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자유의 전사? 미국의 본심은 혁명 분쇄였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자유의 전사? 미국의 본심은 혁명 분쇄였다

[프레시안 books] '전쟁국가 미국' <5> 가브리엘 콜코 <전쟁의 정치학>

지난 3회에 걸쳐 자크 파월의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를 통해 미국 대외정책의 실상을 살펴보았다.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한 진정한 목적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가 아니라 미국 파워엘리트의 경제적 이익이었다는 것, 미국은 2차 대전을 통해 대공황의 경제적 위기에서 벗어났으나 전쟁 특수에 의한 것이었던 만큼 이후 미국 경제는 군사 부문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됐다는 것이 파월의 주요한 주장이었다.

포드, 제네럴모터스(GM), IBM, ITT(국제전신전화회사), 스탠다드오일 등 미국의 주요 대기업들이 1933년 히틀러 집권 이후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에서 매우 수지맞는 기업 활동을 벌였다는 것, 그리고 미국이 해방시킨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에서 기층 민중들의 해방의 열망을 대변한 반파시스트 세력을 일관되게 억압하고 금융가, 기업가, 대지주 등 파시즘을 지원했던 보수 세력들과 손을 잡았다는 것이 전자의 논거였다. 즉 미국은 민주주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 자본주의의 유지 및 확대를 위해 전쟁에 뛰어든 것이었다.

또한 미국 정부의 국방 예산은 2차 대전이 시작됐던 1939년 30억 달러에서 1945년에는 450억 달러로 15배로 늘어났다. GNP 대비 군사비 비중은 1939년 1.5퍼센트에서 1945년 40퍼센트로 급증했다. 게다가 무조건 막대한 이윤이 보장되는 정부 발주 전쟁 물자 계약 중 75퍼센트를 60개 미만의 대기업들이 독차지했다. 2차 대전으로 폐허가 된 일본 경제가 6.25전쟁을 계기로 단숨에 회복됐다는 점을 감안하면(당시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6.25를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말했다), 두 차례 세계 대전에서 전쟁 물자의 최대 공급원이었던 미국 대기업이 얼마나 큰 경제적 이득을 얻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전쟁 수행을 이유로 '반독점법'이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미국 대기업의 독점력이 강화됐고 기업계, 금융계 등 경제인 출신들이 미국 정부 요직에 진출하면서 대기업의 경제적 영향력은 물론 정치적 영향력까지 크게 강화됐다. 요컨대 두 차례 세계 대전은 미국 대기업의 정치경제적 위상을 한껏 올려놓은 반면 미국의 민주주의를 약화시켰으며, 나아가 미국 경제의 전쟁 의존을 심화시킴으로써 전쟁 국가로 나아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비판적 사회학자 C. 라이트 밀즈는 일반적으로 "미국에서 민간 기업의 발전은 공공 자금에 의해 뒷받침돼온 것이 사실"이지만 특히 "전쟁은 이들 민간 기업이 부와 권력을 축적하는 데 필요한 많은 기회를 제공해 왔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그는 2차 대전은 "미국의 생산 수단에 대한 핵심적 통제권을 민간 기업에 넘겨주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전쟁들이 가져다준 혜택을 그야말로 보잘것없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즉 2차 대전은 미국의 민간 자본가들이 주요 생산 수단에 대한 핵심적 통제권을 확보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는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캐나다의 수정주의 역사학자 가블리엘 콜코(1932∼2014년)의 <전쟁의 정치학(The Politics of War: The World and United States Foreign Policy, 1943∼1945)>을 살펴보기로 한다. 1968년에 나온 이 책은 2차 대전에 대한 전통적 해석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전통적 해석은 미국의 2차 대전 참전이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콜코는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콜코의 입장은 파월과 같다. 하지만 콜코는 자크 파월의 논점과도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파월은 자본주의 대안 세력, 또는 변화의 원동력으로 소련을 상정하고 있는 반면 콜코는 유럽의 레지스탕스와 중국의 농민혁명군 등 기층 민중을 상정한다. 즉 전쟁으로 기존 체제가 무너지면서 구체제의 억압에서 벗어난 기층 민중들이 사회 변혁에 나서게 된 것이 혁명적 변화를 지향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는 것이다. 이후 세계사는 변화를 지향하는 기층 민중, 즉 좌익 세력(Left)과 세계 자본주의를 복원하려는 미국의 대결이었다는 게 콜코의 입장이다.

1차 대전 이전 영국 지배 하의 세계 자본주의를 복원해 자신의 지도 아래 새로운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이끌려 했던 미국에게는 이들 좌익이 최대 위협 세력이었다.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을 두려워했던 소련은 이들 좌익의 혁명운동을 최대한 억제했지만(즉 사실상 미국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 복원에 협조했지만), 미국은 소련을 세계 모든 혁명운동의 배후로 오인했고 이에 따라 소련과 생사를 건 일대 투쟁(냉전)을 벌이게 됐다는 것이다.

