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E.H. 카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다. 그렇다. 지난 역사와의 대화가 현재와 미래를 추동하기에 "과거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말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대화를 하고 있는가. 대화란, 곧 우리가 지난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규정하고 또 거기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과거사 왜곡은 하루 이틀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매우 체계적이고 집요하게 왜곡해왔다. 그러나 우리 역사학계의 대응은 그리 체계적이지도 못하고 의지도 없다는 것이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은 그 원인은 바로 '식민 사관' 때문이라고 했다.
흔히 주류의 역사학계로부터 '이단아'라는 비판을 받은 적도 있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려고 진실 앞에 서 있는 '자유로운 붓'과 같았다.
- 1961년 충남 아산이 고향이다. 중·고등학교 때 유신 교육이 싫어 수업 시간에 교과서보다 '삼중당 문고'를 더 많이 보던 학생이었다고 했다. 학창시절 이덕일은 어떤 모습이었나.
제도권 교육의 부적응자였다. 유신시대의 학교는 군대와 비슷했다. 교문을 들어갈 때 '멸공'이란 구호를 외쳐야 했다. 반별 군가 부르기 경연대회도 있었고, 학생들이 교련복을 입고 사열종대로 행진을 하는 것이 소풍이었으니, 거의 군대나 다름없었다. 나랑 너무 안 맞았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보니 일제 말기와 비슷했다. 학교와 군대가 별 차이가 없는 상황에 동조하고 싶지 않았고, 공부에도 흥미를 잃었다. 교련 수업이 있는 날이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교련복을 입고 등교했지만, 나는 꼭 싸와서 교련 시간에 맞춰 갈아입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내 나름의 저항이었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대안학교 같은 곳을 다녔어야 했는데…. 그때는 그런 학교도 없었고, 의식도 없었다. 그냥 허송세월한 셈이다.(웃음)
- 중·고등학생이었지만, 유신의 부당함을 인지했다. 영향을 끼친 사람이 있나.
집안 자체가 반골(反骨) 성향이 있다. 아버지는 평안도 월남민이었지만, 유신체제를 반대하고 민주체제를 옹호했다. 그러니, 인생이 불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중학교 때부터 일제시대를 살았던 좌절한 지식인의 책을 많이 읽었다. 후에 생각해보니, 당시 그런 책을 읽으면서 '일제시대의 암울한 분위기를 유신시대와 비슷하게 느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본 책이 훗날 지적 성장에 많은 도움이 됐다.
- 1985년 24살, 남보다는 조금 늦은 나이에 숭실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청년 이덕일은 격변기이던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유신시대 말은 암울했던 시기다. 박정희가 죽어 독재정권이 끝날 줄 알았는데, 군부독재로 이어졌다. 당시에는 정말 사람이 아닌 시기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사회에 불만이 많았는데, 표출할 수 있는 통로가 없었다. 대학생이 아니면, 사회의 부조리를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군대를 다녀온 뒤 대학에 가야 사회문제에 대해 발언이라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남들보다 늦은 나이였지만 몇 달 동은 독서실에서 공부해 대학에 들어갔다.
- 대학생활은 어땠나?
자기의 정치적 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 하나는 좋았다. 물론 그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 했지만. 뭐, 그냥 남들 하는 만큼 했다.(웃음) 잘못된 사회에 나름대로 저항하면서 그렇게 살았다.
- 역사적 논쟁이 있는 이슈를 사료를 통해 탐구하고, 진의를 밝혀내는 탐구자형 학자다. 역사에 매력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다면….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죽을 때까지 이 길을> 등과 같은 책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죽을 때까지 이 길을>은 한길사가 1988년 출판한 <함석헌전집> 중 1권과 5권에 해당한다. <함석헌전집>은 2009년 <함석헌저작집> 반양장본 세트로 재출간됐으며, 총 30권이다. 편집자) 함석헌 선생은 역사학자이자 사상가인데, 그분의 책을 읽으면서 역사란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지사(志士)의 학문처럼 여겨져 사학과를 선택했다. 하지만 대학에서 배운 사학은 밖에서 생각했던 사학과 많이 달랐다. 한국의 제도권 사학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대학을 막론하고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직도 조선총독부의 관점으로 한국사를 바라본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문제가 많다고 느꼈다.
