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으로부터 국가의 책임을 끌어내 국내외의 주목을 받은 센난 석면 피해 소송의 의미를 살리고 기억하고자 시민의 모임은 배상금을 갹출하여 '센난 석면의 비'를 세웠다. 행사장에는 전 현직 시장이 참석했고 전국에서 많은 석면 피해자와 석면 추방 운동가, 피해 소송을 도운 각 사회단체 관계자들이 모였다. NHK 등 여러 방송사의 카메라가 줄지어 섰고, 방송 차량까지 좁은 골목에 들어서 이날 행사가 전국적인 관심사임을 알게 했다.
행사가 시작되자 유오카 대표가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기념비의 명칭이 '센난 석면의 비'입니다. 아마 '센난 석면 피해자의 비'라는 제목을 생각하셨을 분들은 조금 의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기념비가 석면 피해자와 소송을 기억하기 위한 것임은 맞습니다. 몇 년 전 90세의 일기로 돌아가신 석면 피해자 다나카 할머니의 말처럼 센난에서 석면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도 했고 또 아프게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 비의 이름을 '센난 석면의 비'라고 했습니다."
이날 행사에 대한 유오카 대표의 복잡한 심경이 얼굴에서 읽혔다.
여러 사람의 축사가 이어졌고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를 대표해서 참석한 나는 같이 간 스즈키 씨의 통역 도움으로 감사패를 전하며 축하했다. 센난 지역에 많은 재일 한국인 피해자를 위해 애쓴 시민의 모임과 유오카 대표에게 특별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제막식 행사가 끝난 후 인근 마을회관에서 성대한 잔치가 열렸다. 시민의 모임 회원들이 한 곳에서 직접 튀김 음식 등을 만들었고 상마다 갖가지 초밥이 놓였다. 참석자들은 서로에게 술을 권하며 그간의 노고를 위로했다.
'센난 석면의 비'가 세워진 곳은 오래 전 동네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노는 곳이었다고 한다. 일본 전역으로 이어지며 오래된 절을 이어주는 순례자의 길 옆이고 유오카 대표가 사는 집 바로 옆이기도 했다.
제막식 전날 저녁, 필자 일행을 집으로 초대한 자리에서 유오카 대표는 자신과 가족이 석면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오래 전에 석면 방적 회사 '유오카석면'을 설립했다. 당시 센난에는 이미 60여 개의 석면 방직 회사가 있었고 유오카석면은 6개의 공장을 둔 제법 큰 규모에 속했다. 당시 센난에서 석면 산업은 사실상 군수 산업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석면 물자 수요가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수요로 이어졌다.
맥주 몇 순배가 돌았을 때 유오카 대표가 말했다.
"석면 사업을 하는 집안 사람으로서 석면 피해자 모임을 주도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사람들이 요청했을 때 처음엔 거부했었어요. 센난 지역의 석면 사업자와의 관계도 있었고 석면 사업을 하는 집안 사람이라는 부담 때문이었죠. 하지만 피해자들을 위해 무언가 하긴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처음에는 소송이 2년 정도면 될 거라고 봤는데 5배인 10년이 걸렸습니다."
1942년생인 유오카 대표는 1962년 교토 대학에 입학한 후 학생 운동과 정당 운동을 하다 제적되었다. 1968년부터 집안의 가업인 방적 사업을 이었지만 석면을 원료로 사용하지는 않았고 담요, 카펫 등을 만들었다. 2005년 6월 29일 구보타 쇼크가 터졌고 유오카 대표는 <아사히신문>의 기사를 보고 석면 문제를 알게 된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석면 방적업을 해온 가족 친지 중에서도 석면 질환 피해가 있었는데 둘째와 셋째 작은 아버지와 그들의 자녀들에게 석면폐, 폐암, 흉막비후가 진단되었다.
구보타 쇼크 이후 센난 지역에서의 석면 피해에 대한 조사가 지역 시의원인 하야시 씨에 의해 시작되었고 선대로부터 들어 알고 있는 지역의 석면 산업에 대해 알려주면서 자연스럽게 그와 같이 시민의 모임을 조직하게 되었다.
"사업자 가족의 일원으로서 노동자와 피해자의 석면 문제를 즉 정반대의 세계를 보게 된 거죠."
지역 내 사업가의 자녀로서 어려움 없이 자랐던 그는 석면 문제를 통해 주변에 극빈했던 노동자의 삶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 1년 후배인 야부이치라는 동네 친구가 있었는데 우리 공장 바로 옆에 있는 다른 석면 공장에 그 친구 어머니가 노동자로 다녔대요. 석면 문제를 조사하러 다니면서 그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친구는 어릴 적 어렵게 살았던 이야기를 하면서 허허 웃었고 저는 속으로 울었어요."