콜코에 따르면 전후 미국의 세계 기획의 핵심은 미국 지배 하의 세계 자본주의 복원이었고,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자생적 혁명운동은 이 기획에 대한 최대 장애물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자신의 세계 기획을 완수하기 위해 군사력과 경제력 등 모든 힘을 동원해 세계 각지의 혁명운동을 격파해야만 했다. 즉 전후 미국 대외 정책의 핵심은 반혁명(Counterrevolution)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 인구의 6퍼센트에 불과한 미국이 인류 전체를 자신의 지배 아래 둔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과제라고 콜코는 지적한다. 더 나은 삶,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인간들의 열망을 핵무기를 비롯한 압도적 군사력과 경제력으로도 완전히 꺾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결과 2차 대전 이후 세계는 인간다운 삶을 열망하는 여타 인류와 세계 지배를 꿈꾸는 미국 파워엘리트의 투쟁으로 점철돼 왔으며 여전히 가난과 갈등과 전쟁이 지배하는 세상이 됐다는 것이다. 촘스키가 지적했던 '미국의 헤게모니냐, 인류의 생존이냐'의 비극적 상황이 끝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서문에 나타난 콜코의 문제의식과 함께 결론 부분을 전문 번역해 소개한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따라서 변화의 원동력이 된다

ⓒPantheon
콜코에 따르면 2차 대전은 정치사회적 변화의 원동력, 대중운동 및 대중정당의 창조자, 기존 질서의 파괴자로 요약된다. 즉 전쟁은 기존 질서를 철저히 파괴한 것이다. 2차 대전은 1917년 이후 흔들리고 있던 국제정치경제질서를 완전히 파괴했다. 패전한 독일은 열강에서 탈락했고 1차 대전 이후 열강의 각축장이었던 동유럽은 내부 문제에 몰입하게 된다.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의 패권이 무너지고 혁명적 변화가 시작됐다. 중국의 농민혁명이 대표적이다. 또한 식민주의가 몰락했으며 1차 대전 이전까지 세계를 지배했던 영국의 역할은 크게 축소된다.

한마디로 세계 모든 곳에서 전쟁과, 전쟁으로 인해 기존 질서에서 해방된 민중들의 혁명운동이 세계의 정치사회적 지형을 결정적으로 바꿔놓았으며, 이후 수십 년간 전개될 세계 정치의 틀을 마련했다.

미국의 전쟁 목표는 우선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을 꺾는 것, 그리고 미국 지배 하의 단일한 세계 자본주의 경제와 이를 지탱할 국제정치체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미국은 대단히 정교한 경제 및 정치적 목표를 수립했다. 이후 세계 정치는 미국의 전쟁 목표와, 미국의 정치군사지도자들이 인식한 세계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돼 왔다.

전쟁 목표와 관련해 다음 3가지 주제가 미국 정책결정자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첫째, 좌파의 부상 : 전쟁으로 인한 기존 사회 체제의 해체와 혁명운동의 성장, 그리고 이에 따른 세계 도처에서의 변혁의 가능성은 미국 주도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 수립에 최대 장애물이었다.

둘째, 소련 : 소련은 세계 도처 좌파의 배후 세력으로 의심됐다.

셋째, 영국 : 미국 주도의 세계 자본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1차 대전 이전 패권국이었던 영국 세력권(British Empire)의 해체가 필요했다.

미국과 좌파

20세기의 전쟁은 강력한 좌파 세력 등장의 전제 조건이었다. 1차 대전이 러시아 혁명을, 2차 대전은 중국 혁명을 낳은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전쟁은 전투의 승패, 국경의 변경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었다. 이와 함께 사회 체제의 파괴 또는 해체를 불러왔고 국내의 계급투쟁을 격화시켰다. 독일 및 일본에 대한 연합국의 전쟁이 진행되는 것과 함께 중국, 이탈리아, 그리스, 프랑스, 동유럽에서는 새롭게 태어날 사회체제의 성격을 놓고 내전이 벌어졌다. 한편 독일은 전쟁 말기 패배 직전, 연합국이 좌파 세력의 움직임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이를 이용해 (미영소) 연합국 간 관계와 전후 국제정치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유럽 전체에 걸친 무장 레지스탕스, 특히 서유럽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급성장과 소련군의 서진은 미국에게 '좌파 문제'를 제기했다. 레지스탕스, 그리고 이탈리아 및 프랑스 공산당의 성장은 소련군의 영향 때문이 아니라 전쟁을 통한 구질서의 파괴 때문이었다. 게다가 구지배세력은 파시즘에 부역한 전력 때문에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좌파의 위협은 (전쟁으로 사실상) 파산한 러시아의 지원 때문이 아니라 유럽 파시즘의 일시적 파괴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한편 동아시아에서는 일본,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제국에 의한 식민주의와 과두지배체제의 일시적 파괴가 있었다.

