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빨리'. 우리 민족의 대표 특성으로 꼽힌다. 기원을 두고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중 하나가 5000년 동안 유지된 '농경사회'다. 한반도의 기후상 모내기나 논에 물 대는 일, 추수 등 모두 그 시기에 맞춰 집약적으로 일해야 한다. 시기를 놓치면 한해 농사를 망친다. 자연히 농부들은 그 시기에 맞추려 '빨리빨리'를 몸에 익힌다. 자기는 물론 자식들을 굶기지 않으려면 죽어라 일해야 한다. '빨리빨리'가 우리 민족의 특성이 된 배경이다.
일본이 '축소지향'으로 경제를 부흥시켰다면 한국은 '빨리빨리'를 기본으로 '압축 성장'을 이뤄냈다. 물론, 부작용도 컸다. '빨리빨리'는 속성과 편법을 당연시하는 '대충대충' 문화를 만들어냈다.
압축 성장에 따라붙는 건 '위험 감수 문화(risk-taking culture)'다. 뒤처진 것을 하루빨리 만회하겠다는 '빨리빨리' 문화가 '위험 감수 문화'를 낳았고, 이는 다시 ‘빨리빨리’를 가속화시켰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을 '위험 요소'가 많은 사회를 넘어 '잔인한 사회(Brutal Society)'로 귀결 됐다.
'세계 1위 조선업체'라는 현대중공업을 살펴보자. 박정희 시대인 1974년에 세워진 이 조선소는 일본 등 해외와 비교해 후발주자였다. 기술력도 부족했고, 경험도 미천했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 1위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그 배경에는 '빨리빨리'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선박 제작 기일을 앞당기면서 경쟁력을 갖췄다.
하지만 부작용도 상당했다. 일례로 배를 만들면서 수많은 노동자가 죽어야 했다. 현대중공업에서 첫 선박을 만들던 해에는 22명, 그 다음 해부터는 각각 19명, 15명, 23명이 죽었다.
이러한 죽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직영에서 하청으로 '위험 감수 문화'가 전이됐다는 것이다. 그 구조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프레시안>은 현대중공업 하청업체 대표를 어렵게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현재 공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리고 '위험 감수 문화'가 어떻게 하청 노동자에게 전가됐는지 등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 안 죽는 게 이상하다"
지난 6월 11일, 현대중공업 하청업체 직원 강모(44) 씨가 철판 대조립 공정 과정에서 800kg 철판에 깔려 사망했다. 대조립은 각각의 800kg 철판을 용접해 커다란 철판을 만드는 작업이다. 크레인으로 1.5m 높이 철 지지대 위에 800kg 철판을 올려놓고 가용접한 후, 크레인에서 철판을 분리하고 본용접을 한다.
800kg 철판 당 철 지지대는 세 개가 기본이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가용접도 하지 않은 채 크레인에서 철판을 분리했다.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지지대가 부러지면서 사단이 난 이유다. 가용접만 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빨리빨리'가 부른 참사다.
"지난 6월 발생한 사고는 한마디로 말해 기성(톤당 작업단가)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사고가 난 업체는 현대중공업에 들어온 지 채 한 달도 안 된 곳이었다. 현대중공업 협력업체협의회에 가입도 되지 않은 곳이다. 전 업체가 원청에서 '후려치는' 기성을 감당하지 못하고 퇴출당한 뒤, 들어온 곳이다. 물론, 신규 업체는 후려친 기성을 그대로 받았다. 그러니 문제가 생겼다. 기성이 너무 낮아 인건비를 아끼는 수밖에 없다. 원래 한 달 동안 진행해야 하는 공사를 보름 안에 마무리하는 식이다. 그래야 겨우 돈을 맞춘다."
현대중공업 하청업체 A대표는 "그러니 사고가 안 일어나겠는가"라고 반문하며 "이런 상황 속에서 일하는데 사람이 안 죽는 게 더 이상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철판 가용접도 안 하고 크레인에서 철판을 분리한 일이나, 철 지지대를 제대로 설치하지 않은 일 등 모두 공사 기간을 줄이다 벌어진 일이라는 이야기다.
