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은 받지 않았다. 질문을 하는 것과 관련해 청와대와 기자단 간에 의견 불일치도 있었지만, 당초 질문을 '두 개 정도만 얘기해볼 수 있다'는 취지로 제안한 청와대의 잘못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국정원 해킹 의혹이나, 메르스 사태 책임 소재, 경제인 사면과 같은 질문이 나올까 봐 두려워했던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오랜만에 '국민' 앞에 모습을 드러냈으나 그 내용도 '녹음기'를 트는 수준이었다. 경제 관련 법안(박 대통령 표현에 따르면 '경제 활성화 법안')을 처리하지 않고 있는 국회, 노동 시장 개편(박 대통령의 언어로는 '노동 시장 개혁')에 미온적인 노동계, 이 두 집단을 '절박함을 모르는 세력'이라는 낙인을 찍는 데 그쳤다. 즉 국민들에게 국회와 노동계 등을 '반 개혁 세력'으로 일러바친 셈이다. 이런 박 대통령식 '소통'은 이제 익숙하다.
이번 담화는 또한 이례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역대 대통령들은 임기 반환점을 돌 무렵 광복절 경축사나 광복절 특별 담화 등을 메시지 전달 창구로 활용해왔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광복 70주년의 의미를 연일 강조하고 있으면서도, 광복절을 불과 9일 남기고 별도의 '대국민 담화'를 냈다. '메시지 쪼개기'다.
국정 기조를 가다듬고, 통일 외교 문제까지 포괄해야 할 광복절 담화에 앞서 박 대통령이 강력히 추진하는 노동 개편 과제 등을 별도로 강조해야 한다는 '전략'이 녹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내용은 없다. 실업 급여 수준을 올리고, 공공기관에 임금피크제를 전면 도입한다는 내용이 포함됐지만, 이는 다른 부처나 정당이 발표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들이다.
이날 담화문은 그간 국무회의 석상의 발언이나, 대통령이 주재하는 각종 경제 관련 회의체의 모두 발언과 별다를 게 없었다. 청자만 '국민'으로 설정했을 뿐, 담화문이 남긴 것은 공학적인 '메시지 기획'이었을 뿐이었다.
이런 방식의 기획이 줄 수 있는 효과는 뻔하다. 대통령에 대한 지지층을 결집이다. 이를 통해 하반기 정국을 청와대가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메시지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다른 현안에 철저히 침묵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유승민 축출했는데도 '개혁'은 답보…9월 국회 노린 여론전 성격
박 대통령의 이번 담화는 지난 6월 25일의 '배신의 정치' 발언과 그 이후 유승민 축출 등 일련의 흐름 속에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지난 2년 반 가까운 시간을 박 대통령은 국정원 파동 수습에 허비하고, 정치적 반대파 제거에 집중해왔다. 메르스 사태와 같은 외생 변수도 터져 나왔다. 경제는 더 어려워지고 양극화는 심화됐다.
그 사이 새누리당은 먼저 변했다. 개혁 성향의 여당 지도부가 등장했고, 국민연금 개혁은 청와대의 뜻대로 흘러가지 못했다. 정국 주도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두려움은 결국 '유승민 숙청'을 낳았고, 이를 계기로 박 대통령은 노동 시장 개편 등 과거에 수차례 강조해왔던 정치 이슈를 밀어붙이고 있다. 그것이 이번 '담화'로 이어진 셈이다.
청와대의 하명을 받은 여당은 이제 겨우 전열을 가다듬고 '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담화는 9월 국회를 앞두고 국민들에게 당정청이 마련한 법안을 설명하는 취지인 것처럼 느껴진다.
'국민을 보고 가겠다'는 의지는 이미 지난 '6.25 발언'에 녹아있다.
"정치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를 먼저 생각하고, 정부의 정책이 잘 될 수 있도록 국회가 견인차 역할을 해서 국민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정부와 정부 정책에 대해 끊임없는 갈등과 반목, 비판만을 거듭해 왔습니다. 그 단적인 예로 지금 정부가 애써 마련해서 시급히 실행하고자 하는 일자리 법안들과 경제 살리기 법안들이 여전히 국회에 3년째 발이 묶여 있습니다. 가짜 민생법안이라고 통과시켜주지 않고, 청년들의 일자리 창출을 해볼 수 있는 기회마저 주지 않고 일자리 창출을 왜 못하느냐고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런 법들을 통과시켜주지 않으면서 정부에만 책임을 물을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
진정 정부의 방향이 잘못된 것이라면 한번 경제 법안을 살려라도 본 후에 그런 비판을 받고 싶습니다. 정치적 대립으로 인해 국민들에게 꼭 필요하고, 정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제때 해내지 못하는 일이 일상화되면서 정치의 문제가 경제와 민생을 위협하는 상황이 지속되어 오는 데도 정치권에서는 정부 비판과 반목만을 거듭해 오고 있습니다.