미국과 영국은 서유럽과 남유럽에서 강력한 공산주의 운동의 등장, 그리고 무장 레지스탕스 내 공산주의자들의 중심적 역할을 파악했다. 레지스탕스는 적절한 좌파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한편, 혁명의 주역으로서 외국 침략자는 물론 파시즘과 협력해 파시즘의 집권을 가능케 했던 국내 보수 세력을 척결하고자 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러한 국내 투쟁과 세계 정치의 연관성을 살펴보지 못했고, 전쟁 당시 미국과 영국도 그 중요성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1920년대 이후 좌파 세력을 억압했던 보수 세력이 전쟁으로 무너진 후, 미국과 영국에게는 그 공백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보수 질서의 전통적 세력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가 최대 당면 과제였다. 1943∼1947년에 걸쳐 미국과 영국은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일관된 정책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중국(의 혁명운동)만은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방대한 국토와 엄청난 인구를 가진 중국에 대한 통제는 자신들의 능력 밖이라는 점을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프레시안 북스 지난 호 바로 가기]

미국과 소련


유럽과 아시아에서의 대격변은 언제나 미영과 소련의 관계에 악영향을 끼쳤다. 미영은 국제공산주의(모스크바)가 유럽과 아시아의 혁명운동을 조종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서방과 소련의 외교는, 소련이 통제할 수 없는 사태 발전에 의해 좌우되었던 것이다. 거의 모든 지역에서 전쟁이 초래한 사회정치적 변화는 어느 누구도 통제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아가 소련은 기꺼이 (미영에) 협력할 용의가 있었고 실제로 그런 시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혁명적 변화가 소련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미영은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소련이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동유럽에서, 미국은 최악의 상황만을 확인했고 이것이 미국이 바라는 이상적 국제질서를 침해했다고 믿었다. 결국 유럽과 아시아에서의 혁명적 대격변, 특히 동유럽에서의 변화는 모두 소련의 책임으로 귀착되었고, 서방과 소련 간의 정치적 문제에 관한 군사전략에 영향을 끼쳤다.

미국과 영국


미국은 1차 대전 이후 2차 대전 이전 세계경제의 문제는 영국의 정책이 미국의 목표와 상반된 결과라고 판단했다. 또 전후 정치동맹의 문제에서는 영국이 프랑스와 함께 미소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자적 유럽세력이 되려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두 차례 세계 대전으로 국력이 소진된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새로운 두 강대국 미소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독자적 유럽을 건설하고자 했다. 프랑스 문제는 좌파의 득세, 드골의 개인적 성향, 전후 프랑스의 정치경제적 지향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다. 이탈리아, 유고, 그리스와 관련해서도 미국은 좌파의 득세뿐만이 아니라 이 지역에 대한 영국의 지배도 걱정해야 했다. 미국은 소련에 대한 영국의 외교정책도 문제 삼았고, 사우디 등 중동 지역에서는 미영이 경쟁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미영 간의 갈등은 '좌파 및 소련 봉쇄'라는 더 큰 공동의 목표에 의해 회피될 수 있었다.

결국 독일의 패배가 임박하면서 미국의 전쟁 목표는 미국 주도의 세계 자본주의 복원으로 모였다. 그러나 전쟁에 의해 구체제에서 해방된 민중들의 혁명운동이 이러한 미국의 기획에 최대 장애물로 등장했다.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을 두려워했던 소련은 좌파 운동을 최대한 억제함으로써 미국의 기획에 최대한 협력하려 했으나, 미국은 소련을 세계 좌파 운동의 배후 세력으로 판단했다. 한편 영국은 미국의 세계 자본주의 복원의 경쟁자였으나 '좌파 및 소련 봉쇄'라는 더 큰 공동의 목표에 의해 미영 간의 갈등은 회피됐다.

<3> 미국, 마피아는 '칭찬' 레지스탕스는 '거부'...왜?
<4> 2차 대전 연합군 최종 표적은 히틀러가 아니었다


<전쟁의 정치학>의 결론


추축국에 대항하는 미영소의 연합은 숙고나 선택의 결과가 아니었다. 나치 독일 등 공동의 적을 꺾어야 한다는 단 하나의 목표가 이들 세 나라를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을 뿐이다. 미국, 영국, 소련은 (나치 격퇴라는 화급한 목표 외에) 단 하나도 공동의 전쟁 목표를 갖고 있지 않았다. 전쟁 이후 이루어야 할 정치, 경제적 목표는 전혀 달랐다. 단 하나, 소련과 좌파 세력을 봉쇄해야 한다는 미영의 부정적 공동 목표가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독일과 일본이 패배하고 난 후 세 나라 간의 취약한 연합은 곧바로 공개적 갈등으로 변질됐다. 초기의 갈등은 전쟁 기간 내내 증폭됐고 1944년 말부터는 미영에게 가장 중요한 문젯거리가 됐다. 그리고 이 갈등이 현대 세계사의 골격을 형성했다.

