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광주항쟁의 영향과 미국, 1980~1992
13. 1980년대 문학예술 속의 미국 (요약)
1979년 박정희가 암살됨으로써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로 불렸던 7년간의 유신체제가 끝났다. 18년 동안 지속됐던 박정희 철권 군사독재가 종식된 것이기도 했다. 갑자기 그리고 뜻밖에 찾아온 정치 환경의 변화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온 민주주의에 대한 커다란 기대를 갖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1979년 12월 전두환의 군사쿠데타와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잔혹한 탄압은 그러한 기대를 꺾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인권 외교를 주창하던 카터 미국 대통령의 도움을 기대했다. 광주에서의 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한국에 있어 ‘특별한 나라’인 미국이 개입하여 무장 충돌을 막아 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한 미국대사나 주한 미군 사령관을 비롯한 미국 관리들은 오히려 전두환이 정권을 잡도록 도와주는 등 반대 방향으로 조치를 취했다. 나아가 레이건 행정부는 전두환 정권을 확실하게 지지했다.
한국인들은 민주주의와 미국의 지원을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또 다른 군사독재와 미국의 배반을 맛보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기대와 현실 사이의 참을 수 없는 격차는 많은 한국인들 사이에 깊은 좌절과 분노를 자아내게 만들었고, 이는 198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초까지 반정부 및 반미 투쟁으로 이어졌다.
1980년대 한국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회 현상은 민중운동의 발전이었다. 이 운동의 세 가지 주요 목표는 (1)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2) 외세의 지배로부터 실질적 독립을 성취하며, (3) 외세의 영향 없이 한반도 통일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민중운동은 반미주의를 비롯한 반외세 민족주의를 불러오지 않을 수 없었다. 주로 대학생들이 미국문화원을 불태우거나 투신자살을 하는 등 다양한 폭력적 형태로 반미감정을 분출하는 가운데, 문인과 예술인들은 민중 문화운동을 전개하면서 문학예술 작품을 통해 강렬한 반미감정을 표출했다.
문학에서는 ‘반미 문학’이라는 용어가 등장할 정도로 미국에 대한 부정적 묘사가 흔하게 그리고 거세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반미 문학의 주요 소재는 다음과 같았다. (1) 한국인들에 대한 미군들의 오만함과 범죄행위, (2)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방조와 한국의 군사독재에 대한 미국의 지원, (3) 미국에 기반을 둔 한국 내 초국적 기업들의 탐욕적 경제활동, (4) 1945년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국의 역할과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 (5) 미군 주둔 및 핵무기 배치 그리고 한반도 통일에 대한 미국의 방해, (6) 미국문화의 나쁜 영향.
반미적 미술 작품의 소재는 미국 제국주의와 신(新)식민주의에 대한 반대, 반자본주의, 그리고 한반도 통일에 대한 미국의 방해 등이었다. 미국 국기를 태우거나 찢는 모습, 미국을 상징하는 '엉클 샘'이나 미국 관리들을 모욕하는 모습, 미국 무기를 비롯한 미제 상품을 파괴하는 모습 등이 그림 속에 담겼다.
음악 분야에서는 미국의 대중음악을 거부하면서 한국의 전통음악을 되살리는 운동이 일어났다. 반미 노래의 소재는 한반도 분단, 반전 반핵, 한국에 대한 미국의 내정간섭, 그리고 반자본주의 등이었다. '민족해방', '통일', '양키' 등을 반미 음악의 노랫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반미 연극은 주로 한국의 군사독재에 대한 미국의 지원, 미국에 기반을 둔 초국적 기업의 '착취'에 반대하는 노동투쟁, 미국 농산물과 축산물 한국의 시장개방에 대한 미국의 압력 등을 주제로 다루었다. 영화제작자들은 미국 회사가 한국에서 영화를 직접 배급하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한편, 폭력과 섹스가 판치는 할리우드 영화를 거부했다.
요약하자면, 반미주의는 1980년대 한국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폭넓고 강렬하게 전개되었다. 1980년 5월의 광주 학살이 한국과 미국 사이의 극도로 불평등한 관계 때문에 수십 년 동안 쌓여온 다양한 갈등으로부터 생겨난 불만과 원한, 그리고 분노가 전면적으로 폭발하는 데 방아쇠를 당긴 것이었다.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에게 미국은 더 이상 동맹이 아니었다. '제국'은 의심할 여지없이 '적'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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