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정선 카지노 밑에는 59개의 '꿈'이 있습니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정선 카지노 밑에는 59개의 '꿈'이 있습니다!"

[과학 수다가 만나러 갑니다] 정선군 고한중학교

요즘엔 강원도 정선 하면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의 촬영지부터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테다. 하지만 정선 하면 '탄광'이 연상될 때가 있었다. 어느 정도 연배가 있는 독자라면 1980년 4월에 정선군 사북읍에서 있었던, 탄광 노동자 처우 개선 시위와 이를 막는 경찰 간의 충돌로 빚어진 이른바 '사북 사태'가 생각날지도 모른다.

최근에 정선은 탄광 대신 다른 상징도 얻었다. 바로 '도박'이다. 탄광을 없앤 대신 세운 공기업 강원랜드가 운영하는 하이원리조트와 그에 딸린 카지노는 이곳의 새로운 상징이다. 석탄 채굴의 흔적으로 을씨년스럽던 태백산맥 한 자락에 지금은 휘황찬란한 불빛을 빛내는 카지노가 서 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정선읍 근처에 <삼시세끼> 촬영지가 있다.)

탄광과 도박. 이렇게 보통 사람의 생활감각으로는 도저히 구체적인 실감이 안 나는 양극단 사이에 정선이 놓여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양극단을 단박에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있다. <프레시안>과 사이언스북스, 알라딘이 함께 하는 '과학 수다가 만나러 갑니다'의 두 번째 방문지 정선군 고한읍 고한중학교가 그곳이다. 고한중학교는 카지노 바로 밑에 자리 잡은 작은 학교다.

사실 처음부터 피해갈 수 없었다. '과학 수다가 만나러 갑니다' 방문지를 선정하는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나부터 이렇게 말했다. "고한중학교는 갈 수밖에 없겠네요." 내가 말문을 열자마자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학 강연을 신청한 '영어' 선생님의 사연이 너무나 절절했던 탓이다.

"저는 15년차 영어 교사 송민경입니다. 왜 영어 교사가 과학 수다에 관심을 가지냐고요? 우리 고한중학교는 산골 아주 깊은 산골에 위치한 학교입니다. 도서관도 하나 없고 서점도 하나 없습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카지노와 (그것과) 관련해서 24시간 운영되는 식당, 마사지, 노래방….

(…)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불평만 할 게 아니라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다는 교사로서의 욕심이 생기기 시작해서 이렇게 용기를 내 봅니다. 가을에 우리 고한은 정말 너무 혼자보기 아까운 아름다운 단풍이 절정을 이룹니다. 꼭 한번 방문하셔서 우리 아이에게 제가 보여 주지 못하는 세상으로 이끌어 주세요."

송민경 선생님의 이 사연은 새벽 3시 20분에 올라왔다. 보이는 곳이라곤 옛 탄광의 흔적과 카지노와 그것이 배출한 욕망의 배설물뿐인 곳에서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자 고군분투하는 선생님. 그 선생님이 'SOS'를 치는데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막상 응하긴 했는데 영 자신이 없었다. 도대체 우리가 그런 SOS에 응할 자격이나 될까?

막상 고한중학교에 도착해서 교실 하나를 가득 채운 전교생 59명의 얼굴을 보니 자격지심은 더욱더 커졌다. 이런 외부 손님의 방문이 낯설었는지 아이들은 수줍은 오카리나 연주 공연까지 준비했던 모양이다. 아름다운 오카리나 소리를 들으면서 점점 더 머리가 아득해졌다. 오늘 내가 준비한 강연이 과연 이 아이들에게 선물이 될 수 있을까?

천문학자 이명현 박사가 먼저 매를 맞았다. 이 박사는 "가리면 보인다"라는 시 같은 제목의 강연에서 가리고 보니 보이는 것들을 설명했다. 예를 들어, 지구와 태양 사이를 달이 가리면(일식) 그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태양으로부터 수백만 킬로미터를 뻗어 나오는 수백만 도의 온도를 갖는 '코로나'가 그렇다. (태양이 밝을 때는 코로나를 볼 수 없다.)

자기가 태어난 달의 별자리를 정작 생일날 확인하지 못하는 것도 빛이 과해서다. 태양이 밝을 때는 정작 그 별자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태양이 가려지면 그 때야 태양 주변의 별자리가 제 모습을 드러낸다. "복면을 쓰고 얼굴을 가린 가수의 목소리에 우리가 감동을 받는 것처럼, 과학에서도 이렇게 가려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명현 박사가 말하는 내내 아이들 눈치를 보던 나는 "다르면 보인다"라는 강연으로 이어갔다. "가뭄 때문에 물이 부족해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오염된 흙탕물을 떠먹어야 하는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과학기술은 어떤 해결책을 줄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바닷물을 먹는 물로 만드는 해수 담수화 시설을 지어줄 수 있겠죠?"

그런데 해수 담수화 시설을 짓는 데는 2000억 원이 넘는 돈이 필요하다. 그 시설을 운영하는 데는 엄청난 전기가 들어가는데, 그 운영비를 감당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그럼, 이런 건 어떨까요? 어떤 과학기술자는 흙탕물을 빨대처럼 빨면 세균, 바이러스를 비롯한 오염물질이 정화되는 '생명 빨대'를 만들었습니다."

생명 빨대의 가격이 2000~3000원에 불과한 사실을 말해주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들렸다. 아이들에게 세상에는 '큰 기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기술'도 있고, 때로는 그 작은 기술이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환경을 지키는 데 더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음을 전하는 데는 일단 성공한 듯하다. 그리고 이어진 그런 작은 기술을 고안한 사람들의 이야기….

한 시간이 넘게 이어진 두 강연이 끝날 때까지 아이들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지루한 대목에서 졸릴 법도 했을 텐데, 멀리서 온 손님에게 '예의'를 지키려는 아이들의 마음이 참으로 고마웠다. 질의응답 시간에도 질문이 계속됐다. '상대성 이론' 같은 어려운 얘기는 피해가려던 이명현 박사는 결국 중력과 속도에 따른 시간 지연 현상을 길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강연이 끝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송민경 선생님께서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우리 아이들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더니 송 선생님의 후기가 이어진다. "지금 이런 얘기가 아이들한테 얼마나 가 닿았나 싶죠? 다들 자기 나름대로 담고 있다가 반드시 오늘 이 시간을 되새기는 순간이 있을 거예요. 오늘 정말 고맙습니다!"

멀리서 온 손님들 기운을 북돋아주고자 하는 격려였겠지만, 송 선생님의 후기를 들으면서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아이들에게 이번 기회가 끝이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의 방문이 이어져,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되새기는 순간이 좀 더 많아졌으면 참으로 좋겠다는 욕심도 들었다.

탄광이 있었던 정선군 고한읍에는 지금 카지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는 꿈꾸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지금도 애타게 꿈의 연료가 될 만한 자극을 갈구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두 시간 내내 열심히 사회를 봤던 (이름도 물어보지 못한) 한 친구의 고민을 끝까지 해결해주지 못했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

"연예인을 취재하는 기자가 되고 싶다고? 음, 그건 아저씨의 꿈이기도 하단다. 어떻게 꿈을 이룰지 같이 한 번 궁리해 보자!"

ⓒ사이언스북스

ⓒ사이언스북스

▲ 천문학자 이명현 박사. ⓒ사이언스북스

ⓒ사이언스북스

▲ 강양구 <프레시안> 기자. ⓒ사이언스북스

ⓒ사이언스북스

▲ <과학 수다>(이명현·김상욱·강양구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