- 주 전공분야는 근현대사지만, 조선사와 고대사까지 역사 연구의 범위가 넓다. 방대하고 넓은 분야를 다루려면, 깊이 파고들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전공이 근현대사인데, 왜 고대사를 하느냐?'라고 하는데, 비판 자체가 잘못됐다. 본래 역사를 연구하려면, 역사 전체를 개괄해야 하고 자기가 전공하는 특수 분야의 역사는 더욱 깊이 공부해야 한다. 정상적인 역사학을 하는 외국에서는 한 역사학자가 보통 두 개의 전공을 갖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자기 분야의 역사만 하라고 강요한다. 이런 풍토는 모두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것이다. 조선총독부에서 한국사를 모두 왜곡해 놓고는 고대사는 고대사 전공자만 연구하게 하고, 조선사는 조선사 전공자만 연구하게 했다. 역사를 전체적인 눈으로 보게 되면, '식민 사관'이 부분적 허위들이 합쳐서 만들어진 '왜곡 사관'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식민 사관이란, 한 마디로 '조선총독부 사관'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영구히 지배하기 위해서 조선총독부의 관점으로, 한국사를 바라본 것이다. 조선총독부에서 가장 일관적이고도 중점적으로 왜곡했던 부분이 바로 고대사 연구 사업이었다. 태평양전쟁 때도 한국 고대사 연구에 들어가는 예산은 줄이지 않을 정도로 막대한 공을 들인 이유가 무엇이었겠나. 한국의 고대사 왜곡에 한국 통치의 핵심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우리 역사의 원형을 되찾자는 노력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식민 사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지게 됐다. 특히 조선총독부가 중점적으로 왜곡한 분야가 고대사이기 때문에 고대사를 연구하게 된 것이다.
- "조선이 멸망할 때 고위직에 있던 76명이 일제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이들은 왕족과 지배층들이었는데, 당파를 알 수 있는 64명의 수작자 중 북인은 2명, 소론은 6명이고 나머지 56명은 모두 노론이었다. 조선은 왕족들과 집권 노론이 팔아먹었다"고 저서<이회영과 젊은 그들>(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펴냄)에서 밝혔다. 어떤 의미로 해석할 수 있나.
조선총독부의 역사관을 옹호하는 사람이 보면, 이들 대부분이 조선 후기 인조반정 이후에 집권한 노론 당파에 뿌리를 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에게 대한제국을 팔아먹은 총리 이완용이 노론의 마지막 당수였다. 이 노론의 후예들이 아직까지 한국 사학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해방 이후에 우리가 나라는 되찾았지만, 역사는 여전히 조선총독부 사관이 지배하는 것이 현실이고, 현재다.
한국 사회의 잘못된 분야를 파고들어 가다 보면, 공통으로 만나는 문제가 바로 친일잔재 미(未)청산이다. 역사학계도 마찬가지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 출신들과 그 제자들이 해방 이후에도 역사학계에 절대 권력을 장악하면서 역사학의 기본 구조가 왜곡됐다. 노론에서 친일로 이어지는 비정상적인 구조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1930년대 식민지 부호(富戶)를 살펴보니, 조선총독부에서 작위를 받았던 민영휘와 이완용의 자식들이 1등부터 3등까지를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독립운동가 희산 김승학 선생의 후손인 김병기 대한독립운동총사 편찬위원장은 광복 70주년 경기도학술토론회에서 기막힌 이야기를 들려줬다. 일진회 송병준의 사위 구연수는 명성왕후의 시신에 석유를 뿌려 소각하는 일을 감독한 인물인데, 나라가 망한 후 경찰 최고위직인 경무관과 중추원 참의가 되었다. 또 그 아들 구용서는 해방 후 한국은행 초대 총재가 됐다고 한다. 궁내부대신 민병석은 자작의 작위를 받았는데, 그 아들이 대한민국 제5~6대 대법원장을 지낸 민복기라는 것이다. 민복기는 유신 때 대법원장으로서 인혁당에 대한 사법살인을 주도한 인물이다.
