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이냐 실패냐
2013년 12월 김연아는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열린 '골든 스핀 오브 자그레브'에 출전했다. 소치 동계 올림픽 출전을 앞둔 마지막 국제 대회였기에 팬과 언론의 관심이 컸는데 김연아는 완벽한 기량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그런데 대회 직후 인터넷과 사회 연결망 서비스(SNS)에서 김연아 경기에 대한 한국 해설자와 외국 해설자의 해설 비교가 등장해 관심을 받았다.
서양 : "나비죠? 그렇군요. 마치 꽃잎에 사뿐히 내려앉는 나비의 날갯짓이 느껴지네요."
한국 : "저 기술은 가산점을 받게 되어 있어요."
서양 : "은반 위를 쓰다듬으면서 코너로 날아오릅니다. 실크가 하늘거리며 잔무늬를 경기장에 흩뿌리네요."
한국 : "코너에서 착지 자세가 불안정하면 감점 요인이 됩니다."
서양 : "제가 잘못 봤나요? 저 점프! 투명한 날개로 날아오릅니다. 천사입니까? 오늘 그녀는 하늘에서 내려와 이 경기장에서 길을 잃고 서성이고 있습니다. 감사할 따름이네요."
한국 : "저런 점프는 난이도가 높죠, 경쟁에서 유리합니다."
서양 : "울어도 되나요? 정말이지 눈물이 나네요. 저는 오늘 밤을 언제고 기억할 것입니다. 이 경기장에서 연아의 아름다운 몸짓을 바라본 저는 행운입니다.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한국 : "경기를 완전히 지배했습니다. 금메달이네요. 금메달~ 금메달~."
정확한 출처가 없긴 하지만 적어도 내가 오랜 기간 경험했던 서구 해설자의 해설 방식은 이와 일치한다. 이러한 정서적인 시적 표현을 매우 자주 쓰는 것은 물론이고 시청자들의 몰입을 위해 경기 내내 속삭이듯 해설한다. 점프 성공했을 때 우렁찬 목소리로 힘주어 해설하고 경기 끝나자마자 등수부터 들이미는 한국의 해설자들과는 전혀 다르다.
사실 외국 해설자들의 해설을 번역하기 시작한 것은 몇 년 전부터 김연아의 열성 팬들이 김연아가 외국인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는 존재인지 증명하고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미국, 일본은 물론 중국, 러시아, 프랑스, 체코의 중계 방송 해설 내용까지 번역을 해서 그 자랑스러움을 함께 나눴다.
그런데 이를 한국 해설자의 해설과 비교해 보니 한국 해설의 천박함이 단번에 드러난 것이다. 한국의 해설자는 3회전에 성공 했느냐 못 했느냐, 착지가 감점이냐 가산점이냐, 1등이냐 2등이냐에 초점을 맞췄고 선수들이 점수를 받을 때마다 김연아와의 점수 격차를 계산하는데 몰두했다. 사실 점프에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 점수와 계산, 등수와 메달 색깔 이야기 외에는 별로 들은 기억도 없다. 한국인들이 평소 우습게 생각해 마지않는 중국인 해설자의 표현을 보자.
"강철 나비…천 번의 도약은 바로 이 한번을 위한 비상이었습니다."
얼마짜리냐, 몇 번째냐
2013년 12월 22일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야구 선수 추신수가 FA로서 텍사스 레인저스와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7년에 1억3000만 달러. 7년 동안 1379억 원을 받는, 한국 스포츠 현실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액수의 계약이었다.
추신수는 이후 상당 기간 뉴스메이커가 됐다. 그런데 언론이 쏟아낸 기사들의 초점은 "추신수 몸값, 어느 정도 수준일까"라는 제목에서 보듯 대부분 돈이었고 비교였다. 그리고 추신수가 버는 돈을 갖가지 방법으로 비교, 분석했다. 이렇게 뒤집고 저렇게 메치고, 여기다 붙이고 저기다 붙여서 온갖 방식으로 돈 이야기를 써나간다.
