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 박근혜 대통령이 '통일대박'을 이야기한 지 1년 반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이에 맞춰 대통령 직속기구로 통일준비위원회(이하 통준위)가 출범한 지는 1년이 됐고요. 여기에 광복 70주년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올해가 남북관계의 물꼬를 틀 수 있는 적기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2015년이 절반 정도 지난 현재까지 상황을 보면 박근혜 정부는 올해도 남북관계를 풀려는 의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최근 유엔 북한 인권사무소가 서울에 개소한 데 이어 정부가 독자적인 대북제재에 나서면서 여전히 남북 간 분위기는 냉랭한 상황입니다.
정세현 : 박근혜 정부가 남북관계를 국내 정치용으로 쓰는 것 같습니다. 잇따른 실정으로 인기가 떨어지고 있는데, 통일 문제를 부각시켜서 보수를 결집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떨어지는 지지율과 레임덕 상황을 그나마 버텨주게 하는 힘이 '보수결집'이기 때문입니다.
연초에 박근혜 정부는 올해 광복절인 8.15에 거창한 행사를 할 것처럼 선전했습니다. 통준위의 민간 부위원장이 광복 70주년 행사 준비위원회의 공동위원장을 맡게 할 정도였습니다. 이는 8.15를 계기로 남북관계의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겠다는 정치적 의지의 표현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국민들에게 제시한 거창한 비전이나 화려한 청사진과는 달리 남북관계는 악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됐습니다. 최근 상황을 되짚어보자면 북한은 6월 15일, 비록 전제조건을 여러 가지 달긴 했지만 대화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그날 오후 북한의 성명에 대해 '부당한' 전제조건을 달았다면서 한 번에 이를 걷어차 버렸습니다. 여기에 인권사무소 개소식까지 하는 것을 보니 박근혜 정부가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것을 통해 뭔가를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메르스(MERS·중동 호흡기 증후군) 때문에 박근혜 정부에 대한 국민 여론이 아주 나빠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 북한이 남한에 험한 말을 쏟아내고 위협을 가하면서 군사적인 긴장을 높이면 국내정치에 대한 관심이 이쪽으로 쏠리게 됩니다. 위기에 빠진 국내 정치에서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겠다는 계산으로 이런 식의 반응을 한 것인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한미일 6자회담 수석대표들이 인권문제를 통해 북한을 압박해서 6자회담에 나오게 만들겠다는 해괴한 전략을 채택했겠습니까? 인권 문제 하나만 해도 여러 측면에서 레버리지를 쥐고 북한에 인센티브를 줘도 해결될까 말까 한 복잡한 사안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복잡한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해서 인권 문제를 압박 수단으로 활용하겠다? 참 대단한 발명왕들입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여기서 또 눈여겨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통일부는 지난 5월 1일에 민간 교류를 확대하겠다는 정부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외교부는 인권을 통해 북한을 압박하겠다고 나서고 있고요. 같은 정부에서 메시지가 엇갈리게 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세현 : 외교 안보 정책의 컨트롤 타워가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세월호도, 메르스도 청와대가 컨트롤 타워가 아니라고 하더니, 외교 안보 정책 역시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겁니까?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이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박근혜 정부가 그렇게 강조한 '원칙'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원칙이 정확히 무엇인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는 곧 이 원칙이 수시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건 북한한테도 꽤 곤혹스러운 상황입니다. 어떤 원칙이 있는지 알아야 그걸 지키든가 말든가 할 텐데 원칙 자체를 모르니 뭘 지켜야 할지도 모르는 겁니다.
그렇게 강조하는 '원칙'의 실체가 없으니 대북 정책은 엇박자의 연속입니다. 분단 70년, 광복 70년을 맞은 올해만큼은 광복절인 8.15 행사를 남북이 함께 잘 치러서 남북관계의 계기를 마련해보려고 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민간교류를 활성화하겠다는 정부 입장도 나온 것이고, 6.15 15주년 남북공동행사 추진을 위해서 북한 관계자와 접촉하는 것도 승인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통일부가 이러고 있는 사이 외교부는 다른 방향으로 나갔습니다.