2차 대전 참전 국가 중 미국은 인명과 재산 피해 면에서 가장 적은 피해를 봤다. 1945년 8월 현재 산업과 기술 역량에서 오직 미국만이 상당 기간 현대전을 치를 능력을 갖고 있었다. 전쟁을 통해 이전보다 더욱 강력해진 나라는 미국뿐이었다. 인력과 자원 규모 면에서 소련보다 열세였던 섬나라 영국은 러시아보다 더 큰 피해를 봐 2류 국가로 전락했다. 미국은 어떤 국가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세계 최강 국가가 됐다. 또한 미국 지도자들은 이러한 미국의 위상에 걸맞은, 어쩌면 미국의 위상보다 더 큰 (세계에 대한) 정치적, 특히 경제적 목표를 명확히 세워두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워싱턴의 지도자들은 미국의 군사력이 막강하다는 사실과 미국의 정치경제적 목표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들은 또한 미국의 핵심 목표 달성이라는 측면에서 향후 소련, 영국,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화가 찾아왔을 때 미국의 목표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망가지고 해체된, 무한하게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현실에 대해 미국의 통제력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가 이후 미국의 모든 구체적인 대응과 가정을 규정지었다. 나아가 이러한 미국의 팽창주의적 대응이 전후 열강 간의 관계 및 갈등의 구조를 결정했다.

당초 미국은 좌파의 득세, 그리고 이것이 전후 미국의 정치경제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위협이 된다는 점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으나 점차 소련의 팽창에 대한 대응이 더 큰 대외 정책 과제로 떠올랐다. 미국 지도자들은 특히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동유럽에서 소련의 팽창주의가 전후 미국이 달성하려고 하는 최대 목표를 위협한다고 판단했다. 2차 대전은 동유럽의 전통적 정치경제 구조를 완벽하게 파괴했다. 소련도 이 기정사실을 바꿀 수 없었다. 왜냐하면 동유럽의 파괴를 불가피하게 만든 것은 소련이 아니라 동유럽 구체제의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새로운 구조적 한계 내에서 움직여야 했고 실제로 다양한 정치적 가능성을 모색했지만, (동유럽의) 새로운 사회경제적 현실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미국과 대결할 경우 자신이 현저한 열세라는 사실을 다른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소련은, 공산주의 세력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국에 적대적이지 않고 소련에 대한 침공 통로의 역할을 포기할 용의가 있는 정치세력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든 보수적이고 신중한 노선을 취했다(즉 소련에 적대적이지 않은 비공산세력의 집권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소련은 급진 우파는 물론이고 급진 좌파도 똑같이 통제할 용의가 100퍼센트 있었다. 또한 미국과 영국이 이탈리아, 그리스, 벨기에에서 그랬던 것처럼(반파시스트 세력에 대한 철저한 탄압), 동유럽의 민주주의를 지켜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미국과 영국, 소련 어느 나라도 자신의 핵심적인 전략적, 경제적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또는 좌파의 집권 아니면 전쟁 이전 반동적 파시즘 세력의 복권을 허용해가면서까지, 유럽의 민주주의를 허용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실제로 소련이 유고와 그리스의 혁명 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는 점, 그리고 1945년 당시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있었다면 동유럽을 공산화할 의도가 없었다는 사실이 이제는 분명히 드러났다.

미국에게 동유럽의 장악은 중요한 경제적 목표의 하나였다. 이를 위해서는 동유럽의 정치적 현실이 이러한 미국의 열망과 일치해야 했다. 그러나 동유럽 지도자들의 대소련 정책들과는 무관하게, 동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미국이 원론적인 정책 목표의 구체적 세목을 확정하기도 전에 미국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다른 열강이 동유럽 전체, 나아가 세계의 특정 지역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미국의 정치경제적 목표는 세계를 단일한 자본주의 경제권으로 통일하는 한편 이를 위한 정치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의 특정 지역이 자신의 직접적 통제에서 벗어난다면, 즉 다른 열강에 의한 정치경제적 세력권이 형성된다면 이는 미국의 정책 목표를 직접적으로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바로 이 때문에 미국은 프랑스에 대한 영국의 통제를 반대했으며 동유럽의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동유럽의 현실은 미국이든 소련이든 자신의 계획이나 소망대로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전쟁 기간 내내 소련은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 신중하고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통일전선 전술이 그 대표적 사례였다. 좌파 세력은 모스크바의 통제에 따라 모든 손해를 무릅쓰고 통일전선을 위해 그들 자신의 독특한 사회주의적 성향을 포기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나아가 동유럽 전체의 운명에 대해 미소가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은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한편 전후 동유럽에 미국의 목표와 이익에 부합하는 경제 프로그램에 협력할 수 있는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미국의 정책 때문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목표는 전통적으로 러시아에 적대적이었던 보수적 지도자들의 재기를 막는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동유럽 사회의 완전한 파괴는 소련에 유리한 것이었다. 동유럽에 대한 미국의 목표는 동유럽을 반식민지의 형태로 전쟁 이전의 전통적 유럽 경제에 통합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1차 대전 이후 2차 대전에 이르는 기간(전간기, 戰間期) 동안 제국주의 및 민족주의의 동맹세력이었던 동유럽의 사회 및 정치 세력을 어느 정도 개량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미국은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도 소련도 해낼 수 없는 과제였다. 미국의 정책이 실패의 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그 책임을 소련에 떠넘겼다. 동유럽을 둘러싼 세계정치의 악화는 역사적으로 가망 없는 혼란에 빠진 동유럽에 대한 미국의 팽창정책이 초래한 것이었다.

