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발 위헌 시비가 붙은 개정 국회법을 계기로 이른바 'K·Y 체제'에 서서히 금이 가는 모습이다. 김무성 대표·유승민 원내대표의 공조 체제를 뜻하는 이 단어는, 지난 2월 유 원내대표의 선출과 함께 탄생했다. 연말 연초 '정윤회 비선 논란' 정국을 거치며 커진 청와대로부터의 원심력에 힘입은 결과였다.
그러나 상위법 취지에 위반하는 시행령에 대해 국회의 시정 요청권을 제도화한 개정 국회법은, 4개월가량 계속돼 온 K·Y 투톱 체제를 통째로 흔들고 있다. 예상대로 청와대가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유 원내대표가 입을 타격은 불가피하다. 국회로 돌아온 개정 국회법에 대한 재의 요청 결단을 내릴 수 있는 힘이 누구보다 김 대표에게 쏠려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 대표는 개정 국회법으로부터 한 발씩 빼 나가는 모습을 연 이어 보이고 있다. 김 대표는 18일엔 기자들을 만나 "우리는 강제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찬성했는데 강제성이 있다고 보는 게 대세다. 대통령으로서 위헌성이 분명한데 그걸 결재할 수도 없는 처지"라며 박 대통령을 감쌌다.
19일엔 한 발 더 나갔다. 김 대표는 "정부에서 확실한 입장을 취하면 거기에 맞춰서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청와대가 '위헌' 판단을 굳히면 여당도 이를 따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개정 국회법엔 '문제가 없다'는 유 원내대표와는 완연히 다른 입장이다. 유 원내대표는 법 자체에 대한 논리적 판단을 우선했다면, 김 대표는 당·청 관계를 우선해 고려하는 모습이다.
물론 김 대표와 유 원내대표의 이견이 드러난 것이 이번은 처음이 아니다. 세금·복지 부문이나 미국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등이 논란이 됐을 때도 투톱 사이엔 의견 차가 있었다. 애초 김 대표가 경제·사회 등의 영역에서 유 원내대표보다 훨씬 보수적인 점도 작용했다. 그러나 근래의 상황은 '특별'하다. 유승민 원내지도부 체제의 중도 하차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가시화되어 있는 국면이다.
무엇보다 이번 개정 국회법의 생사 여부는 애초 이 법의 제1 사용처로 예상됐던 세월호 시행령 시정 문제로 직결된다. 지난 본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 찬성률은 86.5%(재석 244명 중 211명 찬성)였다. 당시 찬성표를 던졌던 새누리당 의원들이 집단적으로 마음을 바꾸면 유승민 체제와 함께 세월호 진상조사도 물 건너가게 된다. 현재의 개정 국회법 정국을 늘 보던 '당·청 갈등'의 하나로 쉽게 볼 수 없는 이유다.
개정 국회법 제1 사용처 '세월호 시행령 시정'은?
전망은 좋지 않다. 여권 내에선 국회로 돌아온 개정 국회법이 재의되지 않을 가능성을 크게 보는 이들이 상당하다. 한 여당 관계자는 개정 국회법에 대한 부담감이 친박뿐 아니라 비박계 안에서도 퍼져가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개정 국회법을 둘러싼 당·청 싸움에서 현재 청와대가 승기를 잡고 있다는 얘기다.
이는 '어쨌거나 당·청은 함께 가야 한다'는 인식이 작동한 결과라고 여권 관계자들은 설명한다. 물론 10개월 뒤인 총선을 앞두고 '여전히' 막강한 공천 영향력을 가진 박근혜 대통령 '눈치 보기'라는 설명도 늘 뒤따른다. 비박 대 친박 공천권 싸움의 전초전 링 안에 박 대통령과 유 원내대표가 서 있고, 김 대표는 '메르스 행보'에 주력하며 일단은 관망하는 모양새인 것이다.
개정 국회법이 국회로 환부할 경우, 정의화 국회의장의 행보도 다시금 중요해진다. 정 의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청와대가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헌법 53조에 따라서 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헌법 53조 4항은 "재의의 요구가 있을 때는 국회는 재의에 부치고, 재적 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전과 같은 의결을 하면 그 법률안은 법률로서 확정한다"고 했다.