인권사무소 개소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대외 정책이 미국을 따라가기에 바빴습니다. 미국은 중국을 압박하려는 반중(反中) 전선, 즉 남중국해부터 시작해서 서해와 동해까지 라인을 구축하려고 합니다. 이를 정당화하거나 이 전선을 강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북한의 유사 상황을 만들어 내고 싶어 합니다. 쉽게 말하면 북한이 사고 쳐주기를 바라는 것이 미국입니다. 북한이 사고치면 남한이 어설프게 남북관계 개선한답시고 나서는 것을 사전에 차단할 수도 있죠. 이렇게 여러 가지 노림수가 있는 미국의 전략에 남한이 그대로 끌려 들어가고 있는 형국입니다.
물론 미국과 중국이라는 거대한 강대국 사이에서는 작은 국가가 별도로 움직일만한 공간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통령이 나름의 식견과 철학이 있다면, 미국과 협조할 것은 하면서 우리는 우리대로 필요한 일을 하겠다는 '투 트랙' 전략을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분단국가의 외교부 장관이라면 남북관계, 통일문제와 한미 동맹 문제 사이에서 확실한 철학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합니다. 미국이 하자는 대로 끌려들어 가기만 해서는 곤란합니다.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것 같은 한일, 미국이 등 떠밀었나?
프레시안 : 한국과 일본의 정상이 한일 수교 50주년을 맞아서 각자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발표했습니다. 이것 역시 우리의 의지보다는 미국의 배후 조종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봐야 할까요?
정세현 : 그렇다고 봅니다. 원래 일정대로 한미 정상회담이 진행됐다면 거기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일본과 과거사 문제 관련해서 너무 밀어붙이지 말라고 했을 겁니다. 한국과 일본이 불편하니까 자신들의 동아시아 전략에 차질이 생기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한미일 군사정보약정까지 체결해놓고 일본이랑 이렇게 지내면 되겠냐, 이거 뭐하는 짓이냐는 식으로까지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한국은 미국의 이러한 요구를 거역하기 힘듭니다.
물론 김대중 대통령이었다면 미국에 "협조할 부분은 협조할 테니 강제로 일본과 화해하라고 하지 마라"라고 일정한 선을 그었을 겁니다. "국민들 눈이 있는데 갑자기 이러면 곤란하다"는 식으로 빠져나갔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정부는 이 정도의 말을 미국에 할 배짱도 없습니다.
오히려 미국이 윤병세 외교부 장관에게 "한일 수교 50주년 계기로 좀 풀어라, 불편하다"는 식의 메시지를 전달했을 것이고 윤 장관은 이를 충실히 수행했을 겁니다. 미국은 자국의 외교 정책에서, 특히 동아시아 정책에서 걸림돌이 되는 한일 간 불편한 관계를 이번 기회에 정리했다고 좋아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과정에서 끌려다니기만 했습니다. 중국이 남중국해에 인공섬을 만들면서 영유권 다툼을 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 "우리 편 좀 들어줘"라면서 다급한 처지에 있는 미국을 잘 이용해서 우리가 일본에 요구하는 사안들을 관철시킬 기회도 놓쳤습니다. 과거사 문제만 해도 좀 더 기 싸움을 하든지 협상을 하면서 밀고, 당기고, 받아낼 것 받아내고 하는 과정을 거쳤어야 하는데 미국의 필요에 의해 그냥 화해 국면으로 넘어간 꼴이 됐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다시 일본과 얼굴 찌푸리면서 우리 요구안을 관철시킬 수 있겠습니까?
남북회담을 할 때도 북한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많이 합니다. 그러다가 반대급부를 받고 그 요구들을 하나씩 걷어냅니다. 우리와 일본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사 문제를 연계시켜서 받아낼 것을 받아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대일 외교의 주도권을 사실상 넘겨준 꼴이 됐습니다. 언제 다시 일본과 과거사 문제를 가지고 협의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채 말입니다.
프레시안 : 하지만 일각에서는 벌써 9월에 한일 정상회담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양국의 군사 협력 역시 가속화될 것 같은데요.