(…)
이제 우리 정치는 국민을 중심에 두는 새로운 정치를 하는 정치인들만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정치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국민들뿐이고, 국민들께서 선거에서 잘 선택해 주셔야 새로운 정치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담화는 내놓았지만 소통은 없었다
이날 발표된 담화문도 별다를 게 없다. 국무회의냐, 담화냐, 형식의 차이였을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의 '동참'과 '이해'를 구하는 취지의 말을 네 차례 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머리말로 한 번, 현 상황이 '경제 위기'임을 인식시킨 후에 한 번, 노동, 공공부문, 금융, 교육 개혁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국회 법안 처리를 압박한 후에 한 번, 그리고 마무리 발언을 통해 또 한 번, 이렇게 4번이다.
박 대통령은 담화문을 시작하며 "저는 오늘, 우리 경제의 기초를 튼튼히 하고, 재도약을 위한 정부의 국정운영방안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한다"며 "그 계획과 추진은 국민 여러분의 동의가 있어야 하고 적극적인 동참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선 것도 국민여러분의 협조와 협력이 절실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이어 "국민 여러분께서 마음을 모아 힘껏 지지해 주신다면, 역대 정부에서 해내지 못한 개혁을 반드시 이뤄낼 것"이라며 "우리 모두가 한배를 타고 있는 운명공동체라는 인식으로 경제 재도약을 위해 힘을 모아 주실 것을 간곡히 요청 드린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국정 과제에 대한 설명을 마친 후 "오늘 저는 절박한 심정으로 정부가 추진해갈 경제혁신 방안을 설명 드리고, 모든 경제주체들과 국민 여러분의 협력을 간곡하게 부탁드렸다"며 "이제 이 개혁을 반드시 성공시켜서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해 나가는 길에 함께 나서주실 것을 당부 드린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마무리 발언으로 "이런 노력은 정부와 대통령의 의지만으로는 해낼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국정의 중심은 국민이고 혁신과 개혁의 동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민여러분이 함께 손잡고 동참해 주실 때만이 나라와 가족과 개인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다. 나라와 개인과 가족의 미래를 위해 조금씩 양보하고 서로 협력하며 힘찬 행진을 해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했다.
'국민'을 청자로 강력히 설정한 이같은 모습은 과거에도 찾아볼 수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 2013년 야당이 정부 조직법을 통과시키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국적자'였던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내정자가 스스로 사퇴하게 되자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당시에는 민주당(현 새정치민주연합)을 '반 개혁 세력'으로 설정, "하루 빨리 정부조직 개편안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도록 국민 여러분께서도 힘을 모아주실 것을 부탁드린다"고 했다.
국정이 막히고 절박할 때마다 박 대통령은 '국민'을 대화 상대로 설정했다.
지금 박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은 좀처럼 오르지 않고 있다. 답보 상태다. <한국갤럽>이 발표한 7월 다섯째 주 박 대통령의 직무 수행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 34%는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57%는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10%는 의견을 유보했다. 최근 6주간 긍정 평가와 부정 평가 간 격차는 평균 25%포인트를 기록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여당 지도부를 갈아치우고 자신이 설정한 '개혁' 과제 수행의 길을 닦은 후에도 지지율이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박 대통령의 이번 담화로 단기간 지지율은 상승할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이 대국민 접촉을 늘려가면 지지율은 그만큼 따라오게 돼 있다. 문제는 방식이다. 질문을 거부하고,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말만 내놓는 방식의 소통은, '고정 지지층' 이상에게 어필하기 어렵다. 현 상황의 30%대 초반 지지율은 정확히 박 대통령의 고정 지지층으로 보는 게 맞다.
담화는 했지만, 소통은 없다. 지지층에 호소는 했지만, 확장성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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