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과 녹색당,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는 '함께 사는 돈 탐방기'라는 공동 기획을 시작합니다.
지금은 '각자 생존'의 시대라고 합니다. 노인 빈곤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인 48.1%에 달하고, 체감 불평등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장년층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사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 점점 높아지고 있는 기본 소득에 대한 관심도 이런 현실의 반영입니다.
이 기획에서는 우리 사회의 소득 실태를 진단하고, 지역과 현장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대안을 모색해 보려고 합니다. 각자 생존이 아니라 함께 사는 길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많은 관심과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기본소득 전국투어 세 번째 지역은 광주였다. 전날 벌교에서 함께 행사를 진행하고 잠자리를 선뜻 내어준 최혁봉 전남녹색당 운영위원장의 트럭을 얻어 타고 투어 네 번째 날의 여정을 시작했다. 지붕이 높고 산골 경치가 한눈에 보이는 근사한 집에 모처럼 들렀는데, 한밤만 머물고 떠나려니 염치없게 아쉬움이 들었다. 이런 집에서 사계절은 어떤 모양일까? 짐작 가지 않는 그림을 그려보며 새 행선지인 광주시 학교밖 청소년 지원센터로 향했다.
이번 전국투어 내내 가는 곳마다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 주제가 교육이었다. 사람들은 기본소득의 재원만큼 교육에 큰 관심을 보였다. 두 가지 주요 이슈가 있다. 하나는 기본소득이 실현된 후 예상대로 노동시간이 단축된다면 사람들이 새로 주어진 시간을 활용할 교육 인프라가 형성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 또 하나는 녹색당에서 지향하는 체제의 생태적 전환을 위해서는 기본소득과 함께 문화적, 교육적 실천이 동반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교육은 기본소득이라는 현금지급 정책에 새로운 생활양식의 근거가 될 윤리를 제공함으로써 생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해야 한다.
덴마크, 민주주의 교육이 복지 시스템의 기반
우리는 이민철 광주 학교밖 청소년 지원센터장을 만났다. 마침 그는 얼마 전 덴마크에 직접 방문해 교육 시스템을 살펴보고 왔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덴마크의 사회와 교육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북유럽 국가중 핀란드의 경우 집권당에서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등 기본소득 실현이 기대되는 정치적 상황이지만 덴마크에서는 기본소득에 대한 담론이 활발하지 않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새로운 대안이 필요 없을 만큼 기존의 복지 시스템이 잘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민철 센터장이 보고 온 덴마크는 민주주의 교육이 뿌리를 내린 나라였다. 덴마크 교육의 기반을 다진 사상가 그룬트비의 목표는 “엘리트에 지배당하지 않는 평민을 기른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에 걸맞게 덴마크에서는 어릴 때부터 민주주의 교육을 한다. 다른 게 아니라 타협과 협상, 그리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연습이다. 협상은 생각하는 시민을 기른다. 이러한 교육을 통해 성장한 시민들은 사회적 필요가 발생할 때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협회나 협동조합 등을 조직한다. 조직을 통해 사회에 공통의 의견을 제시하고,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절차가 학습되어 있다. 이렇게 형성된 두터운 시민사회는 개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문제가 생기면 결국 개인이 정부나 기업 같은 큰 조직을 향해 ‘투쟁’에 돌입하게 되는 한국사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국가는 생각하는 시민을 신뢰한다. 이 센터장은 "우리나라는 교육의 권한이 국가에 있지만 덴마크에서는 시민에게 있다"고 말했다. 예컨대 덴마크에서는 학생이 15명만 모이면 학교를 세울 수 있다. 전체 학생의 15%가 이러한 자유학교에 다니고 있다. 국가로부터의 승인도 필요하지 않다. 무엇을 배울 것이냐는 문제부터 시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공교육은 전문적인 인력을 키워내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이를 위해 상대평가와 점수를 통한 경쟁을 강화하는 대신, 학생 한 명 한 명에 대한 맞춤형 교육을 실행한다. 개개인이 자기 고유의 역량을 탁월하게 펼칠 수 있도록 다양한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스템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독일에 국토를 빼앗기고 황무지에서 재건을 시작해야 했던 19세기 중반으로부터 150년에 걸친 끊임없는 학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오늘날에도 덴마크 교육은 평등을 강조함으로써 높은 수준의 복지 시스템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을 계속한다. 제도는 그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문화와 교육이 동반될 때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덴마크의 복지는 시민들과 국가의 동등한 권력관계 위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국가가 시민을 통제 대상으로 보는 한국 사회에서 복지와 교육의 양상은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부족한 인간'의 증명을 요구하는 복지
자생적인 민주교육에 희망을 걸고 있는 이민철 센터장은 학교 밖 청소년들과 함께 대안학교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학교인 '래미 학교'는 민주학교를 만들기 위한 실험이다. 삼십여 명의 학생들이 학년제 없이 다닌다. 커리큘럼은 학생, 교사, 학부모가 함께 기획한다. 그 중 어떤 것을 들을 지는 본인의 선택에 따른다. ‘래미’라는 이름도 학생들이 ‘미래는 뒤집어야 보인다’는 의미를 담아 직접 지은 것이다.