정세현 : 정상회담 개최를 두고 미국의 권고 내지 압박이 강하게 작용할 겁니다. 미국이 가운데 서고 오른쪽에 일본, 왼쪽에 한국이 서서 스크럼을 짜고 동아시아로 들어가야 하니까요. 이렇게 되면 우리가 미·중 간 군사 대결에 직접 동원될 여지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일 간에 갑자기 관계가 좋아지는 것이 그저 반갑기보다는 불길해 보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발목 잡았던 현안들이 하나씩 해결되면서 넘어가면 아무 걱정이 없지만, 지금은 수술하다 말고 가위 넣고 서둘러 봉합한 것 같아 보입니다.
한일 간 해결해야 할 일본군 '위안부' 문제, 과거사 문제, 독도 문제 등에 대해서 해결할 수 있는 접점을 만들고 방향을 정해놓는 조건 하에서 정상회담이 이뤄지면 괜찮은데, 한일 수교 기념일 전날인 6월 21일까지도 인상 쓰고 있던 나라끼리 갑자기 9월에 정상회담을 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의미 있는 성과가 나오겠습니까? 우리가 독자적으로 국가 이익을 저울질하면서 외교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억지로 끌고 들어온 외교판에서 미국의 국가이익을 위해 일하는 보국대 노릇을 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한미일 3국이 군사정보공유 약정을 맺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족쇄를 찼다는 겁니다. 정보를 공유한다는 것은 같은 정보를 입수하면 같이 행동을 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특정 지역에 쓰나미가 몰려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사람들은 모두 쓰나미가 밀려오지 않는 곳으로 이동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정보 공유라는 것은 행동의 통일과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수갑을 차고도 팔은 약간 움직일 수 있듯이, 어려운 상황 속에도 나름의 길을 찾을 수는 있는데 미국이 저렇게 밀어붙이는 것에 끌려들어 가고만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북, 당국 간 대화는 'No!', 이희호 이사장 방북은 'OK?'
프레시안 : 북한이 남한 당국 간 대화는 문을 걸어 닫으면서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방북 협의에는 호응해 나왔습니다. 북한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정세현 : 2가지라고 봅니다. 우선 북한의 의도를 좋게 보면, 이희호 이사장 방북을 계기로 남북관계의 전기를 마련하겠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약속은 지킨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희호 이사장은 2011년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 장례 당시 조문을 갔었습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이에 대한 답례로 이 이사장을 초청했습니다. 남북관계에서 스스로의 말을 뒤집어버리면 대남 정책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신뢰를 쌓기 위해서라도 이 이사장 방북 협의에 응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이사장의 방북 일정을 들어보고 난 뒤에 상부에 보고하겠다고 말한 북한의 대응이 잘 이해가 안됩니다. 이미 몇 번이나 이 이사장의 방북 관련 협의를 해왔고, 6월에 만나자고 했으면 당연히 7월에 가는 것으로 알고 있을텐데 이걸 상부에 왜 보고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방북 경로나 일정을 합의했다면 시기만 결정하면 되는 건데, 6월 30일에 만났으면 7월 중에 가려고 하는 것이지 10월에 가려고 하겠습니까?
북한이 설득력이 없는 설명을 하는 것을 보고 남북관계는 인권사무소에 대북 금융제재까지 나오면서 악화되고 있는데 이 이사장의 방북을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으니 마지 못해 응해주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이러다가 이 이사장의 방북이 무산되기라도 하면, 그 책임을 남측에 넘기려는 전술도 쓸 수 있습니다.
