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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해방을 보지 못한 시인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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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해방을 보지 못한 시인 윤동주

[국경을 걷다, 2015] 독립운동의 땅, 간도는 아프다

황재옥 평화협력원 부원장의 북-중 접경 지역 답사기 '국경을 걷다 2015'를 연재합니다. 황 부원장은 지난 2012년 9월부터 12월까지 총 13회에 걸쳐 <프레시안>에 '압록·두만에서 바라본 북한의 오늘'을 주제로 접경 지역의 모습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3년 뒤 황 부원장은 당시와 같은 경로로 지난 8월 15일부터 7박 8일간 일정으로 다시 한 번 접경 지역 답사에 나섰습니다. 다시 찾아간 북-중 접경 지역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이번 연재를 통해 3년 동안 변화된 북한의 모습을 살펴보고 이를 통한 북-중 관계 변화 양상을 짚어보려 합니다.
백두산을 오르는 날은 눈을 뜨자마자 날씨부터 확인하게 된다. 날씨가 도와주지 않으면 천지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전날 비가 왔지만 다행히 날이 개어 있었다. 사실 2012년에는 이틀에 걸쳐 남파와 북파 코스로 백두산을 올라 청명한 하늘 아래 깨끗한 천지를 봤다. 이번에 서파 코스로 백두산에 올라 천지를 보게 된다면 북한의 동파 코스 빼고는 백두산의 전 코스를 다녀오게 되는 셈이다.

가보지 않은 코스라 굳이 반대하지 않았지만 결론적으로 서파 코스의 풍광은 남파 코스만 못했다. 우선 인산인해를 이룬 관광객들이 1500여 계단을 줄을 지어 올라가야 했고, 막상 정상에 올라가면 앞줄의 사람이 자리를 내주어야만 비로소 천지를 볼 수 있었다. 좌우로 시야에 들어오는 백두산의 위용도 남파에 비하면 2% 부족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남파 코스 입장료가 180위안 정도 더 비싸서 우리 가이드가 서파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값대로 간다'는 옛말이 틀린 게 없다.

관광객이 넘쳐 나는 걸로 봐서 백두산(장백산)을 관광지로 개발해 벌어들이는 중국 당국의 수익이 상당할 것 같았다. 이 수익을 어디서 관리하는지 궁금했다. 가이드 설명으로는 2007년 창춘(長春) 동계 아시안 게임 때 장백산을 찾은 일부 한국인들이 '백두산은 우리 땅' 이라는 피켓 시위를 한 이후, 우리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 연변 안투(安圖)현 관리에서 지린(吉林)성으로 관리권이 넘어갔다고 한다. 자기네 장백산을 우리 백두산,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니 긴장했던 모양이다. 동북공정이란 이름으로 우리의 고대 역사를 왜곡해가면서 자기네 역사에 편입시키는 중국이다 보니, 이러한 소수 일반인들의 주장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백두산 관광객(위). 백두산 서파 코스에서 바라본 천지(아래). ⓒ황재옥

백두산 국경 획정 이전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었다. 가이드에 따르면, 백두산 국경 획정은 196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이전에는 북한이 단독으로 백두산을 관리했다. 1940년대 후반, 중국의 국공내전 때 수세에 몰린 팔로군 2만 명이 장제스(蔣介石) 군대를 피해 북한으로 피신할 수 있도록 김일성이 파격적인 도움을 줬다. 당시 북한도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정신없는 대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국민당 군대에 쫓기던 팔로군이 북한 지역으로 도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 것이다.

또 북한은 팔로군 2개 사단 2만 명이 필요로 하는 군수 물자, 군량미 등을 무상으로 지원했다. 그때 김일성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팔로군은 이후 하이난다오(海南島)까지 진격해 국민당 군대를 대만으로 밀어내고 승리를 거두었다. 북한이 마오쩌둥(毛澤東)이 국공내전의 최종 승자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1940년대 후반 김일성의 팔로군 지원 때문에 백두산 관리에 있어서도 중국이 북한에게 관리를 양보했다는 것이 가이드의 설명이었다. 국민당에 쫓기던 팔로군에 대한 지원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1962년까지 북한이 백두산을 단독 관리하도록 해 주었으나, 1962년 국경 획정을 통해 양국이 관할 구역을 나눠 갖게 됐다는 설명이었다.