학교를 원하지 않는 청소년들과는 일터를 만들고 있다. 이미 시장 안에 목공 공방을 열어 일거리를 받고 있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벗어나 일찍 사회에 진입하는 청소년들은 보호 장치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들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관계망을 스스로 조직하고 일자리를 만들어 생활의 자립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 목표다.
"이 친구들이 당당하고 무지 멋있어요."
이민철 센터장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하지만 한국의 복지는 이들이 계속 멋있게 성장하는 것을 지원하는 방식이 아니다. 탈학교 청소년들을 위한 예산을 책정받으려면 오히려 이를 숨겨야 한다. 이 센터장의 표현에 따르자면 "우리가 얼마나 짠한지 보세요"라고 말하며 스스로 낮춰야 한다. 그는 이것이 복지의 한계라고 못 박았다. 당당하게 자신의 역량을 증명하는 순간 지원이 끊기고, 무언가 부족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드러내고 자존감을 깎아내릴 때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청소년에게 기본소득을 준다면?
이런 점에서 이민철 센터장은 시민의 권리로서 주어지는 보편적인 기본소득에 긍정적이다. 그가 만나는 학교 밖 청소년 중에는 진보적인 부모의 영향으로 대안교육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으로 가정에서 방치된 경우이다.
"학력 같은 배경도, 기술도, 부모의 지원도 없이 사회로 나오면 위험하고 단순작업만 반복해야 하는 저임금 노동뿐이죠. 우리 사회에서 가장 밑에 있는 노동시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기본소득이 이러한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 가지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방향으로의 상상은 기본소득 자체의 교육적 효과이다.
"부모 주머니 털어서 받는 용돈은 막 써도, 알바해서 벌어들인 자기 돈은 함부로 안 쓰거든요."
이 센터장은 청소년기부터 자기 앞으로 돈이 들어온다면 경제생활에 대한 인식이 발전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청소년들이 자신의 경제적 권리에 눈을 뜰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미성년자에 대한 지원은 대개 양육수당으로 부모에게 지급되지만 기본소득은 청소년과 부모 간에 금액에 대한 권한을 어떻게 설정할지 협상하고 합의하는 장치를 만들어 줄 수도 있겠다는 내용이 이어졌다.
"예컨대 위임장 같은 것을 만들어서 권한 양도에 대한 결정은 청소년들이 직접 내리게 할 수도 있겠죠,"
곧장 민주주의 교육의 실천으로 구체화 되며 나아가는 이 위원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교육 주체들을 통한 기본소득 운동의 확장이 기대되었다.
시민에 의해 구성되는 공공성을 생각하다
저녁에는 광주영상복합문화관에서 광주 녹색당과 노동당 광주시당이 공동주최한 '기본소득 삼색토크: 상상하라, 기본소득'이 있었다. 금민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운영위원장과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그리고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운영위원인 내가 참여해서 앞서 만난 이민철 센터장의 사회로 대화를 나누었다.
노동시간 단축의 키로서의 기본소득, 공유자원의 배당을 통한 기본소득, 기본소득 운동이 가지는 실천적 의미 등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인터뷰 때와 달리 말을 아끼며 사회를 보던 이 센터장은 마지막으로 “기본소득은 ‘민주주의 소득’이구나. 민주주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기본소득이 가능해질 것 같다”는 말을 남기며 토론회를 마무리 지었다.
기본소득에 대한 합의가 가능한 사회로 나가기 위한 기본소득 운동의 역할, 국가에 의해 설계되고 주어지는 공공성이 아니라 시민에 의해 구성되는 공공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한 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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