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대로입니다. 국정원은 모든 걸 자살한 임 과장에게 떠넘겼습니다. 임 과장이 RCS 구입을 주도했고, 파일도 자의적으로 삭제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덧붙였습니다. 불법적인 민간인 사찰은 없었다고요.
이에 대해 야당과 언론은 그럼 임 과장이 파일을 삭제할 이유도, 자살할 이유도 없었던 것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답은 이미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 과장이 압박감과 부담감을 느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증좌로 유서를 들었고요.
어차피 평행선 위 공방이 될 게 뻔한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각도를 돌려 야당도, 언론도 별로 주목하지 않는 문제 하나에 집중하겠습니다.
우선 조각 사실부터 추리겠습니다. 어제 국회 정보위 보고과정에서 나온 조각 사실 세 개인데요. 첫째, RCS 구입 문의 이메일 계정인 '데빌앤젤(devilangel1004)'의 주인이 임 과장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임 과장이 51개의 파일을 삭제한 시점은 17일 새벽이었다고 했습니다. 셋째, 임 과장이 관리한 타깃들은 모두 해외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세 개의 조각 사실들에 한 가지 조각 사실을 추가하겠습니다. 이건 어제 국회 정보위에서 나온 게 아니라 지난 16일 새정치연합 김광진 의원이 폭로한 사실인데요. '데빌앤젤'과 동일한 ID의 블로그에서 스파이웨어 설치를 유도하는 앱이 심어져 있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렇게 네 개의 조각 사실을 갖고 이리저리 조합을 맞추다보면 아주 의미심장하면서도 흥미진진한 미스터리가 도출됩니다.
해킹 타깃이 모두 해외에 있는 외국인이었다면, 그것도 숫자가 극히 제한된 극소수 외국인만이었다면 왜 굳이 블로그에 스파이웨어를 심어 무차별적인 감염을 시도했을까 라는 의문은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방법보다는 오히려 천안함 의혹을 제기했던 안수명 박사에게 했던 것처럼 콕 찍어 악성 코드가 숨겨진 이메일을 보내는 식의 방법이 더 적합했던 것 아닐까 라는 의문 역시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의문은 이미 얼추 제기됐으니까 그냥 환기만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새롭고도 더 중요한 의문점이 있습니다.
문제의 블로그 게시글은 최소한 17일 오후까지는 남아 있었습니다. 김광진 의원이 폭로한 후 다른 언론이 문제의 블로그에 들어가 확인해 기사를 내보낸 시점이 17일 오후였으니까 이때까지만 해도 문제의 블로그 게시글은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겨레>가 블로그를 조사한 20일에는 게시글이 존재하지 않았고요. 이 블로그와 연동돼 있던 다른 블로그도 접속 불가능 상태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럼 문제의 블로그 게시글은 언제 삭제된 걸까요?
이 의문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는 이유가 있습니다.
국정원 보고에 따르면 임 과장이 51개의 파일을 삭제한 시점은 17일 새벽입니다. 1시 몇분부터 3시 사이라고 합니다. 헌데 같은 날 오후까지 블로그 게시글은 삭제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인데요. 임 과장이 문제의 소지를 없애려 했다면 블로그 게시글부터 삭제하는 게 상식적인 수순이었을 겁니다. 국정원 내부의 파일은 정치권이나 언론의 추적권 밖에 있었던 반면에 블로그 게시글은 완전 노출된 상태였으니까요. 따라서 블로그 게시글부터 없애고 그 다음에 파일을 삭제하더라도 했어야 하는데 임 과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였을까요?
이 의문이 합리적이라면 그 대답은 매우 의미심장할 겁니다. 외부의 블로그보다 내부의 파일을 먼저 삭제해야만 했던 특별한 사유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문제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게 있습니다. 블로그 게시글 삭제 시점입니다.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20일에 가서야 블로그 게시글이 삭제된 사실이 확인됐을 뿐 그게 정확히 며칠 몇시에 삭제됐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17일 오후부터 20일 사이로 추정될 뿐입니다.
이 지점에서 가정해 보죠. 블로그 게시글이 18일 이후에 삭제됐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한 마디로 말이 안 됩니다. 18일은 임 과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날입니다. 따라서 18일 이후에 블로그 게시글이 삭제됐다면 이는 임 과장이 아닌 제3자가 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모든 일을 '임 과장 단독' 또는 '임 과장 자의'로 몰아가는 국정원 주장과는 배치되는 정황이 도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정확히 언제 블로그 게시글이 삭제됐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국정원은 의혹을 해소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의혹을 제기할 단서를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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