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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만에 '다시' 멎은 대북 확성기…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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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만에 '다시' 멎은 대북 확성기…끝일까?

[기자의 눈] 2004년 대남·대북 '고별 방송' 내용은?

남북 고위급 접촉 결과로 25일 새벽 발표된 '6개항 합의'에 따라 남북이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정부 당국에 따르면, 북한은 이날 정오를 기해 전군에 내린 '준(準)전시상태' 명령을 해제했다. 한국군도 이에 따라 같은 시간부터 대북 확성기 방송을 전면 중단했다. 이는 남북 공동보도문의 6개항 가운데 3항과 4항에 따른 조치다. (☞관련 기사 : 북 "남측 군인 부상 유감"…남 "확성기 방송 중단")

한국군의 대북 확성기 방송은 지난 4일 북한의 '목함 지뢰' 도발사태 이후 6일만인 8월 10일부터 이날까지 보름 동안 재개됐었다. 한국의 대북 방송과 북한의 대남 방송은 체제 선전과 심리전 목적으로 한국전쟁 이후 계속돼 오다 지난 2004년 6월 중단됐었고, 이는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에 담긴 "남북 간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신뢰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서로 상대방을 중상 비방하지 않는다"는 합의 정신을 살린 것으로 평가받았다. 당시 남과 북은 방송을 중단하며 다음과 같이 '고별 방송'을 해 눈길을 끌었다.

"전방에 나와있는 국군 장교들과 사병 여러분. 군사분계선상의 역사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핏줄과 언어도 하나인 우리 민족은 더 이상 갈라져 살 수 없으며 분열의 비극은 하루 빨리 끝장내야 합니다. (중략) 6월 15일부터 군사분계선 지역에서 모든 선전활동을 완전히 중지하게 되는데…(중략) 통일의 그날 우리 만납시다. 꿈결에도 바라던 통일의 그날 기쁨과 감격에 울고 웃으며 서로 얼싸 안읍시다." -2004년 6월 14일, 북한의 마지막 대남 방송

"남북 간 군사실무접촉에 결과에 따라 지난 1962년부터 42년간 계속해온 우리 <자유의 소리> 방송이 오늘부로 북한의 확성기 방송과 함께 막을 내리게 된 역사적 사실과 관련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중략) 우리들이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민족 공동 번영과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남북 간 합의사항들을 착실하게 이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끝으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기원하면서 그동안 우리 방송을 들어준 인민군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무궁한 행운을 빕니다." -같은날, <자유의 소리> 고별 방송

남북이 '고별 방송' 직후인 2004년 6월 15일 자정부터 대남·대북 방송을 멈춘 것은, 같은달 10~12일 열린 대령급 남북 군사실무회담에서 남측 문성묵 국방부 회담운영팀장과 북측 류영철 인민무력부 국장이 '무박 3일 마라톤 협상'을 한 결과였다.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 '무박 3일 마라톤 남북회담' 등은 최신 뉴스이면서 11년 전의 역사이기도 한 셈이다. (☞관련 기사 : 실무군사회담 무박3일 마라톤 협상 타결…15일부터 남북 선전활동 중단)

이 대령급 군사실무회담은 같은달 3~4일 열린 제2차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에서 밤샘 협상 끝에 도출된 '서해 해상에서 우발적 충돌 방지와 군사분계선 지역에서의 선전활동 중지 및 선전수단 제거에 관한 합의서'의 구체적 실행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것이었다. 또 장성급 군사회담은 2000년 9월 제주도에서 열린 남북 국방장관 회담에 따른 후속 조치였으며, 국방장관 회담은 물론 그 3개월 전 6.15 남북정상회담이 있었기에 가능해진 일이었다.

이처럼 2004년의 확성기 방송 중단은 만 4년동안 차곡차곡 쌓아올린 남북 간 신뢰 구축과 교류협력 확대의 '결과물' 중 하나였던 셈이다. 그러나 2008년 2월 임기를 시작한 이명박 정부는 '비핵·개방·3000'을 내세우며 남북관계를 북핵 문제 해결에 단단히 동여매는 연계론을 폈다. 방코델타아시아(BDA) 제재 등으로 2005년 9.19 공동성명과 2007년 북핵 2.13 합의 등 6자회담을 통해 도출된 북핵 문제 해법이 주춤대는 사이 남북관계도 덩달아 표류했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는 곧 북한이 붕괴할 거라는 인식에 사로잡혀, '지금 여기'에서 북한과 대화를 통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상태를 관리해야 하는 책무를 소홀히 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2002년 제2차 연평해전 당시에는 남북이 교전 상황에 돌입했음에도 '핫라인'을 통해 상황을 관리했지만, 2010년의 연평도 포격 도발 때에는 전쟁에 대한 공포가 서울 시내에 독버섯처럼 피어났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통일정책에 관여했던 임동원 전 국정원장은 회고록 <피스메이커>(중앙북스 펴냄)에서 "(연평해전) 이튿날 아침 일찍, 북측은 핫라인을 통해 '이 사건은 계획적이거나 고의성을 띤 것이 아니라 순전히 현지 아랫사람들끼리 우발적으로 발생시킨 사고였음이 확인됐다'며 '이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내용의 긴급통지문을 보내왔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사고가 재발되지 않도록 노력하자'고 덧붙였다"고 했다.

당시 북측의 반응은, 핫라인 상에서의 비공개 대화였긴 했지만 25일 '6개항 합의'에 담긴 "북측은 (…) 지뢰 폭발로 남측 군인들이 부상을 당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는 내용보다 훨씬 저자세였다. (북측의 공식 반응은 남북 장관급 회담 북측 대표가 남측 대표에게 "얼마전 서해 해상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무력충돌 사건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하면서 북남 쌍방은 앞으로 이러한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할 것이라고 간주한다"는 통지문 내용을 전화로 불러준 것이었다. 이런 방식을 '전화 통지문'이라고 한다.)

이는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 도발을 저지른 북한이 나흘이나 지나서야, 그것도 '조선중앙통신사 논평'이라는 형식을 통해 "포격에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 사실이라면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한 것과는 극명하게 대조됐다.

5년 후인 현재로 돌아와 보면, 다행히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인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북핵문제-남북관계 연계론을 넘어서서 병행 발전을 추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2015년 8월 25일 정오부터 이뤄진 방송 중단은 향후 남북 적십자 실무접촉(공동보도문 5항)과 당국 회담(1항)으로 이어지는 '시작점'이다. 2000년 6.15 공동선언이 2004년의 6월의 확성기 방송 중단을 낳은 것처럼, 2015년 8월의 확성기 방송 중단이 또 한 번의 정상회담 등 평화로 가는 길을 포장하는 한 장의 벽돌이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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