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근황'은 석 달 전과 다름없었다. 여전히 '지도에도 없는 마을'에 살며,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노래했다. 으레 불콰한 얼굴로.
류근. 그런 그가 '8.25 남북공동합의문'이 발표되자 페이스북에 '노골적 1인 성명'을 내고 남과 북의 위정자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시인은 남북한의 일촉즉발 상황에 대해 "국민과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담보로 야바위"를 벌인 것이라고 비난하며, "결국 너희들(남북한 위정자) 권력의 담장 위에 강고한 벽돌 하나를 더 얹었을 뿐 국민과 인민들 삶과 자존에 어떠한 것도 얻게 한 것이 없다"고 소리쳤다. 노골적 비장함은 "바야흐로 아오리 사과만 제 철"인 조국을 상기하며 "조낸 유감이다. 시바"라는 은유적 탄성으로 마무리됐다.
'조낸'과 '시바'가 불편하다? 시인은 주장한다. "'조낸'은 부사고 '시바'는 감탄사다. 그리고 류근은 삼류 시인이다."
그와 처음 마주한 건 봄과 여름 사이, 술과 술잔을 앞에 두고서다. 시인은 "술 한잔 어떠세요?"라는 말에 낮술로 응했다. 해가 저문 뒤에도 술에 술을 탄 듯 대화가 이어졌다.
시인의 순정
류근은 현재 "시인 퇴사" 중이다. 2010년 시집 <상처적 체질>(문학과 지성사 펴냄)을 낸 후, 2~3일에 한 번씩 페이스북에 글을 남기며 모교에서 '선생질'을 하고 있다. KBS <역사저널 그날>에 출연한 뒤로는 인기까지 얻었다. 한때 벤처사업가였던 그는, 억대 자산가 혹은 비렁뱅이라는 소문을 몰고 다녔다.
시심(詩心)에 대한 순정(純情)은 평소 시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시인은 시로 말해야 하는 존재"라며 스스로를 굳이 "전직 시인"이라고 했다.
그는 황지우 시인의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지성사 펴냄)를 부적처럼 가방에 넣고 다닌다고 했다. 황 시인이 2006년부터 3년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으로 있으면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누가 뭐래도 시는 참 좋다"며 애정을 보였다.
"시바"를 건배사로 술잔을 비우자, 추억이 안주처럼 따라붙었다. 시인 이성복·김수영·천상병, 가수 김광석, 소설가 이외수, 방송인 김제동 등 모두 외로움을 자양분 삼은 사람들이다.
아저씨 : 외로움의 세계란 건 말유. 유씨처럼 묻고 대답하고, 말하고 듣고 그런 세계가 아뉴. 술 마시면 잊어먹고 그런 세계가 아니란 말유.
나 : 술 마시고 잊어먹지 않아요. 마실수록 더 외로워지지….
아저씨 : 그러니까 유씨는 아직 멀었슈. 마실수록 외로워지는 술에 몸 바쳐 가면서 또 날마다 외롭다고 닭처럼 짖어 대잖어유.
나 : (뭐? 닭처럼? 짖어 대?) 제가 언제 다, 닭처럼….
아저씨 : 하긴 뭐 세상에 닭 만큼 외로운 게 또 어디 있을라구유. 죽으면 결국 못 먹는 털하구 대가리만 남는 게 닭인데….
- <싸나희 순정>(류근 지음, 퍼엉 그림, 문학세계사 펴냄) 중 172쪽
싸구려 사회
시인의 술잔은 자연스레 시대적 고민과 마주했다. 그는 취업률을 기준으로 학과 통폐합을 추진하는 대학, 600조 원에 달하는 사내 유보금을 쌓아놓고 일자리는 '아몰랑' 하는 기업을 비판하며 "사회가 전반적으로 싸구려가 되어 가고 있다"고 성토했다.
"응시자 100명 중 3명만 취업에 성공한다는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2030세대가 포기하고 싶어서 포기하는 게 아니다. 돈이 든다는 이유로, 사랑하고 꿈꾸는 행위가 생존에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이 사회가 청년들을 '포기세대'로 만들었다."
류근은 '포기세대'를 경쟁 사회의 산물로 바라봤다. '경쟁만이 살 길이야. 잘난 놈만 잘살면 돼'라는 주문에 걸린 피에로. 그는 "자본을 많이 가진 세력들이 경쟁을 조장하고 있다"며 "(청년들이) 자본 독점 세력이 창출한 시장의 노예가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경쟁, 자본, 시장 등 시에는 절대 등장하지 않을 단어들. 시인은 "자살과 행복 지수 등 OECD 통계상 부정적인 항목의 1위는 모두 대한민국"이라며 "수치가 발표될 때마다 '나만 불행한 게 아니야. 다 불행해'라는 이상한 위안마저 얻는다"고 통탄했다.
