에 실린 공자의 말씀을 빌려 거짓을 진실이라 우기는 세상의 가짜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진실한 사람은) 엇비슷해도 본질은 그른 사이비를 미워한다. 가라지를 미워함은 그것이 곡식의 싹을 망칠까 염려해서이고, 아첨쟁이 간사한 자를 미워하는 것은 그가 참된 의를 어지럽힐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惡似而非者. 惡莠, 恐其亂苗也; 惡佞, 恐其亂義也.)(〈맹자〉'진심盡心' 하편)
이지가 평생 미워하며 비판했던 것은 이기적인 본심을 감춘 채 진실을 호도하고 선동하는 지식인의 교묘한 언변과 위선이었다. 공자는 자신을 두고 "감히 말하건대 나는 말을 꾸며내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고집불통의 완고함을 미워한다"(非敢爲佞也, 疾固也)(〈논어〉'헌문'편)고 말한 적이 있는데, 같은 질문을 이지에게 던지더라도 대답은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학〉은 이지의 말처럼 종래 증자가 지었다고 알려졌다. 지금에 이르러선 대체로 진한(秦漢) 연간 순자 계열의 유가 사상가 손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각주

1) 자하(子夏) : 공자의 제자 복상(卜商, B.C. 507~?). 자는 자하, 복자(卜子) 혹은 복자하(卜子夏)로 존칭된다. 공문십철(孔門十哲)에 들며 진(晉)나라 온(溫) 출신으로 고대의 문헌전적(文獻典籍)에 밝아 문학(文學)에 뛰어나다고 일컬어졌다. 자하는 안회나 증삼처럼 공자의 도를 엄격히 준수하는 제자는 아니었다. 나름 독창적이고 이단적 성향까지 있어 극기복례에 치중하지 않고 시대와 더불어 함께 나아가겠다는 면모를 보였는데, 공자는 그가 인(仁)과 예(禮)를 준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너는 군자유가 되고 소인유는 되지 말아라"(女爲君子儒, 無爲小人儒)(〈논어〉'옹야'편)하고 경고하기도 했다. 공자 사후에 위(魏)나라에 가서 문후(文侯)의 스승이 되었고, 이회(李悝)와 오기(吳起) 같은 인물들이 그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2) 〈논어〉'자장'편에 실린 자하의 말로, 원문은 다음과 같다. "벼슬을 하면서 힘이 남으면 학문을 하고, 학문을 하고도 힘이 남으면 벼슬을 하라"(仕而優則學, 學而優則仕). 여기서 우(優)는 '남는 힘이 있다'(有餘力)로 해석한 주희의 견해에 따랐다. 그러나 이와 달리 '우'를 '뛰어나다'(優長)로 풀이하며 "벼슬하면서 뛰어나고 싶으면 공부해야 하고, 학문에 뛰어나면 벼슬할 수 있다"로 해석하는 형병(邢昺) 같은 주석가도 있다.

3)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4 '춘록'(椿錄). "〈대학〉은 학문을 하기 위한 시행세칙이다. 먼저 〈대학〉에 통달하고 강령을 수립해 결정하면 기타의 경전은 모두 〈대학〉 안에 내용이 들어있는 잡설임을 알게 된다." (大學是爲學綱目. 先通大學, 立定綱領, 其他經皆雜說在裏許.)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김혜경

대전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와 국립대만사범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지금은 대전의 한밭대학교 중국어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여기저기 다니며 하는 세상 구경을 좋아하다 보니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와 영국 런던 대학교(SOAS)에서 견문 넓힐 기회를 가졌고 중국 무한대학교 초빙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싶어 여러 번 읽다가 포송령의 <요재지이>와 이탁오의 <분서>, <속분서> 같은 중국 고전을 우리말로 옮기기도 했다. 지행합일을 지향하는 자칭 개인주의자이기도 하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