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광주항쟁의 영향과 미국, 1980~1992
12. 1980년대 영화 속의 미국
한국에서 본격적인 반미영화는 1980년대 말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것 같다. 내 자료수집의 한계일지 모르지만. 크게 두 가지 이유였을 것이다. 첫째, 혹독한 검열제도 때문에 제작될 수 없었거나 만들어졌어도 상영되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둘째, 민중영화 운동이 1980년대 초 시작되었지만, 주로 학생들인 운동주도자들이 영화 제작에 필요한 자금과 기술을 확보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으리라 추측한다.
그 대신 1980년대 초부터 민중영화 운동의 발전 과정에서 반미감정이 종종 표출되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전반 민중영화 운동을 이끌었던 주요단체 가운데 하나로 1982년 조직된 '서울 영화집단'은 할리우드 영화가 한국 영화계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면서 제 3세계의 '민족해방을 위한 영화'를 모델로 한 운동을 전개했다. 여기서 민족해방을 위한 영화는 미국영화를 비롯한 대중영화에 의해 잘못된 의식이 심어지는 것에 대항하며 새로운 의식을 일깨우는 '가장 중요한 예술'로 간주되었다.
많은 활동가들은 한국에 수입되는 외국영화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미국영화가 한국인들에게 해롭다고 생각했다. 주로 폭력과 섹스를 다루면서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려 한다는 이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5년 한국 영화시장이 개방되자 미국의 압력에 따라 미국영화 수입은 급증했다. 1985년의 23편이 1986년엔 39편으로, 그리고 1987년엔 57편으로 늘었다가 1988년엔 전반기에만 100편 이상으로 껑충 뛰어오른 것이다.
1988년 미국의 영화배급 대행업체들이 한국에서 미국영화를 직접 배급하기 시작하자 영화계 주변에서 반미감정이 강하게 분출되었다. 1988년 6월 한국 정부가 영화법을 고쳐 외국영화의 직접배급을 허용하자 학생 영화인들을 포함한 진보적 영화감독과 조감독들이 개정된 영화법에 반대하는 항의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반민족적 영화법이 한국을 미국의 문화식민지가 되도록 이끌 것이라고 주장하며 새로운 영화법 시안을 제안했다.
1988년 9월 한국의 영화제작자들은 미국의 영화배급사인 '유나이티드 인터내셔널 픽쳐스'(UIP)가 처음으로 배급한 영화에 대한 반대투쟁을 주도했다. 그들은 해당 미국영화를 상영하기로 계획한 극장들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영화감독들은 "미국영화 물러가라"고 선언했고, 젊은 영화인들은 "미국영화 몰아내자"고 외쳤다. 감독들과 젊은 영화인들은 11일 동안이나 밤샘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서울의 극장들은 미국영화 직배에 항의하기 위해 하루 동안 영화를 상영하지 않았다. 다양한 시위운동 조직들은 미국이 한국의 영화시장을 침범한다고 비난했다. 많은 영화인들은 미국영화의 직접배급을 중단하고 영화법을 개정하라는 청원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미국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을 점거하고 관객들에게 그 영화를 보지 말도록 권유하기도 했다.
1988년 10월에도 투쟁은 계속되었다. 대구지역의 학생들은 미국의 영화배급사들이 들여온 영화를 거부하는 캠페인을 이끌었는데 이는 시민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는 곧 모든 미국영화를 거부하는 전국적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여성운동 및 문화운동 단체들은 미국의 외설퇴폐 문화와 에이즈(AIDS)를 몰아내자는 집회를 갖고 미국영화를 거부할 것을 결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전국 극장협회'는 전국의 478개 극장 가운데 딱 한 곳을 빼고는 모두가 미국영화의 직접배급을 거부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1989년 6월 '한국 영화제작가협회'는 미국 대통령에게 미국영화 직접배급을 5년간 연기해줄 것을 요구하는 항의서한을 보냈다. 이에 미국 정부는 한국영화 제작자들의 반대를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만약 그들이 미국 영화배급사들의 영업을 지속적으로 방해한다면 벌금형에 처해지게 될 것이라고 위협하는 답장을 보내왔다.