이런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지금껏 이 사실이 한국 사회의 비밀로 지켜지고 있었는데 이를 비판하며 일제에게 작위를 받은 사람들의 명단을 공개하니, 저들의 공격이 매우 심해졌다. 이런 사실을 밝히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 그들이 자랑스럽게 간행한 책 <조선귀족열전(朝鮮貴族列傳)>(일제의 조선연구회가 1910년(명치 43년)에 출판했다. 편집자)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일제가 천 년 만 년 갈 줄 알았던 거다.
- 노무현 정부에서 설립한 '동북아역사재단'이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및 과거사 왜곡에 동조하고 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국가 지원 역사재단에서 역사를 왜곡하다니, 놀랍다. 핵심이 무엇인가.
한 가지 자료를 보여주고 싶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지난 2008년부터 지금까지 60여 명의 연구자가 세금 50억 원을 들여 만든 지도다.
한반도 북부를 중국 식민지로 만든 중국의 동북공정 지도와 똑같다. 중국의 담기양(谭其骧)이라는 역사지리학자가 총 8권의 <중국역사지도집>을 간행했는데, 동북공정은 모두 이 틀에서 진행된 것이다.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집>은 지금의 북한 지역 일대를 중국사의 강역이라고 그렸는데, 대한민국에서 세금으로 만든 '동북아역사지도'가 담기양의 지도를 그대로 표절했다. 한마디로 '매국 지도'다.
그래서 <동북아역사지도>의 허구를 증명하기 위해 지난 4월 17일 국회 동북아역사왜곡특위에 나가 2시간 40분 동안 증거자료와 함께 동북아역사재단의 이번 역사 지도를 비판했다. 국회 속기록(제332회 국회(임시회) 제32차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을 보면 나와 있다.
<동북아역사지도> 편찬위원회의 설명을 들으면 가관이다. 편찬위원에게 "고구려와 한나라의 국경선을 세로로 긋는 사료적 근거가 뭡니까?" 하고 물었더니, "이 시기의 자료를 검토했을 때 고구려가 정복하고 있던 영역들의 교통로를 중심으로 해 가지고 그 지점들을 찾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그래서 다시 "아니, 그러니까 그 1차 자료가 뭐냐니까요?" 하고 물었더니, "<삼국사기>, <삼국지>의 자료"라고 했다. "<삼국사기>에는 태조왕이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고 모본왕(慕本王)이 어양(漁陽), 상곡(上谷), 북평(北平) 지역들을 다 공격했다고 나오고, 이것은 <후한서>(後漢書, 중국 후한의 정사)에도 나온다. 도대체 당신들이 이야기하는 사실이 <삼국사기> 어느 부분에 있느냐?"라고 재차 따져 물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더라.
몇 년 전 중국에서 동북공정 지도를 미국 의회에 보냈다. 지금의 북한 강역이 중국의 역사영토라는 담기양의 지도다. 미국 의회에서 이에 대한 대한민국의 공식입장을 물었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동북공정 지도가 맞다'는 식의 지도를 보냈다. 바로 <동북아역사지도>의 일부를 보낸 것이다. 이런 식의 역사관을 가진 이들이 국민 세금을 독식하면서 한국 학계를 장악해왔다.
- 어느 정도인지 몰랐는데, '사실'이라면 심각한 문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동북아역사지도>에 '6세기 신라의 팽창'이라는 지도에는 '우산국(울릉도)'은 있고 독도는 없다. 독도는 그 많은 도엽 중 단 한 장에도 표기되어 있지 않다. 이를 지적하자, "실수"란다. 학자 60여 명이 8년 동안 동북아 역사지도를 만들면서 독도를 한결같이 (대한민국 영토로) 표시하지 않았다니…. 어떻게 실수란 말인가.
