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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종로에 발을 못 붙이게 하라"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조선-일본 토지 전쟁의 발발

앞서 연재에서 설명하였듯이, 1920년대 지방 빈농과 지역 유지의 경성 유입이 증가하면서 경성에 거주하는 조선인 인구는 빠르게 늘었고, 일본인의 인구 역시 증가하였다.

토지 및 주택 시장 측면에서 매우 성격이 다른 수요 계층에 시장에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이질적인 두 계층은 주거 지역도 상이했는데, 일본인은 청계천 이남 남촌 지역에 그리고 조선인은 청계천 이북 북촌 지역에 거주하였다. 하지만 조선인과 일본인의 경성 유입이 가속화되면서,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거주하던 두 계층은 동일한 지역의 토지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에 돌입하게 된다.

새로이 경성에 진입하려는 조선인들은 그들보다 경제력이 월등한 일본인 거주 지역(남촌)에 자신들의 거주지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경성에 유입된 조선인들의 목적지는 청계천 이북, 북촌 지역이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우월한 입장의 일본인들에게는 공간적 제약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남촌뿐 아니라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른 지역으로 거주지를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촌의 주거 환경도 유지하면서 새로 유입된 일본인들의 살 거처를 마련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 일제는 정책적 차원에서 북촌 진출을 계획한다.

조선인과 일본인 공동 관심 지역, 북촌

결과적으로 북촌 지역은 조선인과 일본인 모두의 공동 관심 지역으로 떠오르게 되었고, 이는 두 계층 간 토지 확보 경쟁, 조일 토지 전쟁을 불러일으켰다.(여기서 '북촌' 지역은 현재 우리가 관습적으로 인지한 삼청동, 가회동 일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대문 안 청계천 종로 북쪽 지역을 뜻한다.)

"최근에 이르러 그들은 총독부가 경복궁으로 옮길 시일이 가까워지매 대경성의 미관을 위한다는 이유로 종로 일대의 큰 거리를 개수하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제 종로통 도로개수에 따라, 양측의 조선인 상점과 가옥들이 간혹 도로의 폭을 넓힘으로 인하여 헐리어 버리는 곳이 십수 개소나 되는… (그리고) 헐린 집터에는 도시미관을 위하여 단층집을 짓지 못하게 하고 반드시 이층 이상의 집을 세우도록 하였다. (하지만) 경제력이 부실한 조선 사람이 이층 이상의 집을 세울만한 자력이 있을지가 (의문이다.) … 일본인들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선인을 감언이설로 충동하여 전부 지가의 수중에 넣고자 암중비약을 한다…."1)

일제는 정책적 차원에서 총독부 등 정부 기관을 북촌 지역의 옛 국공유지에 자리 잡게 하고 주변에 관사를 건설하여 일제 하수인들의 거주지를 북촌에 만들었다. 부동산 개발 측면에서 해석하자면, 일종의 앵커 시설(Anchor Facility)를 입점시킨 후, 앵커 시설에 필연적으로 연관되는 시설 및 인력들의 이주를 유도한 것이다.

정부 기관을 북촌 지역에 옮김과 동시에 일종의 도시 미화 운동(19세기 말~20세기 초 유럽과 미국에서 불었던 도시 계획 정책으로 도시를 아름답게 꾸미는 계획 : 불가피하게 저소득이하 서민들이 거주지를 뺏기는 상황이 종종 발생함)을 종로통에 벌이면서 자연스럽게 조선인들의 북촌 이탈 효과를 보려 했다.

이러한 힘든 와중에도 북촌 지역을 사수하려는 조선인들이 있었고, 그들의 심경은 매우 비장했다.

"종로통 삼정목 구십번지 길진옥 씨는 '물론 우리의 재력이 어찌 넉넉할 수가 있겠습니까만, 기어코 이 지역만큼은 일본인의 수중에 내어주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들을 가지고 헐리게 된 열다섯 채의 소유주들 중 한 사람도 집을 팔아넘긴 이가 없습니다. 그 터를 안 팔려고 기를 써가며 각 은행으로부터 비싼 이자를 주고 돈을 얻어다가 이층집을 짓는 중인즉, 앞으로 장사가 잘되면 혹시 몰라도 만일 그렇지 않다면 결국은 은행물건이 되고 말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 아닙니까'라며 매우 전도를 우려하는 중이었다."2)

▲ '종로도로개수와 일본인의 북진'. ⓒ<조선일보>, 1925.06.18

북진하는 일본인을 두려워하는 조선인들

▲ '북진의 여파? 공가가 감소'. ⓒ<동아일보>, 1927.5.30
당시의 조선인들은 남촌을 넘어서 북촌 지역으로 북진하는 일본인들을 매우 두려워하였고, 이를 막기 위한 숨 가쁜 노력을 하였다. 이들은 은행 빚을 지어가면서 토지를 지키려 한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조선인이 바라는 만큼 녹녹하지는 않았다.

북촌 지역 소재 신규 주택이 시장에 나오는 대로 속속 일본인들의 수중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동아일보>는 일본인들의 북촌 진입으로 말미암아 빈집들이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고 전했다. 같은 날짜의 다른 기사에서도 경성에 유입된 일본인 중 70%가 북촌에 정착하였다고 한다.3)

급기야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청계천 이북 지역 중 과거 조선인들의 다수를 차지하였던 지역에서도 일본인들의 수가 많이 늘어난 지역들이 상당수가 되었다. (아래 그림 참조)

▲ 한국인 우위지역의 변화(1917-1927). ⓒ김종근, 서울 中心部의 日本人 市街地 擴散: 開化期에서 日帝强占 前半期까지, 2003 재정리

암울한 시대 분위기 속 신흥 자본가 계층 등장

일제의 주택 문제 해결은 기실 일본인 주택 부족 해결을 의미하였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가 일본인의 북진(북촌 진출)이었다. 따라서 경성의 조선인들은 주택 부족 문제에 힘들어했고 자신들의 터전인 북촌에서 쫓겨나는 형국이었다. 그렇기에 조선인들 입장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세력 또는 조직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조선인 주택 수요층을 위한 새로운 조직이 등장하는데, 건양사의 정세권 선생을 위시한 조선인 출신의 신흥 자본가 계층, 근대적 디벨로퍼들이다. 이들은 늘어나는 인구를 볼 때, 주택사업(주택 건설 및 운영)이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보았고, 일부는 민족적 소명을 갖고 사업에 임했다.

건양사 정세권 선생의 첫째 따님 정정식 님의 전언이다.

"아버지(정세권 선생)는 항상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사람 수가 힘이다.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 붙이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4)

그리고 이런 흐름에 나타난 주택 양식이 우리가 환호하는 삼청동, 가회동, 인사동 등지에서 볼 수 있는 근대식 한옥 집단 지구다.

1) "종로 도로 개수와 일본인의 북진", <조선일보>, 1925년 6월 18일.
2) <조선일보>, 앞의 기사.
3) "(일본인) 北進의 餘波? 公家가 減少", <동아일보>, 1927년 5월 30일.
4) "激增하는 日本人府民 今年에 벌서 三百名", <동아일보>, 1927년 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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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부동산/도시계획) 취득 후, 2009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환경대학원)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부동산 금융과 도시/부동산개발이며, 현재는 20세기 초 경성의 도시개발과 사회적기업과 경제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Urban Hybrid (비영리 퍼블릭 디벨로퍼)의 설립자겸 고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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