1980년대 말 노동운동이 급속도로 발전함에 따라 '민족영화 연구소'는 민족영화운동과 노동해방투쟁을 연계하고자 했다. 이 연구소는 민족영화가 외세에 대한 민족자주와 파시스트에 대한 민주주의를 확립하고 한반도 통일에 기여할 것을 주창했다. '민족영화 제작소'는 민족영화 운동이 민족해방 투쟁에 기여하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민족영화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외세와 군사독재 그리고 독점자본주의에 맞선 이념적 문화투쟁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민족영화 운동은 한국의 '식민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반미 민족해방과 통일'을 성취하는 데 목표를 두었던 것이다.
민중영화 또는 민족영화는 비디오테이프나 8mm 또는 16mm 영화 등 '작은 영화' 형태로 제작되었다. 보통 크기의 영화에 비해 작은 영화는 적은 비용으로 만들어지고 쉽게 배포될 수 있었다. 게다가 영화 제작과 공연에 관한 법이 작은 영화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비디오테이프는 1980년대 말 민족영화 운동의 가장 대중적 매체가 되었다. 해외에서 만들어져 지하에서 상영된 광주항쟁 비디오테이프의 영향이 컸다. 비디오테이프는 신속하게 녹화되고, 쉽게 재생산되어 동시에 다수로 배포되며, 어디서나 편리하게 상영될 수 있었던 것이다.
민족영화운동과 노동해방투쟁의 연계 및 작은 영화의 대중화로 반미영화와 노동영화는 1980년대 말부터 흔히 비디오테이프나 16mm 영화 형태로 나타났다. 1988년 대학생 영화제작자들의 모임인 '대학영화연합'은 두 편의 비디오테이프 영화를 만들었다. <우리는 결코 둘일 수 없다>는 1988년 6월 민족통일의 길을 열기 위한 시도로 남한의 대학생들이 북한의 대학생들과 만나기 위해 판문점으로 행진하려는 것을 다룬 다큐멘터리였고, <우리의 조국은 백두에서 한라까지입니다>는 1988년 8월 남한 학생들이 북쪽으로 행진하려는 것을 촬영한 것이었다.
1980년대 말의 통일운동은 반미주의를 표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8년 6월 남한 정부가 대학생들의 통일 행진을 사전에 차단하자 거의 모든 대학에서 수만 명의 학생들이 전투경찰과 충돌했다. 충돌 과정에서 학생들이 외친 구호 가운데 하나는 "분단을 강요하는 양키를 몰아내자"였다. <뉴욕 타임스>의 보도대로 미국이 한반도 통일의 가장 큰 방해물이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이 신문은 1988년 6월 10일 자에 학생들은 미국 '침략군'이 남한 정권을 조종해왔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의 "궁극적 목표는 통일을 실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독립된 정권 아래서 자주를 성취하는 것이다"고 보도했다. 한편, 학생들이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중에도 한국 정부는 주한미군 유지비용을 1989년부터 1991년까지 3400만 달러에서 4000만 달러로 올려주기로 합의했다. 한국 언론에는 보도되지 않고 미국의 주요 신문 <뉴욕 타임스>에 학생들의 시위와 함께 보도된 내용이었다.
1980년대 말 노동운동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민족영화 제작소'는 노동쟁의에 초점을 맞춘 비디오테이프를 많이 만들었다. 앞에서 얘기한대로 이 제작소의 궁극적 목표는 반외세 민족해방 투쟁을 통해 노동해방을 성취하는 것이었기에, 미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다큐멘터리를 녹화했다. 예를 들어 1989년 38분짜리로 만든 <5공이 6공인데>는 6공 노태우 정권 아래서의 상황이 5공 전두환 정권 아래서의 상황으로부터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특히 농산물 수입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시위를 포함한 반미투쟁을 소개했다.
1989년 45분짜리로 만들어진 <천만 형제여 총단결하라>는 한국에서의 노동쟁의 역사를 다루었다. 미 군정 아래서의 노동투쟁과 미국에 기반을 둔 초국적 기업의 위장폐업에 대한 투쟁 등도 담았다. 이 다큐멘터리는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한국의 독재정권과 독점자본을 미국이 배후에서 통제한다고 주장했다.