일본이 이런 사실을 모를 것 같은가? 아베 총리가 (미국 의회에 제출된 자료에) 독도가 누락된 점을 모르고, 도발했겠는가? 우리는 아직도 식민지 의식, 즉 '노예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학계를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한때 제국을 운영했던 나라다. 제국 운영의 기본은 식민지 관리다. (이 지도를 제작한 사람들은) 일본이 지금도 한국을 식민지로 생각하며 관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들까? 국내 식민 사학자들, 즉 매국 사학자들이 과연 일본과 커넥션이 없을까?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모든 학자들은 다 한국을 위한 역사를 하겠지'라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소설을 써도 좋은데, 다른 것은 몰라도 독도는 그려놔야 할 것이 아닌가. 이건 '일진회'(一進會, 대한제국 말인 1904년부터 1910년까지 일본의 한국 병탄정책(倂呑政策)에 적극 호응해 앞장섰던 친일단체. 편집자)가 만든 지도다. 정상적인 대한민국 사람들이 만든 지도가 아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지도도 옆쪽에 따로 울릉도를 표시해놓고, 독도는 빼놓았다. 실수가 아니다. 의도적인 것이다.
<동북아역사지도> 뒷부분으로 갈수록 더하다. 식민지 당시 조선의 행정지도를 보면, '독립운동사 지도'는 한 장도 없다. 1920년대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장독립운동단체 참의부(參議府)·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는 있지만, 결성 초기부터 조선총독부와 밀양·부산경찰서 등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의열단(義烈團)이나 국내 여러 독립운동단체와 관련한 기술은 없다(의열단은 1924년 일본 왕궁에 폭탄을 던지기도 했다. 편집자). 온통 식민지 시기 행정구역뿐이다. 일제강점기 몇 년도에 무슨 면과 어떤 읍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알아야 하나? 한국을 점령했던 사실을 그리워하는 일본 극우파가 그렸다면 딱 맞는 지도다. 이에 대해서는 최근 출판한 책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만권당 펴냄)에서 자세하게 서술했다.
-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발생하는 것인가?
국회에서 발표할 내용을 미리 달라고 해서 처음에는 거부했다. '동북아역사지도의 문제점'이란 자료였는데, 우려했던 것은 이 자료가 저쪽(동북아역사재단)에 넘어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 나라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 정·관·재계 및 언론계 요소 요소에 저들의 커넥션(connetion, 관계망)이 움직이고 있다. 오전 8시로 예정된 국회 특위 전날(4월 16일), 밤 8시경에 자료를 보냈다. 하지만 밤사이 자료가 동북아역사지도 편찬위원회에 넘어가 동북아역사재단 관계자들이 특위에 반박 자료를 들고 나왔더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한국 사학계의 카르텔(cartel, 연합)을 또 한 번 느꼈다.
-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석필 펴냄), <조선왕 독살 사건>(다산초당(다산북스) 펴냄), <사도세자의 고백>(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펴냄),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펴냄) 등 역사학계에서 정설이지만 역사적 논쟁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주제로 30여 권 이상의 역사비평서를 썼다. 그 중 몇몇은 베스트셀러가 되며, 기존과 달리 잘 읽히는 역사서로 인기를 끌었다. 비법이라도 있나.
속에 맺힌 게 있어야 글이 잘 써지는 것 같다.(웃음) 역사 전체에서 '주체를 누구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늘 있었다. 다수가 옳다는 것을 잘못된 것으로, 옳지 않다는 것을 잘된 것으로 여기는 현실 비판에 대한 문제 제기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예를 들어, 이이는 '십만양병설'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더니, 식민 사학자들이 '한국사를 비하한다'면서 공격했다.
당시에는 소수였지만, 올바른 길을 추구하다 사형당한 사람들. 예를 들어, 백호 윤휴(白湖 尹鑴. 조선 중기 문신으로 남인의 거두이자 청남(淸南)의 중진이었다. 서인에게 권력이 넘어간 후 사형당했다. 편집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 조선 후기 실학자로, 재야 지식인이다. 그는 한국사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편집자)과 같은 사람들에게 주목했다.
