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한 진보 성향의 논객이 오랜 기간 여자 친구를 폭행했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 피해여성에 의해 알려지면서 '데이트 폭력' 논란이 있었다. (아래 서술은 피해 여성의 주장에 근거한 것입니다. 편집자)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며 사회적 발언을 해온 젊은 청년이 나이도 어린 여자 친구를 지속적으로 때렸다는 이야기는 놀랄 만했다. 그런데 그가 여자 친구를 때리는 방식이 특이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거기엔 일관된 패턴이 있다는 점이었다. 폭력의 작동 방식이 매번 유사했던 것이다.
그는 여자 친구를 때리면서 이유를 댔다. 스스로 논객이었기에 그냥 때릴 수는 없고, 상황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또는 여자 친구에게 자신이 폭력을 행하는 근거를 설명하기 위해 매번 이유를 댔던 듯하다. 쉽게 말하자면 맞는 이유를 가르쳐주며 때린 것이다. 이유는 다양하다. 나와 언쟁했기 때문에, 나를 화나게 했기 때문에, 나를 못생겼다고 무시했기 때문에, 오늘 내가 응원하는 야구팀이 졌기 때문에 등.
여자 친구는 "거의 매일 맞았다"고 했는데 그 논객이 응원하는 야구 팀이 당시 연전연패 하며 꼴찌를 내달리던 팀이었기에 그녀의 "거의 매일 맞았다"라는 고백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가 반복적으로 행한 폭력에는 일종의 '격발 장치'가 있었다. 바로 '네가 나를 화나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서로 싸우다 자신이 휴대전화를 던졌을 때조차 "이건 네가 나를 화나게 해서 그런 것이니 너의 책임"이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스스로 열 받아 물건을 집어던지는 못난 행위의 책임을 황당하게도 여자 친구에게 떠넘긴 것이다. 모든 게 여자 친구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여자 친구를 폭행한 후 "네가 구타 유발자라서 때렸다"고 확인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는 이 세상 뭇 남성들이 내세우는 폭력의 이유와 놀랍게도 동일하다.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사전에 (또는 평소에) 경고한다. "나를 화나게 하지 마라." 그리고 때리고 나서 다시 말한다. "맞을 짓 하지 말랬지." (사실 이 '합리화 과정'의 순서는 자주 바뀌기도 한다.) 결국 남자들의 폭력은 여자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이다. 자기들이 때려놓고 자기들 잘못은 아니라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교활한 가부장제의 등장,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
지금은 고인이 된 최진실이 1990년대 이후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국민 배우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결정적 이유는 단 한편의 CF 광고였다. 바로 브티아르(VTR·비디오테이프리코더) 광고. 남편이 좋아하는 축구 경기를 미리 브티아르로 녹화했다가 퇴근하는 남편을 반기고는 우리를 향해 웃는 얼굴로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라고 말하는 최진실의 모습은 전 국민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 광고 한 방으로 최진실은 CF 모델에서 '대박' 스타가 됐고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은 역대 최고의 광고 카피가 되면서 많은 패러디를 양산하게까지 된다.
그런데 이 광고 카피는 매우 가부장적이면서 사실은 여성에게 일방적 순종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적 문구이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고 말하는 최진실의 웃는 얼굴은 남편의 행실에 대한 책임이 여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은 자신의 남편에 대해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가. 결국 최진실의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선언은 남편의 무능, 불성실 그리고 폭력에 면죄부를 주면서 동시에 '화목하지 않은 가정'의 책임은 여자가 떠안아야 하는, 매우 한국적 특수성이 합리화 되는 장면인 것이다.
이후 최진실은 비극적 아이러니의 주인공이 된다. 개인 최진실에게 닥친 가정 폭력과 이어진 참혹한 비극은 과연 최진실이 '나름'의 역할을 해내지 못했기 때문인가. 서세원 부부에게 있었던 적나라한 폭력과 한편의 소극과도 같은 비극은 과연 아내가 '여자 나름'의 노력을 충분히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인가. 이 두 여성의 불행이 과연 그들의 책임이던가.
과거 남자들이 스스럼없이 내뱉던 말이 있다. "여자랑 북어는 패야 돼." 어떤 이는 그게 틀렸다면서 고쳐준다. "사흘에 한번씩."
이렇듯 여자 패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던 한국의 가부장제는 최진실 이후 교묘해졌다. 사실은 교활해졌다. 과거엔 대놓고 때리다가 이제는 여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때리는 것이다. 게다가 이유를 가르쳐주면서 때리는 것이다. 과거 무식한 가부장제에서 최진실 이후 교활한 가부장제로 변모한 것이다.
여성이 '맞을 짓' 하기를 기다리는 남자들
중학생 시절 아침 등굣길에 그 수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향해 아파트 단지 사이를 개미떼처럼 흘러가는데 그 흐름을 거스르고 지나가던 아주머니 기억이 생생하다. 잠옷 바람이었고 맨발이었으며 고개를 숙이고 걷는 중년의 여성. 이제는 그런 무식한 시대가 지나갔을까. 나는 얼마 전 한 여성이 아파트 단지 상가에 맨발로 뛰어들자 가게 주인(여성)이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슬리퍼를 벗어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여성들을 때린 남자들은 무어라 했을까. "여자가 맞을 짓 했다" 아니었을까.