<최윤범 열사, 다시 태어나도 민주노조를> (1989년, 50분)은 1988년 4월 한 공장에서 민주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에 항의하기 위해 분신자살했던 최윤범의 노동투쟁을 그린 비디오테이프다. 이 다큐멘터리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치, 경제, 군사적 '정복 정책'들을 설명하며 한국 경제가 미국에 얼마나 예속적인지 보여주었다. 나아가 미국이 한국의 노동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꼭두각시 정권'과 '매판자본'을 통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깡순이, 슈어 프로덕츠 노동자> (1989년, 58분)는 미국에 기반을 둔 초국적기업인 슈어 프로덕츠 (The Sure Products Co.)의 폐업에 반대하는 노동투쟁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1988년 12월 이 회사가 사전 예고 없이 폐업한 뒤 약 230명의 여성노동자들이 투쟁할 때 제작되었다. 초국적기업의 착취를 폭로하고 노동계급의 반제국주의적 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시도였다. 따라서 시위자들의 반미 노래 및 연극 공연을 포함한 다양한 문화 활동 등도 보여주었다.
위에 소개한 비디오테이프들은 대량으로 재생산되고 노동조합과 다양한 민주화운동 단체들에 배포되어 노동자들의 투쟁 정신을 고취시킬 수 있도록 연좌농성 중에 상영되기 마련이었다. 또한 민중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교회나 야학 또는 일터 등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민족영화 제작소'는 이러한 비디오테이프들을 만들어낸 데 이어 '올바른 선전선동 활동'을 포함해 이들을 잘 활용하기 위한 민족영화 보급지침서를 펴내기도 했다. 이 지침서는 각 비디오테이프의 내용과 함께 제작 목표와 배경 등을 설명하고 각 영화를 감상한 뒤 무엇을 어떻게 토론할지 알려주었다. 예를 들어, <노동하는 민중을 위한 세계사> (1989년, 90분)라는 비디오테이프를 소개하면서, 지침서는 관중들이 제국주의와 민족해방 투쟁에 관해 토론할 것을 요구했다. 과거 식민지시대 조선에서의 일본과 해방 이후 남한에서의 미국 사이에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이 무엇이며, 한반도 통일을 방해하는 게 무엇인지 등을 얘기해보라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반미 다큐멘터리가 비디오테이프에 담겼다면, 극영화는 대개 16mm 필름으로 제작되었다. 아마 최초로 그리고 가장 강렬한 반미감정을 표출한 영화는 1988년 젊은 영화제작자들의 모임인 '장산곶매'가 83분짜리로 만든 <오! 꿈의 나라>였다. 이 필름영화는 폭력적이고 외설적인 할리우드 영화가 범람하고, 타락한 한국 상업영화가 대량으로 제작됨으로써 초래된 "한국영화 문화의 총체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반미영화는 미국의 광주학살 공모를 암시하면서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 미국의 신식민지적 정복정책"을 폭로하고자 했다. 또한 주한미군들의 풍기 문란한 생활과 분노한 한국 젊은이가 미국인을 공격하고 성조기를 불태우는 모습 등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영화는 1989년 1월 처음으로 서울의 한 조그만 극장에서 2주간 상영되었다. 그리고 정부의 지속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에 걸쳐 다양한 장소에서 상영되었다. 이 때문에 영화제작자와 극장주가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정부의 탄압과 제작자의 투쟁이 영화를 오히려 홍보하는 셈이 되어, 20만 명이 넘는 관객을 유치하게 되었다.
김태영이 1989년 16mm로 만든 영화 <황무지> 역시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미관계를 다루었다. 주로 광주학살에 참여했던 공수부대원 출신이 양심의 고통 때문에 분신자살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이 영화는 1989년 5월 광주에서 처음으로 상영되던 중 압수되었고, 그 비디오테이프는 일주일 뒤 서울의 한 극장에서 몰수되는 바람에, 몇 명의 대중영화배우와 텔레비전 탤런트들이 출연한 영화였지만, 많은 관객을 동원하지는 못했다.
'장산곶매'의 <파업 전야> (1990, 110분짜리, 16mm)는 한 공장에서 민주노조를 세우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에 초점을 맞추면서 노사갈등을 묘사했다. 대체적 내용이 반미주의와 직접 연결되지 않지만, 영화제작자들은 '제국주의의 자본'이 한국을 '문화 식민지'로 만들고 있다면서 "폭력과 섹스가 판치는 할리우드 영화"의 대안으로 이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이 영화가 1990년 3월 시험적으로 공연된 뒤 정부는 계급의식을 주입시키고 파업을 이끌 수 있다며 공연을 금지했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파업 전야>는 1990년 4월 전국에 걸쳐 동시에 10개 이상의 도시에서 주로 대학 캠퍼스를 중심으로 상영되었다. 이에 정부는 영화제작자와 극장주를 기소하고 체포했으며, 영사기와 필름 복사본 등을 압수한 데 이어 일부 관중까지 처벌하는 등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이 영화는 그 무렵 가장 큰 노동운동 조직이었던 '전국 노동조합 협의회'에 의해 "1990년의 영화"로 선정되었다. 나아가 1991년엔 '한국 민족예술인 총연합'으로부터 첫 '민족예술상'을 받았다. 약 30만 명의 거대한 관중을 동원할 정도로 훌륭한 내용인 데다 현실주의의 모델이 되었던 것이다.