"이런 지옥이 세상에 어디 있나.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미래의 가치를 가져와 탕진하고 있다. (산업 역군의 대표격인) MB는 대통령 재임 중 치적 쌓기에만 몰두했지, 한 게 뭐가 있나. 4대강사업으로 국토를 망가뜨린 것도 모자라, 미래의 가치인 청년들에게 부담까지 주고 있다. 사회적 부패 구조, 이젠 이에 저항할 동력조차 없다."
'있는 놈'만 돈을 버는 싸구려 사회, 우리는 김수영의 시처럼 저항할 수 있을까? 류근은 "자본을 이길 수 있는 정의가 필요하다"며 공감 능력을 우선으로 꼽았다.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남의 배고픔을 나의 배고픔으로 여기는 정서적 공감 능력."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싸구려다.
"요즘 힘 있고, 돈 있고, 능력 있는 아버지와 그렇지 못한 아버지와의 대비가 우리 사회의 또 하나 대결 구도로 떠오르고 있다. 자식 문제로 누구에게 전화 한 통 걸어줄 수 없는 아버지들의 자괴감과 박탈감이 분노의 메아리로 흔들려 운다. 그러나 단언컨대 아버지는 힘 있고, 돈 있고, 능력 있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냥 언제 어디서든 자식을 위해서 웃어주고, 견뎌주고, 울어주는 사람이다. 자식을 위해 기꺼이 수모와 치욕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 땅의 자식들아! 못난 아버지라고 행여 비웃지 마라. 그 못난 아버지들의 뼈와 살과 피를 밟은 자리가 바로 지금 너희의 현재와 미래다. 그 눈물겹고 뜨거운 릴레이가 바로 꺼지지 않는 우리 삶의 추동이다."
- 8월 19일 류근의 페이스북 중
보수 경계령, 시바!
화나고 분해서 시바! 외롭고 슬퍼서 시바! 대중도 류근의 "시바"에 기대 외친다. "조낸 시바!"
시인의 통속적(通俗的) 공감 능력은 페이스북 글뿐 아니라 작품 전반에 걸쳐 있다. 문화평론가 최현식 씨는 <상처적 체질>의 해설 '통속미 혹은 존재의 희비극'에서 류근의 통속미(通俗味)는 "자아와 세계를 아프게 껴안는 방법적 사랑이자 어떤 절대적인 것을 휘감아 돌기 위한 감각적 전략"(149쪽)이라고 평했다.
"기를 쓰고 김대중을 키우고, 밑바닥에서 노무현을 올렸지만 남은 게 뭔가.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사람을 늙고 병들게 하는 시대인가? 우리가 슬퍼하고 경계해야 할 문제는 정말 이것이다. '그렇게 해 봤자 별 볼 일 없는데, 그 어려운 싸움을 또 해야 하나?' 그런데 이런 사고는 보수가 원하는 것이다."
그는 보수적 사고를 경계했다. 현재 대한민국 보수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로 상징된다. 기득권의 삼박자를 고루 갖췄기 때문이다. 김 대표 부친에 대한 친일 논란은 광복 70년인 올해 다시 도마에 올랐다. 고(故) 이맹희 CJ명예회장 장례를 계기로 삼성가(家)와의 인연도 새삼 주목받았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는 외삼촌과 조카 관계다. 무엇보다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정치를 배운 민주화추진협의회 막내로, 문민정부에서 내무부차관을 지냈다.
술을 술술 넘기던 류근은 현 정권을 조선시대 선조에 빗대 기어이 한마디 했다.
"선조가 나쁜 건 다른 게 아니다. 능력 없이 옥좌를 이어받은 후, 권력에만 집착했다. <징비록>에 기록된 선위(禪位) 파동만 20여 차례다. 그럴 때마다 국정이 마비됐다. 백성은 안중에 없었다. 오로지 자신이 나라를 일으켜 세웠다는 오만함만 있었다. 보수 정권 또한 그동안 여러 차례 국란(國亂)을 초래했다. 진짜 나라를 잘 다스릴 의지가 있는지 묻고 싶다."
★ 단박 인터뷰얼핏 보면 연관이 없어 보이는 '단박 인터뷰' 주인공들. 하지만, 이들 모두 약자에 대한 시선으로 우리 사회의 감시자 역할(워치독, watch-dog)을 마다치 않는 분들입니다. 그동안 만난 '단박 인터뷰' 주인공들을 다시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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