사회 개혁은 그때나 지금이나 두 가지로 귀결된다. 하나는 신분적 평등(또는 계급적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다. 나머지 이런저런 명목으로 개혁을 이야기하는 것은 다 지엽적이거나 헛소리다. 간단하게 보면, 두 개의 틀 속에(개혁적 요소가 모두) 들어간다. 신분적·경제적 평등을 추구했던 이들을 찾다 보니, 소외당한 것도 모자라 사형을 당하는 등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에게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할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들에게 시선이 갔다. '묻히고 지워진 사람들을 복원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공부하다 보니, 책을 여러 권 쓰게 됐다(출판된 서적만 120권 이상이다. 편집자). 사실 많이 쓴 것도 아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하도 많아서, 사료를 살피다 보면 자신들의 이야기로 책을 써달라고 호소하는 듯하다.
- 책 내용으로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고….
지난해 <우리 안의 식민 사관>(만권당 펴냄)을 냈다가 민형사상 고소를 당했다. 김현구 고려대 명예교수가 책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창비 펴냄)에서 가야를 '임나(任那)'라고 표현하며,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전라도 지역까지 차지했다고 주장했다. 관련해 10장 이상의 지도도 실었다. 이를 비판했더니, 김 교수가 형법상으로는 명예훼손을 민법상으로는 출판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식민 사관을 비판했다고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법정에 왔다 갔다 한 형국이다. 이런 상황이니, 어떻게 제대로 된 비판을 할 수 있겠는가. 프랑스 같으면, 저런 사람들은 바로 나치 찬양처벌법에 따라 감옥에 간다. 요즘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 다수가 '가야가 곧, 임나'라며 일본이 영산강 유역까지 지배했다는 내용의 논문을 쓰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비판받기는커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한국 측 위원으로 발탁돼 나랏돈을 펑펑 쓴다. 그러니 후배 학자들은 '저런 역사관을 가져야 잘 먹고 잘 사는구나'라는 생각에, '가야=임나'라고 쓰는 게 흐름이 됐다. 그나마 명예훼손에 대해서 검찰에서 무혐의 판결이 나왔다.
이후 서울고검에서 다시 조사할 것이 있다며 몇 가지 형식적인 질문을 하더니 기소했다. 이미 6월 26일에 기소 명령을 내려놓고, 닷새 정도가 지난 7월 1일 재조사한 것이다. 그래서 현재 형사피고인 신분이다. 주위에서는 걱정하지만,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한다. 법정에서 할 말이 많다.
김현구 교수는 다른 책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작과비평사 펴냄)에서 "미국은 한 일본 연구가의 연구를 바탕으로 천황을 이용하여 700만 일본군을 저항 없이 항복시킨 것이다. 그리고 공산혁명을 막고 일본으로 하여금 극동의 반공보루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게 만들었다"(217쪽)라고 했다. 그는 히로히토(천황)를 마치 평화의 사도인 것처럼 칭송했는데, '700만 일본군을 저항 없이 항복시켰다'는 주장도 우스운 이야기다. 당시 일본은 군부 자체가 붕괴됐다. 소련군이 참전하니까 '무적 황군'이라고 부르던 100만 관동군이 그냥 붕괴됐다. 이후 히로히토는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자, '도쿄에도 원폭이 투하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항복했다.
이런 역사학자의 고소로, 형사사건의 피고가 됐다. 대한민국을 과연 정상국가로 볼 수 있나? 중국의 동북공정주의자와 일본의 극우파가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1919년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헌법 전문(제헌헌법)을 가진 대한민국은 어디로 갔나. 치열하게 따져볼 생각이다. 순국선열들의 혼령이 지하에서 피를 토하고 있을 것이다.
- 일제 잔재인 식민 사관을 비판하는 동료 학자들이 있나?
요즘은 많이 늘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만 해도 박사학위 소지자가 7~8명이 된다. 이제는 대한민국이 진짜 독립 국가인지, 우리 스스로 자문해야 한다. 대한민국 정부의 교육부는 뭐하는 조직인가. 동북아역사재단이 교육부 소속인데, 이들이 이 지경이 되도록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정말 몰라서 눈 감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동북아역사지도>에서 북방한계선(NLL) 영역을 북한 영토라고 표시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청와대를 필두로 국정원, 검찰, 교육부 등 온 나라가 동원돼 난리를 쳤을 것 아닌가. 그런데 북한의 일부 지역을 중국 땅인 양, 독도를 일본 땅인 양 여기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헌법에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라고 명기되어 있는데도, 국토의 반을 팔아먹고 독도는 일본에 넘겼다. 그런데도 국가기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이러니 일본과 중국에서 한국을 어떻게 보겠는가. 또 북한은? 이런 생각을 하면 자존심이 너무 상하고 화가 나 얼굴이 붉어진다. 하지만 나라를 책임지는 이들은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차라리 몰라서 그런다고 믿고 싶다.
