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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 도시로 전락한 경성, 인구는 늘지만…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1920년대 급변의 경성

디벨로퍼. 땅 매입부터 기획, 설계, 마케팅, 사후 관리까지 총괄하는 부동산 시행사, 혹은 개발자를 말합니다. 이름 그대로 부동산을 새로운 용도로 개발하는 이를 가리킵니다. 해외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디벨로퍼의 이미지가 좋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디벨로퍼가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근대의 디벨로퍼들, 정확히 일제 시대 때 활동했던 디벨로퍼들에 대한 평가도 비슷합니다. 집 장사꾼으로 치부됩니다. 하지만 다른 관점도 제기됩니다. 일본인으로부터 '조선인의 경성'을 지켜낸 사람들이라는 평가입니다.

김경민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가 현재의 북촌, 인사동을 포함해 서울 전역에 근대 한옥 단지를 개발한 정세권에 관한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를 통해 근대의 디벨로퍼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1)
"경성은 일본의 '게이죠'다"
일제 강제 합병의 결과, 경성이 식민 도시로 전락하면서 수도로써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일제는 조선의 수도였던 경성의 지위를 깎아 내리고자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는데, 이 조치로 말미암아 경성의 범역은 크게 축소된다.1)
경성이 식민 도시로 전락하면서 정치 행정 업무에 종사하던 조선인들은 생활 근거를 상실하였고, 이들 다수는 경성을 떠났다.2) 또한 1910년대 일제의 강압적 무단 통치를 피해 만주와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도 많았다.

경성에 거주했던 조선인들이 경성을 떠났음에도, 경성의 총 인구수는 1910년 강제 합병부터 1910년대 말까지 대략 25만 명선을 유지하면서 큰 변화가 없었다. 조선인들이 경성을 빠진 자리를 일본인들이 채웠기 때문이다. 1914년부터 1920년 불과 6년 사이 일본인의 수는 5만9000명에서 6만5000명으로 10% 이상 늘어난다.

하지만, 인구가 정체되었던 1910년대가 지나고 1920년이 되면서 경성은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된다. 경성은 이전과 다른 차원의 산업화와 도시화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경성, 10년간 4.5배의 성장

1920년 회사령이 철폐되어 회사 설립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면서, 경성에 각종 회사와 공장들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는데, 일본인들이 건설한 회사와 공장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은 물론이다. 1920년 불과 200여 개에 불과했던 회사의 수는 1930년 900여 개에 이르게 되어 10년간 무려 4.5배의 성장이 이루어졌다.3)
이러한 성장의 기류 속에 나타난 가장 큰 특징은 소비 도시 경성이 생산 도시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1928년 <조선일보> 기사는 경성이 "소비 도시로부터 생산 도시로 일변"하고 있고, "십사 년 전과 비교하면 6배가 늘었다"고 밝히고 있다.4)

"일본사람이 경영하는 공장은 대활기를 띄어 작금량년에는 대자본이 들어와서 시내 공업 지대를 엿보는 중이며 널리 시외까지 공장터를 엿보는 중으로 공업 지대로 변한다는 게 경성의 장래는 우리에게 관계없는 생산적 도시가 되리라 한다."

사업체의 증가는 자연적으로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는데, 이는 지방에서 토지를 일제에 빼앗긴 계층이 공장들이 들어선 도시로 이주하면서 충당되었다. 1918년 토지 조사 사업이 완료되고 산미 증산 계획이 시작되면서 조선의 농민층은 토지를 빼앗기며 경제적으로 몰락하였는데, 이들은 그나마 자신들의 노동력으로 일할 수 있는 공장이 있는 도시로 이주하였다.5)

경성이 산업 도시라는 특징을 띠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고, 농촌의 빈농들이 경성으로 몰려들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경성으로 모여든 빈농들 모두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에, 도시 내 주거 빈민(걸인)은 큰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근일 서울 시내에는 걸인이 많이 증가되었으며, 앞으로도 더욱 증가될 형세로 농촌 형편이 곤란하여 시골서 살 수 없는 사람이 상경한 까닭이다."6)