눈에 띄는 대목은 '재의의 요구가 있을 때'다. 이 요구를 청와대의 재의 요구로 해석하느냐, 여야의 합의된 재의 요구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정 의장의 행보는 달라진다. 청와대의 거부권 행사 자체를 '재의 요구'와 동일시한다면, 정 의장은 직권으로 본회의에 개정 국회법을 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정 의장이 '여야 합의'에 무게를 싣는다면, 재의 가능성은 대폭 줄어든다.
정 의장은 그간 '여야 합의'를 늘 강조하는 태도를 보여왔다. 여당의 '단독 처리' 의사가 명확했던 세월호특별법안이나 이완구·황교안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국면에서도, 정 의장은 여야가 어느 쪽으로건 합의를 이뤄올 것을 주문했다. 정 의장이 이번엔 직접 중재안을 제시하고 '자구 수정'에 나서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청와대와 국회의 정면충돌'도 결코 작지 않은 부담이다.
일단은 약 2주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다. 박 대통령은 중동 호흡기증후군(메르스·MERS) 사태가 어느 정도 잠잠해지고 난 뒤에야 움직일 것으로 보인다. 헌법과 관련 법규에 따라 박 대통령은 국회 통과 법률이 정부로 이송되고 15일 이내에 공포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개정 국회법은 15일에 이송되었으므로 30일이 '마지노선'이다. 이때까지 당·청 간, 그리고 국회와 청와대 간 여러 층위의 물밑 접촉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개정 국회법 뭉개도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이번 국면이 '박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여야 재의 요구 합의 불발'이란 수순을 밟게 되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선 결코 청와대에도 유리하지만은 않다. 유 원내대표 체제가 무너지고 새 원내지도부를 선출하게 되더라도, 친박계 원내 지도부가 들어설 가능성이 절대적으로 높은 것도 아니다. '진짜' 전쟁이 시작되는 것은 어쩌면 이때부터일 수도 있다. 유승민 등 비박계의 '반격'이 이루어진다면 말이다.
청와대가 '논리'에서나 '신뢰성' 면에서 우위에 있는 것도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본인이 의원이던 시절인 1998년, 훨씬 더 강한 국회법 개정안을 동료 의원 33명과 공동 발의했었다. 당시 개정안은 "행정입법이 법률의 위임 범위를 일탈하는 등의 의견이 제시된 때는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이에 따라야 한다"고 돼 있었다. '시정을 요청할 수 있다'고 한 이번 국회법보다 훨씬 큰 강제성을 가졌다.
게다가 박 대통령이 이 같은 절체절명의 '당·청 갈등'을 만들면서까지 무엇을 하겠단 건지도 명확히 보이는 게 없다. '청와대가 OOO를 성공하기 위해 일단 접어주자'고 주장할 만한 뚜렷한 'OOO'가 없다는 얘기다. 당에 대한 청와대의 컨트롤 능력에도 물음표가 붙어 있다. 지난달 29일 국회법 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하던 때만 해도, 홍문종 의원 등 친박계 의원들까지 대거 찬성표를 던졌던 데서 잘 드러난다.
당장엔 일부 의원들이 이 같은 청와대의 국회법 '극혐' 정서를 제대로 알리지 않은 탓을 유 원내대표 등에게 묻고 있지만, 이는 변명에 불과하단 게 여권 일각의 시선이다. 조윤선 정무수석의 사퇴 이후 청와대와 당을 잇는 다리는 이병기 비서실장뿐이다. 친박 의원들도 박 대통령의 의중을 쉽사리 파악할 수 없는 조건. 이런 상태에서 당으로부터의 신뢰·충성이 '흔들' 하는 지지율 대폭 하락 국면이 재차 열리면, 지난 2월 유승민 체제 출범과 같은 상황은 얼마든지 다시 연출될 수 있다.
이렇듯 청와대의 '유승민 불신임'이 또 한 번의 당의 '박근혜 불신임'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상존한다. 그리고 이들이 20대 총선을 앞두고 이 같은 권력 쟁탈전을 계속하는 동안, 법이 정한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 기한도 차차 다해갈 것이다. 여당의 협조를 막연히 기대하며 이미 국회를 통과한 법의 자구수정과 황교안 임명동의안 표결 처리에 합의해 준 '뒷진 짐' 야당도 떳떳할 수만은 없다. '공멸'이란 표현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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