결국 소련과 미국은 통제할 수 없는 세력, 즉 좌파세력을 부분적으로만 통제할 수 있었다. 즉 오직 서유럽에서만 좌파에 대한 통제가 가능했던 것이다. 2차 대전은 내전에 빠진 사회의 고유한 온갖 내부적 위기들을 현실화했다. 이는 각 산업자본주의 국가의 내부 상황, 1차 대전, 그리고 1939년 이후 세계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의 지속적 쇠퇴 등 상이한 요소들의 결합에 의한 부산물이었다. 미국은 소련의 상당한 지원을 받아 이러한 (자본주의의) 붕괴를 지연시킬 수 있었지만, 그 도도한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전쟁이 현대 세계 외교와 갈등의 방향을 결정한 이후 이 모든 문제들은 1942∼1945년의 기간에 한곳으로 모여 다시 한 번 새로운 힘으로 폭발했다. 미국은 전쟁 이전 자본주의와 과두지배의 구질서를 자기편으로 받아들여 이를 약간 개량한 다음, 새롭게 세워질 세계 자본주의 경제에 통합시키려 했다. 그러나 구질서는 식민지 지역 및 반식민지의 중국에서는 죽어가고 있었고, 동유럽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결국 미국은 오직 서유럽만을 잠정적으로 자본주의 세계 경제에 통합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들이 세계 권력의 구조 및 조건에 미친 영향은 (1917년의) 소련 혁명보다도 컸다. 이는 부분적으로 1947년 이후 소련이 많은-전부는 아닌-사회주의 및 혁명적 국가를 보호하고 지원하면서 (혁명의) 성공과 실패 사이의 완충재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2차 대전은 전쟁 이전 유럽의 정치경제 구조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구질서에 대해서는 아무런 사회적 지지도 없었고 따라서 변화에 대한 저항도 없었다. 유럽 자본주의는 무너지고 있었으며 그중 살아남은 것은 오직 외부 개입에 의해서만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유럽 국가들에 대한 연합국의 일방적인 내정 간섭이 전시, 그리고 전후 국제정치의 결정적 요소가 된 것이다. 미국과 영국은 이탈리아에서 첫 사례를 만들었고(1947년 총선에서 미 CIA는 기민당 등 보수 정당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함으로써 이탈리아 공산당의 집권을 막았다), 미국이 이를 유럽 다른 국가들에 확대함으로써 공식화됐다. 미국은 진정한 합의의 광장이 될 수 있었던 유럽자문위원회(EAC)의 출범을 저지했는데, 이는 서방측이 피점령국의 '민주주의'를 통제함으로써 점령군이 혁명적 변화를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나온 조치였다.

미국은 유럽의 정치경제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미국에 협조적인 유럽 보수 세력의 복권을 돕고, 유럽 및 아시아 구질서의 전면적 붕괴를 막기 위한 시도를 해야 했다. 구질서의 붕괴는 한 지역, 또는 세계 전체에 대한 소련의 지배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미국은 독일 및 일본과 관련해 진정하고도 항구적인 평화를 추구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가는 시점에 미국의 많은 주요 지도자들은 소련의 팽창을 막는 한편 미국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독일 및 일본을 개혁해 이들을 세계 자본주의 경제에 통합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국은 전쟁 기간 동안, 패배한 추축국이 전후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할지에 대해 의도적인 모호성을 유지했다. 그리고 이 모호성이 의미하는 바는 미국은 추축국의 완전한 파괴보다는 전 세계에 걸쳐 미국의 국익을 증진하는 것을 더 중요한 것으로 판단했으며, 이것이 미국의 전후 기획에서 가장 중요한 고려 요소가 됐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2차 대전은 미국 정부의 비극적 실수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어쩌면 덜 제국주의적인 독일과 일본(과의 협력)이 미래 소련과의 동맹보다 나았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후 과제의) 우선순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궁극적으로 미국 전후 정책의 초석이 됐다. 이러한 노선에 따라 전술적 목표에 변화가 생겼고 전후 유럽, 특히 프랑스와 관련한 영국의 정치적 목표에 대한 당초 미국의 적대적 태도도 크게 완화됐다. 봉쇄와 안정, 즉 좌파와 소련이라는 이중의 위협에 대한 봉쇄, 그리고 전쟁 이전 유럽 자본주의 및 식민주의의 핵심적 사회경제체제를 유지하고 안정시키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과제가 된 것이다.

미국이 수행하고자 했던 과제는 세계의 많은 곳에서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 일부 지역에서는 훨씬 가능성이 높았으며, 어쨌든 미국 정부로서는 기존의 정치경제적 조건을 뒤흔들려는 모든 시도들에 대해 최선을 다해 저항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미국은 이들 혁명운동을 봉쇄하고, 방향을 바꾸도록 하며 파괴하려 했다. 방치했다간 온갖 형태의 혁명적 운동이 생겨나 미국의 이익과 전후 목표를 침해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어려운, 그리고 많은 지역에서는 불가능한 이 과제를 수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나서지 않으면 그 결과는 수많은 나라에서 죄파가 집권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오직 미국만이 세계적 반혁명에 전면적으로 개입할 힘을 갖고 있었고, 이에 따라 말 그대로 세계의 모든 지역에 대한 미국의 군사 개입은 전후 국제정치의 전형이 됐다. 1945년 세계적 반혁명의 주역을 떠맡기로 한 워싱턴의 결정은 이후 세계에서 미국의 힘의 미래에 관한 확고한 원칙이 됐다.