- 닮고 싶은 역사의 인물로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를 들어, 이 둘의 이름을 딴 '천고(遷固)'라는 호를 가지고 있다.(2009년 7월 7일 자 <주간경향> '이종탁이 만난 사람' 인터뷰 중) 만약 본인이 역사 속 인물이었다면, 어떤 사람이었을 것 같나?
조선 후기 사람이었으면, 아마 박세당(朴世堂)처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거나, 윤휴(尹鑴)처럼 사형을 당했을 것이다.(웃음) 운 좋게 처형되지 않았다면, 시골에 은거(隱居)해 글이나 읽고 책이나 쓰면서 평생 불우하게 지냈을 것 같다.(웃음) 그나마 땅이라도 있어서 먹고 살면서 공부하면 괜찮은데….
만약 우리 관점으로 <동북아역사지도>를 만들면, 아마 중국은 동북공정이란 말 자체를 사용하지 못한다. <사마상열전>과 같은 중국 사료에 따르면, 한때 고조선은 산둥반도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사기 <하본기>에는 고조선 강역(疆域)은 중국 하북성 갈석산까지라고 나와 있다. 이런 사료를 바탕으로, 한문(漢文)으로 된 원문을 쓰고 한글과 영어로 "<사마상열전>에 의하면 산둥반도도 한 때 고조선의 광역이다", "<하본기>에 의하면 하북성 일대도 고조선 강역이었다"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에 중국이 뭐라고 하면, '너희 역사서에 나오는 내용이야!'라고 반박할 것이다. 그렇다고 중국이 담기양의 지도 따위로 반박할 것 같은가?
처음 동북아역사재단을 만든 것은 노무현 정권이었다. 재단의 산파 역할을 허성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을 나중에 만났더니, 자신도 이런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며 '식민 사학자에게 농락당한 노무현 정권'이라는 내용으로 책을 쓰겠다고 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설립 취지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 극우파의 역사 침략을 막는 이론을 생산하라'는 것이었는데, 오히려 이에 동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 개탄했다. 당시에는 몰랐다고 하지만, 계속된 문제 제기로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런데도 바로잡지 않고 있다.
- 본인 스스로 학계에서 주류가 아니라고 했다. 주류의 견제 때문인가, 아니면 스스로 주류와 선을 긋고 있는 건가.
이제는 주류니, 비주류니 하는 표현을 쓰지도 않는다. 이미 저쪽 역사관은 학문적으로 끝났다. 유통기한이 지난 학문과 기존 카르텔을 가지고 억지로 유지하고 있다.
나를 포함한 식민 사관 비판 세력은 신주류다. 어차피 우리가 이기게 돼 있다. 그야말로 우리는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역사를 연구해 왔다. 만약, 우리가 저들처럼 사료적 근거도 없이 역사를 해석했다면 옛날에 끝났을 것이다. 소수파가 다수파에 맞서 싸울 때는 확실한 논리적 근거와 학문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 결과 지금 서서히 지형이 바뀌고 있다.
- 역사를 바라보며, 가장 안타까운 순간이 있다면?