"어마어마한 계약" 정도로는 안 된다. "역대 메이저리그 계약 중 27위" "역대 야수 계약 규모에서 19위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등수가 성에 차지 않았나 보다. "평균 연봉이 역대 외야수 8위" "역대 외야수 중 6위로 높은 몸값" 등 다양한 계산 방식으로 기사들을 쏟아냈다.
그런데 이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1, 2, 3등도 아니고 6등이 뭐냐. 그래서 나온 게 "아시아 선수 중 역대 최고 연봉"이다. 그리고 추신수가 어느 정도의 인물인지 다시 한 번 알려주고 싶었다. 우리의 영웅 "박찬호의 5년 6500만 달러 뛰어 넘어"라고 설명을 해준다.
그런데 1억 달러라는 돈이 어느 정도인지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추신수가 받는 1억4000만 달러는 연평균 1875만 달러인데 월급으론 155만 달러이고 일급으로 계산하면 5만 달러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또 달러 개념에 약한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걸 원화로 바꾼다. 그의 월급은 한국 돈으로 16억4000만 원이고 매 경기당 9600만 원이라는 설명도 덧붙인다.
특히 몇몇 언론은 추신수가 꿈의 구단인 뉴욕 양키스의 7년 1억4000만 달러 제안을 거부한 것과 관련해 그의 선택이 옳았음을 세금을 통해 설명한다. 텍사스는 주 소득세가 없고 연방 소득세만 내면 되는 곳이기 때문에 "따라서 양키스 제안과 비교했을 때 1000만 달러 손해가 아니라 되려 800만 달러 이득이 되는 셈"이라는 것이다. 캘리포니아 거주자인 류현진이 내야 하는 주 소득세가 13.3%라는 세율까지 제시한다.
물론 외국도 예를 들어 유럽 선수가 세금 때문에 미국에 거주한다는 걸 언급하는 경우도 봤지만 한국처럼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돈 이야기, 세금 이야기를 자세하면서도 천박하게 하지는 않는다.
뭐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한국방송(KBS) <뉴스 9>를 보자. 뉴스 제목이나 화면 아래 자막이나 마찬가지다. "추신수 7년간 1380억 원" 야구 선수 추신수, 아니 인간 추신수는 그의 다른 어떤 인간됨보다 1380억 원이라는 돈의 액수로 우리들 머릿속에 각인된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이튿날 추신수의 어릴 적 친구로 일본에서 뛰는 이대호가 소프트뱅크와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3년간 148억 원이라는, 역시 대형 계약이다. 그런데 전날 추신수의 성과를 돈으로 표현한 KBS <뉴스 9>는 이대호 기사 제목을 이렇게 뽑았다.
"추신수 이어 이대호 '친구야 나도 대박'"
이걸 영어로 표현하면 이쯤 될 것이다.
Lee "Hey Choo, I hit the jackpot, too!"
'찌라시' 수준에서도 보기 힘든 천박하고도 상스러운 기사 제목이다.
외국에서 선수들이 팀을 옮기거나 대형 계약을 하게 되면 주로 보게 되는 기사 내용은 그가 왜 그 팀을 선택했나, 그 팀은 왜 그 선수를 선택했나, 그 팀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과거 팀과 새 팀 팬들의 반응 등이 주를 이룬다. 연봉 액수는 기사 첫 머리 6하 원칙에 따라 언급될 뿐이다. 한국처럼 연봉 액수 가지고 분석 기사 내는 경우는 없다.
우리 언론의 뉴스를 보면 숫자가 굉장히 많이 등장하고 강조된다. 결과, 점수, 등수가 중요하다. 스포츠에선 여기에 메달 색깔이 추가된다. 사실 우리는 오랫동안 그랬다. 뭔가 자부심을 가질만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항상 숫자와 등수를 내세웠다. 산업화에 들어선 1970년대 이후 다리, 발전소, 공장, 댐을 지을 때나 간척 사업을 끝내면 항상 아시아 최고, 동양 최대, 세계 몇 번째 등의 수식어를 꼭 붙였다. 이것, 저것이 애매하면 '세계 최단 기간 완공'을 가져다 붙이기도 했다. 그러다 백화점이 무너지고 다리가 떨어졌지 아마.