물론 북한으로서도 이 이사장의 방북으로 갑자기 남북관계 개선의 물꼬가 틔워질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 이사장의 방북이 무사히 성사되길 바라지만, 현재 미국의 동북아 전략과 박근혜 정부의 기조로 비춰봤을 때 이 이사장의 방북으로 당장 남북관계에 봄날이 찾아오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기는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반전을 꾀하려면 박 대통령이 이 이사장 방북 편에 북한에 메시지를 전달해야 합니다. 북한에 "일단 회담에 나오면 내가 책임지고 전단이든 뭐든 해결할 테니까 너무 요구 조건만 많이 내걸지 말고 회담에 나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대통령 이름으로 전달하면 북한이 대화에 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남북관계 개선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박 대통령이 원칙주의자이기 때문에, 북한의 태도 변화가 없는데 이쪽에서 먼저 다가갈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 광복 70주년은 그냥 물건너 가는겁니다. 미국은 한반도 유사사태를 유도해서 동북아의 패권을 놓지 않으려고 하고, 일본이 적극적으로 동아시아 지역에서 군사적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이 보통 의지를 가지지 않으면 남북관계 개선으로 나가기 어려운 국제적인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겁니다. 분단국 대통령으로 아무런 역할도 못하고 5년 지나갔다는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으면 미국의 동북아 정책에 일정 부분 거리를 두고 통일부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좀 풀어줘야 합니다.
물론 언제까지 북한의 투정을 들어줘야 하느냐는 불만도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북의 국력 차이와 국제적 위상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반도 상황이 안정적으로 관리되는 것이 우리에게 이득입니다. 북한이 예뻐서가 아니라 우리의 국익을 위해서라도 북한이 필요로 하는 것을 조금씩 제공하면서 남북관계 주도권을 쥐고 들어가야 합니다.
프레시안 : 북한이 이희호 이사장 방북 건을 계기로 우회적이나마 대화의 제스처를 보이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남한과 대화가 필요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는데요.
정세현 : 김정은 체제 들어서 농업을 비롯한 곳곳의 분야에서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이에 따른 생필품 수요가 늘어나고, 이를 뒷받침할 공급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김정은 체제 이후 북한은 2012년 6.28조치, 2014년 5.30 방침 등을 통해 개별적으로 생산성을 늘릴 수 있는 유연한 조치들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박봉주 내각 총리가 경제부문 총책을 맡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는 2002년 7.1경제관리 개선조치랑 비슷한 방식으로 북한 경제를 작동시키려는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역소도 개별 사업이 가능하도록 하고 포전담당제의 규모도 줄여서 가족 단위로 농사를 짓고 잉여 생산물에 대해 개인이 알아서 처분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생산량을 늘려가고 있는 것이죠.
이렇게 생산량과 공급이 조금씩 늘어나면 주민들의 생필품에 대한 수요가 폭발하게 돼 있습니다. 여기서 공급이 따라가 주지 못하면 인플레이션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7.1 경제개선관리조치 때도 수요가 폭발했는데 공급이 따라주지 못하는 바람에 인플레가 발생했고, 그래서 화폐개혁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다가 실패해서 당시 박남기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기도 했죠.
이런 선례가 있기 때문에 김정은 정권 입장에서는 인플레를 반드시 잡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물품 공급이 늘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2013년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북·중 관계가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는 북한 내부 수요를 충족시켜줄 만한 물건이 중국에서 올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그래서 북한은 남북관계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남북관계 조금만 개선해놓으면 당국 차원의 방대한 양의 지원은 기대하지 못하더라도, 민간 차원의 인도적 대북 물자 지원은 뚫릴 수 있을 겁니다. 이 정도만 들어와도 상황은 훨씬 안정적으로 흘러갈 수 있죠. 그래서 북한이 올해 신년사부터 지난 6월 15일 공화국 정부 성명까지 대화 이야기를 집어넣은 겁니다.