대학생 영화인들의 모임인 '영화제작소 청년'은 1991년 16mm 80분짜리 다큐멘터리 <어머니, 당신의 아들>을 만들었다. 민족자주와 민주화 그리고 한반도의 통일을 위한 학생운동을 그린 것으로, 한 학생이 반미 통일운동에 참가했다가 구속되자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이해하고 그의 활동을 지원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청년 영화인들은 '외세와 한국 반역자들'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퇴폐적 자본주의의 다양한 문화적 해악을 전파하는 할리우드 영화의 침범"에 맞서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정부가 필름 복사본을 압수하는 등 탄압했지만, 1991년 4월 전국에 걸쳐 9개 장소에서 동시에 상영되었다. 정부가 이 다큐멘터리를 상영 금지한 이유는 미국을 반대하고 적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몇 편의 상업영화 역시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표출한 것은 주목할 만했다. 장길수 감독의 1988년 작품 <아메리카 아메리카>는 미국에서 인종차별과 범죄로부터 고통받는 한인 동포의 삶을 묘사했다. 이 영화는 도덕적으로 부패한 미국사회를 보여주면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한 미국이 한인 동포에겐 '보이지 않는 감옥'이라는 점을 암시했다. 이 영화는 미국영화 반대운동이 한창이던 1988년 개봉되어 그해 흥행기록 5위 안에 들기도 했다.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 (1990)은 1988년 같은 제목으로 출판된 이태의 자전적 소설을 극화한 것이었다. 이 영화는 소설에서처럼 미군정시대와 한국전쟁 중의 빨치산활동을 다루었다. 앞에서 1980년대 소설을 소개하며 얘기했듯, 빨치산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지냈던 이태는 빨치산활동이 미국의 한반도 점령에 저항하고, 미국의 후원을 등에 업은 극우세력에 대항하는 민족해방 투쟁이었다고 재해석했다. 정지용 감독은 1989년 9월 이 영화를 촬영할 때 그가 이전에 미국영화 직접배급에 반대하는 시위를 이끌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다.
장길수 감독의 <은마는 오지 않는다> (1991)는 1990년 같은 제목으로 출판된 안정효의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다. "한국 안에 있는 미국의 현실"을 묘사한 것이다. 소설에서처럼 한국전쟁 중 조그만 마을에서 한 과부가 미군들에게 집단강간을 당한 뒤 창녀가 되는 내용이다. 그 마을 전체가 미국 문화의 영향으로 퇴폐적으로 변해가고 일부 어린이들은 미군들의 총에 맞아 죽어가는 모습도 들어있다.
안정효의 1989년 소설 <하얀 전쟁> 역시 1992년 정지용 감독에 의해 같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한국 군인들이 미국의 용병으로 파견되었던 베트남전쟁에서의 잔악한 행위를 고발한 작품이다. 안정효의 소설이 미국에서
마지막으로 민중영화 또는 민족영화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은 공장노동자들 사이에 영화감상 동아리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런 동아리들은 1980년대 중반 공장지대 주변의 교회와 노동조합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많은 노동조합 안에 문화 활동을 통해 노동자들의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흔하게 조직되었다. 동아리 회원들은 교육 목적으로 감상할 영화를 선정하여, 영화 감상에 앞서 안내문이나 해설서 등을 먼저 읽고, 감상 후에는 반드시 토론회를 열었다.
이러한 동아리 활동과 관련하여 '노동자 영화제작단'은 1991년 임금인상을 위한 노동투쟁에 관한 영화 지침서를 만들었다. 여기에 선정된 영화들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노동계급의 생활과 투쟁이었다. 제국주의 전쟁과 파시즘 역시 주요 주제로 포함되었다. 나중에 이 단체는 70mm 영화 몇 편까지 소개하는 지침서도 펴냈다. 주제는 제국주의의 야만성, 제국주의 전쟁, 민족 분단, 미국의 꿈 등이었다. 이렇듯 1980년대 말부터 한국에서의 노동 문제는 확실하게 반미주의와 결합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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