작년(2014년) 지인들과의 저녁자리에서였다. 한 참석자가 아내를 때렸다가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장인이 회사까지 찾아오는 등 한바탕 난리가 있었다고 한다. 배울 만큼 배우고 가진 만큼 가진 남성이었기에 참석자들은 놀랐고 당연히 그에게 융단폭격을 가했다. 한참의 소란스러운 질책이 끝나자 그때까지 고역스러운 표정으로 듣기만 하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튀어나온 말.
"그런데 사실 그 사람이 맞을 짓을 했습니다."
여성에게 손을 대는 남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바로 "네가 맞을 짓 했다," "나를 화나게 했다," "열 받게 했다"이다. 그런데 이는 사실 핑계이고 세상에서 가장 못난 자기변명일 뿐이다. '맞을 짓'이란 남자들이 쳐놓은 폭력의 덫일 뿐이다. 폭력의 방아쇠란 말이다. 사람이 사람과 살다 보면 당연히 다투게 되는 것인데 그러한 일상적 다툼을 '맞을 짓'으로 규정해 다투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때리겠다는 것이다. '폭력의 인계철선'이다. 결국 지켜질 수 없는 조건을 던져 놓고 걸리기만 기다리는 비열한 짓이자 가장 비겁한 폭력이다.
'맞을 짓'은 없다
비난의 화살은 당연히 이를 악용, 애용하는 남성들에게 가야하지만 이들이 뿌린 폭력의 씨앗은 전 방위적으로 흩뿌려져 싹을 틔웠다. 우리는 맞고 때리면서 이에 모두 익숙해졌다. 세뇌됐다. 하도 당연해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못 한다.
이제 엄마도 아이에게 "맞을 짓 하지 마라"고 경고한다. 아이들은 더 빨리, 자주 걸린다. 그래서 엄마도 아빠처럼 "넌 나를 화나게 했어"하며 때린다. 이러니 선생님도 학생들에게 "너 맞을 짓 했지!?"라고 다른 학생들 앞에서 선언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때린다. 그리고 주의를 준다. "앞으론 맞을 짓 하지 마"라고.
이 세상에 '맞을 짓'은 없다. '맞을 짓'이 도대체 무엇인가. 정의를 내려 보라. 내가 정의를 내려 볼까? 맞을 짓이란 '다툼 등 사소한 일로 화가 난 사람이나 심심한 사람이 자신보다 약한 상대방을 때리려고 할 때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상대에게 그 폭력의 책임을 뒤집어씌우기 위해 내세우는 비겁한 변명'이라고.
여자 친구에게도, 배우자에게도, 학생에게도 맞을 짓이란 없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실수는 할지언정 맞을 짓을 저지른 사람은 없다. 아무도 맞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맞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단 말이다.
앞서 이야기한 젊은 논객은 그 자신 아버지의 폭력을 겪으며 성장했다고 한다. 아마 자기가 경험한 방식 그대로 여자 친구에게 행했을 것이다. 피해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 말이다. 사실 그의 글에서 보게 되는 길고 복잡하며 때로 혼란스럽기까지 한 그의 논리는 그의 성장 과정의 영향을 받은 것 같기도 하다. 그의 친구가 말했듯 그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도와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 논객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그 젊은 논객만 가지고 호들갑 떨 일이 전혀 아니었다. 우리 모두의 문제임에도 우리는 이 문제를 그만의 문제인 것처럼 그에게 떠넘기고 그를 비난했다. 그리고 우리는 아닌 척 했다. 그러나 남성의 폭력, 데이트 폭력, 가정 폭력, 학교 폭력 등 우리는 폭력에 너무 관대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익숙해졌고 스스로 행사했다. 심지어 가해자를 동정하며 피해자를 비난하기도 한다.
사실 몇 달 전 일이었고 이후 쓰고자 했지만 신발 속 돌멩이 같은 게 느껴졌다. 쓸 생각을 하면 어릴 때부터 동생, 여자 친구, 아내, 자식에게 내가 직접 행했던 폭언과 폭력이 어른거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무수한 경험 끝에 뒤늦게나마 얻은 뼈아픈 결론이 있으니 그것은 이 세상에 '맞을 짓'이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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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와 대중문화 뿐 아니라 세상사에 관심이 많아 정치 주제의 글도 써왔다. 인간의 욕망과 권력이 관찰의 대상이다. 연세대학교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미네소타대에서 스포츠문화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미래는 미디어가 지배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아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동아대 체육학과 교수, 부산관광공사 사장을 지냈다. <미국 신보수주의와 대중문화 읽기: 람보에서 마이클 조든까지>, <스포츠코리아판타지>, <어퍼컷>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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