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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합당, 김대중 반대하는 미국의 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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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합당, 김대중 반대하는 미국의 조종?

[문학예술 속의 반미] 문민정부 출범과 정치문화의 변화 그리고 반미

VI. 문민정부의 출범과 정치문화의 변화 그리고 반미

1988년 4월 총선거는 이른바 '1노 3김'의 4당 체제를 불러왔다. 그러나 1954년 이후 한국 정치에서 처음 나타난 '여소야대' 현상은 2년도 넘기지 못했다. 1990년 1월 대통령 노태우와 두 야당 지도자 김영삼, 김종필이 민주자유당을 새로 만든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 가운데 김영삼은 새로운 여당에 합류함으로써 오랫동안 경쟁자이자 민주화 투쟁의 동료 김대중의 허를 찌르며 야권의 2인자 자리에서 벗어났다. 거의 30년 동안 군사독재에 맞서 싸워온 그는 가까운 동지들을 비롯해 민주화 투쟁을 벌여온 사람들로부터 '배반'에 대한 신랄한 비난을 받아야 했다. <영삼이의 일기>, <반 민자당 봉기가>, <보수 대야합 분쇄가>, <1노 2김가>, <들어나 봤나?> 같은 저항 노래 등을 통해 야유당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특히 <1노 2김가>와 <들어나 봤나?>는 1990년대 초 널리 불렸다. 김대중을 반대하는 미국의 조종에 따라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야합했다는 내용이었다.

1992년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는 민자당과 김영삼을 반대하는 민주정부를 세우기 위한 운동이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에 의해 전개되기도 했다. 노동자와 농민, 학생과 청년, 교사와 교수, 문인과 예술가, 종교인 등을 포함해 30만 명 이상의 회원으로 구성된 전국 최대의 민주화운동 단체였다. 그러나 1992년 12월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서 30년 이상의 군사독재 이후 민주주의를 불러올 영웅으로 환호한 반면, 반대파들은 선거 결과를 민주화에 대한 실패로 간주했다. 그의 권력 기반이 직전의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통치가 기존 파시스트 통치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하면서 일련의 개혁정책을 잘 수행했지만, 그가 집권 과정에서 미국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학생들은 김영삼 정부가 지속적으로 보수 친미 성향을 보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들은 김영삼 정부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배에 맞서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하도록 압박하기로 결의했다.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을 비롯한 재야 세력의 지도자였던 문익환 목사 역시 한국이 제국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자주적인 국가가 돼야 한다고 주창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첫해에 정치 자유화, 경제 정의, 사회 개혁 등을 신속하게 추진해나가면서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이끌어냈다. 야당은 허를 찔렸고, 반정부 세력은 투쟁의 초점을 잃었다. 정치적 사건에 초점을 맞추어온 투쟁적 민중운동이 약화하고, 사회복지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비폭력적 시민운동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전반적인 정치문화, 특히 '저항문화'가 폭력적 대중시위에서 비폭력적 문화투쟁으로 바뀌어갔다.

1980년대 반미주의는 민중운동과 함께 발전되었기 때문에, 1990년대 민중운동의 약화는 반미주의의 쇠퇴를 의미했다. 앞에서 얘기했듯, 민중운동은 군사독재에 맞선 민주주의, 미국을 비롯한 외세 지배로부터의 실질적 독립, 외세의 간섭 없는 한반도 통일을 이루는 데 목표를 두었다. 따라서 문민정부가 등장해 신속하게 민주화를 진전시키는 것은 적어도 미국이 한국의 군사독재를 지지해왔다는 대중의 인식을 지워버릴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1990년대 반미주의의 강도는 약해지고 반미감정의 표출 빈도는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김영삼 정부에서 반미주의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90년대의 저항운동은 다양한 문화 활동을 통해 전개되었기에 반미운동이 이전보다 평화적으로 일어났을 뿐이다.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전개된 반미운동의 주요 원인은 다음과 같다. (1) 1980년 5월 광주항쟁 진압 과정에서 미국이 행한 역할에 대한 의혹이 해소되지 않았다. (2) 미국이 전반적으로 한국 내정에 간섭하고 특히 한반도 통일을 방해하는 정책을 폈다. (3) 미국이 한국의 농산물시장, 특히 쌀시장을 개방하라고 고압적이며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했다. (4) 한국인들에 대한 미군 범죄가 그치지 않았다.

첫째, 한국인들은 1980년 5월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묵인이나 방조를 지속적으로 비난해왔다. 1990년대까지 그 비극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광주항쟁과 관련된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2월 취임해 바로 다음 달 광주시민들의 슬픔과 분노를 달래기 위해 광주를 방문했고, 광주항쟁 및 다른 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이 묻혀있는 망월동 묘지에 참배하고 싶다는 뜻을 표명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그가 묘역에 들어서는 길을 막았다. 그가 광주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참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광주시민을 비롯한 일부 한국인들이 광주학살과 관련해 한국 정부와 미국에 어떠한 책임을 묻고 있는지 잘 보여주었다. 한국 정부에 광주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하는 한편 미국에 학살에 대한 묵인과 방조를 사과하라고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지 않는 광주항쟁 기념식은 없었다. 더구나 1993년 5월엔 광주항쟁 13주년을 맞아 김영삼 대통령 취임 이래 가장 큰 규모의 시위가 서울에서 일어났다. 약 4만 명의 학생들이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묵인'이나 '승인'을 사과하라고 요구하는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주한 미국대사관으로 행진하면서 그들을 막는 전투경찰과 투쟁을 벌인 것이다.

광주에서는 광주학살과 관련한 반미운동이 다른 어느 지역에서보다 강렬하게 전개되었다. 이미 얘기했듯, 최초의 반미 폭력은 1980년 12월 광주에서 일어났다. 젊은 농민과 학생들이 광주 미국문화원에 불을 지른 것이다. 그 때부터 1980년대 말까지 광주에서 '미국 문화의 상징'은 29회나 공격당했다. 1989년 5월엔 그 건물이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방화, 폭탄물 투척, 점거 등 끊임없는 기습공격 때문이었다.

1990년 6월 광주 교외로 이전해 다시 문을 열었지만 기습공격은 그치지 않았다. 1993년 7월 광주의 전남대학교 캠퍼스에 뿌려진 <양키는 가라, 니 나라로 가라>라는 제목의 팸플릿에서, 학생지도자들은 광주시민들에게 광주 미국문화원이 영원히 문을 닫도록 투쟁할 것을 촉구했다. '미국의 통치를 위한 기구'가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는 것보다 완전히 폐쇄되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학생들은 김영삼 정부를 "문민정부라는 미명 아래 친미적이고 굴종적이며 매국적인 정권"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팸플릿 뒷면엔 윤용 고려대학교 교수가 1988년에 쓴 반미 시 <양키는 가라>가 인쇄되어 있었다. "양키는 가라 / 가서 돌아오지 마라 / 절대 돌아오지 마라 / ... / 악마 같은 살인자 양키는 꺼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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