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정의화 국회 의장이 팽목항을 방문했습니다.
세월호 참사 500일을 맞아 아직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희생자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정 의장은 이 자리에서 "세월호 참사 후 우리 모두 진심으로 울었고, 분노했고, 원망했다"며 "무기력과 절망, 죄책감을 느끼며 많은 반성과 결심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그는 "우리 사회가 이제는 물질주의에서 벗어나 물질과 정신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로 바꿔나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쓸쓸한 팽목항, 세월호를 잊은 야당
지금 팽목항은 쓸쓸합니다.
참사 500일임에도 정치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 의장의 방문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 정도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한국 사회는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며 '생명과 안전'이라는 시대정신을 말했습니다. 거의 모든 국민이 깊은 충격을 받았죠. 압축성장의 병폐가 사회 곳곳에서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었고, 세월호 참사는 그것에 대한 매우 준엄한 경고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한국을 방문해 무엇보다 유가족들의 깊은 슬픔을 위로했습니다. 세월호에 대한 관심이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교황은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500일 동안 우리 국민들은 트위터와 블로그 등에서 1600만 건이 넘게 '세월호 참사'를 언급했습니다. 참사가 발생한 첫 한 달 동안에만도 400만 건이 넘었고, 1주기 때도 100만 건이 넘는 언급량을 기록했습니다. 참사 초기에도 정치는 실종됐었습니다. 유가족들은 정치의 완충지대도 없이 국가권력과 맨몸으로 맞닥뜨렸습니다.
그리고 500일이 지난 지금도 정치는 세월호 참사를 외면했습니다.
정 의장은 실종자 수습 필요성을 강조하며 "대한민국 국회가 국민 모두를 끝까지 지켜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는 만큼 국회 의장으로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야당이 국민들로부터 외면 받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지금 야당엔 공학이 난무할 뿐 가슴 깊은 공감이 없습니다.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이 정부 여당의 방해로 누더기가 되었고 그마저 예산집행을 둘러싼 갈등으로 진상규명 작업은 제대로 시작조차 못하고 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는 야당 정치인을 발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지금 새정치연합이 진보냐, 중도냐, 보수냐 하는 사치스런 논쟁을 할 때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분노하는 국민의 슬픔 한복판에 스스로의 존재이유를 놓아두지 않은 채 미래의 공약을 내놓는다고 누가 그 진정성을 믿어주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새정치연합은 집권당이 아니지 않습니까.
박성민 "싸우지도 못하는 게 야당인가"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는 각기 다른 각도에서 우리 사회의 근본적 모순을 드러낸 준엄한 경고입니다. 뚜렷하게 한 일도 없이, 심지어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 초기대응에 철저하게 실패한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안보 이슈 한방으로 다시 50%대를 구가하는 것은 성찰 없는 야당의 근본적인 한계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주 정치전략가인 민 컨설팅의 박성민 대표는 <한겨레> 칼럼에서 "싸우지도 못하는 게 야당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지금 야당은 무엇에 분노하는지, 무엇과 싸우고 싶은지, 누구를 대변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정치는 싸우는 것이다. 총칼을 버리고, 폭력이 아닌, 말로 싸우는 것이 정치고 민주주의다. '그만 싸우라'는 것은 민주주의를 '그만하라'는 것이다."
이른바 중도확장론을 펼치는 당내 인사들이 매우 불편해 할 만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지금 야당의 이념 논쟁은 과녁을 한참 벗어나 있습니다. 진정성과 공감이라는 문제의 본질을 보지 않고 이데올로기 문제로 논점을 형해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9월 2일에 공개된 민주정책연구원의 <유권자 지형 분석 보고서>도 중도라는 이념의 틀에 현실을 짜맞추기 위한 보고서라는 의혹을 지울 수 없습니다. 성장과 분배의 문제를 비롯한 시대정신의 문제를 단순 여론조사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를 근거로 당의 전략을 설계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매우 복잡한 혼돈의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혼돈은 지구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 대선에서는 좌우의 진폭을 극단적으로 넓힌 샌더스와 트럼프가 전통적인 정당 엘리트인 힐러리와 젭 부시를 강력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특히 '은행 국유화'를 공약으로 내건 자칭 민주사회주의자 샌더스가 미국 사회를 뒤흔들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 복잡한 시대에 시대정신을 읽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새정치연합은 이념논쟁이라는 불리한 프레임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기 전에 자신이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인지, 그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누구와,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를 정리해야 합니다. 소득주도성장론이나 공정성장론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사회의 가장 아픈 사람들을 진심으로 위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노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치의 출발점입니다.
야당의 '9월 대란' 현실화되나?