비단 몰락한 저소득 농민층만 경성으로 몰려든 게 아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실력 양성에 대한 사회의식이 높아진 가운데, 1924년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으로 대변되는 고급 교육 제공 기회는 지방 부유층에게는 경성을 매력적인 주거지로 만들었다. 여기에 보건의료 체계 개선으로 사망률이 감소하고 출생률이 증가하면서 자연 증가율도 상승하였다.7)

이로 인해 경성의 인구는 25만 명(1920년)에서 35만 명(1930년)으로 10년 사이에 40% 폭증하였고, 불과 15년 후인 1935년 인구는 1920년 대비 60% 증가한 40만 명에 이르게 된다.

경성, 유럽과 동일한 문제 발생했지만 피해는 조선인에 집중

1920년대 경성이 산업 도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19세기 유럽 도시들이 산업 도시로 변화하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산업 혁명을 겪으면서 유럽 도시 내부에는 수많은 공장이 설립되었고, 이 공장들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고 이 노동력은 대개 농촌 지역의 몰락한 빈농들의 이주로 충당되었다.

이로 인해 중세 시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던 이 도시들(지리적으로 매우 작은 면적의 도시들)은 엄청난 인구(노동력) 유입으로 새로운 문제점에 직면한다. 지나치게 사람들이 과밀해졌으며, 도시 내부 위생상 문제점이 나타나게 되었고, 과밀한 인구로 인한 심각한 주택 부족 문제가 발생하였고, 도시 빈민이 양산되었다.

1920년대 산업 도시 경성은 유럽 도시들의 산업화 과정상 나타난 동일한 문제점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피식민계층인 조선인에 집중되었다.

"현재 경성의 가장 절박한 중대 문제 중의 하나는 경성부민의 주택 문제이다. (…) 경성을 찾아오는 사람으로 놀래는 것은 경성부민의 태반이 제 집을 가지지 못하고 () 일본인은 21,034호(거주 가구수)에 개인 소유 14,222가(가옥)와 관사 2,299가(가옥)를 합하면, 16,521가(가옥)로 약 5,200집이 부족한 셈인데 반해, 조선인 측은 49,259호(거주 가구수)의 230,732인이 24,044가(가옥)에 들어 살고 있으니, … 현재의 배 이상의 집이 필요한 것으로 되어 있어, 조선인 측의 주택 문제는 일본인에 비하여 일층 심각한 형편이다."8)

▲ ‘대경성 면목이 안재 3만호가 월세 세민, 총 호수 4만9천호 속에: 주택난 중의 경성’ (<중외일보> 1929.11.8)

1) 김영근 「일제하 경성 지역의 사회∙공간구조의 변화와 도시경험 : 중심-주변의 지역분화를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제20호, 2003.
2) 김영근, 위의 글.
3) 中村資良, 朝鮮銀行會社要錄 I~X, 1921~1942 (양승우∙최상근, 「일제시대 서울 도심부 회사 입지 및 가로망 변화의 특성에 관한 연구」, 『도시설계 : 한국도시설계학회지』 제5권 제1호, 2001 재인용).
4)「京城에 工場激增 昨今엔 九百十四處, 소비도시로부터 생산도시로 일변」,『조선일보』1928년10월 17일.
5) 형기주 「일제하 경성의 공업과 공업입지: 1910년대」, 『서울학연구』, 제10호, 1998.
6)「乞人의 激增과 이에 대한 대책은 엇던가」, 『동아일보』 1924년 08월 29일.
7)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1(「일제하 경성 지역의 사회∙공간구조의 변화와 도시경험: 중심-주변의 지역분화를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제20호, 2003에서 재인용)
8)「대경성 面目이 安在 3만호가 월세 세민, 총 호수 4만9천호 속에, 주택난중의 경성(1)」 『중외일보』 1929년 1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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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부동산/도시계획) 취득 후, 2009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환경대학원)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부동산 금융과 도시/부동산개발이며, 현재는 20세기 초 경성의 도시개발과 사회적기업과 경제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Urban Hybrid (비영리 퍼블릭 디벨로퍼)의 설립자겸 고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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