야부이치 씨는 석면폐 환자로 국가 소송의 원고였는데 판결이 나오기 전에 사망했다.
유오카 대표는 센난의 석면 문제를 풀어가는 시민운동 과정에서 중요한 세 가지 문제를 알게 되었다.
첫째, 일본 사회의 빈곤 문제. 둘째, 일본이 갖고 있는 사회 문제. 셋째, 일본에 사는 재일 한국인의 차별 문제.
그는 재일 한국인 문제의 사례로 자신과 2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마쯔시마 가나 씨의 이야기를 했다. 그녀 가족은 오사카 지역을 전전하여 극빈한 삶을 살았는데 11살 때부터 센난과 붙어 있는 한난의 석면 공장에서 일했고 나중에 석면 공장 노동자와 만나 결혼했다. 한난의 석면 공장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 센난에서 옮겨간 경우가 많았다. 특히 한난에 있는 석면 공장에 한국인 노동자들이 많았고 나중에는 이들이 운영하는 소규모의 석면 공장들이 다수 생겼다.
"세상에 슬픈 과거를 가진 사람들이 많겠지만 같은 세대로서 이들 두 사람의 삶을 통해 그렇게나 어렵게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점이 이 운동을 계속하게 된 동력이 되었죠."
센난에서 석면 피해자 운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모두 "왜 가까이 있던 주민과 피해자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지 못했던가"라는 의문과 부채 의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
유오카 대표는 어릴 적 어른들로부터 "석면은 조선인들의 일이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고 주변에 조선인들이 많아 그런 건 줄 알았다고 했다. 2010년 10월 26일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석면 심포지엄에 참석한 유오카 대표는 사진 한 장을 보여주며 "센난의 한 석면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1940~1950년대 찍은 기록 사진입니다. 이들 중 상당수가 문 씨, 김 씨 성을 가진 조선인이었어요. 한국의 시민운동이 센난의 석면 피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유오카 대표는 그 사진이 자신의 집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시민의 모임을 하면서 집에 있는 자료를 살펴보다가 그는 석면 산업이 전쟁 중에 군수 산업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를 보게 되었는데 센난 석면 산업계가 전투기를 만들어 '석면호'라는 이름을 지어 국가에 헌납하고 그 비행기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이었다.
센난의 국가 배상 소송의 원고 가운데 한국인이 몇 명이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정확히 알지 못한단다. 상당수가 한국인 1세 또는 2, 3세인 것으로 추측되지만 본인들에게 직접 묻기 어렵단다. 많은 경우 일본 국적으로 귀화를 했고 사회적 차별 등의 문제 때문에 한국계임을 밝히지 않고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2014년 12월 22일 열린 '2014 환경 피해자 대회'에서 국내외 환경·사회단체들은 국제 부문 환경상인 레이첼 이정림 어워드 수상자로 시민의 모임 유오카 카즈요시 대표를 선정했다. 참고로, '레이첼 이정림 어워드'는 석면암인 악성중피종 환자로서 아시아와 세계의 석면 사용 금지를 위한 국제 활동에 앞장서다 2011년 사망한 고 이정림을 추모하고 '석면 위험과 석면 피해의 고통이 없는 사회를 만들자'는 그녀의 뜻을 기리기 위해 국내외에서 석면 추방 운동에 앞장서온 시민단체들이 함께 제정했다.
유오카 대표는 행사 주최 측의 초대에 응하지 못한다며 정중히 거절 의사를 밝혀왔는데 일부 패소한 원고들을 포함한 모든 원고들과 배상금을 공평하게 나누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을 내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이 상패를 올해 4월 열린 '센난 석면의 비'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센난에 갔다가 유오카 대표에게 직접 전해주었다.
다음은 상패의 문구다.
"유오카 카즈요시 님은 '석면 마을'로 불려온 일본 오사카부 센난 지역에서 발생한 다수의 석면 피해 책임이 일본 정부에 있다는 점을 국가 배상 소송의 대법 확정 판결을 통해 확인하는 쾌거를 거두는 일에 앞장서왔습니다. 특히 센난 지역의 석면 피해자들 중에는 다수의 재일 한국인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들을 돕기 위한 활동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왔습니다. 공식적인 한일 관계가 악화일로에 있는 시기에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이자 사회운동가인 유오카 선생의 존재와 역할은 한일 간 시민 사회의 신뢰 구축과 교류에서 매우 중요한 귀감이 됩니다. 이에 격려와 감사의 마음을 담아 감사패를 드립니다."
(최예용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 집행위원장은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으로도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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