놈 촘스키(Noam Chomsky) 미국 메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 교수 등 해외 석학 163명이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을 위한 탄원서를 제출했다. "조 교육감이 선거를 통해 부여받은 책무를 잘 수행할 수 있게끔 해달라"라는 내용이다. 이 탄원서는 오는 9월 4일 선고 공판을 진행할 항소심 재판부에게 전달됐다. 지난해 선거 당시 상대후보였던 고승덕 변호사의 미국 영주권자 의혹을 제기했던 조 교육감은, 이런 의혹이 허위로 드러나면서 1심 법원에서 당선 무효 형을 선고받았다.
"후보자 간 공방에 대한 판단은 유권자의 몫"
이들 석학들은 최근 제출한 탄원서에서 "선거 과정에서 내놓은 의견을 기소하는, 발전된 산업국가에서는 극히 드문 현상"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제기했다. "지난 몇 년 사이 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조금씩 잠식되어 가는 것"과 맞물린 우려다.
이들은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명예훼손의 과도한 형사범죄화와 선거운동의 제한 경향"에 대해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유엔 인권위원회 권고에 따르면, '명예훼손'에 대해 형사법 적용은 극도로 제한된 경우에 국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많은 나라들이 이미 '명예훼손'을 형사 범죄로 취급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도 곁들였다.
선거 시기라면, 더욱 그렇다. 이들은 "후보자 간 공방에 대해 진실과 허위에 관한 최종적인 판단을 하는 건 원칙적으로 유권자의 몫"이라는 게 "국제사회의 합의"라고 밝혔다. 후보자에 대한 비판과 검증에 대해선 최대한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들은 "한국의 사법부도 이런 세계적 추세와 원칙을 존중하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의혹 해명 요구는 허위사실 유포가 아니다"
아울러 이들은 "조희연 후보가 고승덕 후보에게 영주권 관련 의혹의 해명을 요구한 것은 허위사실 유포라 볼 수 없으며, 선거 결과에 실제로 영향을 끼친 사안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들은 "2심 법원이 1심 판결을 바로잡아"달라고 요구했다.
다만 이들도 "한국 법을 해석하는 일은 한국 법원의 몫"이며, "(자신들과 같은) 국외자가 할 일은 아니"라는 점은분명히 인정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법원은 국제 사회가 한국의 표현의 자유에 대해 갖고 있는 우려를 이해해야"한다는 지적을 꼭 해야만 했다. "폭압적인 독재체제가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한반도에서 중대한 희망의 등불"인 한국에서 '표현의 자유' 관련 지표가 계속 악화되고 있다는 자료가 쏟아지는 게 안타깝기 때문이다. 이 탄원서에는 촘스키 교수 외에도 래리 다이아몬드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교수, 스테판 해거드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 캠퍼스 교수 등이 서명했다.
"선거운동 과정의 허위 진술, 형사 처분 아닌 민사 소송으로 풀어야"
해외에 있는 한국인 학자들도 잇따라 탄원서를 냈다. 백태웅 미국 하와이대학교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탄원서에서 "선거에서 설령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진술이 나온다고 해도 정부와 법원이 나서서 이를 규제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역시 많은 주에서는 선거 과정에서 나온 허위 진술에 관한 법률이 아예 없다는 설명도 담겼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나온 발언들은 형사 처분 대상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명예훼손이 발생했다면, 민사 소송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
조 교육감이 고 변호사에게 제기한 의혹은 1심 재판 과정에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면, 고 변호사가 조 교육감에게 손해 배상을 청구할 수는 있다. 그러나 검찰이 나설 일은 없다. 백 교수의 설명대로라면, 그렇다.
"무단횡단에 무기징역?"
유종성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대학교 교수가 낸 탄원서도 눈길을 끈다. 지난 2013년, 유 교수는 아내인 유승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선거를 돕다가 선거법 위반 혐의로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 받았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의혹 제기를 허위사실 공표로 해석할 수 없다"고 판단해 유 교수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조 교육감 측 변호인도 인용한 판례다.
유 교수는 탄원서에서 자신의 경험을 소개했다. 그리고 조 교육감 사건은 자신의 경우보다 더 낮은 수준의 의혹 제기라고 설명했다. 자신에게 무죄를 선고한 판례가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유 교수는 "(설령 조 교육감이 의혹 제기에 앞서 사실관계 확인을 소홀히 했다고 해도) 이는 무단횡단에 무기징역을 선고하는 것과 같은 지나치게 가혹한 형벌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아주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법원이 유권자의 선택을 뒤엎고 대의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과잉 사법정치"라는 비판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아주 가벼운 죄, 너무 무거운 처벌…"법관 재량으로 '선고 유예' 해야"
국내 학자들도 대거 탄원서 및 의견서를 제출했다. 조국 서울대학교 교수, 한상희 건국대학교 교수 등 법학자 89명은 의견서를 통해 1심 판결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조 교육감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게 타당하며, 설령 죄가 있다고 해도 '선고 유예'를 하는 게 옳다는 내용이다.
'선고 유예'란, 가벼운 범죄에 대해 일정 기간 선고를 미루는 것이다. 그 기간 동안 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형을 선고하지 않는다. 법관이 재량껏 쓸 수 있는 제도다.
항소심 재판부가 '선고 유예'를 할 경우 조 교육감은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선고 유예'에 대한 요구는, 이른바 '비례의 원칙'과 맞물려 있다. 처벌은 잘못의 무게에 비례해야 한다는 것. 1심 판결은 이 대목에서 허점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 교육감에게 적용된 죄목은 지방교육자치법 위반이다. 현행 지방교육자치법에 따르면, 경쟁 후보자를 낙선시키기 위해 허위사실을 공표할 경우 7년 이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상 3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돼 있다. 1심 법원이 선고한 형량이 벌금 500만 원이다. 법이 정한 최저형량인 셈. 하지만 현행 선거법 상 당선무효 기준은 벌금 100만 원 이상이다. 조 교육감에 대한 선고가 당선 무효 형인 건 그래서다. 아울러 1심 판결이 확정되면, 조 교육감은 선거보전금 30억 원도 반납해야 한다.
최저형량 선고와 교육감 퇴출 및 30억 원 반납 사이의 간극. 여기서 '비례의 원칙'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법원이 인정한 죄의 무게는 아주 가벼운데, 처벌의 무게가 너무 크다. '선고 유예'는 재판부가 이 문제를 푸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진보 교육감 표적 기소', 최종 결론은?
이밖에도 누리꾼 1만 여 명이 온라인 서명을 한 탄원서가 제출됐다. 혁신학교학부모네트워크 학부모 479명도 탄원서를 냈다. 박재승 변호사 등 사회원로 118명도 동참했다.
조 교육감은 지난해 5월 선거운동 과정에서 상대 후보였던 고승덕 변호사가 미국 영주권자라는 의혹을 제기했었다. 최경영 <뉴스타파> 기자가 트위터에 남긴 글이 근거였다. 선거가 끝난 뒤, '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이라는 단체가 조 교육감을 고발했다. 세월호 유가족 등을 고발했던 단체다. 경찰은 사건이 안 된다고 봤다. 그래서 무혐의 의견으로 송치했다. 하지만 검찰은 달랐다. 공소시효 만료를 하루 앞둔 지난해 12월 3일, 전격 기소했다. 당시 진보 교육감에 대한 '표적 기소'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올해 4월 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7부는 조 교육감에게 벌금 500만 원을 선고했다. 이 같은 1심 판결이 최종 확정될 경우, 서울시 교육감 선거를 다시 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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