소련은 이러한 미국의 의도, 그리고 좌파에 대한 소련의 은밀한 지원이 초래할 위험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전쟁 기간 동안은 물론 전쟁 직후에도 좌파에 대해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았다. 소련이 아무리 보수적 정책을 취해도 세계의 모든 사회적, 경제적 문제의 배후에 소련이 있다는 미국의 확신을 지워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혁명운동의 배후에는 어떤 식으로든 소련의 음모와 지원이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소련과 좌파를 자본주의 붕괴의 결과라기보다는 그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적어도 1914년부터 세계의 방대한 지역에서 자살극을 벌이기 시작한 자본주의 체제 실패의 책임을 소련과 좌파에 돌린 것이다. 하지만 서유럽 자본주의의 회복을 위한, 중요한 숨 쉴 공간을 마련해준 것은 세계 도처의 혁명운동에 대한 소련의 보수주의(적 통제)였다. 이후 서유럽 공산당 세력의 신중함은 항구적이 됐고, 스스로에게 규율한 일상적 정치양식이 됐다. 이처럼 가능한 한 기존 질서에 순응하겠다는 소망, 그리고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미국과 영국이 좌파의 승리를(민주적 선거에 의해서든, 또는 무력투쟁에 의해서든)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이는 정확한 것이었다) 서방 군대가 주둔한 모든 지역 공산당의 정치적 행위를 결정지었다. 나아가 소련은 자신이 통제하는 지역의 공산세력, 그리고 이를 통해 모든 저항세력에게 이러한 전략을 강요했다. 이에 따라 유럽 저항세력을 궐기하게 만들었던 국가적 혁신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반면 소련이 무장 저항세력을 통제할 수 없었던 지역, 또는 우파가 무장 좌파를 끌어안을 수 없을 정도로 완고했던 지역-중국, 그리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혁명과 국제적 위기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위기들은 소련이 추구한 정책의 부산물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좌파세력에 대한 소련의 통제력 결여, 그리고 결코 막아낼 수 없는 도도한 변화의 대세를 거스르려 했던 영국, 특히 미국의 대응이 초래한 것이었다. 미국은 서유럽을 제외한 세계 모든 지역에서 기존 사회 질서가 완전히 붕괴했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모든 힘을-경제력과 군사력-동원해 기존 질서의 붕괴가 초래할 정치경제적 결과를 피하려 했다. 미국은 그러한 결과를 결코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서유럽에서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한편 경제력과 군사력으로도 전쟁과 경제적 붕괴에 의한 사회 해체를 막을 수 없었던 지역에서 미국은 변화의 성격과 규모를 제한할 수는 있었다. 공산주의, 혁명적 민족주의 등 다양한 힘과 대의명분에 의한 사회적이며 혁명적인 대격변에 대한 미국의 억압적 대응은 세계적 변화의 양상을 양극화시켰다. 모든 급진적이며 인간주의적 운동의 자연스러운 특징인 다원주의가 부정됐고, 이에 따라 이들 운동은 생존과 성공을 위해 다양성과 사회적 실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변혁을 위한 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획일적이며 반미적이어야 했다. 이는 일정 부분 이념 때문이기도 했지만 외부의 압력을 이겨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이후 수십 년간 (미국의) 반혁명(Counterrevolution)은 혁명과 역사의 경로를 규정하는 결정적 요소가 됐다. 또한 아시아 및 기타 지역에서 스스로의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려는 수많은 시민들을 질곡에 가두었다. 그리하여 미국은 사회적 쇄신과 생존을 방해하는 항구적 위협이 됐다. 미국은 반혁명을 통해 세계의 문젯거리가 된 것이다.

▲ 얄타 회담(1945년 2월) 당시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위키미디어커먼스