세월호 참사를 예로 들어보자. 배가 좌초됐을 때 선장과 선원이 먼저 도망갔다는 사실이 사건을 더 키웠다. 그게 바로 친일파의 모습이다. 선열들의 수많은 희생으로 조선이 해방됐을 때 친일파가 가장 먼저 도망쳤다. 그런 사람들이 미(美) 군정이 시작되자, 슬금슬금 기어들어와 요직에 등용되고, 이승만 정권 때는 권력을 잡아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억압했다.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가 해방 이후에 처단되기는커녕 다시 권력을 장악했다. 이들에게 정치권력은 무엇이었겠는가. '사익 실현의 도구'였을 뿐이다. 세월호 참사가 보여준 선장의 모습이 그 압축판이다. 사익 실현의 도구로 정권을 운용하는 이들은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노블레스 오블리주'는커녕 도망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일제에게 나라를 되찾았을 때 민족정기를 다시 한 번 세웠어야 했다. 8.15 해방이 됐을 때 친일세력을 모두 청산하는 전제 위에, 좌파계열의 독립운동가는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걷고 우파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은 자유민주주의 노선을 걸었다면 지금 어떤 모습일까? 프랑스가 그랬다. 우파계열의 드골이 가장 앞장서서 나치 잔재를 청산했다. 그 토대 위에 좌·우파 정당이 각각 사회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했다. 우리나라도 해방 후 독립운동을 한 세력들끼리 좌우로 나뉜 채 선의의 경쟁으로 나라를 이끌었다면, 좋은 나라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승만 시절, 친일파가 다시 집권하고 이후 군사 쿠데타 정권이 장기 집권을 하면서 우리 사회에 적폐(積弊)가 많이 쌓였다. 이 적폐를 덜어내야, 서구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정상(正常) 국가'가 될 것이다.
-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
'가치를 추구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도 이 직업을 가지고 소위 한국 사회에서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을 여럿 만나봤다. 행복하다는 느낌, 부럽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았다. '성완종 리스트 파문'을 봐라. 성완종 씨나 그에게 로비를 받은 사람들이나, 다 허깨비 인생 아닌가. 그들이 과연 행복할까?
지금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좋다는 공감대가 넓어진 것 같다. 여기에 공적인 가치 추구가 조금 더 보태졌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 공공의 가치를 넓히는 일에 자기 월급의 100분의 1이라도, 500분의 1이라도 기부하며 사는 것도 한 방법이다.
- 이덕일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최고의 지식인인 공자는 개인적으로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 그 인생의 끝에서 공자는 역사서 <춘추(春秋)>를 썼다. 맹자는 이에 대해 '공자가 <춘추>를 쓴 후,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두려움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공자 시대에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가난한 공자는 낙도(樂道)를 이야기했다. 안빈낙도(安貧樂道)가 바로 그것이다. '가난하지만 도를 즐긴다'는 말이다. 젊은 시절에는 그 의미를 몰랐다. 안빈감도(安貧堪道), 즉 '가난하지만 도를 감내한다, 견딘다'는 말이라면 모르겠다. 가난하지만 도를 견딘다는 안빈감도는 말이 되는 것 같은데, 안빈낙도라. 어떻게 가난을 즐길 수 있다는 건지 몰랐다. 하지만 공부를 좀 더 깊게 하다 보니, '안빈낙도가 진정한 자유의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생육신 남효온이 쓴 <육신전(六臣傳)>이 있다. 단종 복위에 목숨을 걸었던 사육신(死六臣)의 전기(傳記)다. 금부도사가 박팽년에게 '어찌해서 이런 화란을 불러일으켰는가?'라고 묻자, 박팽년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이후 <세조실록(世祖實錄)>을 보면, 세조와 그 공신들의 행태는 거의 집단정신병 수준이다. 매일 조정에서 술을 마시고 춤추는데, 결과는 공허하다.
내가 볼 때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편하지 않다'라고 한 박팽년의 말이 '자유'인 것 같다. 누가 나에게 '왜 그렇게 힘든 길을 가십니까?'라고 물으면, 가끔 박팽년의 말을 인용한다. 박팽년과 나를 비교하는 것은 미안한 일이지만, 육체는 고달파도 마음은 편안한 길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저런 굴곡을 겪으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이런 저런 방식으로 돈을 벌어 부유하게 살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게 자유는 아니다. 인생의 가치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추구하고, 그 길로 가는 것이 자유다. 육체적·물질적으로는 손해를 보더라도 자신이 추구하는 길로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적극적인 자유'라고 생각한다.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는 정치경영연구소 조경일 연구원이, 정리는 조경일 연구원과 손어진 비례대표제포럼 간사가 담당했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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