그런데 가이드의 설명은 사실관계에 큰 착오가 있었다. 필자가 2013년 저서 <국경을 걷다>에서도 밝혔지만, 1962년에 백두산 경계가 획정된 건 맞다. 그러나 그 이전까지는 중국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중-소 분쟁 시기라는 타이밍을 절묘하게 활용한 북한이 중국에게 압록강-두만강, 백두산의 경계 획정을 요구했으며, 국제정치적 필요 때문에 중국이 북한에 유리한 방향으로 양보해 줬던 것이었다.

백두산 경계 획정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은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의 북-중 관계에 대한 정서가 상당 부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중국에 살고 있는 소수 민족이지만, 배후 국가 또는 모국인 북한이 중국으로부터 일방적인 지원만 받고 사는 건 아니고, 그럴만한 역사가 있다고 자위하고 싶은 생각에서 나온 '희망적 판단(wishful thinking)'의 소산이 아닌가 싶다. 북한 지역으로의 팔로군 피신과 중국의 한국 전쟁 참전 결정의 배경에 대한 얘기는 몰라도, 백두산도 북한이 많이 차지하고 있다가 1962년에 오히려 중국에 상당 부분 돌려준 거라는 얘기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한편, 북-중 양국 간 관계를 혈맹 관계라 지칭했던 과거와 비교해 최근 북-중 관계 성격이 무엇이냐에 대한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탈냉전 시대에도 양국의 관계가 혈맹 관계인지 아닌지, 또는 변화된 국제 환경 속에서 양국의 관계가 약화된 것은 아닌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베이징 대학교 진징이(金京一) 교수는 "북한과 중국이 '당 대 당'의 끈끈한 관계를 마감하고 정상적인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평가했다.

70년간 이어져 온 북-중 양국의 우호적인 전통과 관계가 주변국의 영향으로 그리 쉽게 변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앞일을 어찌 예단할 수 있겠는가? 국제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관계국들 간의 이해관계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얽히고설키는 과정에서, 북-중 양국은 혈맹 관계임을 내세우기도 하고, 때로는 상황적 필요에 따라 정상적인 국가 관계임을 강조하기도 할 것이다.

백두산 정상을 내려와서 우리는 두만강 방면으로 향했다. 시원하게 뚫린 도로를 달려가기도 했으나, 의외로 봉쇄된 도로가 많아 돌아가야 했다. 꼭 봐야 할 곳을 포기해야 했는데, 난핑(南坪)쪽이 봉쇄되어 강 건너 무산과 '조어대(釣魚臺)'라 불리는 김일성 낚시터를 볼 수 없었다.

도로 봉쇄 이유는, 북한 마을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충산(崇善)이라는 곳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 때문이었다. 지난해 12월 말 북한 탈영병이 강도짓을 하다 주민 4명이 숨지는 일이 발생했고, 그 이전에도 두만강을 넘어온 북한 남성이 중국인을 살해하고 달아난 일이 있고부터 이 지역에 대한 중국 공안의 검문 검색이 강화됐다고 한다.

2012년에도 광핑(廣坪)을 거쳐 충산(崇善)에 도착하기 전까지 3개의 검문소를 지났었다. 특히 두만강 상류가 흐름도 완만하고 강폭도 좁아 북한 주민의 도강이 용이할 뿐 아니라, 물건을 던지면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거리라서 두만강변에서는 밀수도 잦다고 한다. 그런데 북한인에 의한 살인 사건까지 발생하니 경계 감시가 더 심해진 것이다. 3년 전에도 두만강이 압록강보다 검문과 검색이 더 심하다고 느꼈었는데, 이번에는 아예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봉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2012년 8월에 갔던 광핑-충산-난핑 코스를 포기하고 허룽(和龍), 룽징(龍井)을 거쳐 옌지(延吉)로 들어가는 길로 향했다. 새로 가는 길은 식민지 시대 우리 선열들이 일본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했던 민족사적 의미가 큰 지역들이었다. 항일 투사들은 고난 속에서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젊음과 목숨을 바쳤고, 그들을 따라온 가족들은 저 넓은 간도에서 척박한 삶을 꾸려가며 그들을 뒷바라지했다. 선열들의 패기와 조국애에 어깨가 으쓱해지면서도, 고개가 숙여지고 마음은 숙연해졌다.