중동지역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 그리고 영국이 독자적 노선을 추구하기 위해 필요한 금융의 자유, 나아가 전후 세계 경제 질서에 대한 영국의 발언권 등을 제한하는 데 성공함에 따라 미국은 영국을 미국의 전후 정치경제적 목표에 완전히 복속시키는 것의 상대적 중요성을 낮춰 잡았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영국의 취약성이 온전히 드러났고, 반공이 미영 두 나라의 최대 공동 과제임이 명백해졌다. 이에 따라 당초 미국이 최우선 과제로 상정했던 영국 세력권(British Empire)과의 관계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전후 세계에서 소련 문제, 그리고 사회 변혁을 위한 국제적 운동의 문제가 화급한 과제가 됐다. 물론 영국 세력권과의 관계 문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당초 미국과 영국의 경쟁 관계는 1차 대전 후 2차 대전 이전(전간기)의 경제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미국은 이 기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후의 경제적 목표를-다른 분야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매우 세밀하고 정확하게 세워두고 있었다. 워싱턴의 거의 모든 주요 지도자들은 세계 모든 곳의 자본주의, 특히 영국 세력권 하의 자본주의를 부활시키고 개선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또 기대했다. 이들은 또한 세계 자본주의의 붕괴가 그다지 심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국제적 차원에서든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생존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 문제 제기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사태 전개(자본주의 붕괴)의 어마어마함과 그 사회적 영향력이 드러나면서 워싱턴은 19세기 후반 영국식 자유무역을 본뜬 자유주의적 국제경제 체제를 건설하는 것보다 유럽 경제를 재건하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라는 점을 깨달았다. 이와 함께 미국의 경제적 목표를 규정한 코델 헐(당시 미국 국무장관)의 일반 이론(자유주의적 국제경제 체제)보다는 특정하고 구체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이러한 구체적 목표들이야말로 (미국이 생각하는) 이상적 세계경제에서 미국이 실질적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최소한 단기적 차원에서 미국이 추구하는 구체적인 경제 목표를 방해하는 최대의 장애물은 (석유 자원의 보고인) 중동지역에 대한 영국의 지배, 그리고 서반구의 대외 교역에 대해 미국이 행사해온 헤게모니에 대한 영국의 도전이었다. 세계 경제에 관한 미국 정부의 공식 견해인 헐의 이론에 따르면 미국은 다른 모든 선진국들에 대해 비교 우위를 누릴 터였다. 그러나 특정한 경제적 이해관계-예컨대 석유 자원의 확보-에 대해 미국이 실제로 힘을 행사하는 방식은, 영국이 보기에 경제적 제국주의임이 분명했다. 즉 공정한 자유 경쟁이 아니라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영국의 국력을 약화시키고 궁극적으로 붕괴시키려는 것으로 보였다. 미국이 즐겨 애용하는 국제경제에서의 '문호 개방'이라는 정책은, 실질적으로 현대 산업 국가들에 핵심적으로 필요한 주요 원자재에 대한 미국의 우위, 나아가 독점적 통제를 의미했다. 석유(자원을 둘러싼 쟁탈전)야말로 미국이 전쟁에서 확보하려 했던 경제적 목표가 무엇인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가뜩이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영국이 석유 및 전후 세계 경제 질서와 관련해 미국과 갈등을 빚으면서 세계 도처에서 힘의 공백 사태가 벌어졌다. 미국은 신속하게, 그리고 기꺼이 영국이 물러난 중동 및 중남미로 진출해 힘의 공백을 메웠다. 이러한 미국의 새로운 (패권국가적) 역할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치밀한 계산과 목표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미국의 이러한 행태는 영국이 보기에 미국의 세력권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예전에 영국의 (제국주의적) 세력권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지만 전후 똑같은 행태를 보인 것이다. 세계 많은 지역에서 영국 세력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 미국 세력이 들어섰다는 것은 이제 미국이 어마어마한 정치적, 전략적 책임을 짊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세계적 차원의 이윤(global profit)을 노리는 국가라면 피할 수 없는 의무였다. 그리고 이 새로운 의무는 전 세계에 대한 경제적 팽창을 노리는 미국의 야망이 초래한 부산물이었다. 또한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좌파 세력에 대한 불가피한 대응이기도 했다. 소련의 팽창에 대한 우려는 앞의 두 과제(미국의 경제적 팽창과 좌파 세력 견제)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었다. 미국은 자신이 건설하려는 체제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세계에 대한 정치군사적 개입이 불가피했다. 특히 중동지역에 대한 영국의 우위를 무너뜨린 이후 미국은 세계의 더 많은 지역들에 대해 군사적 개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 2차 대전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미국은 차관과 대출, 투자 등 모든 외교적 자원을 동원해 자신이 소망하는 세계 경제 질서를 만들어내려 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미국은 자신의 필요와 목표에 부합하는 정책만을 편 것이다. 이전의 패권국가인 영국이 그랬던 것처럼.