2013년 12월 중국이 달착륙선을 쏘아 올리는 데 성공했다. 마침 중국에 있는 친구가 이 소식을 전하는 한국과 중국 양국의 뉴스를 비교한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중국 : 중국 최초로 달 연착륙 성공
한국 : 중국, 달 착륙 성공. 미, 러 이어 세 번째.
<변호인>, '천만'과 '기록' 외에 다른 영화평은 없는가
영화 <변호인>이 화제다. 지난 26일 누적 관객수 1056만 명을 기록해 <왕의 남자>를 뛰어 넘었고 역대 영화 관객 순위 신기록을 세울지 관심이라고 한다. 이 영화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재로 삼았기에 개봉 전부터 화제가 집중됐던 영화다. 그런데 개봉 후 관객이 몰리면서 또다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정식 개봉 3일 만에 100만, 5일 만에 200만, 7일 만에 300만, 10일 만에 400만, 12일 만에 500만, 14일 만에 600만, 17일 만에 700만, 19일 만에 800만, 25일 만에 900만, 32일 만에 1000만 관객을 달성한 '변호인'은 25일까지 1056만8150명을 동원하며 새 기록 달성에 도전하고 있다."
"역대 세 번째로 빠른 속도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해 9번째 1000만 한국영화라는 수식어도 달았다. <변호인>은 신정 연휴에는 하루에 67만 관객을 동원하는 기염을 토하며 <아바타>의 종전 최고 스코어 기록을 갈아치우기도 했다."
개봉 때부터 언론은 매일 일일 관객 집계를 보도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이에 관심을 보였다. 아예 이를 응원하는 분위기까지 등장했다. 감격적이고도 흥분된 어투로 "또 봐야지" 하는 SNS를 많이 보지 않았는가. 많은 이들이 1000만 관객 달성과 신기록 작성을 염원하기 시작했다. 또 일찌감치 1000만 관객이 가시화 되면서 올림픽과 같은, 때 아닌 '흥분 모드'가 등장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 "변호인"을 치면 바로 아래 "변호인 관객 수" 또 그 아래엔 "변호인 관객 수 추이"가 검색어로 뜬다.
이제까지 <변호인>과 관련된 가장 많은 기사는 누적 관객 수 보도였고 1000만 명 돌파 여부였으며 또 괴물 그리고 역대 최다 관객 동원 기록을 가진 <아바타> 기록 갱신 여부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노무현의 영화 <변호인>을 보면서도 숫자, 등수, 신기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변호인>은 이 영화가 우리에게 명령하는 눈물과 감동 외에는 다른 영화평을 허락하지 않는 요상한 영화가 되어버렸다.
<변호인>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최근 삼성의 '총장 추천제' 때문에 꽤나 시끄러웠다. 일개 기업이 감히 대학을 서열화 하고 줄 세우기 하려든다는 것이었다. 삼성 뭐라 할 것 없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줄 세우지 않았나. 등수 매기기를 즐겨하지 않았나. 1등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나. 1등을 위해, 1천만 관객을 위해 이미 본 영화도 기꺼이 두 번, 세 번도 보는 민족 아닌가.
우리는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매우 강한 집단이다. 그런데 예전엔 외국, 특히 서구에 대한 인정 투쟁이었는데 이젠 국내에서도, 또 영화라는 문화 장르 안에서도 숫자와 등수로 인정받으려 한다. 그래서 순위를 치고 올라가 이전 것들을 제쳐 버리면 그렇게 즐거워한다. 확실히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시대로 들어선 듯하다.
노무현의 유산이 고작 '1등주의'에 '천만 관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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