조선소는 인건비가 공정비의 전부를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 보니 노동시간을 줄이는 게 공정비를 줄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기성을 절반으로 삭감하면 그에 맞춰 한 달 안에 끝내야 하는 공정을 보름 만에 끝낸다. 하청업체는 그렇게 마진을 남긴다.
문제는 이렇게 기성을 후려치는 일이 일개 업체에만 진행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A대표에 따르면 지난 6월 기준으로 현대중공업 하청업체협의회 272개 소속업체 중 60%가 임금을 주지 못했다. 퇴직금과 임금을 주지 못해 노동부에 피소된 업체 사장도 상당하다.
이런 상황에서 안전펜스를 설치하거나 안전교육을 하는 건 쉽지 않다. 안전교육 시간조차 노동시간으로 산정돼 임금을 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견디다 못한 업체가 공사 기간을 줄이면서 지난 6월 같은 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원청에서 머리를 쓰고 있다"
그렇다면 원청인 현대중공업은 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기성을 책정하는 걸까. A대표는 "원청에서 머리를 쓰고 있다"고 해석했다.
"기성을 깎은 것은 3년 전부터였다. 저가로 배를 수주했다는 이유였다. 그러면서 1000만 원 주던 기성을 500만 원으로 내렸다. 지금은 조선 경영이 어렵다며, 2018년도까지는 8% 적자라면서 공식적으로 우리(하청업체들)가 4%, 직영이 4% 손해를 보자고 했다. 하지만 이건 겉으로 내세우는 주장에 불과하다. 지금 보이는 행동은 하청을 빨아먹을 때까지 빨아 먹고 뱉겠다는 심보다."
7월 기준으로 현대중공업 내 48개 하청업체가 폐업했다. 대부분 후려친 기성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도산했다는 게 A대표의 증언이다.
주목할 점은 그렇게 폐업한 하청업체의 빈자리에 단기 업체가 들어온다는 점이다. 현대중공업 하청업체로는 정식 등록업체, 한시 등록업체, 그리고 단기 등록업체가 있다. 단기 등록업체는 3개월만 일하는 업체를 말한다. 여기는 협의회에 가입도 안 할뿐더러, 등록업체가 내야 하는 공탁금도 내지 않는다. 48개 업체가 폐업하면서 단기 등록업체는 약 90여 개 더 생겨났다.
A대표는 "원청 현대중공업과 하청업체 간 맺은 도급계약서에는 우리를 원청 마음대로 폐업하지 못하게 돼 있다"며 "그렇다 보니 기성 압박으로 하청이 스스로 자폭하게 한다. 정식 등록업체를 죽이는 방식으로 기성을 후려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말 안 듣는 정식 등록업체를 뽑아낸 자리에 단기 등록업체를 넣은 뒤, 원청이 원하는 대로 일을 맡긴다는 주장이다. A대표에 따르면 현대중공업은 올해 1월 1일부터 하청업체 평가제를 도입했다. 말 안 들으면 점수를 적게 줘 퇴출 업체로 만들겠다는 의도다. '노동의 유연화'를 넘어 '하청의 유연화'가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방식은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구조를 더욱 견고히 하고 있다. 지난 6월 사고가 발생한 업체도 정식 등록업체가 폐업한 뒤 들어온 3개월 단기 등록업체였다.
하창민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장은 "'빨리빨리' 공정을 하니 일하다 사람 죽는 게 다반사가 됐다"며 "이런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지금과 같은 죽음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21세기 대한민국 조선업이 세계 1위에 올랐다지만 배를 만드는 사람들의 자세는 여전히 40년 전, 개발도상국에 머물러 있다. 하드웨어는 발전했으나 이를 움직이는 시스템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이야기다. 이는 우리 사회를 '잔인한 사회(Brutal Society)’로 낙인찍고 있다.
- 은폐되는 사람들
(이 기획 시리즈는 사단법인 ‘다른내일’준비위원회와 <프레시안>의 공동기획으로 제작되었으며, 이후 별도의 책자와 영상제작으로 발행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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