바로 이러한 구체적 목표가 있었기에, 즉 치밀하게 계산된 경제정치적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2차 대전 말기부터 소련과 좌파, 그리고 세계 자본주의의 공동 수호자였던 영국과도 대결했던 것이다. 나아가 그 목표를 위해 이제까지의 역사,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역사에도 저항했다. 물론 미국의 대응이 계획과 의도대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우연적이거나 의도하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우연적 사태들은 미국의 선의를 보여주는 근거로 해석됐다. 즉 미국의 실제 현실과 실질적 목표보다는 의례적 수사와 공식적 설명을 더 신뢰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우연적 사태들이 미국 정책의 동기가 (자국의 국익 추구가 아니라 자유롭고 공정한 국제 경제 질서를 만들겠다는) 선의에서 비롯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 국내 현실과 대외 정책의 목표를 감안해보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미국은 전후 막강한 힘을 보유했다는 인식과(당시 미국 지도자들은 미국이 '세계를 물려받았다'고 생각했다) 함께, 즉 세계 최강의 국가로서 자신의 핵심적 경제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전제 조건인 미국 주도의 고도로 조직화된 세계 경제정치공동체를 건설한다는 분명한 목표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나아가 소련이 나름의 이유와 목표를 위해 미국에 협력한다 해도 세계 모든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만큼 강력할 수는 없었다. 미국은 인류의 운명에 제한을 가하고 영향을 끼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소망에 바탕을 둔 정치경제 질서를 건설함으로써 전 세계를 통제하겠다는 야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때때로 워싱턴의 주요 정책결정자들은 어쩌면 미국 단독으로는 이러한 야망을 이룰 수 없으며 동맹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전쟁 상대국이었던) 유럽의 독일과 극동 일본의 미래에 대한 워싱턴의 수수께끼와도 같은 애매모호한 태도가 이를 잘 말해준다. 미국은 세계 모든 곳에 다양한 형태로 경제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한 국제 협상에서 다른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막강한 힘을 지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미국은 전후 세계의 기본 성격을 자신의 입맛대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렇게 하려 했다. 1943년부터 1944년에 걸쳐 루스벨트와 그 측근들이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요구를 협상으로 해결하려는 영국의 시도를 좌절시킨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루스벨트와 트루먼 등 미국 지도자들은 (영국과 소련 등) 연합국들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만큼 전후 세계의 정치경제 질서를 미국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세계는 경제력과 군사력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오직 혁명적 운동만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정신적) 자원과 영감이 있어야 했다. (불행하게도) 워싱턴의 어떤 지도자도 이러한 측면을 제대로 인식하거나 그 중요성을 평가하지 못했다.

세계적 갈등이 국가 간의 전쟁에서 사회 변혁을 위한 이념전쟁 및 내전으로 변모하면서 그 성패는 숫자(인구)라는 단순한 정치적 산수의 문제로 귀결됐다. 즉 (세계 인구의 6퍼센트에 불과한) 미국이 세계 모든 지역에 자국 군대를 파견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미국은 세계 도처에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전함을 파견했지만, 그 막강한 기술력으로도 어마어마한 세계 인구 모두를 통제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 전체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미국인, 영국인, 또는 소련인만으로는 부족했다. 굶주림에 고통 받으며 더 나은 삶을 열망하는 세계의 모든 마을에 군대를 파견해야 했다. 아니면 소련처럼 자신이 (혁명을) 주도할 수도, 방지할 수도 없다는 불가피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전후 시기가 시작될 즈음 세계를 대하는 미국의 태도는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즉 세계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막강한 물질적 힘을 지녔지만 그 막강한 힘으로도 이뤄낼 수 없는, 가망 없는 거대한 야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전후 미국이 추구했던 목표나 이를 위해 동원한 수단은 미국 역사상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민간기업의 이익 추구를 위한 국내외적 목표 달성에 국가가 동원된 것은 지난 수십 년간 미국 사회의 전형적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20세기 들어) 이른바 '국익'을 위해 새로운 국제주의를 표방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미국 정부의 국제주의란 미국 대기업의 해외 진출을 돕기 위한 제국주의적 동기를 은폐하기 위한 것일 뿐, 그 결과에는 전혀 책임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단지 새로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미국 국가의 팽창과 함께-1943년 이후 미국은 세계 최강의 국가가 됐다-이전보다 훨씬 파괴적인 기술(즉 핵무기)이 도입됐고, 이에 따라 국제적 갈등에 따른 인명 피해가 훨씬 커졌다는 점이다.

미국은 2차 대전 중 자신이 면밀하게 구상했던 국제 정치경제 질서를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나아가 전후 미국이 구축한 국제 질서가 안정적이며 이상적인 것인가를 시험조차 해보지 못했다. 또한 자신이 만들어낸 국제 질서에 의한 정치경제적 혼란을 극복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끝없는 일련의 국제적 위기의 단초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1943∼1945년의 전쟁의 정치에 대한 미시적 관찰을 통해 현대 미국 외교의-원칙과 형식 측면에서-실상과 목표를 찾아볼 수 있다. 어떤 나라도 (미국이 꿈꿨던) 세계를 건설할 수 없다. (그러한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미국의 시도는 언제나 그 약점만을 드러냈을 뿐이다. 미국은 자신의 힘을 행사하려고만 했지, 미국의 힘과 이념의 한계를 직시하려 하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다양한 속성과 문제들을 지닌 세계는 어느 한 나라, 또는 몇몇 동맹국들에 의해 지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차 대전 기간 동안 미국이 구상한 장기적 정치경제 목표들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실현되지 못했다. 단지 특정 지역에서 영국을 대신해 과거 영국보다 작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었다.

2차 대전은 세계의 현실과 각 사회들의 구조에 대한 근원적이고도 돌이킬 수 없는 위기의 전주곡이었다. 그리고 이는 우리 시대의 표상이 됐다.

전쟁은 끝이 났으나 세계는 여전히 불타고 있기 때문이다.

*2010년 7월 31일 첫 호를 내고서 5년간 이어온 '프레시안 books'가 새 단장을 위해서 한두 달의 휴식 기간을 가집니다. 그간 '프레시안 books'는 심사숙고해서 선택한 좋은 책을 공들여 쓴 서평으로 독자에게 소개함으로써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프레시안 books'는 더 적극적으로 책을 매개로 한 소통에 나설 예정입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