간도 지역은 우리 민족 독립투쟁사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고, 먹을 것이 없어 간도로 이주한 우리 조상들의 애달픈 삶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애국심에 대한 존경과 고달픈 삶에 대한 연민이 동시에 겹치는 곳이기에 간도는 우리에게 항상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한참을 가다 버스가 산 정상에 멈춰 섰다. 저 멀리 보이는 곳이 청산리 대첩이 벌어졌던 곳이라 한다. 1920년의 청산리 대첩은 일제 강점기 우리 독립군이 거둔 최고의 승전보였다. 높은 곳에서 바라봐서인지는 몰라도 산세가 제법 험준했다. 저 멀리 드넓게 펼쳐진 산야들이 남다르게 느껴지면서, 청산리 대첩과 동시에 많은 독립투사들이 떠올랐다. 홍범도 장군, 김좌진 장군, 이범석 장군 외에도 이름 없이 투쟁하다 돌아가신 선열들을 생각하면서 묵념했다. 얼마나 많은 조상들이 이 낯선 타국에 뼈를 묻었던가.

만주 일대의 독립군 소탕 작전에 나섰다가 청산리에서 독립군에게 무참히 패배한 일본은, 그 이후 '훈춘 마적 사건'을 조작해 독립군을 토벌했다. 일본의 토벌을 견디다 못한 홍범도 장군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사망했고, 김좌진 장군은 신분을 감추고 피신하다 방앗간에서 암살당했다. 최근 상영된 <암살>이란 영화에 많은 관객들이 몰렸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다. 특히 올해가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선열들의 뜻을 고이 기리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가는 허룽(和龍), 룽징(龍井), 투먼(圖們), 훈춘 지역에는 조선족의 인구 구성이 전체의 6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룽징에 들어서자 한글 간판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한글이 위에 쓰여 있고 아래쪽에 한문이 쓰여 있지만, 한글이 더 크게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학교 근처 식당에서 연변 냉면으로 점심을 먹고, 옛 대성중학교가 있는 용정중학교를 방문했다.

▲ 룽징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한글 간판. ⓒ황재옥

운동장으로 들어서니 오른쪽 역사관 앞에 윤동주 시인의 흉상과 '서시' 시비(詩碑)가 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안내원은 빛바랜 사진들을 짚어가며 우리 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차분하게 설명해 나갔다. 젊은 시절 선열들의 사진을 통해, 그들의 패기와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여름 방학이면 이곳을 찾는 한국 단체의 수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하니, 용정중학교는 항일 독립 운동의 산교육 현장인 셈이다.

▲ 대성중학교 옛 터 앞의 윤동주 흉상(왼쪽)과 '서시' 시비. ⓒ황재옥

이어 우리는 조선을 밝게 만들겠다는 뜻을 지닌 지명, 명동(明東)촌에 있는 윤동주 생가를 방문했다. 윤동주 일가의 삶은 바로 조선인 간도 이주 역사의 축소판이었다. 올해가 윤동주 시인 사망 70주년이라는데 조국의 해방을 바로 눈앞에 두고 어처구니없이 일본인에게 죽임을 당한 윤동주 시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생가 곳곳에 세워진 시비를 보면서 그의 간결하고 고결한 마음을 함께 할 수 있었다. 룽징을 떠나 옌지(延吉)로 향하는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어둡고 아팠던 역사의 현장에서 그분들의 조국애를 떠올리고 그 시대를 같이 살았던 분들의 애환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 생가 안에 설치된 윤동주 서거 70주기 추모 제단. ⓒ황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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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재옥

이화여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북한학으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통일부 정책자문위원, 원광대 초빙교수(외교안보통일), 김대중평화센터 이사 등을 거쳐 현재 민주평통 상임위원, 민화협 정책위원장, 통일부 남북관계발전위원회 위원, 더불어민주당 한반도경제통일교류위원회 부위원장, 외교안보통일 자문회의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북한의 기아>(역서, 2001) <북한인권문제 : 원인과 해법>(2012), <국경을 걷다>(2013), <정세현 정청래와 함께 평양 갑시다>(공저, 201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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