이런 가운데 당 내부에서는 9월 들어 분열을 예고하는 발언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낡은 정치 행태와 결별해야 한다. 일대 쇄신을 가져올 '정풍운동'이 필요하다"며 안철수 의원이 전북대 강연에서 포문을 열었습니다. 안 의원은 당 혁신위 활동을 실패로 규정했습니다. 안 의원은 성장론과 부패 척결을 당면 과제로 제시했습니다. 전자는 자신의 공정성장론을 강조한 것이고, 후자는 한명숙 전 총리와 윤후덕 의원에 대한 당 지도부의 태도를 강력하게 비난한 것입니다.
김한길 의원은 안 의원이 주최한 '공정성장론' 토론회에 참석해 "재보선 패배 이후 당 지도부와 혁신위가 많은 애를 썼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 같다"면서 "더 큰 변화와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습니다. 박영선 의원은 대전에서 열린 북 콘서트에서 "곰팡이는 빨아도 잘 안 지워진다"며 손학규 전 대표 복귀론에 불을 지폈습니다.
안철수, 김한길, 박영선 등 전 대표들이 일정한 공감대 위에서 문재인 대표 흔들기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옵니다. 새정치연합 9월 대란설이 현실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들립니다.
이에 대해 문재인 대표는 "더 강도 높은 혁신을 독려하는 그런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싶다"며 '클린치(clinch) 전술'로 응수했습니다. 상대의 공격을 일단 껴안아서 방어한 셈입니다. 그러면서 문 대표는 "특히 중요한 그런 위치에 계신 분들이 다들 혁신에 참여해 준다면 우리당이 더 단합되고 국민의 신뢰를 받으면서 지지율도 오르지 않을까 생각한다"고도 했습니다. 클린치 이후의 가벼운 잽.
당 혁신위 활동이 종료되는 시점에서 평가를 둘러싼 당내 세력 간의 강력한 힘겨루기가 시작된 셈입니다.
정풍운동은 가치와 목표가 분명해야 성립
혁신위 활동에 대한 당내 비판이 있을 수 있고 더 신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문제제기도 문 대표의 대응도 공허하게 들리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국민을 위한 진심어린 노력으로 비쳐지지 않고 당권을 둘러싼 정쟁으로 인식됩니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지지자들 간의 상호 헐뜯기가 재연되고 있습니다.
정풍운동은 정당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카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풍운동을 위해선 목표가 뚜렷해야 합니다. 낡은 진보와의 결별이나 새로운 인재영입 같은 추상적인 목표로 정풍운동을 일으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2001년 3김 보스정치 해체를 목표로 한 '천·신·정의 정풍운동'은 시대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천정배, 신기남, 정동영 등은 1인 보스정치 청산을 통한 정당민주화와 국민경선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상향식 공천제도를 분명하게 요구했습니다.
민주당은 쇄신연대의 주장을 받아들여 당권-대권을 분리했고 김대중 대통령은 당 총재직에서 사퇴했습니다. 경선방식에 대해서는 지도부가 '국민 30%, 당원 70%' 안을, 쇄신연대는 '국민 70%, 당원 30%' 안을 내놨고 당권파와 개혁파의 갈등 끝에 2001년 12월 '국민 50% 당원 50%' 안에 합의함으로써 '국민경선제'가 시행되었습니다. 이것이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강력한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지금 야당에서 정풍운동을 시작하려면 다수의 당원이 공감할 명분과 함께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솔선수범해 싸워야 합니다. 정풍운동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세력과 투쟁을 통해 당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혁신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해석과 여지가 많은 추상성은 분열을 장기화할 뿐입니다. 문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에게 분명한 요구 조건을 내걸고 동조자를 규합해 힘으로 목표를 관철하는 것이 정풍운동이니까요.
'손학규 복귀론'도 명분가 가치가 없으면 그저 계파 갈등으로 보일 뿐입니다. 손 전 대표가 복귀한다고 해서 야당의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보는 국민이 있을까요?
문 대표의 대응도 너무 즉자적으로 보입니다. 위기에 빠진 정당을 구원하기 위한 창조적이고 파괴적인 상상력이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당의 상태에서 무지개선대위가 무슨 힘을 가질 수 있을까요. 국민들이 외면하는데 계파의 수장들이 모여 선대위를 구성한들 돌아선 국민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마치 물과 기름처럼 착시 효과만 커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질문이 좋아야 좋은 답을 구할 수 있습니다. 괴테는 "가장 중요한 일이 중요하지 않은 일에 밀려나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둬 온 승부사 조훈현은 "생각의 심연에 이르기 위해 고독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문 대표는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 야당의 위기를 돌파할 가장 중요한 질문을 스스로 찾아내야 합니다. 시간에도 공간에도 사람에도 제약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합니다. 야당 의원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본질적인 질문 말입니다.
좋은 질문이 찾아지면 가장 중요한 답도 구해질 것입니다.
질문의 시작은 '무엇을'이나 '어떻게'가 아니라 '왜'가 되어야 합니다.
더 늦기 전에 그 질문을 찾아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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