북한이 5.24 조치에 그렇게 목을 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5.24 조치가 풀리면 민간 차원의 인도적 대북 지원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나마 숨통을 틀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프레시안 : 우리 정부도 북한의 이런 사정을 모르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이런 상황을 잘 활용하면 남북관계 주도권을 우리가 틀어쥐고 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되돌아보면 '북한붕괴론'이라는 유령이 세 번째 남한을 떠돌고 있는 셈입니다. 김영삼 대통령도 북한 붕괴를 믿고 있었고, 이명박 대통령도 통일이 임박했다고 발언하지 않았습니까?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면서 항아리도 만들었구요. 기어이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남재준 국정원장의 '2015년 자유민주주의 체제 통일론' 발언이 나오기에 이르렀습니다. 김영삼 정부와 이명박 정부, 그리고 박근혜 정부는 북한의 붕괴를 예상했고 기대했기에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진지하게 추구하기보다는 그저 북한 붕괴를 기다리는 것으로 일관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박근혜 정부가 이랬던 건 아닙니다. 작은 것부터 하나씩 신뢰를 쌓아나가겠다는 이른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당선 뒤에도 한동안 신뢰 프로세스를 강조했죠. 그런데 어느샌가 이 정책은 자취를 감췄고, 지난해 통일대박론을 터뜨리면서 통일준비위원회까지 만들게 됐습니다. 결국 통일이 임박했다고 생각하니까 통일 준비를 하게 되는 겁니다. 앞으로 20~30년 후에 통일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때를 위해서 미리 준비하자는 게 아닙니다.
이 와중에 통일부는 민간 차원에서라도 뭘 해보겠다고 움직이고 있지만, 통일대박을 이야기하고 통일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는 대통령이 보기에는 이건 별로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탄력을 받지 못하는 겁니다.
누가 망해가는 북한을 먹여 살렸나
프레시안 : 그런데 보수 쪽에서는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등 남북 경제협력 사업을 하지 않았다면 북한이 벌써 망했을 거라며, 이 두 정권이 북한을 살려줬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정세현 : 한 국가의 붕괴 조건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경제난 때문에 체제가 붕괴한다고 생각하는 건 정말 '나이브'(naive, 순진한)한 이야기입니다. 먹고 사는 것이 어려워지면 인간은 상대적으로 센 권력에 줄을 서게 돼 있습니다. 식량난이나 경제난으로 인해 폭동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통제는 더 강화되죠. 이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통제를 강화하려는 쪽에 줄을 서는 사람들이 저항하려는 사람들을 찍어 누르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소위 '권력의 앞잡이'들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이런 앞잡이들이 전체 인구의 10%만 되도 나머지 90%를 찍어 누르고 체제가 유지되는 겁니다.
또 북한의 지정학적 위치가 붕괴하기 힘든 구조를 만드는 측면도 있습니다. 우리가 쌀이나 식량 주지 않는다고 해서 북한이 굶어 죽는 것 아닙니다. 중국이나 일본이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거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일본에서는 1991년 북한에 대한 대대적인 연구가 진행됐습니다. 이들은 북한이 동독처럼 되면 북한 주민들 중에 상당수가 바다로 도망쳐 나오는 이른바 '보트피플'이 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리고 해류의 흐름으로 미뤄보아 이들이 도착할 곳은 결국 일본이라는 점을 간파하고 수용소를 지으려는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1995년, 우리가 북한에 쌀을 주려고 했을 때 자기들이 먼저 주겠다고 나선 겁니다. 우리가 15만 톤 주겠다고 했을 때 일본이 50만 톤을 들고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식량난은 김대중 정부 때 발생한 일이 아닙니다. 이른바 '고난의 행군'은 1995~1997년 때 일입니다. 김영삼 정부 시절입니다. 이때 김영삼 대통령이 북한에 쌀을 줬습니다. 보수의 논리대로 하면, 아사자가 속출하면서 체제가 위태로웠던 북한을 살린 것은 김영삼 정부 아닙니까? 당시가 북한 붕괴의 '골든타임' 이었는데, 김영삼 정부가 쌀을 지원해주는 바람에 김정일 정권이 유지됐다는 이야기는 왜 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당시는 세계식량계획(WFP)이나 미국, 유럽의 민간단체에서 북한에 식량을 많이 가져다줬습니다. 일본이 지원했던 것과 비슷한 이유인데, 북한 붕괴가 부정적인 국제적 파급효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8년은 고난의 행군이 끝나고 난 뒤입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9년 김대중 정부는 본격적인 대북 지원을 시작했습니다. 여기다가 김대중-노무현 정부 집권 시기는 북한이 이전보다는 형편이 좋아졌을 때입니다. 자, 누가 죽어가는 북한 정권을 살린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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